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시장에 가서 쇠고기 안심이랑 감자랑 호박이랑 춘장 좀 사와요."



토요일 오후, 와이프가 심부름을 시킨다. 비싼 한우 안심은 내 입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딸냄이 태어나기 전 맞벌이 하던 때야 호기롭게 안심 한 근 정도 두툼하게 썰어와서 스테이크도 구워 먹고 했지만 이제 안심은 귀하신 딸냄이 입에만 들어가는 고급 식자재가 되었다. 감자랑 호박과 춘장은 와이프가 잘 하는 몇 안되는 요리 중 하나인 짜장을 만들기 위함이다. 얼마전 있었던 처남의 생일을 식구 모두가 (심지어 처남 본인마저..) 까먹은 것이 미안해 처남이 좋아하는 짜장을 만들어 담아 줘야겠다고 한다. (처남이 얼른 연애를 했음 좋겠다.)



아, 잡설이 길었다. 어쨌든, 이 심부름에서 내게 중요한 것은 어떤걸 사오라는게 아니라 '시장에 가서' 사오라는 부분이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대기업의 대형 마트도 있지만 몇몇 종목들은(딸냄이 전용 안심이라든지..) 마트보다 시장에 있는 가게에서 사오는 것이 낫더라는 경험치가 쌓였다. 그래서 오늘도 와이프는 내게 '시장에 가서' 그것들을 사오라는 거다. 괜시리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알았어~' 라고 대답했다. 오빠는 뭐 먹고 싶은게 없냐고 물었지만 와이프가 할 줄 아는 요리가 거기서 거기인지라 특별히 없다고 대답하곤 옷을 챙겨입고 나섰다. (먹고 싶은 건 없고 찍고 싶은 건 많았다 ㄷ)



시장은 걸어서 5분인 대형마트와 달리 차로 5분이면 가는 거리에 있다. 시장에 도착한 나는 심부름 따위는 금세 잊고 지갑 대신 카메라를 꺼냈다. 시장에 심부름을 오는 것이 내게 의미있는 이유다. 이 곳은 슬슬 돌아다니며 스냅을 찍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다. 아파트 단지와 인접하여 이제 재래시장의 느낌은 그다지 나질 않지만 여전히 이 곳은 '시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며 시장 뒤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30분 정도 한 바퀴 돌며 10여컷 정도는 셔터를 누를 만한 그런 곳이다. 



내 손엔 새로운 똑딱이 하나가 들려있다. 바로 Ricoh GR1s! 라이카 28미리나 하나 사볼까 해서 Contax T3를 팔아 먹었지만 원하는 매물이 나오지 않았고 그 사이 T3를 팔아 마련한 목돈은 야금야금 생활비로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생각해보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신품으로까서 10년도 넘게 멀쩡히 잘 사용하던 T3의 희생이 너무 의미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늘 휴대할 수 있던 똑딱이의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은 생각보다 그 빈자리가 컸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마지막으로 장터나 한 번 보고 와야지.' 하다가 마침 괜찮은 가격에 올라온 GR1s를 발견했고 결국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사버렸던 것이다. 써보고 별로면 다시 팔면 되지란 생각으로.. (다 이런 식으로 사놓고 정작 되판 경우는 극히 드물다.)



주중에 택배로 받은 녀석에게 첫 필름을 넣어줬다. 흑백 위주로 사용할 카메라지만 마침 후배가 새로 산 Summaron 3.5cm를 대신 테스트하는 중이라 Leica M6에 흑백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GR1s에는 첫 롤을 칼라 네가티브로 넣어주기로 했다. 앞서 얘기했듯 써보고 별로면 다시 팔려 나갈 수도 있는 카메라이기에 녀석은 명성대로 뭔가를 나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내가 잘 찍어야 하는게 아니고??)





노란 원색에 끌려 한 컷을 눌러봤다. 청명한 늦은 오후의 낮은 빛이 꽤나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줬다.





이 시간대에 이 곳을 오면 꼭 한번쯤은 카메라를 들이대게 되는 꽃집 비닐하우스와 담벼락. 왼쪽 편에 좀 지워져서 식별이 잘 안되는 'SEX'란 글씨에 매칭될만한 어떤 피사체가 지나가길 늘 기다려보지만 오늘도 아닌 것 같다.





스냅 사진에서 사람이 없는 컷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렇게 한적한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가장 뻘쭘하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면 '저 자식은 뭐하는 놈일까?' 라고 생각할 것만 같아 괜히 뒤통수가 따갑다. 애꿎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방금 전에 확인한 페이스북도 또 새로고침하고.. 그러면서 곁눈질로는 양쪽에 누가 오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아, 카메라의 초점은 원하는 위치에 고정해 뒀음은 물론이다. 


GR1s의 완소 기능으로 초점 고정 기능을 들고 싶다. 반셔터를 눌러 초점을 잡은 채로 mode 버튼을 길게 누르면 그 거리로 초점이 고정되는데, 카메라를 내린 채 쉬고 있다가도 타이밍이 오면 징징거리며 다시 초점을 잡을 필요없이 즉각 셔터를 누를 수 있다. 구도를 잡아두고 매복을 주로 하는 나에게 정말 유용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GR1v의 수동초점 기능이 조금 부러웠는데 이거면 됐다 싶다. 





세로컷으로 왜곡 정도는 어떤지 좀 확인해 볼까 싶었다. 하지만 그냥 찍기는 필름이 아까워 또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 보니 같은 구도로 쓸데없이 3컷이나 찍었다. 오토바이 한 대, 아저씨 한 분, 그리고 이 자전거. 이게 제일 나았다. 더 기다리긴 싫었다.





해가 점점 뉘엇뉘엇해진다. 아마 장사를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을 간판도 없는 빈 상가들의 이미지 덕에 실제 보다 더 오래되고 더 시골스러운 느낌이 드는 곳이다. 여기서 부턴 초점을 맞추지 않고 스냅 포커스 모드를 써보기로 했다. 앞서 언급한 초점 고정 기능이 원하는 곳에 초점을 맞춘 후 고정시키는 방식이라면 스냅 포커스 모드는 2미터로 고정된 방식이라는 점이 다르다. 28미리의 깊은 심도를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조리개를 조여두면 어지간한 거리는 웬만큼 초점이 맞으니 걸어다니며 찍는 길거리 스냅에서 아주 유용하다. 실제 GR1s의 AF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고 조금 어둡거나 콘트라스트가 낮은 환경에서는 버벅임이 심하기에 더욱 활용성이 높다. 





낡고 오래된 이미지와 달리 시장 너머 형산강 건너편엔 브랜드 있는 고층 아파트들이 쭉쭉 솟아 있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진부한 시선의 사진이지만 그래도 이 곳에 오면 꼭 한 컷씩은 찍게 되는 것 같다.





가게 한 곳이 다른 매장으로 바뀔 모양인지 내부 공사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현대의 렌즈답게 역광에서도 플레어나 콘트라스트의 저하가 거의 없다. 이 렌즈가 호평을 받아 L마운트로 출시되기도 했으니 광학적 성능은 믿고 산 카메라였다.



"어디예요?"


와이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은 안보고 테스트를 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다. 뜨끔하다. 왜 안오냐고 와이프가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따라 시장에 감자 팔러 나온 할머니들이 없어서 몇 바퀴 돌면서 찾고 있다고 먼저 얘기하며 버벅인다. 그런데 와이프의 본론은 '빨리와!'가 아니라 '빵 먹고 싶다~ 빵도 좀 사와요.' 였다. 내심 안도하며 얼른 사서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만하면 테스트는 대충 된 것 같다. 해상도와 콘트라스트도 괜찮고 GR 라인업다운 슬림한 디자인과 스냅 특화 기능들이 보여주는 이 카메라의 정체성은 역시 매력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28미리 화각이 아닌가. 다소 부족한 AF성능과 어둡고 흐릿한 뷰파인더가 좀 아쉽지만 완벽한 똑딱이는 결국 없기에 양보하기로 했다. (T3, TC-1, MINILUX 등등 이것들이 짜기라도 한 마냥 크고 작은 문제들이 꼭 한두개씩 있으니...)


이제 시장으로 심부름을 올 때면 카메라를 챙겨 나오는 날이 더 잦아질 것 같다. 그리고 와이프가 시킨 주문 중 그 날따라 꼭 못찾는 물건이 있어 난 30분 정도 더 늦을테고 말이다.



2016.09.24. 포항 효자시장




앙증맞은 후드까지 있는 Ricoh GR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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