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뭐 찍는데요?"


날선 목소리가 들렸다. 자주 겪는 일이다. 


"아, 이 집이 특이해서 좀 찍고 있습니다."


"이 집이 뭐가 특이한데요?"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라서요. 좀 찍어두려구요."


"이건 뭐하려구요?"


"원래 일제 시대 흔적이나 이런 것에 관심이 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좀 찍어두고 있습니다."


"뭐하는 사람인데요?"


이럴 때 아마추어 사진가는 참 궁색해진다. 차라리 대학교 때 사진찍을 땐 편했다. 사진찍는 학생이라고 얘기하면 충분했지만 사진찍는 회사원이라고 할 수도 없고.


".... 그냥 취미로 사진 찍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보통의 경우와 달랐다. 


"그럼 찍지 마세요."


응?


"이런 곳에 왔으면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공부를 하고 그래야지 그렇게 재미로 찍고 그럴거면 찍지 마세요."


취미로 찍는 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셨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취미'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유희와 오락의 이미지 때문인가 잠시 황당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생각하시는 것처럼 재미로 놀러 다니는게 아니라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 이런 곳에 혼자 올 정도면 저도 나름대로 관심이 있어서 온 것 아니겠습니까. 군산이나 포항에 남아있는 일제 시대 흔적도 몇차례 찾아다녀봐서 진해에도 많은 곳이 남아있다고 해서 이번에 처음 들러본 길입니다."


"여기에 이런 건물들이 왜 많이 남아있는 줄 알아요?"


"일본이 진해에 군항을 만들면서 계획 도시로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그게 일본 군항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대로 공부하고 알아야한다는거야. 그런것도 모르면서 뭘 사진을 찍겠다고.."


진해의 군항이 일본의 것이 아니면 어느 나라 것이란 말인가. 


건물 안에 앉아 창문 너머로 빤히 나를 쏘아보는 노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니 뭐 군사기밀 시설도 아니고 여긴 엄연히 진해에서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해 이곳저곳에 안내 간판도 붙은 일제시대 장옥거리가 아닌가. 사진 한장 찍는데 왠지 억울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 따져보고 싶다가 포기했다. 


"네 그럼 안찍겠습니다."


그러고도 발걸음이 바로 돌아서지지가 않아 잠시 서있으니 노인이 나를 부른다.


"이리 들어와봐요."




방금전까지 무척이나 공격적으로 쏘아붙이던 노인에게 은근이 짜증이 났었지만 들어오라는 소리에 이게 웬일인가 싶어 얼른 들어갔다. 노인의 집은 '황해당 인판사'라는 간판이 붙은 오래된 일본 가옥이었다. 사무실인지 창고인지 구분이 안되는 그의 방에는 오래된 낡은 서적들과 각종 서류, 인쇄물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고 바로 옆에는 인쇄기, 복사기 등이 있었다. 쏘아붙이실 때는 언제고 그래도 들어오라고 해주시니 급 황송해져서 이곳저곳 눈을 굴리고 있으니 앉으라고 하신다.








"진해가 일본 군항으로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죠? 사실은 그게 아니야.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그는 너저분한 책상을 잠시 뒤지더니 한문으로 쓰여진 낡은 문서를 하나 꺼냈다.



"무슨 내용인지 읽어봐요."



아놔.. 초서체로 흘려쓴 한자를 내가 읽어낼리가. 조사 따위만 한글로 적혀있었고 마지막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쨌든 보통 문서는 아니다 싶었다. 



"못읽겠는데요."


"전혀 못읽겠어요?"


"네."


"초서로 흘려써서 읽기가 어렵긴 하지. 근데 이것도 문제야. 이런 문서를 젊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정리를 해줘야하는데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점점 없으니. 자, 이게 무슨 내용이냐.."



그는 띄엄띄엄 한자를 읽어가며 한장짜리 계약서의 내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 문서는 대한제국 말기 일본이 진해에 대한제국 해군 기지를 건설해준다는 약정을 체결한 서류로서 대한제국의 해군이 체계가 갖추어지면 일본이 시설 및 이용권을 다시 돌려준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애초에 일본 군항을 만든다는 얘기가 없었어요. 한국 군항을 만들어준다고 했다니까. 근데 그 때 우리나라에 해군이 있었어요? 해군도 없는 나라에 군항을 왜 만들어줬겠어요? 결국은 자기들이 쓸거였다고. 그런데 명목상은 대한제국 해군 군항을 만들어준다고 눈속임을 한거에요. 물론 우리도 알았겠죠. 힘이 없는데 어차피 막을 수도 없었을거고. 이런걸 아무도 몰라. 이런걸 알아야한다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합니다. 그죠? 그 때 일본이 어떻게 이기는줄 알아요?"


시종일관 그의 질문하는 투는 '너 이거 알아? 알면 한번 얘기해봐.'라는 식이었다. 아는 건 아는대로 모르는 건 모른다고 대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뭐라고 대답해도 노인이 만족할만한 대답이 나오기 어렵겠다는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뤼순항을 공격해 러시아 해군을 격파하고 대한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일본 해군 함대가 러시아 본국으로 부터 급파된 발틱함대를 전멸시키게 된 것이 결정타가 아니었습니까?"


"그건 어떻게 알아요?"


"짜르의 마지막 함대라는 책을 예전에 봤습니다."


"그 발틱함대가 어디로 왔는지 알아요?"


"희망봉을 돌아서 왔습니다."


"왜 희망봉을 돌아서 왔죠? 더 가까운 길이 있는데. 그게 어디였겠어요?"


"수에즈 운하요?"


"그렇죠. 그런데 왜 수에즈 운하로 못왔죠?"


파상공세가 끝이 없었다.


"영국이 방해해서요?"


"그렇죠. 영국이 통과를 불허했어요. 그러니 긴 항해 기간동안 지친 발틱 함대가 매복하고 기다리던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걸려서 작살이 났던거죠. 그 때 일본 해군의 전함들이 어디서 만든지 알아요?"


"그것도 영국이죠."


"영국이 만들어 줬어요. 물론 그냥 준건 아니고 판거지만. 당시 최신예 전함이에요. 함부로 팔지는 않는다고. 당시 일본의 기함의 이름이 뭔지 알아요? 전투에서 포탄을 몇발이나 맞았어요?"


와 더이상은 못버티겠다. 


"아뇨 그런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도 잘 알아야한다니까.."








기다려보라며 노인은 일어나 옆 방으로 넘어갔다가 종이 두장을 복사해 들고 왔다. 거기에는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가 탑승했던 기함 미카사호에 대한 글이 있었다. 무려 33발의 명중탄을 얻어 맞고도 승리를 거두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일본놈들을 조심하고 경계해야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렇게 영국이 일본을 도와줬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했어요? 2차대전에 일본이 영국을 공격하죠? 아주 배은망덕한 놈들이에요. 우리는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일본놈들한테 당했단 말이에요. 임진왜란 때 일본이 왜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걔들이 내세운 명분은 정명가도였지요."


"그게 뭐예요?"


"명을 정발하려고 하니 길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진짜 그거였을까요?"


"음.. 뭐 전국시대 무장들의 논공행상 문제도 해결하고 영주 세력들의 강성한 군사력도 소모시키려고 했고.. 뭐 그런 이유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교과서에서 배우는거죠? 사실은 다른 이유가 또 있어요."


"소서행장이 조선에 침공하면서 포루투갈 신부가 하나 따라왔어요. 왜 왔겠어요?"


질문 공세는 어느새 다시 시작되었다. 


"고니시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뭐냐면 유럽 제국들이 일본에게 전쟁을 부추겼어요. 왜? 일본이 조선에서 노예를 잡아오면 노예 무역을 해보려고 했던 것도 있고 일본은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해와서 고급 도자기를 생산해서 유럽에 팔아먹으려고 했어요. 아주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들이 깔려 있다고.."


이 노인은 보통 분이 아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이 묻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더라도 꾸역꾸역 대답을 하는 젊은이와 얘기를 하면서 신이 나시는지 노인은 계속해서 뭔가 자료를 가져와 펼쳐놓고 설명을 이어가시다 집을 보여주시겠다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신문이나 책을 찍어내던데 쓰이던 활자. 노인께서 직접 손수 깎은 것이라 하셨다. "요즘은 이런거 쓰지를 않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이쪽으로 와바. 여기는 원래 예전에 뭐로 쓰인 방이냐면..." 구경하려 따라가랴 셔터 누르랴 바빴다.







"내가 육이오 때 월남해서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는데 학교를 제대로 못나왔다 뿐이지 공부는 나름대로 엄청 많이 했어." 그의 식견으로 보아 절대 틀리거나 과장된 말이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90년대 내무부에서 출간한 '대한민국 도장 대전(?)' 팜플렛을 하나 꺼내어보여줬다. 그 중 그가 만든 도장이 수상작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왜 하필 자칫 '유치'하거나 허황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세계평화'라고 새기셨냐고 여쭈었다. 




"내가 육이오 때 월남해서 해병대에 입대해서 해군으로 옮겨가며 전쟁을 치루고 제대를 했어요. 그 난리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세계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건지 알수가 없어요. 내 가장 큰 소망은 우리 모두, 세계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거 그게 가장 큰 소망이야."







그가 만든 도장을 들고 있는 정노인







창밖에선 정노인의 친구분께서 '저 놈들의 얘기는 언제 끝나나.' 하고 기다리고 계셨다. 진해에서 교장 선생으로 퇴임하셨다는 친구분은 정노인에게 점심으로 국수나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채근했지만 정노인은 집사람이 냉면을 삶아 뒀다면서 냉면을 먹어야 한다고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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