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시끄럽다.


 

내 삶도 만만치 않게 시끄럽다. 당장 내 지갑에서 돈이 들고 나는 일이 아니라면 마음을 쓰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요지경 같은 세상은 보였고 경악과 좌절의 비명 소리가 들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믿어야 하고 또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지 두렵다.


요순시대, 유토피아, 샹그릴라, 그리고 율도국(?). 그래. 어차피 그런 이상향이 실존하리라 믿은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곳에 가까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함이 옳지 않은가. 이 땅의 그저그런 필부 중 하나인 나로서는 요즘을 감당하기가 더욱 벅차진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비열한 거짓들 앞에서 나는 더욱 작아진다.


 

 


M3를 느끼다


 

하릴없이 멍할 때면 M3를 만지작 거리곤 한다.

셔터를 누르는 것 보다 셔터를 장전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초기형에서만 느낄 수 있는 더블스트로크의 손맛은 M3를 사용한다면 포기하기 어려운 매력이다. 부드럽고 매끈하면서도 절도 있게 끊어지는 그 느낌은 마치 볼트액션식 소총을 장전하는 듯, 셔터를 장전하는 순간의 설레임과 흥분을 극대화 해준다. 엄청난 수의 부품들이 투입된 M3의 파인더는 완벽 그 자체다. M라인업 중 유일하게 화이트 아웃 현상이 없고 등배에 가까운 0.91배의 배율은 내 눈의 시야 그대로, 과장과 왜곡없이 솔직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셔터는 매우 부드럽게 작동하며 아주 정숙하다. 물론 일회용카메라들도 조용한 소리를 들려주긴 한다. 하지만 그들의 '틱'하는 맥없는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데 이를 단순히 '조용하다'라고 표현하긴 부족하다. M3의 셔터음은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조용조용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면서도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그 속에 강단이 느껴지는, 그런 소리라 하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챡!'


 


M형 라이카의 시작과 끝, 완벽을 추구했던 카메라


 

내가 가지고 있는 833XXX시리얼의 M3는 56년 생산분으로 올해로 무려 환갑을 맞이하셨다. 라이츠사가 M3를 개발하며 얼마만큼의 기대수명을 목표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M3는 쌩쌩하다는거다. 그것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재미로' 사용하는 일부 클래식 카메라들과 달리 M3는 최신 라이카 카메라와 다를게 없을만큼 편리하다.


M3는 등장과 동시에 그야말로 경쟁사들과 사진가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바르낙의 많은 단점들을 일거에 해결해 버렸고 자동으로 변환되는 3개의 프레임을 내장한 밝고 시원한 파인더와 자동으로 리셋되는 필름 카운터, 최고의 조작감과 우수한 내구성의 부품들과 만듦새, 유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운 디자인과 정밀한 상판 각인, 새로운 베이요넷 M마운트의 도입과 동시에 출시된 우수한 렌즈들까지 더해졌다. 제작단가와 생산효율 보다 제품의 완벽을 우선시한 다시 나오기 힘든 카메라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M3의 완벽함은 라이츠사에게도 부담일 수 밖에 없었는지 이후의 M라인업들은 원가절감의 논리가 적용되며 완성도가 저하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보다 다양한 화각의 프레임을 지원하게 되거나 보다 빠른 필름 로딩과 되감기가 가능해지는 등의 아주 더디고 소소한 개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M3의 장점들이 유지되지 못한 부분은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그랬기에 가능한 모든 부분에서 완벽을 추구하고자 했던 M3의 상대적 지위는 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이처럼 M3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시작과 동시에 끝판왕이 되어버린 무결점의 카메라였고 마치 1회초 선두타자가 끝내기 홈런을 쳐버린 것과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카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자신만만했던 Leica M3의 등장


 


 


세상은 M3 같아야 한다.


 

M3를 만지고 있으면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60년전 독일의 숙련공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거짓없는 기계를 만들어낸 것은 최고의 제품을 향한 그들의 순수하고 정직했던 열정과 장인정신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져 60년을 버텨온 M3와 달리 누군가에게는 5년도 버거워보인다. 속임수와 거짓은 완벽할 수 없다. 오래가지 못한다. 언젠가는 탈이 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다해 존경할 사람이 없는 요즘이라 오히려 낡은 카메라 하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이 또한 슬픈 일이긴 하나 그런 카메라 하나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말이지.. 유토피아나 샹그릴라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세상은 M3 정도는 되야할 거 같다.





나의 Leica M3




작례 몇 장


























2016.06.06. 포항

Leica M3 / 50mm f2.8 Elmar / Kodak 400TMY / IVED







2016.06.06. 포항

Ricoh GR

“라이카 바디에 왜 다른 렌즈를 꽂아?”


사진을 하며 알고 지낸지 오래된 후배는 작년에 M6와 현행 50미리 엘마를 손을 떨며 겨우 마련했다.  50미리를 좀 쓰다보니 역시 0.72배율의 M6에게 최적인 35미리 라이카 렌즈가 간절해졌다. 하지만 그의 작은 간과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는 쉽사리 Summicron ASPH 따위를 덜컥 지를 수는 없었다. 결국 Voigtlander의 렌즈들 따위를 사면 어떻겠냐고 나에게 종종 물어봤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런거 쓰려면 M6는 뭐하러 샀냐? 성능이 좋아서 라이카 쓰냐? 그냥 라이카라서 쓰지.”


솔직히 나는 그랬다. 라이카를 쓰는건 그냥 라이카니까 쓰는 거였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예쁘다는 거? 토이 카메라 따위가 아니라면 내 눈에 광학적으로 몹쓸 렌즈는 별로 보질 못했고 해상도나 콘트라스트, 색감, 왜곡 억제력 등은 예민하고 냉철한 분들이 리뷰에서 친절하게 분석해주시면 ‘음 그렇군.’ 하는 정도였고, 결국 내가 사진을 찍고 나면 어느 렌즈, 어느 카메라든지 나름대로 괜찮았다. (나는 사실 장비 쪽엔 상당히 박애 주의자였던?) 그렇지만 어차피 라이카 바디를 쓴다면 라이카 렌즈가 맞다고 봤다. 이미 라이카를 쓴다는 것 부터가 어쩌면 ‘실용’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닌가.


그런데 M6를 쓰면서 굳이 타사의 렌즈라니. 성능이야 좋겠지. 값도 싸지. 모양도 나름 어울려. 하지만 라이카가 아니야. 그런건 사면 결국 바꾸게 돼. 그를 말렸다. 총알을 좀 더 모으거나 Summicron보다 저렴한 Summaron 괜찮은 물건이 나오길 기다려보자고.




Summaron 3.5cm f3.5


그러던 차에 라이카 쪽에서는 나름 전문성을 가지고 오랜기간 비교적 신뢰가 축적됐다고 하는 ‘ㅈ카메라’와 ‘ㅇ카메라’에 거의 동시에 주마론 매물이 올라왔다. 아쉽게도 M마운트가 아닌 스크류 마운트였지만 우리에겐 LTM이라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ㅈ카메라’의 매물엔 마침 LTM아답터도 포함되어 있었고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미크론 ASPH 중고가의 25% 정도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달려 보는거다. 후배에게 연락했다. 이거나 사봐라.




"쓸 시간도 없는데 나한테 보내."


위탁상품이라 현금 박치기를 해도 한 푼도 안깎아주더라며 후배는 볼멘 소리를 했지만 거기서 깎아봐야 얼마나 깎겠느냐고 상태만 좋으면 몇만원 더 준건 아까워하지 말라며 녀석의 말을 잘라 버렸다. 며칠 후 택배로 물건을 받은 후배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상태를 보여줬다. 사진 찍는다는 녀석이 찍은 제품 사진치곤 너무 X판이라 짜증이 밀려왔다. ‘아 잘 좀 찍어서 보내봐. 렌즈 알 좀 보이게.’


녀석의 허접한 제품 사진으로도 일단 렌즈의 상태는 꽤 좋아 보였다. 주마론이야 이쁘기로 치면 주미크론 1st 8매와 같은 디자인의 2.8 주마론이 최고지만 얘는 엄청 구닥다리처럼 생긴 스크류 마운트 3.5cm 주마론이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생산된 올드 자이즈 렌즈는 그렇게나 좋아했으면서 스크류 마운트 라이카 렌즈들에 관심이 없었던 건 뭔가 덜 떨어져 보이는 외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나의 편견도 50미리 엘마를 쓰면서 사라졌고 라이카 올드 렌즈 특유의 굵은 표현력과 질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주마론도 참 궁금해졌다.


주말에 나가서 얼른 찍고 결과물 좀 보여달라고 후배를 재촉했건만 주말에도 연이어 출근이 잡힌 그는 좀처럼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었다. 나같으면 회사에 들고 가서라도, 점심을 굶고 나가서라도 후딱 찍어볼텐데 이 녀석은 궁금하지도 않은지 천하태평이다. 결국 안달이 난 내가 (근데 왜 내가 안달이..) 연락을 다시 했다.


“야 쓸 시간도 없는데 그냥 나한테 보내라. 내가 자~알 테스트 해줄게. 그리고 M6도 같이 보내. 알다시피 내 M3에는 35미리 프레임이 없어.”




주인보다 먼저 써보게 된 렌즈.


순둥이 후배는 형의 말에 별 대꾸도 않고 카메라를 다음 날 보냈다. 물론 한 마디를 하긴 했다. 경주에 지진 자꾸 나는데 자기 카메라 잘 지켜달라며… -_-  어쨌든 평일에 무조건 도착하게 하라는 지시를 잘 지켜 금요일 오후에 택배가 도착했다. 사무실에서 박스를 호들갑스럽게 뜯어봐야 ‘저건 또 뭘 샀나?’ 하는 팀장의 눈초리만 받을 것 같아 박스를 안고 차로 쏙 들어와서 뜯었다. ‘자식, 딴에 엄청 아끼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하게 완충제가 들어간 포장을 풀자 그의 M6와 주마론이 나타났다.





가까이 있는 지인은 늘 블랙 바디에 실버 올드 렌즈의 조합이 참 예쁘다고 얘길 했었다. 깔맞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리 공감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나쁘지 않다. (물론 블랙페인트 IId였어야 더 멋질 듯..)





렌즈 상태도 꽤 괜찮아 보인다. 외관은 아주 깨끗하고 렌즈 알의 코팅이 상한 부분도 없어 보인다. 밝은 빛에 비춰보면 내부의 헤이즈나 클리닝 기스가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까진 해보지 않았다.




Summaron으로 찍은 두 롤의 흑백 필름


새 카메라, 새 렌즈를 만져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비록 내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M6를 가지고 놀며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감상하며 금요일 오후를 버텼다. 내일 좀 찍어줘야지. 당장 찍을 것도 아니면서 AGFA APX100 한 롤을 넣었다. 역시 퀵로딩이 편하긴 하구나. M3가 갑자기 조금 원망스럽다.




첫 테스트 : 2016.09.24. 포항 / Agfa APX100


토요일 오전, 집에 놀러온 처제네와 함께 포항 환호해맞이공원에 나들이를 가서 M6와 주마론을 꺼냈다. 카메라 보는 눈이 이제 예리해진 와이프가 ‘그건 또 뭐야?’ 라고 물었지만 준비했듯이 당당하게 후배의 카메라라고 얘길했다. ‘이젠 카메라도 돌려 써?’ 라고 했지만 그 이상 잔소리는 없었다. 가족들과 산책을 하며 유유자적 몇 컷을 찍고 오후에 장보러 간 효자시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 롤을 모두 소진했다. (그렇다. 지난 포스팅에 썼던 GR1s 테스트와 같은 날이다.)





환호해맞이 공원에서 내려다 본 영일만 바다. 노출차가 극명한 상황을 일부러 택해보았는데 역광에서의 빛 번짐도 없고 넓은 계조를 보여준다.





오후의 테스트는 장보러 효자시장에 온 김에 주변을 돌아다녔다.
저 쪽 골목 끝에서 자전거 한 대가 오는 것을 봤다. 건물 뒤에 몸을 숨기고 렌즈의 거리를 5피트(약 1.5미터) 정도에 맞춰두고 조리개를 조였다. 그리고 잠시 뒤 자전거가 다가온 순간 카메라를 들어 바로 셔터를 눌렀다. 약간 흔들렸는데 의도치 않게 패닝효과가 되어 다행이다.





늦은 오후의 낮은 햇살이 만들어주는 그림자는 별 것 아님을 알아도 자꾸만 찍게 되는 매력이 있다. 자신의 그림자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의 심리는 무엇일까. 거울에 비친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자신감 부족? 아니면 은연 중에 나를 보이고 싶은 욕망? 일단은 흑백에 어울리는 질감이 좋아 찍었다. 계조가 참 좋다.





누가 지나가길 기다렸으나 실패.





위의 컷을 찍고 자리를 옮기니 이런 타이밍이 온다. 역시 급하게 눌러서 흔들렸으나 아까보다 더 패닝이 잘 됐다. 패닝 전문작가로 나서볼까 하는 1%의 객기가 잠시 솟았다. 하지만 이거슨 필름. 비싼 필름으로 이제 그런 짓은 못하겠다. 그리고 원래 이런 컷은 하려고 하면 잘 안되더라는 건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진실이다.




두번째 테스트 : 2016.09.26. 경주 / Kodak 400TX





회사에서는 저녁도 준다. 고맙게도.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는 건 칼퇴를 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의사표시가 되버린다. 저녁을 먹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칼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녁 먹는 대신 나는 카메라를 들고 회사 뒷 길을 빠져나와 인근 촌 동네로 왔다. 용명리사지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차에서 내려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저 덩쿨은 더 올라갈 줄이 있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라는 쓸데없는 궁금증이 들었다. 평소라면 이런 건 찍지도 않았을테지만 흐린 날의 희뿌연 풍경들이 이 날따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런 날씨의 풍경은 ‘덜 떨어진’ 주마론의 성능과 어울어져 뭔가 회화적 이미지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이 곳은 몇년전 경주개 ‘동경이’ 마을로 지정된 곳이다. 동경이는 진돗개와 비슷한 생김새이나 꼬리가 아주 짧은 것이 특징으로 경주 지역 토종견으로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아쉽게도 마을에서 개 그림만 잔뜩 보았을 뿐 정작 동경이는 한 마리도 보질 못했다.





용명리사지 삼층석탑. 그리 큰 탑은 아니나 균형미를 갖춘 세련된 탑이다. 탑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서 쉬고 계셨다.





평소 조리개를 개방해서 사진 찍을 일이 많이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렌즈 테스트차 빌려온 것인데 이런 컷은 하나 찍어봐야하지 않나 싶었다. 보들보들 예쁘기만 한 현행 렌즈들의 보케에 비해 더 아련하고 따스한 느낌이 참 좋다.





요즘은 해가 짧다. 흐린 날이라 더 어둡고 더 이상 찍기는 힘들것 같다. 그래도 400TX를 넣길 잘 했다 생각하며 길을 내려간다.




세번째 테스트 : 2016.09.27. 경주 / Kodak 400TX





오늘은 해가 나왔다. 그래서 또 저녁을 안먹기로 했다. 이렇게 밥까지 굶어가며 사진질을 하고 있노라니 진작 공부를.. 아니 공부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도 이렇게 열정을 다했다면 대성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 대성할 수 있을까?) 지나다니면서 꼭 찍고 싶던 낡은 이발소를 담아봤다.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며 좁고 어둑한 실내에서 21미리를 가지고 1600으로 증감한 400TX로 다큐를 찍고 싶지만, 그 전에 일단 내 머리를 그에게 맡기며 말문을 트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리라. 물론 내 머리를 그에게 맡기는 것에도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하교길의 아이들. 작고 여린 여학생들의 그림자가 비현실적으로 커지는 오후의 낮은 빛





다 쓰러져 가는 헛간과 아무렇게나 심은 호박에선 꽃도 피고 저 멀리에는 아파트가 보인다. 건천 지역은 인근 산업단지가 커지면서 유입 인구가 늘고 새 건물들이 많이 생겨나 몇년전에 비해 스카이라인이 많이 달라졌다.





지은지 얼마나 된 집일까. 벽의 단면만 찍은 이 장면만으로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은 주마론이 1950년산이니 그와 비슷할까? 아니 오히려 이 집이 덜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교길의 여학생. 하늘이 넓게 들어가는 역광에선 콘트라스트가 낮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런게 또 올드 렌즈의 맛이라면 맛이고 재미라면 재미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지 제 몸만한 트렁크를 들고서 씩씩하게 걸어가던 여학생. 대문 옆에 투박하게 쓴 ‘방있음 2층’이 인상적이었다.





지진의 흔적. 곳곳에 돌담이 무너진 집들이 제법 보였다. 살면서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공포였다.





건천1리 공부방.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서울(특히 이른바 강남 8학군)과 이런 시골의 학업 성적, 상위 학교 진학율의 차이가 많이 나는 건 결국 개인의 역량보다도 주어진 환경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은 아닐까. 경쟁의 수준 부터가 다르기에 여기서 공부를 좀 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막상 나가보면 우물안 개구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그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 일지도 모른다.





대략 이렇게 일주일간 갖고 놀며 두 롤의 흑백 필름으로 주마론을 겪어봤다. 충분한 소회를 풀어내기에 일주일은 짧은 기간이었고 72컷으로 이 렌즈의 특성을  파악하기에 나는 너무나 막눈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흑백 사진을 위주로 찍는다면 굳이 비싼 주미크론이 아니어도 라이카의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한 렌즈라는 점이다. 세필로 그린 듯한 섬세한 묘사력과 뛰어난 왜곡 억제력,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성능의 주미크론 ASPH도 좋지만 약간 뭉툭해진 2B 연필로 그린 듯한 굵고 묵직한 묘사를 보여주는 주마론의 느낌도 개인적으로는 참 마음에 들었다.


주머니가 가벼워 대안으로 택했던 땜빵 렌즈가 이 정도라면 사실 더 바랄게 없다. 후배에게 다시 렌즈와 카메라를 싸서 보내며 문자를 보냈다.


“야 렌즈 대박 좋더라. 잘써라.”


(그리고 이 렌즈를 써본 덕에 나는 뜬금없이 2.8cm Summaron에 꽂혀 버렸다..)

"오빠 시장에 가서 쇠고기 안심이랑 감자랑 호박이랑 춘장 좀 사와요."



토요일 오후, 와이프가 심부름을 시킨다. 비싼 한우 안심은 내 입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딸냄이 태어나기 전 맞벌이 하던 때야 호기롭게 안심 한 근 정도 두툼하게 썰어와서 스테이크도 구워 먹고 했지만 이제 안심은 귀하신 딸냄이 입에만 들어가는 고급 식자재가 되었다. 감자랑 호박과 춘장은 와이프가 잘 하는 몇 안되는 요리 중 하나인 짜장을 만들기 위함이다. 얼마전 있었던 처남의 생일을 식구 모두가 (심지어 처남 본인마저..) 까먹은 것이 미안해 처남이 좋아하는 짜장을 만들어 담아 줘야겠다고 한다. (처남이 얼른 연애를 했음 좋겠다.)



아, 잡설이 길었다. 어쨌든, 이 심부름에서 내게 중요한 것은 어떤걸 사오라는게 아니라 '시장에 가서' 사오라는 부분이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대기업의 대형 마트도 있지만 몇몇 종목들은(딸냄이 전용 안심이라든지..) 마트보다 시장에 있는 가게에서 사오는 것이 낫더라는 경험치가 쌓였다. 그래서 오늘도 와이프는 내게 '시장에 가서' 그것들을 사오라는 거다. 괜시리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알았어~' 라고 대답했다. 오빠는 뭐 먹고 싶은게 없냐고 물었지만 와이프가 할 줄 아는 요리가 거기서 거기인지라 특별히 없다고 대답하곤 옷을 챙겨입고 나섰다. (먹고 싶은 건 없고 찍고 싶은 건 많았다 ㄷ)



시장은 걸어서 5분인 대형마트와 달리 차로 5분이면 가는 거리에 있다. 시장에 도착한 나는 심부름 따위는 금세 잊고 지갑 대신 카메라를 꺼냈다. 시장에 심부름을 오는 것이 내게 의미있는 이유다. 이 곳은 슬슬 돌아다니며 스냅을 찍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다. 아파트 단지와 인접하여 이제 재래시장의 느낌은 그다지 나질 않지만 여전히 이 곳은 '시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며 시장 뒤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30분 정도 한 바퀴 돌며 10여컷 정도는 셔터를 누를 만한 그런 곳이다. 



내 손엔 새로운 똑딱이 하나가 들려있다. 바로 Ricoh GR1s! 라이카 28미리나 하나 사볼까 해서 Contax T3를 팔아 먹었지만 원하는 매물이 나오지 않았고 그 사이 T3를 팔아 마련한 목돈은 야금야금 생활비로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생각해보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신품으로까서 10년도 넘게 멀쩡히 잘 사용하던 T3의 희생이 너무 의미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늘 휴대할 수 있던 똑딱이의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은 생각보다 그 빈자리가 컸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마지막으로 장터나 한 번 보고 와야지.' 하다가 마침 괜찮은 가격에 올라온 GR1s를 발견했고 결국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사버렸던 것이다. 써보고 별로면 다시 팔면 되지란 생각으로.. (다 이런 식으로 사놓고 정작 되판 경우는 극히 드물다.)



주중에 택배로 받은 녀석에게 첫 필름을 넣어줬다. 흑백 위주로 사용할 카메라지만 마침 후배가 새로 산 Summaron 3.5cm를 대신 테스트하는 중이라 Leica M6에 흑백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GR1s에는 첫 롤을 칼라 네가티브로 넣어주기로 했다. 앞서 얘기했듯 써보고 별로면 다시 팔려 나갈 수도 있는 카메라이기에 녀석은 명성대로 뭔가를 나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내가 잘 찍어야 하는게 아니고??)





노란 원색에 끌려 한 컷을 눌러봤다. 청명한 늦은 오후의 낮은 빛이 꽤나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줬다.





이 시간대에 이 곳을 오면 꼭 한번쯤은 카메라를 들이대게 되는 꽃집 비닐하우스와 담벼락. 왼쪽 편에 좀 지워져서 식별이 잘 안되는 'SEX'란 글씨에 매칭될만한 어떤 피사체가 지나가길 늘 기다려보지만 오늘도 아닌 것 같다.





스냅 사진에서 사람이 없는 컷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렇게 한적한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가장 뻘쭘하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면 '저 자식은 뭐하는 놈일까?' 라고 생각할 것만 같아 괜히 뒤통수가 따갑다. 애꿎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방금 전에 확인한 페이스북도 또 새로고침하고.. 그러면서 곁눈질로는 양쪽에 누가 오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아, 카메라의 초점은 원하는 위치에 고정해 뒀음은 물론이다. 


GR1s의 완소 기능으로 초점 고정 기능을 들고 싶다. 반셔터를 눌러 초점을 잡은 채로 mode 버튼을 길게 누르면 그 거리로 초점이 고정되는데, 카메라를 내린 채 쉬고 있다가도 타이밍이 오면 징징거리며 다시 초점을 잡을 필요없이 즉각 셔터를 누를 수 있다. 구도를 잡아두고 매복을 주로 하는 나에게 정말 유용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GR1v의 수동초점 기능이 조금 부러웠는데 이거면 됐다 싶다. 





세로컷으로 왜곡 정도는 어떤지 좀 확인해 볼까 싶었다. 하지만 그냥 찍기는 필름이 아까워 또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 보니 같은 구도로 쓸데없이 3컷이나 찍었다. 오토바이 한 대, 아저씨 한 분, 그리고 이 자전거. 이게 제일 나았다. 더 기다리긴 싫었다.





해가 점점 뉘엇뉘엇해진다. 아마 장사를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을 간판도 없는 빈 상가들의 이미지 덕에 실제 보다 더 오래되고 더 시골스러운 느낌이 드는 곳이다. 여기서 부턴 초점을 맞추지 않고 스냅 포커스 모드를 써보기로 했다. 앞서 언급한 초점 고정 기능이 원하는 곳에 초점을 맞춘 후 고정시키는 방식이라면 스냅 포커스 모드는 2미터로 고정된 방식이라는 점이 다르다. 28미리의 깊은 심도를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조리개를 조여두면 어지간한 거리는 웬만큼 초점이 맞으니 걸어다니며 찍는 길거리 스냅에서 아주 유용하다. 실제 GR1s의 AF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고 조금 어둡거나 콘트라스트가 낮은 환경에서는 버벅임이 심하기에 더욱 활용성이 높다. 





낡고 오래된 이미지와 달리 시장 너머 형산강 건너편엔 브랜드 있는 고층 아파트들이 쭉쭉 솟아 있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진부한 시선의 사진이지만 그래도 이 곳에 오면 꼭 한 컷씩은 찍게 되는 것 같다.





가게 한 곳이 다른 매장으로 바뀔 모양인지 내부 공사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현대의 렌즈답게 역광에서도 플레어나 콘트라스트의 저하가 거의 없다. 이 렌즈가 호평을 받아 L마운트로 출시되기도 했으니 광학적 성능은 믿고 산 카메라였다.



"어디예요?"


와이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은 안보고 테스트를 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다. 뜨끔하다. 왜 안오냐고 와이프가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따라 시장에 감자 팔러 나온 할머니들이 없어서 몇 바퀴 돌면서 찾고 있다고 먼저 얘기하며 버벅인다. 그런데 와이프의 본론은 '빨리와!'가 아니라 '빵 먹고 싶다~ 빵도 좀 사와요.' 였다. 내심 안도하며 얼른 사서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만하면 테스트는 대충 된 것 같다. 해상도와 콘트라스트도 괜찮고 GR 라인업다운 슬림한 디자인과 스냅 특화 기능들이 보여주는 이 카메라의 정체성은 역시 매력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28미리 화각이 아닌가. 다소 부족한 AF성능과 어둡고 흐릿한 뷰파인더가 좀 아쉽지만 완벽한 똑딱이는 결국 없기에 양보하기로 했다. (T3, TC-1, MINILUX 등등 이것들이 짜기라도 한 마냥 크고 작은 문제들이 꼭 한두개씩 있으니...)


이제 시장으로 심부름을 올 때면 카메라를 챙겨 나오는 날이 더 잦아질 것 같다. 그리고 와이프가 시킨 주문 중 그 날따라 꼭 못찾는 물건이 있어 난 30분 정도 더 늦을테고 말이다.



2016.09.24. 포항 효자시장




앙증맞은 후드까지 있는 Ricoh GR1s





이른 바 '예술'이라는 불리는 것들 중에서 사진 만큼 진입 장벽이 낮은 분야가 또 있을까.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촬영을 위한 거대한 카메라와 현상, 인화의 까다로움으로 소수 전문가들만이 다룰 수 있는 특수한 기술이었지만 코닥 필름의 출시와 라이카를 비롯한 소형 카메라의 대중화는 보다 편리하고 신속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지난 50년간의 변화를 뒤엎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던 디지털 카메라의 쓰나미가 밀려오면서 사진의 대중화는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상 그 자체가 되었다. 핸드폰 카메라의 성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고 사진을 기반으로 한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올리고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이런 디지털 시대의 사진 생활에서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면 이제는 누구나 내가 찍은 사진을 쉽게 편집하고 보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과거에는 사진을 찍고 나면 필름을 빼서 동네 사진관에 가져다주고 '사람수 대로 뽑아주세요.'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같은 필름도 사진관에 따라 사진의 색감과 노출이 다르게 뽑혀 나오기도 했지만 거기에 대해 불만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일반인은 거의 없었다.



보다 전문적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사진을 다루기 위해서는 암실에서의 현상/인화 테크닉을 어렵게 배워야했고 숙달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포토샵, 라이트룸 같은 전문 보정프로그램이 등장한 후에도 비싼 가격을 주고 구입해야했으며 능숙하게 다루는 일은 암실 테크닉 못지 않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Snapseed나 VSCO같은 어플리케이션을 핸드폰에 설치하기만 해도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사진을 보정할 수 있고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 전 필터 효과 몇개만 이리저리 적용해보아도 훨씬 분위기 있고 멋진 사진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어렵게 익힌 테크닉들이 터치 한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허무하기까지 할 지경이다. 



가끔 RAW 포맷으로 찍은 사진을 라이트룸에서 보정하지 않고 카메라에 내장된 현상프로그램을 통해 JPG로 변환하기도 한다. 주로 굳이 RAW로 찍을 필요가 없이 간단히 써먹을 사진들이다. 그런데 때론 라이트룸에 옮기기까지 기다리기가 귀찮아서, 빨리 결과물을 모니터로 보고 싶어서 카메라 내장 프로그램으로 현상해보기도 하는데 이게 간혹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 사진이 그런 경우로 Ricoh GR로 찍은 컷을 간단히 카메라의 포지티브 모드로 설정하여 JPG로 뽑아낸 컷이다. 포지티브 모드는 채도와 콘트라스트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세팅이 되어 있는데 보통의 경우 그 효과가 다소 과하여 크게 선호하지는 않았는데 유독 이 컷에는 꽤 어울려 라이트룸에서 다시 손 볼 생각도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모 사진 커뮤니티에 포스팅 했었다. '뭐 나름 볼 만하네.' 그런데 이 사진이 그 날 바로 베스트갤러리에 올라 버렸다. 너무나 쉽게 만들어낸 사진이라 그런지 별 애착도 없던 컷이 뜨거운 반응을 받으니 '응? 이게?' 하며 살짝 당황했던 것도 사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다. 사진은 결과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맞거늘 나는 언제나 그 과정과 수단에도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왔던 것은 아닌가. 아무리 좋은 사진을 봐도 그것이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면 '에이 저렇게 좋은 컷을 찍을거면 카메라로 찍지.' 라며 혀를 찼고 디지털 카메라로 좋은 사진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아 저 사람 필름으로 찍으면 더 좋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최신 DSLR과 AF렌즈를 사용해 찍은 다이내믹하면서 칼 같이 초점이 맞은 사진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구닥다리 라이카를 이용해 찍은 결정적 순간에는 더 후한 점수를 주며 감탄해 마지 않았고, 같은 프린트물이라도 작가가 FB인화지에 직접 수동 인화했다고 하면 '아 그래요?' 하면서 그제서야 다시 눈을 가까이 들이대고 작품을 살폈다. 



모든 기술은 보다 편리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칭송하고 편리함을 평가절하 하는 이 못된 심보는 아날로그부터 사진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꼰대스런 자부심인지, 아니면 프로와 달리 작업의 신속성이 중요하지 않고 대량의 이미지를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취미 사진가로서 즐길 수 있는 재미가 불편함 속에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너무 쉬우면 재미는 없지 않냔 말이지. 



저 방어 사진은 그 사진 커뮤니티가 사라지지 않는 한 베스트 갤러리에 남아 남들에게 보여지며 꾸준히 추천수가 한두개씩 더 늘어나겠지만, 너무 쉽게 얻어낸 사진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론 크게 의미를 두거나 애착이 가지 않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아무도 카메라 내장 프로그램으로 보정한 줄 모르고 안다고 한들 사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참 희한한 심리가 아닐 수 없다. 








2016.10.13. 회사에서



몇 년은 쓸 줄 알았던 필름이 슬슬 바닥을 보이자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한참 열심히 찍던 시절에 비하면 많은 것도 아니지만, 한 달에 10롤 정도를 찍어대니 넉넉할 줄 알았던 수십롤의 비축 물자도 얼마 버티질 못했다. 이렇게 많이 찍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필름을 다시 쓰기 시작하니 디지털에는 손이 가질 않는다.



지인과 함께 면세 한도를 꽉꽉 채워 주문한 필름은 2주일 하고도 며칠이 더 걸려 뉴욕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회사로 날아왔다. 박스 겉면에 무슨 이유인지 받는이의 이름이 빠져 있었는데도 내용물이 적힌 스티커에서 'Kodak Potra 160'이라고 적힌 것을 본 여직원이 알아서 가져다 준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것과 반비례하여 마음은 넉넉해졌다. 이제 또 몇 개월을 버틸 수 있겠다는 안도와 그보다 더 큰 설레임. 포장도 뜯지 않은 새 필름임에도 벌써부터 저 필름에 남길 추억과 이미지에 들뜨는 가을날이다.




 






























































2016.09.24. 포항

































































2016.09.04. 포항




2016.10.03. 포항




























































2016.09.10. 포항






개천절 출사 후기.




필름 현상하려면 멀었으므로 오늘은 특이하게 그림으로 후기를 써본다. 




개천절인데 현장 라인이 가동된다면서 관리직도 전원 열외없이 출근하래서 회사에 나왔다. 당연히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그래서 내가 기분이 나쁠 때 하는 최소한의 시위로 점심을 걸렀다. 물론 나만 배고프지만 그런 기분일 때 밥을 먹고 싶진 않다. 특근비도 안나오는 휴일 출근이라 당연히 근로 의지는 제로이고 카메라나 하나 챙겨 드라이브를 나가버렸다.




청도 방향으로 향하는 시골길을 따라 하염없이 가다가 적당히 내키는 곳이 있으면 차를 세우고 사진이나 좀 찍다 올 계획이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좌측편에 꽤 예쁜 하천이 흘러가고 있었고 다리 너머에는 더 좁은 시골길이 있기에 그리로 차를 돌렸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니 조용한 시골 동네가 있었고 거기서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우고 나서야 갑자기 '어? 카메라를 안가져왔나?'  주머니에 뭔가 든 느낌이 나지 않는다. 아..GR도 GR1s도 둘다 안가져온건가.. 여기까지 왜 왔나.. 좌절감이 밀려왔지만 다시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다행히 400TX가 든 GR1s가 있다. 휴.. 




동네를 어슬렁거리니 작은 시골장이 서있었고 좌판에 선글라스를 펼쳐놓고 있는 곳이 있었다. 중절모를 쓴 아저씨 한 분과 친구분이 즐겁게 선글라스를 고르고 있었고 한참을 고른 후 좌판 뒤 담벼락에 지나치게 빽빽하게 걸어둔 거울로 가서 확인하려고 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그 순간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꽤나 포토제닉해 자세를 낮추고 가장 아래 큰 거울에 비친 두 분의 모습을 찍었다. 





요렇게. 거울 하단에 내가 나오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급하게 찍느라 그런건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핏봐도 50은 넘어보이는 연배에도 고등학교 친구들이 어른 흉내를 내며 선그라스를 써보며 히죽거리는 듯한 천진난만한 표정 덕분에 상당히 기대되는 컷이다. 




두 분은 내가 사진 찍는 줄 당연히 알았겠지만 선글라스 뒤에 얼굴이 가리니 크게 개의치 않았고, 덕분에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안경을 맞춰보는 모습도 근접하여 옆에서 찍을 수 있었다.





요렇게. 확실히 28미리는 이런 거리에서 이런 구도에서 참 편안한 화각이다.




그런데 대뜸 한 분이 나를 보고 혹시 구룡포에서 오신 작가 아니냐고.. ㄷㄷ  '네. 어떻게 아세요?' '아 예전에 방송에 한번 지나가면서 나오길래. 뉴스 나오는데 뒤에 화면에서 사진 찍는 양반 얼핏 지나가는걸 본거 같아서.' '근데 그걸 기억하세요?' '허허허' 구룡포에 다니면서 방송 카메라를 본적이 없는데 내가 언제 찍혔는지 그리고 그렇다쳐도 그걸 보고 어찌 나를 알아보시는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골목에서 큰 길가로 나오니 트럭 짐칸 위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계신 할머니 한분이 보였고 그 옆에는 뻥튀기를 튀기는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사실 뻥튀기 할머니가 더 찍고 싶었지만 이미 눈이 마주쳐서 지금 카메라를 들이대면 100% 실패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트럭 위에 할머니를 먼저 찍기로 했다. 





마침 어제 비가 오고난 후로 하늘은 청명했고 약간 사광으로 들어오는 빛까지 완벽. 할머니 쪽에 포커스를 맞춰서 한 컷 찍고 좀 앞 쪽으로 다시 초점을 맞추고 같은 구도로 한 컷 더. 두 컷을 찍고 나니 할머니는 나를 인지하고는 트럭에서 내려와 피해버리신다. 다시 빼꼼이라도 나오실까 싶어 잠시 주춤하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니 아까 눈이 마주친 뻥튀기 할머니가 왜 여기서 사진을 찍느냐고 마구 뭐라 하신다. ㄷㄷ  아 네.. 시장 풍경 좀 찍고 있어요.. 라고 하니 뭘 찍을게 있다고 이런데서 사진을 찍냐고 또 난리를..ㄷㄷ  그러자 그 옆에 앉아서 나물을 팔던 할머니가 '이 할매 원래 고약하니 그냥 정중하게 얘기하고 얼른 가소!' 그래서 '네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났다.. 




선그라스 아저씨들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기분이 급다운이 된다. 




그래도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 어슬렁거리다 보니 오래된 한옥 한채가 있었는데 마침 마당엔 고양이가 널부러져 자고 있고 그 옆엔 까치 한마리가 종종 걷고 있었고 부엌에선 어린 여자애 하나가 막 나오던 참이었다. 세로 컷으로 구도를 즉각 잡았는데 28미리 화각에서 한번에 프레임이 나오지 않아 여자애가 조금 더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셔터를 눌렀는데 아이가 나오는 바람에 까치가 날아버렸다. 적당히 동감이 살게 나왔을지 아님 어중간해졌을지 아쉽다.




 


나름 재미있는 컷이 될 것 같은데 까치가 관건 ㄷㄷ




그런데 카메라를 든 나를 보고 아이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뒤 바로 옆 건물 안에서 보이는 거였다. 한옥의 반을 터서 화장품 가게로 개조한 상가였는지 연결되있는 모양이었다. 한옥과 함께 붙은 화려한 상가 건물이 인상적이라 한옥과 상가를 절반으로 나누어 프레이밍하니 상가 안쪽에서 여자애가 실루엣으로 담긴다. 셔터 타이밍을 놓칠까 얼른 찍었는데 아무래도 여자애의 동감이 어설픈 순간이었을 것 같다.





특이한 건물 구조가 재미있었지만 여자아이의 실루엣이 아마 완벽하게 나오지 않고 저렇게 어설플 것 같다..




이정도 찍고 차 세워 둔 곳으로 가다보니 철길이 나타나고 차단기가 내려가고 있었다. 기차가 오는 모양이었다. 잘됐다 싶어 구도를 잡고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의 속도가 워낙 빠르니 이런 건 보통 한 컷으로 끝이다. SLR이 아니라 초당 5매의 연사도 불가능하기에. 그런데 아직 GR1s는 확실히 손에 익질 않아 전원이 꺼진 상태인 줄로 착각하고 전원을 키고자 전원 버튼을 눌렀다가 렌즈가 안으로 들어가길래 다시 전원을 켜고 하는 몇 초간 살짝 당황 ㄷㄷ  그리고 곧 열차가 나타났다.





열차가 적당한 위치에 도달한 순간 셔터를 눌렀는데 마침 급하게 달려온 오토바이 한 대가 차단기 앞에서 멈췄다. 오토바이가 열차를 지나치게 가리거나 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찍어봤자 뻔할 뻔자인 구도에서 양념 역할을 충분히 해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잠이 깼다. ㄷ




이거슨 꿈??




순간 밀려오는 허무함과 꿈속에서 본 그 몇 컷의 기대작들.. 아놔.. 




휴일 출근에 기분이 나빠 점심 거르고 회의실에서 눈 붙히는 동안 꾼 꿈치고는 너무나도 레알하여 이렇게 후기라도 적어본다. 




끝. ㅠ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