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으로 사진을 마지막으로 찍은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하다. 2011년 여름, 티벳에서 좀 찍기는 했으나 Nikon D700이 주력으로 쓰이던 때라 필름은 F3에 넣은 흑백과 Rolleiflex의 슬라이드만이 보조적인 역할을 했고 그나마도 두 카메라를 합쳐 5롤도 안찍고 돌아왔다. 사실 티벳 여행 전에도 D700 구입을 기점으로 필름 소모량이 급격히 줄어 들었으니 이래저래 한 5년간은 필름을 놓았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은 Ricoh GR의 구입이라는 결정타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아, 이제 필름은 나도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굳어지던 2015년 봄이었다.


오랫동안 같이 사진을 찍어오던 지인이 다시 필름 라이카를 사겠다고 했다. (그도 나와 비슷하게 필름을 놓은지 몇년이 된 상태였다.) 뜬금없이 이제와서 무슨 다시 필름이고 하필 또 가성비 안나오는 라이카냐고 되물었지만, 육아에서 어느정도 해방(?)이 되면서 제정신이 돌아온 그의 의지는 강했다. 수년전에 내가 '이것만은 그냥 안쓰더라도 팔지 마라'고 했던 M7과 35미리 주미크론을 결국은 다시 사야겠다며 그는 다시 필름을 하자고 열심히 꼬셔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지 않던 나는 그리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정말 열렬한 필름 추종자였던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이제 와서 무슨 필름으로 뻘짓을 해요? 아, 난 못하겠어요. 시간도 없고 필름값도 너무 비싸고 이제.'

'야 네가 갖고 있는 그 좋은 카메라들이 아깝다.' 

'뭐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그것들 쓰자고 필름질은 못하겠네요 이제.'

'아, 재미없게 진짜. 혼자하면 심심한데... 그래도 내가 M7사면 같이 필름 카메라로 출사는 가줄거지?'

'그래요 그럼. 그거야 뭐 어렵나. 같이 갑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정말로 다시 M7과 Summicron-M 35mm f2.0 ASPH를 구입했다. 약속대로 그와 필름 카메라를 챙겨들고 출사에 동행해야 했다. 7월의 첫번째 주말에 안강 5일장날이 돌아왔다. 예전에 한창 포항지부가 활발했던 시절에 멤버들과 자주 왔던 곳이기도 하여 익숙하기도 하니 장날 구경이나 하며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손맛이나 보자 싶었다. 유통기한은 진작에 지났을, 그리고 이사하면서 다시 냉장고에 넣지도 않고 방치했던 TMX 한롤을 Contax IIa에 넣었다. 잘 나오긴 하려나... 다행히 몇년간 만져주지도 않았던 카메라는 잘 작동되고 있었다.




골목 귀퉁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잠시 어슬렁 거리다 첫 컷을 눌렀다. '챡!' 아.. 이 느낌이었다. 필름을 와인딩하고 셔터를 누르던 그 설레임의 순간, 잊혀졌다고, 다시 되돌아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던 필름의 기억이 그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몇 년만의 스냅질이라 번잡한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과 달리 몸은 예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컷을 제외하곤 사람이 없는 컷은 거의 찍지 않았다. 지인의 테스트 촬영에 그저 따라서 놀러온 것 뿐이었던 마음 가짐은 이미 사라졌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GR을 메인으로, 필름은 서브로만 적당히 찍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될 수록 이는 반대가 되었다. 함께 가져온 GR은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역시 두개로는 번잡하다.




이럴 줄도 모르고 한롤 밖에 안가져온 필름이라 아끼려 했건만 난사하던 버릇이 살아나니 이런 의미없는 컷도 마구 눌러보고..




주택가 골목길에 펼쳐진 좌판에서는 떠날 줄 모르고 서성이며 셔터찬스를 노렸다. 28미리로 바짝 들이대던 뻔뻔함까진 살아나질 못해 적당히 떨어져서 찍기 편한 50미리를 가져온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뒷배경에 나타난 신형 투싼이 아니라면 언제적 찍은 사진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 곳도 참 변화가 더딘 곳이다.




경운기를 찍었더니 나를 오늘 이 지경으로 몰고온 몹쓸 지인의 모습이 같이 담겼다. 




이 컷을 누르고 났을 때 설레임은 아직도 기억난다. 디카와 달리 어떻게 찍혔는지 알 수가 없는 필름질에서의 기대심리는 극에 달한다. (물론 결과물은 보시다시피 그냥 그렇지만..)




낡은 철물점에서 텐트칠 때 쓸 저렴한 해머를 구입한 지인




촬영을 마치고 캔커피를 곁들인 끽연의 여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What else?



많지 않은(물론 적지도 않지만;;) 나이에 비해 나름 사진을 찍은 햇수는 제법 오래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캐논 AE-1으로 처음 사진을 찍었으니 비교적 빨리 시작한 편이었다. 그러니 그동안 내가 나선 출사의 횟수는 적지 않다. 그 많은 출사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날이 있기 마련인데 이 날의 출사는 나의 사진 인생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날로 남았다. 정말이지 이날 느꼈던 설레임과 흥분은 처음 사진을 배웠던 20년전 그때 못지 않았다. 불과 하루의 촬영만으로 '왜 그동안 필름을 쉬었는가!'라는 자책과 후회가 들었고 디카로만 깔짝거렸던 지난 몇년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지난 날'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던 수년만의 필름 출사는 이후의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조금 싸다 싶게 필름이 나오면 '있을 때 사두자!'며 수십롤씩 사재기를 해서 냉장고에 쑤셔 넣었고 '이왕 이렇게 된거 남들 다 쓰는 라이카도 써보고 죽자.'며 라이카 M3도 들이고, 몇년 동안 놀면서 엉망이 된 필름 카메라들을 오버홀하느라 돈이 깨지는 수렁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이 날이었다. 

나에게는 필름 사진의 르네상스가 되었던 2015년. 그 해 7월 4일의 기록이다.


2015.07.04 경주 안강

Contax IIa / Zeiss-Opton 50mm f1.5 Sonnar / Kodak TMX / 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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