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7시가 거의 다 되었다. 늦었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포항의 동남쪽 장기면에 위치한 장기읍성에 가보기로 맘을 먹었었다. 그리고 이왕 가는거 늦어도 6시에는 집을 나서 성 위에서 동해의 일출을 보고 싶었는데 이미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어차피 일출 촬영은 물 건너 갔음에도 괜시리 마음이 급하다. 씻지도 않고 카메라를 부랴부랴 챙겨 차에 올랐다. 동녘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약 30분을 달려 장기읍성 바로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다. 뒤편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장기읍성의 성곽이다. 이 곳은 오늘로 세번째 찾는 곳이지만 제대로 답사기를 써보고자 마음 먹고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전신주에 있는 장기면의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이 곳 특산품인 산딸기와 더불어 오늘 둘러볼 장기읍성을 모델로 하고 있다.




옛 지도에 나타난 장기읍성의 모습. 성안에는 객사를 비롯한 동헌 건물이 있었으며 보통의 4개와 달리 하나가 적은 총 3개의 문이 있었다. (지도에는 2개만 그려져있음) 남문이 가장 크고 중요한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지형의 특성상 동문이 가장 중요했으며 지금도 동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성내에 옮겨져 있는 장기향교가 과거에는 성밖에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동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간다. 최근 몇년간 장기읍성 성곽의 복원 정비가 많이 진행 되었음에도 동문은 여전히 허물어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정감이 간다.




동문에서 부터 서쪽으로 이어진 성벽을 따라 성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성곽의 둘레는 2,980척(약 1,392m)이었다고 하니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고려 현종 2년(1101년)에 북쪽의 여진족과 동쪽의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흙으로 처음 쌓았고 이후 세종 21년(1439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사적 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에 보이는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간은 최근에 복원 정비된 것이다.




동해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장기읍성은 여전히 복원 및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고구려 성곽에서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성의 특징 중 하나인 '치'. 치는 성벽을 오르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방어 시설로서 치와 치의 간격은 활의 사정거리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요동성을 공격하던 당나라군이 아무것도 모르고 성벽을 기어오르다 양쪽의 치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무참히 당하면서 크게 놀랐음이 '구당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고구려 군에게 약오르게 당한 이후 '치(雉)에서 활을 쏘았음(射)'이 오늘날 '치사하다'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읭?) 어디가서 얘기하고 창피당해도 저를 탓하지 마시길.




파란 하늘과 붉은 깃발의 보색대비. 나무 위에 앉은 까치 암수 한쌍이 정겨웠다.




저 아래 장기면의 들판과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인다. 




동남쪽 성벽 아래 양지 바른 텃밭이 꽤 좋아 보인다. 아침 일찍부터 주민 한 분이 밭일을 시작하고 계셨다. 오늘은 서리도 내리지 않고 제법 따스한 아침이다.




12월임에도 아직 지지 않은 구절초를 만났다. 흐릿하게 뒤에 보이는 것은 남문의 옹성이다.




이와 같이 반월 형태로 둘러진 옹성은 성문을 파괴하려는 공성화기로부터 문을 보호하고 문앞에 돌입한 적을 포위 협살하기 위한 방어 시설이다. 동대문에서 볼 수 있는 그것과 같다. 남문의 옹성은 최근에 복원한 티가 많이 나는 다른 구간에 비해 비교적 원형의 모습이 잘 남아있는 곳이다.




옹성 내부에는 좌우로 길을 막아선 대전차 방호벽 같은 구조물이 있는데 짧은 지식으론 저것이 어떤 용도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옹성의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옹성 내부에서 바깥 쪽을 바라본 모습




남문을 지나니 성벽이 끊어져 마을안을 통해 돌아서 다시 성벽 쪽에 이르렀다.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옛 성벽(왼쪽)과 복원된 성벽(오른쪽)의 차이가 극명히 보인다.




아직 정비되지 않은 옛 성곽의 모습이 궁금해 뒷편 비탈진 경사로 내려가 보았다.



 

복원 정비 하기 전에 장기읍성은 대체로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무너져내린 성곽의 흔적이 안타깝다. 한양도성이나 수원화성처럼 국가적으로 구축된 견고한 성곽이 아닌 장기읍성과 같은 이런 지방 읍성의 경우 양질의 석재와 치밀한 건축기법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낮아 장기간 방치되었을 경우 이처럼 쉽게 무너지고 훼손되었을 것이다.




최근에 복원된 북문이 말끔하다. 이 곳은 실제 정서쪽 방향이지만 북문이라고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 지도에도 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실제 방위와는 상관없이 성의 정문으로 쓰이는 곳을 남문이라 칭하고 그 반대편을 북문이라 하여서 그런 것인가 싶다가도 동쪽으로 향한 정문은 또 그대로 동문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북문의 옹성에 문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북문 안쪽은 주민들의 주차장으로 쓰일만큼 제법 너른 공터가 있었다. 장기읍성의 모든 문은 개거식 구조로 별도의 지붕이 없이 문으로서 트여진 성벽 위에 문루가 바로 올라간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다. 변방의 작은 읍성이다 보니 건축기법상 전문성이 필요하고 비용이 더 올라갈 홍예문은 생략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문을 지나 다시 복원된 성벽이 이어진다. 이 사진에서 잘 드러나듯이 장기읍성은 산위에 지어진 읍성으로서 그 사례가 매우 드문 편에 속한다. 순천 낙안읍성과 서산 해미읍성을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읍성 유적은 거의 없는데 대부분의 읍성들이 평지에 있었던 것에 반해 산 위에 위치한 장기읍성은 왜구의 접근을 관측하고 유사시 수성전(守城戰)에도 유리한 지형적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동서로 긴 마름모 형태의 장기읍성 북쪽 성곽은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경사가 제법 급하다.




갑자기 성곽이 끊어지고 험한 내리막길을 만나 당황스러웠다. 복원을 하려면 다 하지 이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성곽이 끊어진데는 이유가 있었다. 작은 개울이 있었던 것. 장기읍성에 하나 있었다는 수구(水口)가 이 곳이었을 듯 싶다. 이런 작은 개울에는 요즘 보기드문 가재가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돌 몇개를 들춰봤을 수도 있었겠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길도 없는 수구를 지나서 다시 이어진 성곽으로 기어 올랐다.







처음 들어왔던 동문까지 거의 다 내려왔다. 




정비되지 않은채 무너져있는 그대로인 동문터. 겉에서 보이지도 않는 북문은 번듯하게 복원해놓고 장기읍성을 찾으면 제일 먼저 들어서게 되는 동문을 이렇게 방치해둔 것이 처음에는 좀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니 여전히 주민들이 드나드는 통로인 이곳을 복원 한답시고 공사기간 내내 통행에 불편을 겪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나 싶었다. 그리고 제대로 복원하려면 옹성을 둘러야할텐데 그렇게 했을 땐 차량 통행이 너무 어려울테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겠다. 어쨌든 비록 허물어지긴 했어도 장기읍성의 동문은 여전히 주민들이 드나들고 있으니 현재까지 '문'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성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동문 옆에 있는 '배일대(拜日臺)'. 완벽한 역광이라 새겨진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음이 아쉽다. 동해를 내려다 보는 이 곳은 과거부터 해맞이를 하던 장소로 정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장기향교. 글 서두에 첨부해둔 지도에서 보듯 원래는 성 아래에 있던 것인데 지금은 성안에 있다. 반대로 장기현 동헌 건물은 성안에 있던 것이 1922년 성 아래로 옮겨졌다. 




장기향교의 문은 찾을 때 마다 잠겨 있어서 한번도 내부로 들어가보지 못했다.




장기읍성 내부에는 향교 뿐 아니라 여전히 민가가 여럿 남아 성읍마을을 이루고 있다. 물론 여느 시골 마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빈집도 많지만 관광지로서만 존재하는 다른 읍성들과 달리 살아있는 공간으로 남아있음이 인상적이다.


















유럽으로 여행간 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고색창연한 중세 고성(古城)을 보고나서 그 멋스러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비단 건축 양식 자체가 다른 유럽의 성들이 아니라도 같은 동양권인 일본의 성들,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의 경우만 봐도 넓고 깊은 해자와 높은 축대, 화려한 지붕과 아름다운 조경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는 조선통신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우리나라의 성곽들, 그나마 멋지게 지은 수원화성도 아닌 장기읍성과 같은 변방 바닷가의 작은 성을 보고나면 이건 차라리 중국 지방 귀족이 살던 저택 담장만도 못한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드는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읍성과 산성들은 귀족과 영주들이 자신의 위세를 뽐내기 위해 지은 화려한 저택이 아니었고 황제 못지 않게 호화롭고 사치로운 생활을 즐기던 그들만의 작은 궁궐도 아니었다. 궁핍한 재정과 부족한 노동력으로 높고 화려한 성벽을 쌓을 수는 없었지만 야트마한 야산일지라도 험한 산세에 의지하면 낮은 담으로도 적이 쉽게 넘지 못할 요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을 유린하기 위해 적이 몰려오면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성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어 싸웠다. 적을 피해 성안으로 도망 했지만 더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싸우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작은 읍성은 그래서 슬프고 또 절실한 공간이다.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청나라의 여진족은 청 멸망 후 100여년만에 만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사실상 멸족하고 말았다. 한 때는 내로라했던 거란족, 흉노족 등의 북방 유목민족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당의 변방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던 티벳은 중국의 일부로 복속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거대한 중화의 소용돌이 바로 옆에서 수천년 살아오면서도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살아 남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역사 이래 끊임없이 반복된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이런 볼품없고 작은 성에 의지하여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장기읍성과 같은 작은 성의 가치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매길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6.12.03.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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