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시대는 이제 사실상 끝이 났다. 


필름으로 사진을 하기에는 엄청나게 올라버린 필름값과 현상비용, 그리고 웹 포스팅을 위한 스캔작업 소요시간 등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2009년 Nikon D700 구입 이후 나도 결국 필름에서 거의 손을 뗀 상태고 이제는 필름으로 다시 사진을 하고 싶은 생각이 크게 들지는 않는다. 



비교적 길게 이어온 나의 필름 사진 생활을 정리하게 만든 Nikon D700




물론 디지털 시대의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흑백 필름의 풍부한 계조와 입자감은 디지털에서는 아직도 2% 부족하게 느껴짐을 어찌할 수가 없고, 벨비아나 E100VS의 쨍한 채도가 그리울 때도 많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우수한 이미지 퀄리티의 컴팩트 카메라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필름 시절에는 '필름'이라는 ‘평등한’ 감광물질로 사진을 찍어왔기에 비싼 플래그쉽 카메라나 저가 똑딱이나 이미지 퀄리티 자체의 차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컴팩트 카메라로도 잘만 쓰면 얼마든지 훌륭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고 수십년 된 클래식 카메라들도 당당히 현역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는 이미지 센서의 크기가 천차만별이고 컴팩트 카메라에 들어가는 CCD는 이른바 풀프레임 사이즈의 면적에 비해 형편없이 작아 이 같은 물리적인 한계로 이미지 퀄리티와 심도 표현에서 있어 고가의 풀프레임 디지털 카메라를 절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똑딱이는 말그대로 똑딱이를 넘어서기 어려운, 그리고 카메라 가격과 출시년도에 따라 이미지 품질의 차이가 나버리는 불평등한 시대, 이게 가장 큰 불만이었다. 





필름 시절 내가 가방에 늘 넣어 가지고 다니던 Contax T3


담배갑만한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칼자이즈 35미리 렌즈가 장착되어 우수한 해상도와 색감을 자랑했다. 필름 시절이 끝나면서 더 이상 T3를 쓰기 어려워진 나는 이렇게 언제나 휴대 가능하면서도 우수한 성능을 갖춘 컴팩트 카메라가 간절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대략 이러했다. 



 1. 최소한 APS-C 이상 크기의 이미지 센서를 채택할 것


 2. 35미리 이하 광각의 밝은 단렌즈


 3. 크기가 작고 침동식 렌즈로 어딘가 튀어나온 곳이 없을 것



GR이전에는 사실상 이 조건을 충족하는 디지털 컴팩트는 거의 없었다. APS-C를 채택한 라이카 X시리즈는 이 조건들을 대부분 충족했지만 일단 가격이 너무 비싸고, 후지 X100은 35mm2.0의 밝은 렌즈와 광학식 뷰파인더라는 절대적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휴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파나소닉 LX시리즈나 소니 RX100시리즈 같은 인기많은 하이엔드 똑딱이들은 휴대성은 뛰어났지만 줌렌즈의 탑재로 촬영시 렌즈가 너무 튀어나왔고 결정적으로 센서가 작았다. 


이러던 차에 기존보다 훨씬 커진 APS-C 센서를 탑재하여 새롭게 출시된 리코 GR은 내 입장에선 기다려오던 바로 그것이었다. 나같이 이런 카메라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많았던 듯. 국내 출시와 함께 GR은 초기 물량이 금세 동날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나역시 휴가전에 물건을 받고자 각고의 노력을 거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후 GR은 365일 중 300일 이상은 가지고 다니는 나의 진정한 에버레디 카메라가 되었고 지인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산 카메라 중 만족도는 최고! 가격을 떠나 단 한 개의 카메라만 남겨야한다면 GR!' 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종합적인 성능이나 가격, 뽀다구를 떠나서 우수한 휴대성과 스냅에 특화되었다는 점에 큰 가치를 두어서인데, 그 세부적인 내용을 대략 얘기해본다면.



1. 항상 휴대할 수 있는 에버레디 카메라 - GR


앞서 얘기했듯 GR은 Contax T3를 대체할 디지털 컴팩트였다. 회사에 갈 때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에 늘 넣어 다녀야 하므로 휴대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우선 고려 요소였고 GR은 그 용도에 더할나위 없이 적합하다. 렌즈는 침동식이라 전원을 껐을 때 바디 속에 들어가 있고, 버튼과 다이얼 등 대부분의 조작계들도 돌출되어 있지 않다. 굳이 카메라 가방이 아니라 주머니에 넣기에도 크게 두껍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고, 튀어나온 부분이 없으니 갑자기 뺄 때도 걸리는 부분이 없다. 



군더더기 없는 GR의 디자인. 필름 시절부터 이어져오는 GR의 디자인이 잘 계승되었다.





2015.01 포항 - 출산을 앞두고 있던 와중에도 부담없이 들고간 GR로 틈틈히 그 날의 과정을 기록할 수 있었다.




2. APS-C 센서


앞서 휴대성을 최우선 조건으로 거론했지만 사실 휴대성만 놓고 따지자면 핸드폰 카메라가 최고가 아닐까. 하지만 휴대 가능하면서 이미지 품질이 우수해야 했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센서 크기의 하한선은 APS-C로 본다. 그 이하는 아무래도 계조가 좁을 수 밖에 없고(특히 하이라이트 부의 무너짐을 아주 싫어함) 심도 표현에서 자유롭지 못해 메인 카메라로서 역할을 하기에 무리가 있다. 이런 면에서 APS-C를 가진 GR은 휴대성과 이미지 품질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아줬다. 



2013.08 방콕 - 화이트밸런스나 저조도 상황에서의 노이즈도 괜찮다.





2015.02 포항 - 28미리 광각이라도 근접 촬영에 최대 개방시 꽤 부드러운 배경흐림을 볼 수 있다. 역시 센서는 커야..




3. 철저히 스냅에 특화된 기능들


스냅 사진의 특성상 재빠른 가동 시간과 초점 맞춤, 편리한 조작 방식은 필수적인데 GR은 전원 ON시에 렌즈가 나오는 시간도 일반적인 똑딱이에 비해 상당히 빠른 편이며 노출보정 및 조리개 조절도 별도 메뉴 진입없이 직관적으로 한손으로 조절이 가능하다. AF속도는 똑딱이치고 나쁘지 않은 수준이지만 그 무엇보다 TAV모드와 스냅포커스 설정은 그먀말로 GR을 GR답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기능이 아닐까 싶다. 이 두가지 기능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이건 진짜 스냅을 아는 사람이 만든 카메라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 밖에 없었다.




2014.01 포항




스냅 특화 기능 1. TAV모드 


일반적인 TV / AV모드가 아닌 TAV모드는 조리개값과 셔터스피드를 설정하면 그 두 개의 값은 고정되고 ISO의 자동조절을 통해 노출값을 잡아주는 방식인데 이 기발한 모드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펜탁스에서는 원래 있던 기능이라고 하던데 나는 처음 경험한 방식이라 '이런게 있었다니!' 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냅 촬영시에 보통 조리개를 조여서 심도를 확보하는 가초점 방식을 사용하는 스냅 작가들이 많은데 조리개 우선 모드에서는 갑작스런 상황에서 셔터스피드 확보가 안되어 흔들린 사진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TAV모드는 조리개와 셔터스피드 양쪽 모두를 설정가능하니 조리개 11 정도에 셔터스피드 1/125로 세팅해두면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심도와 셔터스피드 모두를 확보할 수 있다. 



2013.08 방콕




스냅 특화 기능 2 . 스냅포커스 설정


TAV모드와 함께 스냅 특화 기능의 주요 핵심이 스냅포커스 설정이다. 똑딱이들도 대부분 수동 초점 설정이 가능하지만 GR만큼 빠르게 적용할 수 있는 카메라는 많지 않다. 스냅포커스는 미리 일정한 거리로 포커스를 설정해두는 기능으로 거리를 미리 설정해두고 펑션버튼 하나로 AF와 MACRO, 스냅포커스를 오갈 수 있어 일반 AF로 촬영 중이더라도 바로 스냅포커스로 전환할 수 있다. APS-C센서는 과거 필름(혹은 풀프레임 디카)에 비해 같은 화각일 때 심도가 더 깊으며 GR의 18mm렌즈는 135기준 28mm 광각 렌즈으로 심도가 깊어 조리개를 11정도에 놓으면 1미터 안쪽부터 무한대까지 거의 초점이 맞는다. 이렇게 설정해두면 AF잡는 시간없이 바로 셔터를 누를 수 있어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2013.07 방콕





4. 주목받지 않는 카메라


GR은 그냥 똑딱이다. 누가 봐도 똑딱이고 자세히 보면 좀 비싸보이기도 한 라이카에 비해 자세히 봐도 싸보이게 생겼다. 리코라는데서 카메라가 나온다는 것도 사람들은 모른다. 마그네슘 합금 바디에 무광 검정으로 칠해진 카메라에는 그 흔한 마크도 없다. 오로지 GR이라는 모델명만 한쪽 구석에 있을 뿐.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DSLR에 비해 GR을 들고 사진을 찍을 때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혹여 보더라도 별 시덥잖은 녀석이거니 하고 관심을 주지 않기에 스냅 촬영시 없어보이는 외관은 스펙으로 드러나지 않는 큰 장점이 되어준다. 



2014.01 통도사





2013.12 포항




5. 상시 표시가능한 전자식 수직수평계


별거 아니라면 아니지만 구도를 잡을 때 수평 수직에 은근히 예민한 편이라 이처럼 액정에 상시 표시가능한 수직수평계를 갖춘 GR은 구도 설정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광각 렌즈의 특성상 정확한 수평이 맞춰지지 않았을 때 왜곡 현상이 두드러질 수 있어 GR의 상시 표시 가능 수평계는 개인적으로 ‘완소’ 기능이다.




2013.07 방콕





2013.08 포항




6. 일부 아쉬운 점들


위와 같은 이유들로 만족도가 정말 높은 카메라라 개인적으로는 거의 불만이 없는데 일부에서 단점으로 지적하는 것 중 몇 가지를 들어본다면 손떨림 방지 기능이 없다는 점, 틸트식 액정이 아니라는 점, 135기준 35mm 화각이 아니라는 점인데, 손떨림 방지 기능이 없음은 나 역시 조금은 아쉽지만 광각 렌즈라 1/30초 정도까지는 크게 주의하지 않아도 버틸만해서 문제가 되진 않는다. 



2013.12 포항




그리고 틸트식 액정을 채용했다면 단가도 올라갔을거고 (이미 충분히 비싼 똑딱이다) 조작 부가 많아져 바디의 견고함만 떨어졌을테고, 무엇보다 카메라 두께가 증가했을 게 뻔하다. 휴대성이 우선인 카메라에서 두께의 증가는 전혀 반갑지 않다. 다음 세대의 GR이 나오더라도 틸트식 액정은 채택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요즘의 LCD화면은 시야각이 넓어 로우앵글을 잡는데도 별 문제가 없다. 



2013.08 서울




그리고 35mm화각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개인 취향이라 별 달리 언급할 건 없지만 내 인생에 가장 사진을 많이 찍고 많이 발전했던 시절이라 추억하는 대학교 3,4학년 시절의 주력 렌즈가 니콘 28mm였다. 그만큼 나는 28mm화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GR의 28mm는 만족스럽다. 



2014.04 서울




지난 2년간 GR은 내게는 핸드폰 만큼이나 평소에 들고 다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에버레디 카메라가 되었다. 리뷰를 쓰려고 하던 것을 차일피일 몇차례 미루다가 이제야 써보지만 많은 사람들이 호평하는 GR의 이펙트 효과라든지 별 의미없는 기계적 성능 같은건 어차피 다른 리뷰에도 많아서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GR은 다소 매니악한 측면이 없지 않아 일반적으로 쉽게 남에게 권할 수 있는 카메라는 아니지만 설계 철학이 지향하는 바가 명확해 스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만한 카메라가 있을까 싶다. 스냅을 좋아한다면 꼭 사용해보길.



몇몇 샘플샷으로 리뷰는 마침. 


참. 모든 사진은 나름의 방식으로 보정이 되어 있으므로 판단은 각자가. 보정은 장난질이 아니라 암실에서 인화하듯 작품의 최종 마무리 단계라 생각하므로 JPEG무보정 리사이즈 같은 건 관심이 없다. 





2013.08 방콕






2013.08 포항







2014.11 포항






2014.11 장가계





2013.12 포항





2015.04 포항







그냥 딱 파커스러운 디자인의 만년필. Parker 21. 

Parker 21은 Parker 51의 대성공 이후 일종의 보급형으로 1948년에 첫 출시된 모델로 디자인상의 차이는 거의 없고 파커 51의 레진 계열에서 재질이 플라스틱으로 바뀌면서 좀 더 저렴해졌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단순하고 둥글둥글한 외형이 P-47 Thunderbolt를 보는 듯해 처음에는 참 멋없다 싶었는데 자꾸 보니 이 단순함에서 실용이 느껴진달까? 은근히 매력적이기도 하다. 





이게 2차대전 당시 강력한 엔진과 두터운 철판으로 인한 맷집을 자랑하며 활약한 P-47 썬더볼트. 단순무식한 디자인이 파커 21과 비슷한 느낌. 





뚜껑은 부드럽게 체결되지만, 워터맨처럼 딸깍하지도 않고 스크류식도 아니라 열리기 쉬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는 상당히 부담스럽다.





몸통안에는 요렇게 생겼다.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고 뒷부분을 4차례 누르라고 되어있다. 요즘 만년필들의 스크류식에 비해 누를 때마다 들어간 잉크가 다시 새어나가서 제대로 들어가긴 하는지 못미덥지만 한번 넣고 나면 꽤 오래 쓰는걸로 봐서 잘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펜촉은 노출된 면이 거의 없는 후드닙 타입. 뚜껑을 열어두고 오래있어도 잉크가 잘 마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요즘은 이런 형태의 만년필이 많지 않다. 닙 정보가 따로 표기되어 있지 않은데 적어도 M 이상일 것으로 예상될 만큼 글씨가 아주 굵다. 다이어리나 수첩에 작은 글씨를 쓰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이면지 따위에 뭔가를 기안하며 휙휙 갈겨 쓰기에 좋다. 닙의 느낌은 상당히 둥글둥글하고 잉크 흐름도 줄줄줄 원활하다. 잉크 소모량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대략 악필이지만 시필샷. 저기 써진대로 잉크는 파커 큉크 블랙. 글씨가 워낙 굵다 보니 얘는 결재용으로만 사용 중인데 그 용도로는 딱 인듯 하다. 너무 굵어 마땅히 용도를 못찾던 중 얼마전부터 뜬금없이 날인대신 전 직원 서명으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져 신나게 사인해주는 중. 복사본 확인 차원에서라 사인용으로는 블루블랙 잉크로 하나 주문해뒀다.




세상에는 비상식적인 일도 많고 아무 생각없이 일하는 사람도 많다.









지난 설날 간만에 친구들과 모여서 노닐던 중 시계를 풀어놓고 사진 찍으며 시계에 갓 빠져드는 한 친구에게 뽐뿌질을 하던 중. 

세상에 비싸고 좋은 시계는 많지만 역사성을 가지고 수십년째 같은 디자인으로 변함없이 사랑받는 시계라면 단연 이 두 모델을 손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분나쁜 소리의 귀신새.


2004년 3월경..(4월인가..) OBC 교육 과정 중 악명높은 동복유격장에서의 유격훈련 때였다. 녹초가 된 몸을 누이고 텐트에서 잠을 청할 때 쯤이면 어디선가 '휘익~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정말 누가 휘피람이라도 부나 싶었지만 밤새도록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그 소리는 무척이나 섬뜩했다. 동복유격장은 몇년에 한번씩은 유격훈련을 받던 초임 소위들 중 사망자가 나오는 곳이라 연병장 앞 쪽에는 그렇게 죽은 동기를 위해 '故 OOO 소위를 기리며' 이런 비석을 세워둔 것이 여럿 있어 그렇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가득했는데 밤중에 이상한 휘파람 소리까지 들려오니 피곤한 와중에도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 기분나쁜 소리의 정체가 뭘까 궁금했지만 사실 새 소리 말고는 별다른 가능성이 없었기에 도대체 밤 중에 저렇게 기분나쁜 소리를 내는 새는 무슨 새일까 궁금해만 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저 어디선가 귀신새라고 들은 것 같다는 몇몇 동기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귀신새의 첫 만남이었다.



OBC교육을 마치고 파주의 자대로 배치받았다. 

전방의 야전은 밤이 되면 더없이 고요하고 어둑하다. 그 곳에서도 기분 나쁜 '휘익~ 휘익~'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적막한 밤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휘파람 소리. 괜히 오싹해지는 그 소리의 공포는 안개가 낀 밤에 순찰이라도 돌고 있으면 극대화됐다. 듣는 순간 괜히 머리가 쭈뼛 서곤 했던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 병사들에게 물어봐도 역시 정확한 이름은 모르고 그냥 '귀신새' 혹은 '저승새'라고 부른다며 저 새가 울고 나면 다음날 꼭 뭐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며, 예전엔 그 다음날 위병소 앞에 고라니가 죽어있던 적이 있었다는 둥 전형적인 군대에서의 괴담으로까지 이어지던 기분나쁜 휘파람 소리의 귀신새. 예전에는 간첩들끼리 신호를 주고 받는 소리같다고 간첩새라고도 불렸다는데..



전역 후로도 간혹 귀신새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살던 중, 오늘 초저녁에 산책 중 다시 그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이제 군대에 있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때 만큼 기분나쁘고 하지는 않았고 '귀신새'.'저승새'라고 불렸던 새의 진짜 이름이 궁금해져서 검색 시작. 나처럼 밤 중에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휘파람 소리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새 소리를 녹음해서 블로그에 올려둔 어느 분도 계셨기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귀신새의 이름은 '호랑지빠귀'였다. 






요렇게 생긴 녀석이 그렇게 소름이 돋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니. 

크기는 약 30cm내외, 시베리아 남부, 만주 일대, 한반도와 일본 등지에서 번식하며 삼림, 공원, 인가 근처에서 산다고 한다. 

귀신새의 이름이 호랑지빠귀라는 것을 알게되고 모양을 알고 나니 기분나쁘고 재수없다며 괜히 싫어했던 것이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10년전부터 궁금해하던 휘파람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더이상 이유없이 무서워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특이한 울음 소리 때문에 괜히 사람들에게서 귀신새라는 무서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호랑지빠귀를 보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피상적인 부분에 치우쳐 잘못된 판단과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귀신새 이야기 끝.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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