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7. 부산

iPhone 7

















2016.11.27. 포항

iPhone 7





















2016.11.05. 포항

AGFA ISOLETTE II / KODAK TMY / EPSON 3200

Canon의 컴팩트 RF카메라 Canonet GIII QL17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방학 동안 토익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내가 끼고 살던 책이 있었으니 이 바닥에서 바이블이라 통하던 '바바라 런던의 사진'이었다. 알던 내용도 다시 보고 존 시스템처럼 단박에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은 몇번이고 다시 읽으며 독파해나갔다. 이 책의 모든 것을 방학 기간동안 마스터하리라는 욕심이 들던 때였다.


그런데 늘 그렇듯 환자들의 생리란 뻔해서 존 시스템 보다는 카메라의 종류를 언급한 부분에서 보았던 레인지 파인더 방식의 카메라가 느닷없이 궁금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친구분의 라이카 M6를 만져본 적이야 있었지만 내가 직접 써본게 아니니 그 찰나의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못했다. 뭐라도 하나는 써봐야 느낄거 아닌가. 학기 중이었다면 곧바로 남대문으로 달려갔겠지만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와있는 와중이었으므로 그럴 수도 없다. 물론 가봐야 헐벗고 굶주리고 다니던 내 형편에 살 수 있는 물건도 없겠지만.


그러고보니 지역에 '나름' 인지도 있는 카메라 가게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거기나 한번 가보자.' 별 기대는 안했지만 심심하기도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가게에 들어서니 마침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사장님과 열심히 장비 얘기 중이다. 들고 있는 카메라는 당시 캐논의 대히트작 EOS-5의 한단계 아래 보급기였던 EOS-55였다.


'아 이번에 내가 백두산에 가서 천지를 좀 찍으려고 해서.. 이거 갖고 찍을 수 있겠는교?'


번들처럼 흔하디 흔하던 캐논 EF28-105 줌렌즈를 들어 보이며 그 분은 사장님께 질문했다. 장사하는 사람한테 저렇게 물어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사장님이 썰을 풀어댄다.


'아이고 선생님, 이번에는 작품 제대로 찍으러 가시나보네요. 이 렌즈도 나쁘지 않은데 천지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28미리로는 이게 다 안들어와요. 워낙에 넓으니까. 이걸로는 좀 그렇고 이거 함 보이소. 이거 갖고 가면 마 끝이지예.'


사장님은 꽤나 비싸던 EF20-35 F2.8L렌즈를 꺼내보였다.


'이거 하나믄 마 풍경은 끝입니다. 이거 빨간 줄 보이시지예? 이게 캐논서 제일 좋은 L렌즈 표시 아입니까? 선생님 정도 활동하셨으면 이제 렌즈도 좋은 거 하나 장만하셔야지요.'


'이기 비싸다 아이가. 너무 비싸가지고.. 좋기야 한데..'


'아따 선생님요. 28미리가꼬 천지 한방에 안들어와가 후회하고 다시 갈라캅니까? 그 돈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지예. 그리고 카메라야 나중에 바꿔도 렌즈는 평생쓰는거 아인교. 백두산까지 가시는데 맘 먹은 김에 좋은 걸로 사가서 찍으이소.'


'생각해보니 그거는 또 그렇네요. 그럼 그거 하나 주소. 그리고 삼각대는 내거 이걸로 가져가도 괜찮겠지요?'


'선생님 내가 장사할라고 하는게 아이고 솔직히 천지 올라가면 바람이 진짜 장난이 아입니데이. 이것도 뭐 카메라 올릴 수는 있지예. 근데 이래 약해가지곤 바람 불어가 휙 넘어가뿌면 비싼 카메라 렌즈 다 깨묵는다 아입니까? 삼각대는 알면 알수록 좋은걸 써야지. 초보들이야 뭐 아는교. 서이 가가 서이 사진 찍을 때나 세우는게 삼각대인줄 알지. 작가들 함 보소. 머할라고 그 사람들이 짓조 같은거 쓰겠는교. 삼각대도 하나 하소. 하는김에.'


적당히 띄워주고 협박(?)하고 회유하여 결국 사장님은 EF20-35 L렌즈와 짓조 삼각대와 많이 사셨으니 싸게 준다며 카메라 가방까지 하나 파실 수 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며 '아 나도 학교 때려치우고 카메라 장사나 해볼까.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한건 올린 사장님 기분이 좋을테니 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표정으로 아저씨가 가게를 나가고 나서야 사장님은 나에게 관심을 주신다.


'어 학생은 뭐 살라고?'


'그냥 구경 좀 하려구요.'


'뭐 찾는거 있나?'


'RF카메라 중고 뭐 없나 싶어서요.'


'젊은 사람들이 그런 것도 쓰나? 우리는 몇개 없는데 그런거.'


그런거 뿐 아니래도 지방 카메라 가게가 그렇듯이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그저 '눈 먼' 매물이 하나 없나 싶어 왔던 것인데 역시나 별게 없다. 그런데 쇼윈도 쪽에 먼지를 케케묵은 작은 RF카메라가 하나 눈에 띄었다. 바로 캐논 GIII QL17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것이 딱 봐도 사기 싫게 생겼었지만 가격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이거는 얼마예요? 파시는거예요?'


'이거? 이거를 뭐 얼마를 받아야되노..'


애초에 별 팔 생각이 없었던 물건이었던지 잠시 고민하시던 사장님은


'학생이니 내 싸게 줄게. 7만원!'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달 용돈이 20만원도 채 안되던 나에게 7만원은 나름 큰 돈이었다. 깎아야한다.


'에이 이거 먼지도 많고 상태도 그냥 그런데 5만원 해주세요.'


'5만원은 안되지~ 우리도 매입한 가격이 있는데.. 학생이니까 그럼 6만원.'


'아 5만원 해주세요. 어차피 이거 제가 안사가면 또 누가 사갈 것 같지도 않은데.'


나름 솔깃한 멘트였으리라.


'그럼 5만 5천원! 됐재? 더는 안된데이.'


이 정도면 OK!


'네 그럼 제가 살게요. 케이스랑 이런건 주시는거죠?'


당시만 해도 남대문에서 니콘 FM2 따위를 사면 서비스랍시며 노란 니콘 스트랩과 정품은 아니겠지만 레자로 된 케이스를 대부분 줬었기에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먼지 케케묵은 이 카메라에 맞는 케이스가 있으리라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의외로 새 것같은 레자 케이스가 있었고 사장님은 '학생이니까'를 자꾸 강조하며 그것도 끼워주셨다. 그렇게 나에게도 처음으로 RF카메라가 생긴 것이었다. 집에 와서 엄마 매니큐어 지우는 아세톤으로 구석구석 닦아주니 새것처럼 반짝였다.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일본의 카메라 제조사들은 이와 비슷한 컴팩트 RF 카메라들을 우후죽순 쏟아냈다. '가난한 자의 라이카'로 유명한 야시카 35GN부터 올림푸스 35시리즈, 미놀타의 하이매틱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35미리 전후의 붙박이 광각 단렌즈가 탑재되고 셔터스피드 우선AE 등의 자동노출이 가능해 사용이 간편했고 플라스틱이 본격적으로 공산품에 많이 사용되던 시절이 아니라 바디의 대부분이 금속으로 만들어져 나름 탄탄한 내구성을 자랑했다는 점이었다. 이 기종들은 80년대 들어 AF가 되는 본격 똑딱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중적인 카메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중에서도 캐논의 GIII QL17은 약 120만대나 팔려나갈 정도로 히트를 친 기종이다. 초반에는 일본에서 생산되나 후에는 대만에서 생산이 되었고 내것도 대만제였다. 중고가는 일본산이 조금 더 비싸다고 하나 롤라이35의 독일제냐 싱가폴제냐 정도의 갭은 아니다. 그 놈이 그 놈인 수준이다.


이 카메라의 최대 장점은 모델명 QL에서 알 수 있는 신기한 Quick Loading 방식이다. M4 이후의 라이카 M바디의 퀵로딩 스풀도 편하다지만 QL17은 그냥 자동카메라에 필름을 넣듯 빨간점까지 필름을 뽑아 뒷두껑을 닫아준 후 와인딩 레버를 감기만 하면 실패없이 로딩이 된다. 필름 넣기에 서툰 일반인들을 배려한 아주 편리한 방식이다. 이후에는 왜 이런 방식의 카메라가 나오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카메라에 캐논이 꽤 많은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시차보정이 되는 프레임 라인이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M형 라이카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장치를 보급형 카메라에서 구현 해줬다니 놀라운 일이다. 노출은 셔터스피드 우선 AE가 가능하고 반셔터를 누른채로 있으면 AE-LOCK도 가능하며 렌즈셔터 방식이라 소음도 진동도 아주 작으며 덕분에 전 셔터스피드 영역에서 플래쉬 동조가 가능하다. 셔터스피드 우선 AE 외에 매뉴얼로도 사용할 수 있고 이 때는 노출계가 OFF되는 대신 완전 기계식으로 작동된다. 나름 기계적 신뢰성도 갖춘 셈이다.


처음에는 제법 예쁘고 클래식컬한 모양 때문에 애지중지하며 자주 들고 다녔다. 하지만 결국 몇롤 찍지 않고 장식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결정적 이유는 4군 6매의 40mm f1.7 렌즈 성능의 한계 때문이었다. '가난한 자의 라이카' 부류에 속하는 카메라들에 대한 사람들의 후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한데 사실 '가성비'로 놓고 보면 부족하지 않은 기종들이지만 보급형이니 만치 그 한계는 명확했다. 이 녀석으로 찍은 필름을 확대기에 걸어놓고 보면 니콘 렌즈와 차이가 제법 났다. 선예도, 콘트라스트 모두 부족했고 역광에서도 강하지 못했다.




2001.01.04 안동, 자전거를 끌고오던 다정한 형제를 만났었다 / Kodak TMX




2001.01.05. 안동, 안동포 짜는 마을 / Kodak TMX




구입 초반을 제외하곤 별로 찍지도 않아서 예제 사진을 찾기가 좀 힘들었다. 그나마 쓸만한 것이 이 두 컷이 전부로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던 중 '야 우리 지금 안동 안갈래?' 라는 동기의 말에 무작정 청량리역으로 달려가 막차를 타고 내려갔던 안동에서 3일동안 돌아다니며 찍었던 사진들 중에서 골랐다. 그 이후로는 이 녀석을 제대로 써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렇게 별로 사랑받지 못하던 GIII QL17은 몇년이 지난 후, 군시절 절친했던 계원에게 선물로 주면서 내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싸구려 카메라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장의 사진때문이다.




2001. 1월 어느날, 대구 / Kodak TMX


할머니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찾아왔다가 돌아갈 때면 항상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개울가 바위 밑에 가셔서 누군가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셨다. 아마 돌아가는 길에 우리 가족 안전하게 잘 가라고 산신령이거나 누구에게 간절히 비셨을 것이다. 늘상 있었던 일이므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장면, 그 장면을 무심코 눌렀을 때 내 손에 있던 카메라가 바로 GIII QL17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후 우연히 옛 필름들을 들춰보다가 이 컷을 스캐너에 걸었다. 당시엔 확대 인화조차 하지 않았던 컷이었기에 어떻게 찍힌 건지 좀 궁금했다. 잠시 후 4000픽셀로 스캔된 이미지가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곧 그 이미지는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종종 걸음이 만들어낸 눈 밭의 발자국을 보며 한참을 눈물을 흘렸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간절했구나. 이 사진에서만큼은 해상도니 콘트라스트니 뭐니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 장면을 남겼음이 너무 소중했고 할머니가 건강히 살아 계실 때 왜 더 많은 사진을 남겨두지 못했나 하는 후회만이 가슴을 후볐다.


환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에게도 버릇, 혹은 목표란 것이 있다. 어떤 카메라나 렌즈를 새로 구입하게 되면 이것으로 일명 '일면'이라든지 '베스트갤러리'라든지로 대표되는 '걸작' 하나는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싼 돈을 주고 샀으니 본전 생각이 나는건 어쩔 수 없나보다. 사진으로 돈벌어 먹고 사는 프로가 아닌지라 나에게 본전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5만 5천원 주고 산 GIII QL17은 본전의 백배쯤은 남겨준건가? 아니 그런 물질적인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겠다. 이곳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라 어딘가에서 '일면'이나 '베갤'을 간 적도 없고 갈 사진도 아니겠지만 내게는 다시는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사진이다. 내 가슴에 와서 박힌 할머니의 모습을 아로새겨준 소중한 카메라로 기억되고 있는 카메라가 바로 GIII QL17이다.


사진 한장으로 기억되는 카메라라니. 녀석은 나의 장비 편력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로 남았다.















2016.10.08. 포항

Ricoh GR1s / Kodak 400TX / IVED


잘쓰고 있던 Nexus 5가 사망하시면서 결국 아이폰으로 넘어왔다. Nexus 5x의 뻘짓을 보고는 이제 구글 레퍼런스는 버리기로. 노트7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리로 갔을 가능성도 높았지만 폭망해버렸고 그렇다고 갤럭시나 다른 안드로이드 폰들은 통신사 어플이 덕지덕지.. 아 너무 싫었다. 결국은 깔끔하게 아이폰으로 전향했다. 




제일 핫하다는 128GB에 제트블랙인데 매장에 가니 마침 있어서 그냥 삼. 뭐 굳이 제트블랙에 환장하진 않았고 무난하게 매트블랙이나 살까 했는데 있다길래 이왕이면? 하는 심리로 샀음. 두번다시 보지 못할 깨끗한 뒷면. 이쁘긴 하다만..




어차피 의미없음.. ㄷㄷ 생폰으로 쓸 용기는 없기에 애플 정품 실리콘 케이스를 씌우고 나니 결국 매트 블랙이 됨 ㅋㅋ 케이스를 계속 씌우고 다녔는데도 뒷면엔 이미 살짝 기스 한 줄이 난 걸로 보아 약하긴 참 약한 듯. 2년 이상 잘 버텨주길.  



아빠가 되었다.


그동안 시장 바닥이나 낡은 포구, 재개발 지역 등지를 돌아다니며 거실에도 걸어두지 못할 '쓸데없는' 사진이나 찍어오던 사진질은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유행하는 말로 '뭣이 중한디?!'였다. 아빠 사진가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결국 딸냄의 성장 기록을 남기는 일이 아닌가. 아빠가 되면서 사진 생활의 주제가 아주 단순 명확해졌다.


 


 


실내에서 최적일 것


자, 그렇다면 육아 사진은 무엇으로 찍어야할까? 지금 생각해도 좀 어이없지만 '어떻게' 찍을 것인가 보다 당장 '무슨 카메라로' 찍을지가 가장 큰 고민으로 다가왔다. (마땅치 않으면 이 기회에 하나 더 사는거다..) 하지만 이미 육아 사진을 핑계로 삼아 Nikon D700에 꽂을 SB-700과 AF 35mm f2.0D를 들인지라 카메라를 또 사기엔 명분이 서질 않았다. 책장 위에서 몇년째 놀고 있는 카메라가 한두개가 아닌데 저 중에 육아 사진을 찍을만한 카메라가 한 대도 없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통할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 있는 걸로 찍자.'

새 카메라에 대한 욕심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이 중요한 임무에 투입할 최적의 무기가 무엇일지 검토해보기로 했다. 육아 사진이니 당분간은 대부분 실내에서만 촬영이 이뤄질 것이다. 당연히 이 작업에 투입될 카메라의 작전 요구 성능의 기본은 '실내 촬영에 최적일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밝은 개방값과 저진동 저소음, 실내에서 빠른 포커싱, 가벼운 무게 등을 필요 조건으로 들 수 있겠다.


이 기준에 의거 갖고 있던 카메라들을 하나하나 따져봤다. 제일 먼저 SLR들이 전원 탈락헸다. 그렇잖아도 셔터스피드 확보가 어려운 실내인데 블러를 유발할 '철푸덕!'은 안될 말이었다. 반면 RF기종들이라면 이 부분에서는 유리하겠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CONTAX IIa나 LEICA M3 같은 기종들은 노출계도 없고 움직이는 딸냄이에 재빨리 포커싱하기가 쉽지않아 아무래도 셔터 찬스를 놓칠 일이 많을 것 같다.(RF는 역시 조여서 찍을 때 진정한 매력이..) 결국 얘들도 일단 보류. 똑딱이 CONTAX T3는 크기도 작고 렌즈 성능도 좋고 AF도 되니 다 좋았는데 최대개방값이 2.8로서 다소 어두운데다 결정적으로 저속 셔터스피드가 정확히 얼마인지 표시가 안되어 실내에선 불안하기 그지 없다. 1/15초인지 1/4초인지 알아야 조심을 하는데..  결국 얘도 탈락했다.


 


 


Konica Hexar AF


이것저것 빠지고 나니 남은 것이 몇년동안 쓰지도 않고 쳐박아 둔 HEXAR AF였다.

Konica에서 내놓은 이 카메라의 가장 큰 특장점으로는 구동 소음을 최소화한 '사일런트 모드'와 우수한 성능의 35mm 렌즈를 들 수 있었다. 모터 와인딩 소음의 억제에 많은 공을 기울인 '사일런트 모드'는 당시의 대다수 자동 카메라들에 비해 상당히 조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동식 RF카메라들에 비할 바는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의미를 높게 두진 않는 편이다.

하지만 섬세한 묘사력과 현대적이고 깔끔한 콘트라스트를 보여주는 렌즈의 성능 만큼은 정말 훌륭하여 예전부터 사진가들 사이에서 '주미크론'에 필적한다는 소문이 회자될 정도였다. 이 같은 호평에 힘입어 코시나에서는 이 렌즈를 스크류 마운트로 별도 제작하여 한정 발매되기도 했다.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로 한정 발매되었던 UC-HEXANON 35mm f2.0. 지인의 렌즈다.


반면 HEXAR AF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최고 셔터스피드가 1/250초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아니, 1/1000초도 대낮에 감도 400필름을 개방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판에 고작 1/250초라니... 주로 조리개를 조여서 찍는 편이라 사실 셔터스피드의 한계는 촬영시에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막상 들고 나갈 카메라를 고르는 순간 주저하게 만드는 심리적 부담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렌즈의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HEXAR AF는 그리 자주 사용되지 못하고 집에서 오랜 세월 놀고만 있던 중이었다.

그렇지만 주로 실내에서만 사진을 찍는 용도라면?

그랬다! 실내에서만 찍는다면 녀석의 치명적인 셔터스피드의 한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 않은가. 감도 400짜리 필름을 넣어도 1/60초를 넘기는 경우조차 거의 없으니 말이다. AF의 정확도도 우수하고 속도도 빠른 편이라 셔터 찬스를 잡기에도 용이하며, 렌즈 교환식 RF기종들에 비해 최단거리도 조금 더 짧은데다(0.6m) 파인더 내의 프레임 라인은 시차 보정도 거리에 연동해 이루어지니 좁은 공간에서도 활용도가 높다. 구동 소음을 최대한 억제한 사일런트 모드는 딸냄이가 자고 있는 모습을 살짝 찍기에도 부담이 적다. 게다가 데이터백도 기본으로 달려있어 기념할 만한 날에는 날짜를 찍어줄 수도 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육아 사진에 최적의 카메라가 아닌가?!



7개월이나 된 후에야 필름으로 사진을 담기시작했음이 후회스럽다. / Ilford Delta 400




쿠션을 좋아하는 딸냄 / Ilford Delta 400




청송 외가집에서 / Ilford Delta 400




엄마보다 먼저 일어난 아침 /  Ilford Delta 400




꽤 늦게까지 떼지 못했던 쪽쪽이 / Ilford HP5+400




걸음마 연습 중 / Kodak TMY




돌사진 찍으러 간 스튜디오에서 / Kodak TMY




아빠랑 같이 찍은 사진은 이런 것 뿐이다 / Ilford Delta 400




바나나 먹으며 신난 딸냄 / Ilford HP5+400




할미랑 영상통화 / Ilford HP5+400




엄마 따라 톡톡톡 / Ilford HP5+400




하나 둘 찰칵! / Ilford Delta 400




자동카메라 하나를 줬더니 자기거라고 잘 들고 다닌다 / Ilford Delta 400




베개 위에서 장난치며 / Ilford Delta 400




목욕하고 나서 기분좋은 딸냄 / Ilford Delta 400



4-5년간 멈췄던 필름 사진질을 다시 시작한 건 딸냄의 성장 과정을 조금은 더 '의미있는 수단'으로 기록해주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렇게 한정적인 용도에서만 조금씩 '아껴가며' 필름을 쓰겠다는 다짐과 달리 다시 시장 바닥이나 찍고 돌아다니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중요한 주제는 가족의 일상을 담아내는 개인적이고도 소박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HEXAR AF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메라는 아니겠지만 가장 고맙고 기특한 카메라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이 카메라가 없었다면 딸냄의 성장 과정을 편안하게 기록할 카메라를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었을 지 선뜻 떠오르지가 않는다.


오늘날 HEXAR AF는 중고가 기준으로 50만원 내외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끝내주는 헥사논 35미리 렌즈의 성능을 놓고 보면 사실 렌즈를 사면 바디는 그냥 따라오는 격이나 마찬가지. 주머니 사정 가벼운 아빠 사진가들이 가족의 일상을 촬영하는데 이만한 카메라가 또 있을까. 작은 문제를 탓하며 팔아 치워 버리지 않았음이 새삼 다행스럽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세상 모든 것에도 길고 짧음이 존재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잣대로 그 길고 짧음을 따져보며 인생의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방향을 결정한다. 99%가 맘에 들어도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1%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못난 모습이 내 눈에는 보기 싫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덮고도 남을 정도의 매력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줏대있는' 결정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크게만 보였던 단점이 더이상  밉지 않자 너무나 예쁘게만 보이는 HEXAR AF














2016.10.03. 포항

Ricoh GR1s / Kodak 400TX / IVED






2016.11.24. 경주

iPhone 7



2016.10.03.

동네 편의점에서 밤마실 중이면 자주 마주치는 녀석

Ricoh GR1s / Kodak 400TX / IVED


2016.11.20. 부산

iPhone 7


"아, 이 집 맛집인가 보네요? 오리지날이네."

칼국수 한 젓가락을 후루룩 입 안에 넣은 그가 뱉은 한 마디에 조금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린다. 제법 따스해지던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회사에 가봐야 한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와 회사 근처에선 그런대로 맛이 괜찮은 칼국수 집에서 마주 앉았다. 그와는 오늘이 첫 만남이다. 

길게는 10년 이상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고 부러 만남을 가질 기회도 없었고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만남은 아주 작은 것에서 이루어지는 법. Nikon F3용 웨이스트레벨 파인더인 DW-3를 구하신다는 P형의 글을 보고 내가 가지고 있는 DW-3를 빌려(?)드리기로 했던 것이었다. (가격 태그까지 있는 신동품이었다!) 우리 환자들에겐, 아니 남자들에겐 서로 만나보고 싶었다는 말은 차마 쑥스러운 것이다. 이럴 때 장비질은 참 좋은 핑계 거리가 된다. 




DW-3를 꽂은 Nikon F3를 들고 있는 P형


웨이스트레벨 파인더 따위야 그런 핑계에 불과했다는 듯 사진 이야기, 카메라 이야기, 오디오 이야기 등등 두서없는 잡설을 나누다 보니 국수 그릇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초면의 남자 둘이서 칼국수 한 그릇 달랑 먹은 것 치고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일행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파전이라도 한 접시 같이 대접했을 것인데 고작 둘 뿐이라 그러지 못한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 정도가 딱 좋다. 배가 너무 부르면 사진 찍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늘 그와 같이 둘러볼 곳은 경주에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흔적으로 정했다. 경주라면 그도 수없이 다녀왔을 터, 황룡사지나 분황사, 남산 곳곳의 불상과 탑들을 굳이 다시 돌아다닐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물론 언제 가도 좋은 곳들이다.) '경주는 신라'라는 뻔한 공식에 대입하여 다니기 보다 그와는 좀 '학구적'으로 색다른 곳으로 다녀보기로 했다. 




첫번째로 들른 곳. 경주경찰서 맞은 편에 있는 '화랑수련원'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근대 건축물의 느낌이 물씬나는 이 곳은 일제 시대 당시에는 '야마구치 병원'이었던 건물이다. 일제 시대 당시의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도 한번쯤 찾아볼만한 곳이긴 하지만 이 병원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이야기가 곁들여져야 더 의미있는 발걸음이 된다.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이른바 '얼굴무늬 수막새'


1932년 경주 영묘사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 수막새는 경주의 골동품상 구리하라에게 넘어갔고 이를 경주에서 공익의사로 근무하던 '다나카 다카노부'가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일하던 오사카 긴타로가 이를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1932년 06월호에 아래와 같이 소개하게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자의 웃는 얼굴을 조각한 회백색 기와…신라 와당 중에서도 아직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섬세한 문양이 특히 이색적" 

그 후 1940년 다나카씨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수막새도 일본으로 가져가 우리는 다시는 이 수막새를 볼 수 없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수막새를 기억하고 있던 박일훈 경주박물관장은 반드시 이를 되찾고 싶어했고 수막새를 처음 소개했던 오사카 긴타로에 연락하여 수막새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여전히 다나카씨가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돌려받기 위해 박일훈 관장은 서신으로 연락하며 간곡히 부탁을 했고 오사카 긴타로 역시 다나카씨를 설득하여 결국 1972년 다나카씨가 방한하여 기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다나카씨가 근무하던 곳이 바로 위 사진의 야마구치 병원이었다.

일견 훈훈한 일화이기도 하나 곱씹어 볼 수록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제시대 동안 한국의 골동품 수집에 혈안이 된 일본인들 때문에 전국의 고분들은 철저하게 도굴되었으며 이 때부터 골동품은 돈되는 물건으로 인식이 되어 해방 후에도 이 같은 도굴은 끊이지 않게 된다. 이 기간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사의 조각이 얼마나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렇게 돌아온 수막새보다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일본식 사찰 '구) 서경사'에 왔다. 교토도 아닌 경주 한복판에 이런 건물이 남아있다니 무척 신기하다. 전국 각지에 있던 신사는 당연하고 일본 불교 사찰건물들도 대부분 사라져 현재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 귀한 구경에 속한다. 여담으로 현재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으로는 군산의 동국사가 가장 유명한데 동국사 역시 김영삼 정권 시절 조선총독부 폭파쇼처럼 사라질 뻔 했으나 결국 보전하기로 하여 거의 원형 그대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세번째 들른 곳은 경주문화원. 조선총독부 경주 분관으로도 쓰였고 현재의 국립 경주박물관이 개관되기전까지 박물관으로도 쓰였던 곳이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이 새로 건축된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걸렸있던 종각 도 위치하고 있다. 




논어의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에서 따온 '온고각'이란 건물의 현판이다. 이 곳에 온 이유는 바로 이것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 현판의 글씨를 쓴 자가 바로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다. 그가 1915년에 경주에 방문했을 때 기념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군인 출신인 초대 총독으로 가혹적인 탄압 정치를 펼쳐 악명이 높은 그이지만 그럴수록 그가 휘갈긴 글씨를 한번 보고는 싶었다. 의도적인지 모르겠으나 현판은 번듯하게 벽에 걸어주지 않고 바닥에 내려서 대충 기대어 두었는데 보존은 하되 적당히 하대해 주고 있는 듯해 보여 기분이 흡족했다. 그래도 현판에 대한 설명문과 함께 보이지 않는 뒷면의 사진을 벽에 걸려두어 관람객에 대한 배려는 충분히 해주고 있었다. 




경주의 옛 사진들을 설명해주고 계신 해설사분. 카메라를 든 수상한 두 사내의 관등성명을 무척 확인하고 싶으셨는지 '어디서 왔느냐, 뭐하는 분들이냐' 계속 물어보셨지만 뭐라고 딱히 답할 말이 없어 그저 '재미로 사진찍고 공부하고 구경다니고 그럽니다' 라고 대답했다.

 



여기는 일제 당시의 흔적은 아니지만 일본과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은 집경전 터다. 집경전이라 함은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시던 곳으로 조선 왕조 내내 가장 신성한 곳 중의 하나였다. 경주로 출장을 온 조정의 관료들은 아침마다 이 곳에 들러 배례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홀랑 타버린 후 일제시대에는 그 터 마저 밀리고 어진을 걸어두던 석조 건축물만이 달랑 남아 이처럼 주택가 구석에 쳐박히게 되었다. 




저 안에 어진을 걸어두었던 것. 화재 예방의 목적으로 저렇게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고는 하는데 국내에 저런 형태의 석조 건축물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주 원시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단순한 형태의 구조물이라 무척 특이하여 어떤 의미가 담긴 형태인지 궁금하나 짧은 지식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여담으로 조선 왕조 역대 임금의 어진은 태조부터 모두 다 근래까지 잘 보관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종묘에 보관 중이던 어진들은 서울이 함락되면서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는데 서울이 수복되고 나자 다시 서울로 옮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가기 바로 직전 어느날 밤, 창고에 화재가 발생했고 몇 점을 제외하고 모두 홀랑 불타버렸던 것이다. 화마속에서 겨우 건져낸 것은 영조와 철종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정말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진은 일제시대에도 감히 무엄하게 사진으로도 찍어두질 못해서 이 화재로 우리는 영영 세종대왕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어진이 남았다면 오늘 날 우리 만원짜리에는 인자한 모습의 세종대왕이 아니라 쳐진 눈에 디룩디룩 살찐 세종대왕의 리얼한 얼굴이 그려져 있을 수도.. 안타깝기 짝이 없는 어진의 소실이지만 그것 또한 하늘이 정한 바, 조선의 운명이고 업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만으로 35년이 조금 안되는 기간 동안 이 땅을 지배했던 일제의 흔적은 이제는 막상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도처에 세워졌던 그들의 신사는 패망 후 그들이 먼저 불살랐고, 우리 역시 그런 것들은 당연히 깨어 부수었다. 거기에 뒤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은 일제 당시의 흔적을 갈아엎어 버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개발로 또 사라져 갔던 것이다. 무언가 귀해지려면 희소해야 한다. 일제의 흔적을 귀한 것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찾아보기 어려워진 오늘날에는 남아있는 당시의 흔적을 찾아봄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만 일제의 흔적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남아있으며 이는 그런 면에서 우리의 언어, 생활, 문화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일제의 잔재와도 비슷하다.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눈에 띄지 않고 자각하기 어렵다. 





곧 5월이라 날씨가 제법 더웠다. 오늘의 답사는 마치기로 하고 근처의 까페에 들어섰다. 주말이지만 손님은 우리 둘 뿐이다. 테이블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보니 오늘의 만남이 원래는 F3용 웨이스트 레벨 파인더 때문이었음이 다시 한번 상기된다. 노안이라 힘드시다 하셨지만 심도 깊은 20미리를 꽂아 잘 써주시길...


유명한 명승 고적이 아닌 이처럼 볼품없고 소소한 유적을 찾아다닐 때 말동무가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P형과 함께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싸구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2016.04.30. 경주



 



2016.11.18.

iPhone7 + VSCO

















2016.11.15

iPhone 7
























무보정 샷들. 어차피 폰카를 많이 쓰지 않으니 크게 의미는 없지만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으로 이 정도 퀄리티로 찍을 수 있다는 건 참 편리한 일이긴 하다. 센서 크기의 물리적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f1.8이라는 최대개방값과 피사체와의 거리를 잘 조합하면 배경흐림 효과도 제법 낼 수 있다. 135 환산 28mm 정도의 화각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기도 하니 나름 쓸만한 듯. 그런데 왜 이렇게 저채도인거냐. 마치 니콘 EXPEED1 시절 D700으로 찍은 JPG보는 것 같네.





















2016.09.22 경주

Minolta AF-C / Kodak 400TX / IVED
















2016.09.19. 경주

Minolta AF-C / Kodak 400TX / IVED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7만원에 산 카메라가 이 정도 나와주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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