와이프가 오늘 처제네 집에 놀러가서 자고 온다고 연락이 왔다.


뭔가 '못된 짓'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 잠시 설레였던 오후 5시. 하지만 현실은 9시 넘어 퇴근해 들어온 빈 집이다. 연이은 야근과 주말 출근 등으로 적잖게 지친 요즘이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간만의 자유를 느끼고자 했던 들뜸은 간데없고 괜시리 우울해지기에 맥주나 한잔 하기로. 뒤져봐야 안주도 없어서 칼로리 대박일 스팸을 구웠다. 이정도면 훌륭하지. 







한 때 미쳐있었던 오디오 & 클래식도 요즘은 시간이 나질 않으니 자연스레 시들시들. 요런 축축 처지는 밤엔 묵직한 저음의 첼로 소리가 듣고 싶다. 로스트로포비치와 브리튼이 연주한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음반을 꺼냈다. 







흔들의자에 앉아 건들건들거리며 맥주 한모금 들이키고 폼 잡아본다. 간혹 둔탁하기만 한 소리를 내주는 AR4도 오늘따라 구수한 것이 소리가 듣기 좋다. AR4는 피아노보단 확실히 현악기가 좋은 듯.







그리고 얼마전 구입한 비비안 마이어의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집. 살아생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그녀의 15만컷의 사진들은 말년에 생활고를 겪던 마이어의 사정으로 창고의 임대료를 내지 못해 경매에 넘겨져 별 생각없이 구입한 수집가 중 한 사람이 페이스북에 몇 컷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 속의 그녀는 거의 늘 혼자였고 외로워보인다.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녀는 자신의 사진이 이렇게 유명해진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을까. 그녀의 사진집을 보며 미안한 기분이 든다. 당신은 남몰래 홀로 평생 찍어온 사진을 이런식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지길 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당신이 그토록 아끼며 숨겨뒀던 사진들을 당신이 아닌 타인들이 맘대로 골라낸 것들이니 더더욱 그럴테죠. 







수수께끼 같은 일생을 살았던 마이어의 사진집을 보고 나니 마침 로스트로포비치의 음반도 끝이 나고 맥주도 두 캔째를 비웠다. 그러고 보니 올해 11월의 날씨는 유난히 흐리고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 많았다. 그럼에도 Guns & Roses의 November Rain을 아직 듣지 않았단 생각이 났다. 11월에 비가 오면 꼭 들어줬던 것 같은데 올해는 처음. 슬래쉬의 기타 솔로 부분은 여전히 가슴을 후벼판다. 피곤하고 신경쓸 일도 많고 불합리하고 어이없는 상황에 하루에도 몇번씩 분노하고 포기하고 삭혀야하는 요즘이다. 기타야 울어주렴. ㅠㅠ



절대 술 취해 쓴 글은 아님.



아침이면 지워버릴 수도 있지만.



블로그에 이런 잡스런 얘기는 오랜만인듯.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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