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 출사 후기.




필름 현상하려면 멀었으므로 오늘은 특이하게 그림으로 후기를 써본다. 




개천절인데 현장 라인이 가동된다면서 관리직도 전원 열외없이 출근하래서 회사에 나왔다. 당연히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그래서 내가 기분이 나쁠 때 하는 최소한의 시위로 점심을 걸렀다. 물론 나만 배고프지만 그런 기분일 때 밥을 먹고 싶진 않다. 특근비도 안나오는 휴일 출근이라 당연히 근로 의지는 제로이고 카메라나 하나 챙겨 드라이브를 나가버렸다.




청도 방향으로 향하는 시골길을 따라 하염없이 가다가 적당히 내키는 곳이 있으면 차를 세우고 사진이나 좀 찍다 올 계획이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좌측편에 꽤 예쁜 하천이 흘러가고 있었고 다리 너머에는 더 좁은 시골길이 있기에 그리로 차를 돌렸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니 조용한 시골 동네가 있었고 거기서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우고 나서야 갑자기 '어? 카메라를 안가져왔나?'  주머니에 뭔가 든 느낌이 나지 않는다. 아..GR도 GR1s도 둘다 안가져온건가.. 여기까지 왜 왔나.. 좌절감이 밀려왔지만 다시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다행히 400TX가 든 GR1s가 있다. 휴.. 




동네를 어슬렁거리니 작은 시골장이 서있었고 좌판에 선글라스를 펼쳐놓고 있는 곳이 있었다. 중절모를 쓴 아저씨 한 분과 친구분이 즐겁게 선글라스를 고르고 있었고 한참을 고른 후 좌판 뒤 담벼락에 지나치게 빽빽하게 걸어둔 거울로 가서 확인하려고 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그 순간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꽤나 포토제닉해 자세를 낮추고 가장 아래 큰 거울에 비친 두 분의 모습을 찍었다. 





요렇게. 거울 하단에 내가 나오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급하게 찍느라 그런건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핏봐도 50은 넘어보이는 연배에도 고등학교 친구들이 어른 흉내를 내며 선그라스를 써보며 히죽거리는 듯한 천진난만한 표정 덕분에 상당히 기대되는 컷이다. 




두 분은 내가 사진 찍는 줄 당연히 알았겠지만 선글라스 뒤에 얼굴이 가리니 크게 개의치 않았고, 덕분에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안경을 맞춰보는 모습도 근접하여 옆에서 찍을 수 있었다.





요렇게. 확실히 28미리는 이런 거리에서 이런 구도에서 참 편안한 화각이다.




그런데 대뜸 한 분이 나를 보고 혹시 구룡포에서 오신 작가 아니냐고.. ㄷㄷ  '네. 어떻게 아세요?' '아 예전에 방송에 한번 지나가면서 나오길래. 뉴스 나오는데 뒤에 화면에서 사진 찍는 양반 얼핏 지나가는걸 본거 같아서.' '근데 그걸 기억하세요?' '허허허' 구룡포에 다니면서 방송 카메라를 본적이 없는데 내가 언제 찍혔는지 그리고 그렇다쳐도 그걸 보고 어찌 나를 알아보시는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골목에서 큰 길가로 나오니 트럭 짐칸 위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계신 할머니 한분이 보였고 그 옆에는 뻥튀기를 튀기는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사실 뻥튀기 할머니가 더 찍고 싶었지만 이미 눈이 마주쳐서 지금 카메라를 들이대면 100% 실패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트럭 위에 할머니를 먼저 찍기로 했다. 





마침 어제 비가 오고난 후로 하늘은 청명했고 약간 사광으로 들어오는 빛까지 완벽. 할머니 쪽에 포커스를 맞춰서 한 컷 찍고 좀 앞 쪽으로 다시 초점을 맞추고 같은 구도로 한 컷 더. 두 컷을 찍고 나니 할머니는 나를 인지하고는 트럭에서 내려와 피해버리신다. 다시 빼꼼이라도 나오실까 싶어 잠시 주춤하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니 아까 눈이 마주친 뻥튀기 할머니가 왜 여기서 사진을 찍느냐고 마구 뭐라 하신다. ㄷㄷ  아 네.. 시장 풍경 좀 찍고 있어요.. 라고 하니 뭘 찍을게 있다고 이런데서 사진을 찍냐고 또 난리를..ㄷㄷ  그러자 그 옆에 앉아서 나물을 팔던 할머니가 '이 할매 원래 고약하니 그냥 정중하게 얘기하고 얼른 가소!' 그래서 '네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났다.. 




선그라스 아저씨들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기분이 급다운이 된다. 




그래도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 어슬렁거리다 보니 오래된 한옥 한채가 있었는데 마침 마당엔 고양이가 널부러져 자고 있고 그 옆엔 까치 한마리가 종종 걷고 있었고 부엌에선 어린 여자애 하나가 막 나오던 참이었다. 세로 컷으로 구도를 즉각 잡았는데 28미리 화각에서 한번에 프레임이 나오지 않아 여자애가 조금 더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셔터를 눌렀는데 아이가 나오는 바람에 까치가 날아버렸다. 적당히 동감이 살게 나왔을지 아님 어중간해졌을지 아쉽다.




 


나름 재미있는 컷이 될 것 같은데 까치가 관건 ㄷㄷ




그런데 카메라를 든 나를 보고 아이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뒤 바로 옆 건물 안에서 보이는 거였다. 한옥의 반을 터서 화장품 가게로 개조한 상가였는지 연결되있는 모양이었다. 한옥과 함께 붙은 화려한 상가 건물이 인상적이라 한옥과 상가를 절반으로 나누어 프레이밍하니 상가 안쪽에서 여자애가 실루엣으로 담긴다. 셔터 타이밍을 놓칠까 얼른 찍었는데 아무래도 여자애의 동감이 어설픈 순간이었을 것 같다.





특이한 건물 구조가 재미있었지만 여자아이의 실루엣이 아마 완벽하게 나오지 않고 저렇게 어설플 것 같다..




이정도 찍고 차 세워 둔 곳으로 가다보니 철길이 나타나고 차단기가 내려가고 있었다. 기차가 오는 모양이었다. 잘됐다 싶어 구도를 잡고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의 속도가 워낙 빠르니 이런 건 보통 한 컷으로 끝이다. SLR이 아니라 초당 5매의 연사도 불가능하기에. 그런데 아직 GR1s는 확실히 손에 익질 않아 전원이 꺼진 상태인 줄로 착각하고 전원을 키고자 전원 버튼을 눌렀다가 렌즈가 안으로 들어가길래 다시 전원을 켜고 하는 몇 초간 살짝 당황 ㄷㄷ  그리고 곧 열차가 나타났다.





열차가 적당한 위치에 도달한 순간 셔터를 눌렀는데 마침 급하게 달려온 오토바이 한 대가 차단기 앞에서 멈췄다. 오토바이가 열차를 지나치게 가리거나 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찍어봤자 뻔할 뻔자인 구도에서 양념 역할을 충분히 해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잠이 깼다. ㄷ




이거슨 꿈??




순간 밀려오는 허무함과 꿈속에서 본 그 몇 컷의 기대작들.. 아놔.. 




휴일 출근에 기분이 나빠 점심 거르고 회의실에서 눈 붙히는 동안 꾼 꿈치고는 너무나도 레알하여 이렇게 후기라도 적어본다. 




끝.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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