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화 유산에 대한 개인적 흥미로 인해 오랜 모습을 간직한 곳을 방문하기를 즐긴다. 물론 우리에게 ‘근대’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무척 혼란스럽다. 새로운 기술과 가치관이 쏟아지던 ‘모던’의 향수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대상 탓에 근대 문화 유산을 사진에 담는 작업은 그래서 또 곤혹스럽고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아직 정리할만한 사진도, 자료도 또 그럴만큼 많은 작업을 하지도 못했지만 지난 출장 길에 들렀던 대전의 옛 충남도청 사진들을 올려본다.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에 위치한 옛 충남도청 건물. 1932년에 지어져 2012년까지 도청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내포 신도시로 도청이 이전한 이후 현재는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에는 2층으로 건설되었으나 해방 후 3층을 추가로 얹었다. 당당하게 자리잡은 건물은 현재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과 일직선으로 이어져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에 들어선 일제의 통치시설 답게 권위적이고 위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런 이 건물에서 권위를 느껴야하는 것 또한 우리 근대사의 아픔일 수 밖에 없다.





1층 복도의 모습. 샹들리에 조명 위와 바닥에 별 문양이 보인다. 이 별 문양은 건물 벽면을 비롯한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데 조선총독부에 있는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한 때 논란이 되었다고 하는데 ‘큰 의미’는 없는 것으로 밝혀져 지금껏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진짜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는 쪽국애들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추론해보자면 교통의 중심지 대전이니 나침반의 방위각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건물외벽에도 이처럼 별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사실 이런 문양은 우리에겐 그 개념이 없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이화(배꽃)문양도 사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거기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들이 많다. 사실상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해진 일본이 자신들의 지방 정부와 같은 정도로 격하하기 위해 문양 사용을 강요했다는 얘기부터 그렇지 않은 자주권의 발현이었다는 얘기까지 있지만 뭐가 맞든지 간에 힘없는 나라의 슬픈 역사는 달라지지 않는다.





80년이 넘은 건물이니만치 그동안 창틀 정도는 교체되었을 만도 한데 여전히 원형 그대로인 것으로 보였다. 오래 되었어도 튼튼하게 남아있는 교량이나 건물들을 보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하시던 얘기가 떠올랐다. ‘일본놈들이 말이야. 뭐니뭐니 해도 저런거 만들어 놓은거 보면…’





2층으로 올라가보기로 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은 반들거렸고 넓은 채광창은 별다른 장식조차 없이 단조로워 사무공간다운 딱딱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계단을 오르다 뒤돌아서 입구로 누군가 들어오길 기다려봤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던 차에 그나마 한 분이 나타나셔서 셔터를 눌렀다.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온지라 전시관 문도 열리지 않았고 찾는 이도 없었다.





사람이 너무 없다보니;;





2층에 오르면 한 가운데 도지사 집무실이 있다. 개방되어 실내를 구경할 수 있지만 역시 너무 이른 시간이 문이 닫혀 있었다. 결국 도지사 집무실을 등지고 한 컷.





도청 바로 옆에는 충남지방경찰청 옛 건물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해방 후의 건물이지만 일제 당시에도 도청 바로 옆에 경찰서 건물이 자리하여 행정과 치안의 핵심이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상무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곳은 일제 당시 일본 경찰들이 유도 등 무예를 수련하고 신체를 단련하던 ‘무덕전’이라는 일본식 건물이 있던 자리로 해방 후 원래 건물은 소실되고 1963년에 그 기초를 이용해 다시 지어진 것이다.



광주에 있던 무덕전.  1967년에 철거되던 모습이다.



일제는 이처럼 각 지방 경찰서에 무덕전이라는 건물을 지어 경찰들이 유도를 수련하게 했는데 軍도 아닌 경찰에서 ‘武’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 것만 봐도 그들의 통치, 치안 철학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보니 해방 후에 새로 지어진 이 건물의 이름도 ‘상무관’이다. 일제가 남긴 것은 소나무의 상채기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오는 바람에 전시관을 보지 못해 얻을 수 있었던 정보와 자료를 접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언젠가 다시 방문할 일이 있기를 기대하며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017.04.15. 대전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Ilford HP5+ 400 / IVED


빛이 좋은 오후다.


간만에 미세먼지도 황사도 없어 하늘이 청명하다. 낮은 해가 만들어주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세상에 입체감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사진가들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황금 시간대, 이대로 사무실에 쳐박혀 있을 수는 없겠다. 단촐한 카메라 하나를 달랑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밥은 안먹어도 상관없다.




회사에서 차로 10분이면 올 수 있는 금척리. 경주와 건천을 동서로 잇는 도로 양편에 38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산재한 곳이다. 금척이란 금으로 만든 자를 말하는데 이 곳에 금척이 묻힌 무덤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금척리다. 금척리 고분군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는데.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당나라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적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척리 고분군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초판 1994., 개정판 23쇄 2012., 돌베개)




금척리로 가는 길. 오후 5시가 넘자 인근 농공단지 등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주민들이 띄엄띄엄 퇴근해서 오고 있었다. 평소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이 곳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낯선 이를 홀깃 쳐다 보셨다.




금척리 고분군은 도로를 따라 좌우로 나뉘어 있는데(정확히는 도로가 신라의 국립묘지를 감히 가로질러 난 셈) 북쪽보다 남쪽에 더 많은 고분들이 산재되어 있다. 1951년 도로 확장 공사당시 파괴된 상태의 고분 2기를 급한대로 발굴 조사를 했고 금귀고리와 곡옥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밝혀졌다. 




51년의 조사에 이어 76년에도 밭 사이에서 소고분들이 발견되어 발굴이 이루어졌고 81년에도 민가 보수 중 발견된 파괴된 소고분들을 발굴한 적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금척리 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대규모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알려진 부분은 많지 않다. 비교적 도굴이 힘든 돌무지덧널무덤이긴 하다만 유물들이 멀쩡히 잘 남아있길 바란다.




공원으로 깔끔히 조성된 대릉원 쪽과 달리 금척리 고분군은 주변 정리 정도만 해둔 상태로 유지되고 있어 태고의 신비와 같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신라 고분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외국인이 이 사진을 본다면 아주 특이한 지형을 찍은 것이라고만 생각할 것 같다. 얼핏 제주의 오름을 찍은 것 처럼도 보이고. 




황남대총 같은 대릉원 쪽 고분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오늘날 고만고만한 촌동네에 불과한 이 곳에 당시에는 어떤 강성한 세력이 자리했었기에 이토록 많은 고분들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문헌 자료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우리나라 고대사의 한계로 인해 풀리지 않는 비밀은 너무나 많은데 신라 지배층의 정체에 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금 부장품이 유독 많고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일대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무덤의 형식으로 인해 4-5세기 신라의 지배층은 스키타이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계가 한반도까지 남하한 무리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 일대가 정비되기 전에는 분명 무너져내린 봉토 사이사이에 민가와 밭들이 들어차 있고 겨울이면 동네 꼬마들이 고분 위에서 눈썰매를 타곤 했겠지만(아마 지금도?) 지금은 중간중간 멋지게 서있는 나무들 말고는 넓은 풀밭으로 정리되어 있다. 고도제한으로 인해 높은 건물이 적은 경주이긴 하지만 경주의 서쪽 변경 건천에서 만나는 넓은 하늘은 답답한 가슴을 제법 시원하게 뚫어준다. 오늘처럼 청명한 날씨라면 더할 나위없다.




주인 모를 고분에 세들어 살고 있는 묘도 있다. 사적으로 지정된 이곳에 제단석까지 놓인 묘가 쓰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적 지정 전부터 있던 묘라면 이해가 간다. 천년이 넘는 세월의 간격이 있겠지만 같은 공간을 나눠쓰며 또 천년을 갈 것이다. 




필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셨다. 늘상 듣게 되는 '뭐 찍는교? 어디서 나왔는교?' 따위의 질문을 예상했으나 잠시 쳐다보시곤 갈 길을 가셨다. 자전거 바퀴가 구르기도 힘든 풀밭에 왜 들어오셨나 했더니 바로 옆 대밭에서 가는 대나무 몇 그루를 잘라 가셨다. 




이 회사를 다닌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이 곳을 카메라에 담다니. 역시 가까운 곳은 언제나 홀대하기 마련인가. 해가 짧아지면 5시부터인 저녁시간에 나와서 이 곳을 찍기도 버거워 질테니 틈나는 대로 소소하게 담아봐야겠다.






2017.04.12. 경주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Ilford HP5+ 400 / IVED







눈을 떠보니 7시가 거의 다 되었다. 늦었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포항의 동남쪽 장기면에 위치한 장기읍성에 가보기로 맘을 먹었었다. 그리고 이왕 가는거 늦어도 6시에는 집을 나서 성 위에서 동해의 일출을 보고 싶었는데 이미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어차피 일출 촬영은 물 건너 갔음에도 괜시리 마음이 급하다. 씻지도 않고 카메라를 부랴부랴 챙겨 차에 올랐다. 동녘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약 30분을 달려 장기읍성 바로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다. 뒤편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장기읍성의 성곽이다. 이 곳은 오늘로 세번째 찾는 곳이지만 제대로 답사기를 써보고자 마음 먹고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전신주에 있는 장기면의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이 곳 특산품인 산딸기와 더불어 오늘 둘러볼 장기읍성을 모델로 하고 있다.




옛 지도에 나타난 장기읍성의 모습. 성안에는 객사를 비롯한 동헌 건물이 있었으며 보통의 4개와 달리 하나가 적은 총 3개의 문이 있었다. (지도에는 2개만 그려져있음) 남문이 가장 크고 중요한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지형의 특성상 동문이 가장 중요했으며 지금도 동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성내에 옮겨져 있는 장기향교가 과거에는 성밖에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동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간다. 최근 몇년간 장기읍성 성곽의 복원 정비가 많이 진행 되었음에도 동문은 여전히 허물어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정감이 간다.




동문에서 부터 서쪽으로 이어진 성벽을 따라 성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성곽의 둘레는 2,980척(약 1,392m)이었다고 하니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고려 현종 2년(1101년)에 북쪽의 여진족과 동쪽의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흙으로 처음 쌓았고 이후 세종 21년(1439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사적 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에 보이는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간은 최근에 복원 정비된 것이다.




동해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장기읍성은 여전히 복원 및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고구려 성곽에서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성의 특징 중 하나인 '치'. 치는 성벽을 오르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방어 시설로서 치와 치의 간격은 활의 사정거리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요동성을 공격하던 당나라군이 아무것도 모르고 성벽을 기어오르다 양쪽의 치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무참히 당하면서 크게 놀랐음이 '구당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고구려 군에게 약오르게 당한 이후 '치(雉)에서 활을 쏘았음(射)'이 오늘날 '치사하다'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읭?) 어디가서 얘기하고 창피당해도 저를 탓하지 마시길.




파란 하늘과 붉은 깃발의 보색대비. 나무 위에 앉은 까치 암수 한쌍이 정겨웠다.




저 아래 장기면의 들판과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인다. 




동남쪽 성벽 아래 양지 바른 텃밭이 꽤 좋아 보인다. 아침 일찍부터 주민 한 분이 밭일을 시작하고 계셨다. 오늘은 서리도 내리지 않고 제법 따스한 아침이다.




12월임에도 아직 지지 않은 구절초를 만났다. 흐릿하게 뒤에 보이는 것은 남문의 옹성이다.




이와 같이 반월 형태로 둘러진 옹성은 성문을 파괴하려는 공성화기로부터 문을 보호하고 문앞에 돌입한 적을 포위 협살하기 위한 방어 시설이다. 동대문에서 볼 수 있는 그것과 같다. 남문의 옹성은 최근에 복원한 티가 많이 나는 다른 구간에 비해 비교적 원형의 모습이 잘 남아있는 곳이다.




옹성 내부에는 좌우로 길을 막아선 대전차 방호벽 같은 구조물이 있는데 짧은 지식으론 저것이 어떤 용도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옹성의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옹성 내부에서 바깥 쪽을 바라본 모습




남문을 지나니 성벽이 끊어져 마을안을 통해 돌아서 다시 성벽 쪽에 이르렀다.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옛 성벽(왼쪽)과 복원된 성벽(오른쪽)의 차이가 극명히 보인다.




아직 정비되지 않은 옛 성곽의 모습이 궁금해 뒷편 비탈진 경사로 내려가 보았다.



 

복원 정비 하기 전에 장기읍성은 대체로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무너져내린 성곽의 흔적이 안타깝다. 한양도성이나 수원화성처럼 국가적으로 구축된 견고한 성곽이 아닌 장기읍성과 같은 이런 지방 읍성의 경우 양질의 석재와 치밀한 건축기법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낮아 장기간 방치되었을 경우 이처럼 쉽게 무너지고 훼손되었을 것이다.




최근에 복원된 북문이 말끔하다. 이 곳은 실제 정서쪽 방향이지만 북문이라고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 지도에도 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실제 방위와는 상관없이 성의 정문으로 쓰이는 곳을 남문이라 칭하고 그 반대편을 북문이라 하여서 그런 것인가 싶다가도 동쪽으로 향한 정문은 또 그대로 동문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북문의 옹성에 문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북문 안쪽은 주민들의 주차장으로 쓰일만큼 제법 너른 공터가 있었다. 장기읍성의 모든 문은 개거식 구조로 별도의 지붕이 없이 문으로서 트여진 성벽 위에 문루가 바로 올라간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다. 변방의 작은 읍성이다 보니 건축기법상 전문성이 필요하고 비용이 더 올라갈 홍예문은 생략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문을 지나 다시 복원된 성벽이 이어진다. 이 사진에서 잘 드러나듯이 장기읍성은 산위에 지어진 읍성으로서 그 사례가 매우 드문 편에 속한다. 순천 낙안읍성과 서산 해미읍성을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읍성 유적은 거의 없는데 대부분의 읍성들이 평지에 있었던 것에 반해 산 위에 위치한 장기읍성은 왜구의 접근을 관측하고 유사시 수성전(守城戰)에도 유리한 지형적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동서로 긴 마름모 형태의 장기읍성 북쪽 성곽은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경사가 제법 급하다.




갑자기 성곽이 끊어지고 험한 내리막길을 만나 당황스러웠다. 복원을 하려면 다 하지 이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성곽이 끊어진데는 이유가 있었다. 작은 개울이 있었던 것. 장기읍성에 하나 있었다는 수구(水口)가 이 곳이었을 듯 싶다. 이런 작은 개울에는 요즘 보기드문 가재가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돌 몇개를 들춰봤을 수도 있었겠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길도 없는 수구를 지나서 다시 이어진 성곽으로 기어 올랐다.







처음 들어왔던 동문까지 거의 다 내려왔다. 




정비되지 않은채 무너져있는 그대로인 동문터. 겉에서 보이지도 않는 북문은 번듯하게 복원해놓고 장기읍성을 찾으면 제일 먼저 들어서게 되는 동문을 이렇게 방치해둔 것이 처음에는 좀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니 여전히 주민들이 드나드는 통로인 이곳을 복원 한답시고 공사기간 내내 통행에 불편을 겪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나 싶었다. 그리고 제대로 복원하려면 옹성을 둘러야할텐데 그렇게 했을 땐 차량 통행이 너무 어려울테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겠다. 어쨌든 비록 허물어지긴 했어도 장기읍성의 동문은 여전히 주민들이 드나들고 있으니 현재까지 '문'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성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동문 옆에 있는 '배일대(拜日臺)'. 완벽한 역광이라 새겨진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음이 아쉽다. 동해를 내려다 보는 이 곳은 과거부터 해맞이를 하던 장소로 정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장기향교. 글 서두에 첨부해둔 지도에서 보듯 원래는 성 아래에 있던 것인데 지금은 성안에 있다. 반대로 장기현 동헌 건물은 성안에 있던 것이 1922년 성 아래로 옮겨졌다. 




장기향교의 문은 찾을 때 마다 잠겨 있어서 한번도 내부로 들어가보지 못했다.




장기읍성 내부에는 향교 뿐 아니라 여전히 민가가 여럿 남아 성읍마을을 이루고 있다. 물론 여느 시골 마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빈집도 많지만 관광지로서만 존재하는 다른 읍성들과 달리 살아있는 공간으로 남아있음이 인상적이다.


















유럽으로 여행간 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고색창연한 중세 고성(古城)을 보고나서 그 멋스러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비단 건축 양식 자체가 다른 유럽의 성들이 아니라도 같은 동양권인 일본의 성들,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의 경우만 봐도 넓고 깊은 해자와 높은 축대, 화려한 지붕과 아름다운 조경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는 조선통신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우리나라의 성곽들, 그나마 멋지게 지은 수원화성도 아닌 장기읍성과 같은 변방 바닷가의 작은 성을 보고나면 이건 차라리 중국 지방 귀족이 살던 저택 담장만도 못한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드는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읍성과 산성들은 귀족과 영주들이 자신의 위세를 뽐내기 위해 지은 화려한 저택이 아니었고 황제 못지 않게 호화롭고 사치로운 생활을 즐기던 그들만의 작은 궁궐도 아니었다. 궁핍한 재정과 부족한 노동력으로 높고 화려한 성벽을 쌓을 수는 없었지만 야트마한 야산일지라도 험한 산세에 의지하면 낮은 담으로도 적이 쉽게 넘지 못할 요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을 유린하기 위해 적이 몰려오면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성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어 싸웠다. 적을 피해 성안으로 도망 했지만 더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싸우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작은 읍성은 그래서 슬프고 또 절실한 공간이다.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청나라의 여진족은 청 멸망 후 100여년만에 만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사실상 멸족하고 말았다. 한 때는 내로라했던 거란족, 흉노족 등의 북방 유목민족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당의 변방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던 티벳은 중국의 일부로 복속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거대한 중화의 소용돌이 바로 옆에서 수천년 살아오면서도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살아 남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역사 이래 끊임없이 반복된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이런 볼품없고 작은 성에 의지하여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장기읍성과 같은 작은 성의 가치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매길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6.12.03. 포항

Ricoh GR

"아, 이 집 맛집인가 보네요? 오리지날이네."

칼국수 한 젓가락을 후루룩 입 안에 넣은 그가 뱉은 한 마디에 조금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린다. 제법 따스해지던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회사에 가봐야 한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와 회사 근처에선 그런대로 맛이 괜찮은 칼국수 집에서 마주 앉았다. 그와는 오늘이 첫 만남이다. 

길게는 10년 이상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고 부러 만남을 가질 기회도 없었고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만남은 아주 작은 것에서 이루어지는 법. Nikon F3용 웨이스트레벨 파인더인 DW-3를 구하신다는 P형의 글을 보고 내가 가지고 있는 DW-3를 빌려(?)드리기로 했던 것이었다. (가격 태그까지 있는 신동품이었다!) 우리 환자들에겐, 아니 남자들에겐 서로 만나보고 싶었다는 말은 차마 쑥스러운 것이다. 이럴 때 장비질은 참 좋은 핑계 거리가 된다. 




DW-3를 꽂은 Nikon F3를 들고 있는 P형


웨이스트레벨 파인더 따위야 그런 핑계에 불과했다는 듯 사진 이야기, 카메라 이야기, 오디오 이야기 등등 두서없는 잡설을 나누다 보니 국수 그릇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초면의 남자 둘이서 칼국수 한 그릇 달랑 먹은 것 치고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일행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파전이라도 한 접시 같이 대접했을 것인데 고작 둘 뿐이라 그러지 못한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 정도가 딱 좋다. 배가 너무 부르면 사진 찍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늘 그와 같이 둘러볼 곳은 경주에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흔적으로 정했다. 경주라면 그도 수없이 다녀왔을 터, 황룡사지나 분황사, 남산 곳곳의 불상과 탑들을 굳이 다시 돌아다닐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물론 언제 가도 좋은 곳들이다.) '경주는 신라'라는 뻔한 공식에 대입하여 다니기 보다 그와는 좀 '학구적'으로 색다른 곳으로 다녀보기로 했다. 




첫번째로 들른 곳. 경주경찰서 맞은 편에 있는 '화랑수련원'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근대 건축물의 느낌이 물씬나는 이 곳은 일제 시대 당시에는 '야마구치 병원'이었던 건물이다. 일제 시대 당시의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도 한번쯤 찾아볼만한 곳이긴 하지만 이 병원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이야기가 곁들여져야 더 의미있는 발걸음이 된다.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이른바 '얼굴무늬 수막새'


1932년 경주 영묘사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 수막새는 경주의 골동품상 구리하라에게 넘어갔고 이를 경주에서 공익의사로 근무하던 '다나카 다카노부'가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일하던 오사카 긴타로가 이를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1932년 06월호에 아래와 같이 소개하게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자의 웃는 얼굴을 조각한 회백색 기와…신라 와당 중에서도 아직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섬세한 문양이 특히 이색적" 

그 후 1940년 다나카씨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수막새도 일본으로 가져가 우리는 다시는 이 수막새를 볼 수 없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수막새를 기억하고 있던 박일훈 경주박물관장은 반드시 이를 되찾고 싶어했고 수막새를 처음 소개했던 오사카 긴타로에 연락하여 수막새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여전히 다나카씨가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돌려받기 위해 박일훈 관장은 서신으로 연락하며 간곡히 부탁을 했고 오사카 긴타로 역시 다나카씨를 설득하여 결국 1972년 다나카씨가 방한하여 기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다나카씨가 근무하던 곳이 바로 위 사진의 야마구치 병원이었다.

일견 훈훈한 일화이기도 하나 곱씹어 볼 수록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제시대 동안 한국의 골동품 수집에 혈안이 된 일본인들 때문에 전국의 고분들은 철저하게 도굴되었으며 이 때부터 골동품은 돈되는 물건으로 인식이 되어 해방 후에도 이 같은 도굴은 끊이지 않게 된다. 이 기간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사의 조각이 얼마나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렇게 돌아온 수막새보다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일본식 사찰 '구) 서경사'에 왔다. 교토도 아닌 경주 한복판에 이런 건물이 남아있다니 무척 신기하다. 전국 각지에 있던 신사는 당연하고 일본 불교 사찰건물들도 대부분 사라져 현재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 귀한 구경에 속한다. 여담으로 현재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으로는 군산의 동국사가 가장 유명한데 동국사 역시 김영삼 정권 시절 조선총독부 폭파쇼처럼 사라질 뻔 했으나 결국 보전하기로 하여 거의 원형 그대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세번째 들른 곳은 경주문화원. 조선총독부 경주 분관으로도 쓰였고 현재의 국립 경주박물관이 개관되기전까지 박물관으로도 쓰였던 곳이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이 새로 건축된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걸렸있던 종각 도 위치하고 있다. 




논어의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에서 따온 '온고각'이란 건물의 현판이다. 이 곳에 온 이유는 바로 이것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 현판의 글씨를 쓴 자가 바로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다. 그가 1915년에 경주에 방문했을 때 기념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군인 출신인 초대 총독으로 가혹적인 탄압 정치를 펼쳐 악명이 높은 그이지만 그럴수록 그가 휘갈긴 글씨를 한번 보고는 싶었다. 의도적인지 모르겠으나 현판은 번듯하게 벽에 걸어주지 않고 바닥에 내려서 대충 기대어 두었는데 보존은 하되 적당히 하대해 주고 있는 듯해 보여 기분이 흡족했다. 그래도 현판에 대한 설명문과 함께 보이지 않는 뒷면의 사진을 벽에 걸려두어 관람객에 대한 배려는 충분히 해주고 있었다. 




경주의 옛 사진들을 설명해주고 계신 해설사분. 카메라를 든 수상한 두 사내의 관등성명을 무척 확인하고 싶으셨는지 '어디서 왔느냐, 뭐하는 분들이냐' 계속 물어보셨지만 뭐라고 딱히 답할 말이 없어 그저 '재미로 사진찍고 공부하고 구경다니고 그럽니다' 라고 대답했다.

 



여기는 일제 당시의 흔적은 아니지만 일본과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은 집경전 터다. 집경전이라 함은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시던 곳으로 조선 왕조 내내 가장 신성한 곳 중의 하나였다. 경주로 출장을 온 조정의 관료들은 아침마다 이 곳에 들러 배례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홀랑 타버린 후 일제시대에는 그 터 마저 밀리고 어진을 걸어두던 석조 건축물만이 달랑 남아 이처럼 주택가 구석에 쳐박히게 되었다. 




저 안에 어진을 걸어두었던 것. 화재 예방의 목적으로 저렇게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고는 하는데 국내에 저런 형태의 석조 건축물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주 원시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단순한 형태의 구조물이라 무척 특이하여 어떤 의미가 담긴 형태인지 궁금하나 짧은 지식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여담으로 조선 왕조 역대 임금의 어진은 태조부터 모두 다 근래까지 잘 보관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종묘에 보관 중이던 어진들은 서울이 함락되면서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는데 서울이 수복되고 나자 다시 서울로 옮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가기 바로 직전 어느날 밤, 창고에 화재가 발생했고 몇 점을 제외하고 모두 홀랑 불타버렸던 것이다. 화마속에서 겨우 건져낸 것은 영조와 철종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정말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진은 일제시대에도 감히 무엄하게 사진으로도 찍어두질 못해서 이 화재로 우리는 영영 세종대왕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어진이 남았다면 오늘 날 우리 만원짜리에는 인자한 모습의 세종대왕이 아니라 쳐진 눈에 디룩디룩 살찐 세종대왕의 리얼한 얼굴이 그려져 있을 수도.. 안타깝기 짝이 없는 어진의 소실이지만 그것 또한 하늘이 정한 바, 조선의 운명이고 업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만으로 35년이 조금 안되는 기간 동안 이 땅을 지배했던 일제의 흔적은 이제는 막상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도처에 세워졌던 그들의 신사는 패망 후 그들이 먼저 불살랐고, 우리 역시 그런 것들은 당연히 깨어 부수었다. 거기에 뒤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은 일제 당시의 흔적을 갈아엎어 버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개발로 또 사라져 갔던 것이다. 무언가 귀해지려면 희소해야 한다. 일제의 흔적을 귀한 것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찾아보기 어려워진 오늘날에는 남아있는 당시의 흔적을 찾아봄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만 일제의 흔적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남아있으며 이는 그런 면에서 우리의 언어, 생활, 문화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일제의 잔재와도 비슷하다.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눈에 띄지 않고 자각하기 어렵다. 





곧 5월이라 날씨가 제법 더웠다. 오늘의 답사는 마치기로 하고 근처의 까페에 들어섰다. 주말이지만 손님은 우리 둘 뿐이다. 테이블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보니 오늘의 만남이 원래는 F3용 웨이스트 레벨 파인더 때문이었음이 다시 한번 상기된다. 노안이라 힘드시다 하셨지만 심도 깊은 20미리를 꽂아 잘 써주시길...


유명한 명승 고적이 아닌 이처럼 볼품없고 소소한 유적을 찾아다닐 때 말동무가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P형과 함께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싸구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2016.04.30. 경주



 


금요일 17시 칼퇴근을 감행했다. 아아.. 얼마 만인가. 


이대로 곧장 집으로 가기에는 아쉽다. 해가 아직 쨍쨍.. 가까운 곳의 마애불을 뵈러 가기로 맘 먹고 차를 돌렸다. 회사가 촌에 있다보니 이런 짓도 가능 (남들은 공연보러 가는데)








차를 세워두고 걸어가다 산 길에 접어들기 바로 전에 있는 어느 집의 대문. 꽃의 원색이 발랄하다. 







바로 여기를 온 것.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을 보러 왔다. 보물 122호.







산 길로 접어 들었다. 신록은 이미 지났지만 녹음이라고 부르긴 아직 옅고 여린 녹색의 싱그러움에 기분이 좋아진다.







초록초록하다.







퇴근하고 바로 왔으니 정장바지에 구둣발이지만 뭐 어떠랴. 눈누랄라. 세속의 번뇌는 이미 주차장에 던져두고 옴.







늦은 오후의 햇살은 소나무의 그림자를 땅 위에 길게 누이고.. 시상이 떠오른다 ㄷ



호젓한 산길을 걸어 마애불을 보러 가노니

산새 소리 지저귀고 산들바람에 풀냄새 실려오다

세속의 번뇌는 주차장에 던져버리고

손에는 욕심버린 작은 카메라 하나 쥐었으니

아아, 라이카가 무슨 필요랴.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았... 손에 든 GR만으로도 충분하니 라이카가 무슨 소용인가. 깨달음을 얻으며 한걸음 한걸음 ㄷㄷ







그리 길지 않은 길을 계속해서 올라가면







새끼 오리 같은 국자가 귀엽게 놓여진 약수터가 나온다. (노란 국자 안에 물 마시며 놀고 있는 나비 보이시는지?)







옆에는 작은 산신각이 하나 있다. 불교와 토속신앙의 하이브리드를 보여주는 우리나라 사찰의 특징.







정겨운 작은 돌다리를 건너서







계단을 오르면 작은 요사채가 있다. 이 곳의 마애불 보다 사실 내가 더 좋아하는 곳.







인기척도 없는 조용한 요사채의 모습. 아 여긴 참 예쁜 곳이란 말이지.







작은 동종도 걸려있고







요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멍때리고 싶어진다.







삼보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누구든 언제든 조용히 찾아왔다 돌아가도 되는 곳.







절 집 살림치곤 다소 투박스럽게 널려있던 수건들







왔으니 근심도 덜어냈다.







요사채 입구에 서있던 콘크리트 기둥에 소박한 솜씨로 새겨진 연꽃 그림. 이런 질감과 색감을 참 좋아라한다.







그리고 마애삼존불. 부처님 오랜만입니다. 10년만이네요. 여길 다시 온게.







아담한 규모의 이 곳은 서산 마애삼존불을 떠올리게 한다. 조각기법이나 세련됨은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그 곳에 비할바는 아니나, 이 곳에서라면 괜히 쓸데없이 마애불에 말도 건네고 자리에 앉아 먼산도 보고 가져온 책도 편한 자세로 읽어도 될 것 같다. 완벽한 조형미에서 오는 경건함과 엄숙함에 압도되는 석굴암과 달리 이런 곳이 경주 곳곳에는 산재되어 있다.







이 시간대에는 삼존불 쪽에 그늘이 져서 사진 찍기엔 그리 좋지는 않다만 그게 뭐 중요한가. 난 깨달음을 얻었거늘;







대신 내가 좋아하는 요사채는 이 시간이 제일 빛이 좋다. 특히 저 전깃줄에 달려있는 백열전구. 참 좋아함.







이제 왔던 길을 되돌아서 내려간다.







싱그러움이 가득한 숲을 벗어나기가 무척 아쉽다.







아아..







길 끝에 속세가 보인다. 버려둔 줄 알았던 번뇌가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2016.05.20 경주


대릉원의 동쪽에 위치한 경주 쪽샘지구. 4∼6세기에 걸쳐 조성된 삼국시대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으로 사적지구로 지정된 경주시 황오·황남·인왕동 일대에 해당하며, 총면적 38만 4,000㎡ 이다. 1960년대 이후 주택이 많이 들어서면서 고분의 훼손이 심해지자 2002년부터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680억 원을 들여 일대 민가 359가구와 사유지 등을 매입하고 2007년 3월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쪽샘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는 근래 들어 최대의 규모라고 할 수 있는데 2009년 6월 현재 적석목곽분과 목곽묘·석곽묘 등의 고분 150여 기가 확인되었고 3,000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사실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땅만 파면 뭐가 나온다는 것인데 천마총으로 유명한 대릉원 바로 옆인 쪽샘지구는 당연히 땅만 파면 뭔가가 쏟아질 것으로 대단한 기대를 모았던 곳이었으나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는 기대에 비해 다소 초라하다고 한다. (신라중장기병의 갑옷은 완벽한 세트로 출토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부분의 집들이 헐리고 없지만 아직 남아있는 집들도 있다. 아직 보상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떠나지 않은 집인지 철거를 기다리는 집인지는 모른다. 사진을 찍다보면 이야기보다 이미지에 치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건물의 잘린 단면이 왜 그렇게 색다르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폐가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이는 쓰레기더미들. 




대학교 시절 간혹 찾던 서울의 달동네 난곡에서도 봤던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긴 숫자들. 철거를 앞둔 집들이다. 문화재 발굴 때문에 정든 집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기 집 공사하다가 땅 밑에서 유적이 나오면 그냥 파묻어 버렸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으니 그따위 문화재가 무슨 소용인지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경주의 한 주택가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의 일부를 수돗가에서 빨래판으로 쓰던 것이 우연히 발견되었음에도 집주인은 포상금에 눈이 어두워 쉽게 내놓지를 않고 장장 9개월간이나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경찰까지 동원하여 강제로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웃기지도 않는 일도 있었다.




역시 철거를 앞둔 집들. 전반적으로 AF20-35mm2.8D는 Nikkor렌즈의 일반적인 특성과 달리 다소 부드러운 콘트라스트와 색감을 보여주는 거 같다. 




경주의 다른 구시가지와 마찬가지로 단층 가옥들과 좁은 골목길이 이어졌던 이 곳은 이제 넓은 공터가 되어 버렸다. 고도제한 때때문에 높은 건물이 별로 없는 곳이긴 하지만 그나마도 건물이 없으니 하늘이 탁 트이며 경주는 참 평평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형산강을 제외하고 그렇게 큰 강을 끼고 있지는 경주는 인근의 건천, 안강, 흥해와 더불어 꽤나 들이 넓어 한 국가의 도읍으로 괜찮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뜨거운 오후의 햇살을 양산으로 가리며 어디론가로 마실 나가시는 두 할머니. 쪽샘지구에 대한 발굴은 앞으로도 20년간 계속 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사의 조각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발굴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2010.08.29 경주 쪽샘지구



 






 










현역에서 당당히 활동하던 포항함(PCC-756)이 09.06.24 퇴역 후 함명을 따라 포항 동빈내항으로 와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대한조선공사(現 한진중공업)에서 건조하여1984년에 취역한 포항함은 이후 동일 제원의 초계함들이 건조되면서 그 1번함으로 이 시리즈를 포항급 프리기트함이라 부른다. 격침된 천안함도 역시 포항급 프리기트에 속하는 함정이다. 보다 한단계 상위 클래스의 프리기트가 울산급 프리기트이며 이후 대공미사일과 대잠헬기를 탑재하고 스텔스성을 염두에 둔 현대적인 프리기트인 KDX-1 광개토대왕함을 시작으로 KDX-2를 거쳐 현재 KDX-3급까지 배치되어 우리나라도 대양해군의 모양새를 조금이나마 갖춰가고 있다. 포항급과 울산급은 배수량 3천톤 규모의 KDX-1이 다수 건조되어 대체되어야 하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이므로 당분간은 현역에서 활약해야 할 것이며 서해에서의 수차례 교전에서 보듯 적 고속정에 대해 원거리에서 76미리 함포를 퍼부으며 아군 고속정의 후위에서 엄호하는 등 북한 해군의 수상 전력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유용할 듯 싶다.





먼저 무장부터 살펴보자. 포함함의 주포인 76미리 함포. 전함(Battle Ship)의 어마어마한 함포에 비하면 76미리 함포는 진짜 포로도 보이지 않을 수준이지만 현대 해군 함정에는 과거와 같이 함포가 주렁주렁 달려 있지도 않을 뿐더러 이런 작은 프리기트함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구경의 함포로 속사가 가능하고 대함/대공도 가능한 활용도가 높은 화기다. 천안함 침몰 당시 근거리에서 초계 중이던 동일 클래스의 속초함이 미상의 물체에 열심히 쏘아댔으나 새떼로 판명됐다는 말도 안되는 발표를 했을 때 쏘아댔다는 함포가 바로 이거다. 대공 사격이었다면 뒤에 보이는 쌍열 30미리 기관포가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이것이 쌍열 30미리 기관포. 선체 앞뒤로 각 2문씩 탑재되어 있다. 울산급에는 대부분 40미리 보포스 기관포가 달려 있지만 포항함에는 이처럼 30미리 기관포가 탑재되어 있다. 주로 대공 방어용으로 쓰이지만 적 소형 함정을 대상으로 속사를 퍼붓기에도 유용하다.





함미 쪽에 있는 MM38 엑조세 대함 미사일 발사대. 1982년 포클랜드 분쟁 당시 아르헨티나 공군의 슈퍼 에탕다르 전투기가 발사한 엑조세 미사일에 영국 해군 최신예 구축함 쉐필드호가 격침되면서 엄청난 유명세를 탄 엑조세 미사일. 포항급 프리기트 초기형에는 이처럼 프랑스제 엑조세 미사일이 장착되었고 후기형에는 미국제 하푼이 장착되었고 초기형도 일부 하푼으로 교체하였다고 한다만 포항급은 엑조세를 계속 장착했던 것 같다.





이건 어뢰발사관. 선체 좌우에 각 3개의 발사관이 있어 6발이 상시 장전되어 있다. 함포로는 적함의 상부 구조물을 파괴하고 무력화시켜 전투불능의 상태로 만들 수 있지만 격침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어뢰라면 한방에 격침도 가능하다. 물론 적함의 크기와 선체 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북한에는 어뢰를 맞고도 견딜만한 함선은 거의 없다.





자체 대공방어를 위한 미스트랄 발사대. 30미리 기관포로 대공 방어를 한다는 것은 2차세계대전 때에나 통할 방법이지 요즘에는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무기 체계에 극히 소홀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방공이 아닐까한다. 한미 연합군이 제공권 하나는 확실히 장악한다는 자신감 속에서 대공 방어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생각치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쨌거나 불안은 했던지 명중률 형편없다는 미국제 스팅거보다 훨씬 괜찮다는 프랑스제 휴대용 대공미사일 미스트랄 발사기를 거치했던 자리도 있다. 그나마 이것도 사거리가 짧아 본격적인 대공 방어용으론 부족하기에 KDX-1이후부터는 수직발사대에 대공미사일이 탑재되고 20미리 벌컨과 30미리 골키퍼 시스템등 우수한 대공 방어 체계가 갖추어지게 된다.





폭뢰 투하대. 물 속의 적 잠수함을 파괴하기 위한 폭뢰를 투하하는 곳이다. 잠수함 승무원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무기인 폭뢰. 자신들을 찾는 소나의 탐지음과 폭뢰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소리는 정말 무시무시할 거 같다.



 


 일단 오늘은 포항함에 탑재된 주요 무기체계만 보고 다음 편엔 포항함의 실내의 모습을 올릴 예정. 잠온다~


2010.08.07 포항


중학교 1학년이던 1994년에 읽었던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 1권의 첫 부분에는 칠천량 해전의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있었다. 훗날 알게된 실제 전투 과정과는 상이한 부분이 많지만 소설답게 칠천량 전투의 긴박함과 절망적인 조선 수군의 모습들이 생생했다. 이순신 위인전이나 국사 교과서 등에서 자랑스럽게 외치는 한산도 대첩이나 명량대첩과 달리 패배, 그것도 궤멸적 타격을 입은 칠천량 해전은 그다지 알려져있지 않았음에도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통해 내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고 있는 동안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전멸당한 칠천량 해전. 그 허망한 패전의 현장을 다녀왔다.



 

거제에서 칠천도로 건너가기 직전 도로 우측편에 있는 칠천량해전비. 이 전에는 관심도 없었는지 비가 생긴지는 얼마 되지도 않은 듯 하다. 2010년 1월 12일에 제작된 비석이다. 역시 패전의 수치스러움과 이순신과 상반되는 이미지의 원균이 어우러져 묻히고 잊혀진 역사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라면 절대 이렇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늦게 나마 생긴 비석의 비문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수전에 어두운데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한 선조와 권율의 무모한 작전 수행 지시와 원균의 꼼꼼하지 못한 작전 지휘등 가치 판단에 대한 부분은 생략한채 담담하게 칠천량 해전의 결과를 얘기하며 이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침몰 거북선 찾기 탐사를 추진 중이라고 마무리 하고 있다. 칠천량 해전의 안내문인지 '우리 거북선 찾기 운동하고 있다규!' 라고 홍보를 하는 것인지...이 해역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의 수가 단일 전투에서는 가장 많을텐데 전몰장병 위령비라도 하나 세워두는 것이 보다 모양새가 맞지 않나 싶다.




거제도와 칠천도를 연결하는 칠천교. 이 다리가 가로지르는 좁은 해협이 칠천량이다. 이 좁은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칠천량 해전이다.





칠천량에서 동쪽인 부산 방향을 바라본  모습이다. 저 멀리서부터 가덕도, 안골포 등지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의 전선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대략 조선수군 100여척, 일본 수군 1천척 가까이 벌어진 전투였는데 이 좁은 바다에 그만큼 많은 전선들이 들어 찼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수한 함포를 이용한 포격전이 유리한 조선 수군은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진을 펼치고 함포 사격을 통해 적을 제압해야 하거늘 좁은 해협에서 진을 펼치지도 못한채 적의 기습을 받아 근접전을 허용하게 되었으니 애초에 칼싸움에서는 일본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칠천량에서 바라본 서쪽 통영 방향의 모습. 포위 당한 조선 수군이 한산도로 퇴각하기 위해 어떻게든 뚫어야 했던 퇴로다.





칠천도와 그 주변의 지도. 화살표 표시가 된 부분이 칠천량이다. 지도 우측 상단의 가덕도에서 전투 후 칠천도로 물러나 정박해있던 조선 수군은 가덕도와 부산포, 안골포, 웅포 등지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고 칠천량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벌였다. 간신히 칠천량이라는 호구를 벗어난 나머지 수군들은 당시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로 어떻게든 철수해야 했으나 한산도로 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통영과 거제 사이의 견내량 마저도 일본 수군에게 봉쇄당해 향하지 못하고 고성의 춘원포로 밀려나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통제사 원균 역시 그 곳에 상륙하였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한 이유는 칠천량 해전에서 목숨은 부지한 선전관 김식(金軾)의 보고서에도 전사한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없고 일본측 기록에도 적의 사령관을 포획 혹은 사살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지라..

선전관 김식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왜선 5,6척이 갑자기 소동을 일으키며 불질을 하여 우리나라 함선 4척이 전부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여러 장수들이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진을 벌리지 못하였습니다. 닭이 울 무렵에 왜선들이 헤아릴 수 없이 와서 서너겹으로 에워싸고 형도 근처에 가득히 널린 채 싸우거나 물러가거나 하여 도저히 당적할 도리가 없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고성 땅 춘원포로 물러나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적세가 하늘을 찔러 우리 배들이 전부 불타서 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도 모두 불타 죽고 빠져 죽을 때에 신은 통제사 원균과 순천 부사 우치적과 같이 몸을 빼어 육지로 올랐습니다. 원균은 나이가 많아 달아나지를 못하고 홀로 칼을 짚고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왜병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면서 원균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는데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결국 칠천량이란 좁은 바다에서 불시의 기습을 당한 조선 수군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며 제대로된 호쾌한 반격 한번 못해보고 무너진 것인데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수군 총사령관이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조선 수군이 전멸당하자 일본 수군은 거칠 것이 없어졌다. 지상군의 진격을 수군이 지원하는 수륙병진책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며 임진년에는 무사할 수 있었던 호남지역 마저 위태하게 되었으며 뻥 뚤린 남해안의 뱃길을 통과해 서해안을 따라 한강으로 적이 치고 올 수도 있게 되었으니 칠천량 해전 한 번의 패배로 인한 결과는 가혹했던 것이다.

철천량 해전에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적과의 교전을 앞두고 적전 도피한 수사 배설의 이야기다. 배설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잽싸게 퇴각하여 호구를 빠져나갔는데 이 덕분에 경상우수영 소속 판옥선 12척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적전 도피죄를 지은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어쨌든 도망하는 와중에도 정신줄 놓지 않고 한산도에 들려 통제영을 불살라 무기와 식량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훗날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비장한 심정으로 쓴 장계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이나 있사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 그 12척이 되어줬다. 여기까지라면 비록 적전 도피를 하였다 하나 현명한 판단으로 목숨을 부지해 훗날 조선 수군의 눈물겨운 감동의 드라마 '명량대첩'의 밑거름이 되어준 것으로 인정해주겠는데 배설은 결국 명량대첩을 앞두고도 또 도망가고 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결국 체포되어 참형을 담하고 마니..ㅉㅉ  어쨌든 그렇게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판옥선 12척을 제외하고 거의 불타 사라지는 최악의 패배가 바로 칠천량 해전이었다.





그리고 칠천량 해역에서 거북선을 찾기 위한 탐사선. 아무래도 이 해역에서 괘멸적인 타격을 입었기에 거북선의 잔해가 있다면 칠천량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자랑스런 역사와 기술을 상징하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란 용어는 이제 쓰지 않기를 바라지만 갑판에 지붕을 씌우고 그 위에 장갑을 덧대어 적의 총, 활로 부터 전투원을 보호하며 적진 속을 종횡무진 누비며 격파하는 돌격 전투함이라는 창의성은 거북선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거북선 철갑 조각이라도 한 점 꼭 찾아주길 바란다.



 
2010.02.27 칠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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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영주

순흥 읍내리 벽화 고분 - 사적 313호



2009년의 마지막 여행지로 영주를 택했다.
언제가도 좋은 부석사와 그 외 몇군데를 들를 생각이었는데 코스를 짜며 지도를 보던 중에 우연히 신라시대 벽화 고분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 1993년 겨울 당시 과천 현대미술관까지 올라가 고구려 고분 벽화전을 봤던 강렬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와중에 남한 지역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벽화 고분들 중 보존 상태도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라니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부석사로 향하는 길 가에 위치해 동선이 꼬이지도 않으니 금상첨화. 사진에 보이는 고분은 원형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일반인들도 저 돌 문을 열고 들어가 구경해볼 수 있다. 실제 벽화는 보존 관계상 들어가볼 수 없는데 아무리 복제한 모형이라지만 무덤 속에 들어가는 기분은 꽤나 깨름칙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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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석문을 열면 '┌ ' 으로 꺾어지는 입구가 나온다. 입구 양쪽 벽면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듯한 우람한 사내들이 그려져 있다. 이 좁은 문을 통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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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쪽으로 들어와서 바라본 모습.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무용 장면이라던지 사냥 장면, 씨름 장면 등이 많이 나와 사료적인 가치도 뛰어날 뿐더러 북두칠성은 물론 삼족오(三足烏)나 주작, 백호, 청룡, 현무 등등 종교적인 관념도 볼 수 있으나 이 그림은 상당히 특이하다.

무덤을 지키는 무사(?) 쯤으로 보이는 이 사내는 뱀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용맹을 보여주고 있는데 신기한 헤어스타일은 물론이며 우람한 체격과 큰 코와 구릿빛 피부는 아무리 봐도 동양인인 신라인의 모습이 아니다. 아래위로 심하게 돌출되어 그려진 송곳니도 그렇고 무섭고 강한 인상으로써 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무덤을 지키기 위한 과장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왠지 경주 괘릉에서 본 아랍인의 모습을 본 뜬 석상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국적이고 특이한 인물의 모습도 그렇지만 마치 펜으로 그린 듯한 그림의 스타일이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마저 주는데 그림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웠던 고구려 벽화들과 달리 이 고분의 벽화는 조선시대 민화를 보는 듯한 투박하고 어설픈 서민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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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통로 안쪽의 꺾이는 부분 상단에 있는 이 그림은 작지만 눈길을 끈다. 벽면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이 곱상한 여성분의 얼굴은 살아남았다. 바로 옆의 구름 그림도 있어 선녀를 그린 것으로도 생각되는데 앞서 우락부락하기만 한 사내의 그림과 달리 이 여성의 얼굴은 참 곱게도 그렸다. 낮은 코와 작은 눈, 통통한 볼과 작지만 도톰한 입술과 기품있어 보이는 긴 목.. 당 현종 때 양귀비도 그랬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얼굴이 통통한 편을 좋아했다고 하니 신라에서도 꽤 괜찮은 미모였으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이 그림은 마치 오늘날 만화를 보는 듯한 획 놀림을 보여주는데 정말 요즘 그림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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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건 뭐 낙서인지 뭔지;; 그리다 만 것인지. 뭘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계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는 보이지 않는 무질서가 혼란스럽다. 신라의 중심이던 경주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이 곳에 존재했던 지방세력의 무덤이었을테니 세련된 기법과 웅장한 규모를 바래선 안되겠지만 고개가 계속 갸우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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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관이 놓여졌던 곳이다. 편편한 바닥에는 적어도 관 2개 정도는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나온다. 벽면의 벽화는 훼손이 심해 거의 알아볼 수 없고 단서가 될 만한 유물은 토기 파편 5개만 남고 모두 도굴당했다고 한다. 또 피가 끓어오르는데 벽화는 거의 지워지고 유물은 다 사라지고 뒷받침할만 사료도 없으니 이 고분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비단 이 작은 고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도굴로 인해 잃어버린 역사의 조각이 얼마나 될지, 또 그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책의 어느 페이지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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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몇평 되지도 않는 좁은 무덤에서 이제 산 사람 세상으로 나가야겠다~ 무섭다고 안들어오고 있다가 내가 나오자 카메라를 들이대는 혜정이~ ㅎ


좁은 무덤 안에서 비록 복제한 벽화들이지만 꽤나 리얼해서 실제 고분을 발견하여 발굴하는 듯한 느낌을 가져볼 수 있는 괜찮은 경험이었다. 이 투박한 작은 벽화 고분을 들여다봐도 놀랍고 흥미로운데 중국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들을 직접 들어가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실감이 안난다.

시간내서 고구려고분벽화 도록이나 오랜만에 펼쳐봐야겠다.


2009.10.02 경북 예천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전통주막 '삼강주막'


경북 지방 출신이 아니면 이름조차 생소할 듯한 예천군에 있는 삼강 주막은 1박 2일에 소개되면서 인기가 급상승하며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사실 마지막 남은 주막이라 하여 예전에 몇 차례 매체에 보도된 것을 보았으나 기사에서 본 주막은 허름하면서도 소탈한 그런 모습이 아닌 복원된 느낌이 너무 나는 그것이었기에 굳이 먼 걸음을 하고 싶진 않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뜬금없이 빌려온 내비게이션 사용에 서툰 어느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는 내비게이션을 쓸 줄 몰라 못찾아가겠다며 도움을 요청하여  어딜 가시느냐 했더니 바로 삼강주막을 가고자 하노라고 대답했었다. 그 분은 신문기사까지 스크랩해서 보여주었는데 그 날 이후 삼강주막을 나도 한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고 추석을 앞둔 휴일 잠시 다녀올 짬을 낼 수 있었다.




삼강 주막이 위치한 삼강나루터.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곳이라 삼강 나루터라 하고 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기 위해 많은 길손들이 머물 수 밖에 없는 목이다. 자연스레 주막이 생겨났을거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어찌보면 오늘날의 고속도로 휴게소와도 같은 곳이었을텐데 주막이라고 하면 왠지 우악스럽게 팔뚝을 걷어 붙히고 대낮부터  술상앞에 앉아 막사발에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입에선 술이 줄줄 새어 흘러야하고) '주모!! 여기 술 한병 더~!!' 를 외치는 수염 덥수룩한 사내들과 탐욕스러운면서도 간사해보이기도 하고 요염하기도 한 분위기로 눈웃음을 치는 주모가  살랑거리며 술을 들고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건물은 원래의 건물을 복원차 보수한 것인데 1900년대에 지어진 나름 100년이 넘은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흑백으로 찍어두니 그럴싸하지만 선명한 황토빛은 조금 어색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마 밑의 액자는 복원전의 모습들. 초가지붕이 아닌 슬레트 지붕이 덮어져 있고 담배를 태우는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보부상 숙소라고 재현해둔 건물. 뭐 어쩔 수 없단 생각이 들지만 저 반듯한 목재와 깨끗하고 편편한 황토벽은 크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궁궐이나 사찰이 아닌 이상 조선시대 서민들의 집, 특히나 주막에 저렇게 각진 반듯한 목재가 사용되었을리는 없다. 그리고 아무 곳에나 걸리는 저 현수막~ 비단 여기 뿐이 아니라 사찰이든 길거리든 넘쳐나는 현수막은 정말 시각 공해다.




뒤에 있는 컨테이너와 쇠파이프 구조물이 참 맘에 안들지만 어쨌거나 나름 주막의 풍경이 이러했지 않을까 싶다. 요즘 처럼 세상이 바쁘지도 않고 복잡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물건 팔러 다니는 보부상들이나 먼 길 가는 나그네들이 좋은 풍광을 만나 하루쯤 늦으면 어떠리오~하면서 강바람에 취해 술에 취해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을 것도 같다. 여기 들른 사람들이 거의 다 촌두부나 부침개, 도토리묵 정도는 다들 맛보던데 가격은 싼 편이었다.




요건 예전에 있던 간이 화장실을 복원한거라는데 뭐 ㅎㅎㅎ  군대 있을 때 숙영지에 설치하던 간이 화장실같은 그런 방식이다. 남자들이야 까짓거 들어갈지 몰라도 여자들은 엄두도 못 낼 화장실. 하기야 조선시대에 조신한 여인네들이 주막에서 얼쩡거릴 일도 없었겠지만;




강둑에서 바라본 삼강 주막.

어쨌거나 삼강주막은 방송을 탄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회룡포, 용문사와 함께 예천을 찾으면 들러볼만한 관광코스가 개발됨으로써 예천군 입장에서도 삼강 주막의 가치는 클 것이다. 하찮아 보이는 이런 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문화와 옛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방송이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예전과 달리 지나는 길손이 쉬어가는 주막이 아닌 일부러 들러야 하는 곳이 된 관광지로서 복원된 주막이 얼마나 자생력을 갖추고 오랫동안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는 더 오랫동안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촌두부 한 점에 막걸리 한 사발 마셔보고자 여기까지 찾을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북적이라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2007년 여름에 들렀던 선진리성과 조명군총을 두번째로 다녀왔다.

경남 사천에 있는 선진리성은 정유재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주둔하던 성이다. 서생포나 웅천 등 다른 곳의 왜성들과 달리 애써 왜성이라는 용어를 피해가며 그동안 선진리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일본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이 못내 찝찝하고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의 유적이라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2007년에는 설명문에 애써 왜성이 있기 전부터 전략상의 요충지라 산성이 있었고 그 위에 다시 일본이 성을 쌓았단 설명을 구차하게 달아서 왜성이란 오명을 피하고자 하는 흔적이 역력했지만 무지 덥던 그 여름날, 아무도 없는 빈 성터를 돌아다니던 난 이 성이 왜성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일본이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파괴되고 방치되었던 유적들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인지라 1년 반만에 다시 찾은 선진리성은 많은 부분이 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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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리성의 입구와 주차장. 예전엔 없었던 것 같은데..포장마차들이 좀 생겼다. 크게 많은 사람들이 찾진 않을 것 같은데 장사나 될지 모르겠다. 봄에 벚꽃이 피면 사람들이 꽤 올 것같긴 하다만.. 어쨌든 성에 도착했을 이 때만 해도 2007년과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안내판부터 이미 내용이 달라져있었다. 선진리성은 왜성이라는 것을 확실히 명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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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만 해도 왜성임을 애써 부인하는 분위기에서 180도 달라진 모습. 일본성에만 있는 천수각(天守閣)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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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복원한 성이지만 일본식 성곽 답게 비스듬히 기운 성벽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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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으로 들어서자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것이 튀어나온다. 성문을 복원해 놓은 것. 이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인데 사천시에서는 선진리성의 성문을 복원해두었다. 다만 안하느니 못한 어설픈 복원에 약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일본 히메지성을 본따 만들었다고는 하는데 저 낮디 낮은 성벽과 무성의하게 만들어둔 총안구는 뭐냔 말이다;; 거기다 우리나라 기와가 얹어진 지붕은 뭥미..국내의 왜성들에 찾아오는 일본인 관광객들도 적지 않고 유명 관광지가 아닌 이런 사적에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이 분야에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답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일텐데 제발 비웃음이나 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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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성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꺾여진 길을 따라 진입하는 수 밖에 없다. 공격군의 정면에 성문이 노출되지 않아 공성기를 이용해 성문을 파괴할 수도 없고 병력들이 성문으로 진입하면서 양쪽에서 쏟아지는 총탄과 화살에 벌집이 되기 딱 좋다. 전형적인 일본성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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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쪽에서 바깥으로 바라본 장면. 이제까지 가본 서생포, 울산, 순천 왜성에 비해 사천 왜성은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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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비해 확 달라진 곳. 성의 중심부인 텐슈가쿠(천수각 : 天守閣). 2007년에 왔을 때는 천수각이란 설명은 전혀없이 저 충령탑에 대한 안내판만 있었는데 이제는 천수각터라며 친절히 안내판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원형이 훼손되었던 충령탑으로 오르는 계단도 없어지고 주변을 싹 정비하면서 기단부를 복원해내었다. 천수각의 기단부만 봐도 이 곳 사천왜성의 천수각은 그렇게 크고 높진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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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2007년 7월 당시의 모습. 일제 시대에는 저 충령비가 있는 자리에 시마즈家의 후손들이 찾아와 무슨 비석을 만들어 세워뒀다는데 해방후 당연히 깨어지고 6.25 및 대간첩작전에서 전사한 공군장병들을 위한 충령탑이 서있다. 분명히 위치나 흘러내리긴 했어도 기단부를 보면 천수각 터가 분명한데 한마디의 언급도 없어서 이 주위를 한바퀴 돌며 유심히 살펴보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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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에서 바라다 본 남해 바다. 대부분의 왜성은 이 처럼 보급이 용이하고 유사시 배로 탈출할 수 있도록 바다를 연하고 있으며 곳곳의 요지를 점하고 있어 조선 수군의 활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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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의 아래쪽. 바로 뒤편은 경사가 심하고 바다라 적이 접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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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성벽의 모습. 참 어울리지 않는 세가지가 공존하고 있는 야릇한 광경이다. 일본이 쌓은 왜성의 성벽과 이들을 무찌른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승전비와 일제시대에 심었다는 사쿠라의 군락. 지금도 봄이 되면 수 많은 사람들이 벚꽃을 즐기러 찾는 곳이라니 역사란 참 재미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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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진리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조명군총. 사천왜성을 공격하던 조명연합군의 전사자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사천왜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사들을 몰아내고자 조명연합군 3만명이 공격을 퍼부었으나 오히려 시마즈 군의 역습을 받고 처절하게 패했다고 한다. 화포를 발사하다 오발로 인해 화약이 폭발하면서 진중에 혼란이 생긴 틈을 타 성안에서 농성하던 시마즈군이 쏟아져나와 결정타를 가했다고 하는데 정유재란 막바지에 경상도 해안의 일본군을 향한 공격 중 제대로 성공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참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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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의 조명군총 모습

어쨌거나 이 조명군총 역시 2007년에는 막 정비사업이 시행중이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왜란 후 수백년 동안 당병무덤(명,청나라가 들어섰어도 중국이라면 당나라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던것 같다)등으로 불리며 방치되었던 것인데 비록 명군의 수가 더 많았다 하나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엔 명군 뿐 아니라 조선군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 뒤늦은 정비 사업이 왜군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코와 귀까지 잘려나갔을 원혼들을 그나마 달래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선진리성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비교적 깔끔한 형태로 복원 유지되어 있어 다른 왜성들에 비해서는 접근성이 용이하여 답사하기는 무척 편한 성인것 같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사용한 최초의 전투를 벌였던 2차 출격의 해역이기도 하고 재유정란 때 조명연합군의 4로 병진책의 창끝이 향했던 격전지로서 의미가 있다. 바로 그 사천성 전투는 우리가 공격에 나서고도 큰 피해를 입은 전투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시바 료타료의 유명한 역사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얘기가 나올때면 늘상 사천전투에서 명군 5만명의 공격을 격퇴하고 반격에 나서 전멸시켰다는 묘사가 이어질 정도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떠올릴 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군의 정면을 돌파하여 탈출한 무용담과 더불어 꽤나 유명한 듯 하다. 어쨌거나 복원사업이 깔끔하게 마무리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앞으로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선진리성도 다른 곳 처럼 아예 이름을 사천 왜성으로 바꾸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그동안 방치되었던 왜성을 비롯한 일본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들은 새삼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의 일부라는 인식하에 재조명 받고 있는 듯하다.

2009. 01. 03


p.s. - 왜성을 답사할 때면 지극히 실전적인 축성기법과 규모가 놀랍기도 하지만 이런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몸 성히 살려보낸 것에 정말 열받는다;; 적어도 울산성에서 가토 정도는 잡았어야 할 거 아니냐고 ㅆㅑㅇ

어린이날로 이어지는 토,일,월 황금연휴를 놓치지 않고 5월 2일(금)에 월차신공을 더해 3박 4일 일정으로 2004년에 이어 일본으로 향했다. 부산항에서 고속훼리를 타고 간 길이기에 목적지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였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하우스텐보스나 유후인으로 향하지만 그다지 흥미있는 곳이 아니었다. 규슈에 가게되면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가토 기요마사의 성인 구마모토성이었다. 후쿠오카 역에서 쓰바메 특급을 타고 내린 구마모토역에서 구마모토 성까지 도보로 이동하며 곳곳의 모습을 스냅으로 담으며 1시간 정도 후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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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은 마침 축성 4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동안 계절 단위로 나눈 축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을 3월 중순 ~ 4월초였다면 더욱 끝내주는 풍경을 보여줬겠지만 그만큼 붐볐을 생각을 한다면 뭐 이 정도 시점도 나쁘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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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구마모토성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동상이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한자 발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많이 부르는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을 떠올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가는 정도의 유명세(?)를 보유한 일본의 맹장이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의 많은 장수들 중 유독 가토 기요마사의 이미지가 강렬한 것은 동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하고 선조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은 전공 외에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성안의 모든 사람과 가축까지 몰살시킨 잔인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 특유의 갑옷 형태와 무사계급들의 상징이던 두 자루의 칼, 가토가 즐겨썼다는 긴 형태의 특이한 투구와 원모양의 문양까지 조각되어 있는 섬세한 형태다. 수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이 동상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웃고 있었다. 구마모토성에 한국인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이 동상과 그 앞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는 일본인들을 보며 이들이 과연 이 녀석이 저지른 잔인한 학살극을 알기나 할런지 하는 생각이 들며 우리에게 원수와도 같은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선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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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동상 아래에 있던 영문 설명문. 그의 삶을 간단히 요약한 이 설명에서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쪽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리가 일대 회전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언급만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는 이에야스의 편에 섰고 역시 눈부신 전공을 세우며 이 곳 구마모토 일대에 영지를 하사받고 구마모토 성을 7년에 걸쳐 세운다. 정작 우리에게 가토의 이미지를 심어준 임진왜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는데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에 대해 굳이 드러내기 싫었을테고 규슈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에 민감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오히려 그래서 구마모토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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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된 안내도 충실하다. 허접한 번역으로 인한 어색한 표현과 오류가 보이지 않는 완벽한 수준으로 규슈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임을 실감케 한다. 위 설명에 나오는 수많은 실전 경험 중의 하나인 정유재란 당시 울산성 전투에서 얻은 교훈 중의 하나가 구마모토성 건축에 영향을 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뒤에 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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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외곽의 해자. 이건 뭐 참호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거의 강이다. 상당한 폭도 폭이거니와 둑의 높이에 축대의 높이 만으로도 공격군의 기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고려 이후 중앙집권적인 왕권 조직을 갖춘 우리나라는 전쟁 발발시 중요 거점에 위치한 산성으로 이동하여 방어전을 수행하는 방식이었지만 일본은 19세기까지도 막부 체제 하 지방 영주들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며 각자의 영지에서 성을 쌓고 살았다. 더군다나 전국시대에 서로가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논리 속에서 일본의 성은 철저하게 실전적인 형태로 발전했을 듯하다. 우리의 거점 방어같은 형태가 아닌 하나의 요새로서 건설된 일본의 성은 이 처럼 해자에서부터 우리와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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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벽 위에는 위처럼 조총을 쏠 수 있는 총안구가 빽빽하다. 16세기 무렵 유럽에서 도입된 조총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서 조총의 충격은 6.25 때 겪은 북한의 T34 전차에 대한 공포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성은 이 처럼 사수가 완전이 보호를 받은 상태로 사격이 가능한 형태로 이루어져있어 실제 외부에서 내부의 사수를 조준해 명중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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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성의 중요한 특징. 바로 꺾어진 출입구. 성문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ㄴ','ㄷ'자형 등으로 꺾인 길을 통과해야 한다. 성문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아 화포나 공성기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될 수 있으며 성문으로 도달하는 동안 방향을 틀어야하는 공격군은 전방과 좌우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총탄으로 부터 몸을 숨길 곳이 없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이 성문을 보호하듯이 성문 전면에 반원형으로 외성을 친 형태가 일부 있긴 하지만 일본의 성처럼 보편적인 설계방식은 아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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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안에서는 축성 400백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 중이었다. 위 사진은 더운 날씨에 구마모토성의 마스코트 분장을 하고 고생 중인 어느 녀석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퀴즈를 내는 진행자인데 일본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대략 '구마모토성을 지은 사람은 누구일까요?'였다. 답은 당연히 가토 기요마사였고 곁다리 답안으로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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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의 가장 핵심부인 혼마루 쪽은 입장료를 지불해야했다. 500엔이었나. 우리나라 기준으로 봤을 때 입장료는 꽤 비싼 편이지만 그럼에도 성 안엔 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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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의 중심, 하긴 구마모토 성 뿐 아니라 일본식 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텐슈가쿠(天守閣). 엄청난 높이의 기단부 석축 위에 우뚝 솟아있다. 구마모토성은 일본의 3대 성(城)의 하나로 꼽힐만큼 그 규모와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실제 2004년 오사카성을 찾았을 때 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 때는 일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인지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인지도.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은 정말 진리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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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웅장한 건물을 보고 있노라니 화가 울컥 나기도했다. 우리나라를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가토는 자신의 영지에서 이처럼 웅장하고 강한 성을 지어서 부귀영화를 누렸단 말이지.. 가토가 7년 동안 공을 들여 지은 이 성은 19세기 세이난(西南)전쟁에서 많은 건물이 불타 사라지고 복원된 것이다. 오사카성도 히데요시가 지을 당시의 엄청난 규모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실제 일본 관광을 위해 알아보던 자료에서 보던 웅장하고 멋진 목조건물들은 대부분 원형대로 복원되었거나 아예 콘크리트로 재건축된 것들도 적지 않다. 2차 대전 당시 미공군 B-29 폭격기에 연일 융단 폭격 당했던 일본의 주요 도시에 있던 유적들은 더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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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유적, 구마모토성 안에 있는 우물터, 보호 철망이 덮혀져 있지만 우물의 깊이는 엄청났다. 안내 표지판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농성(籠城)에 대비해 구마모토성 안에 우물을 120여 곳이나 팠다고 되어있다. 여기서도 일본 녀석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생략하고 있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집착적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우물을 파게 된 계기는 바로 정유재란 당시의 울산성 전투였다. 가토가 주둔하고 있던 울산성을 완전히 포위한 조,명 연합군은 수일동안 공격을 퍼부었지만 가토 기요마사의 악귀처럼 공격을 막아 버터냈다. 더군다나 태화강 하구로 밀려오는 원군들로 인해 조,명 연합군은 퇴각하고 마는데 결국 막대한 인명피해만 내고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울산성을 사수한 가토의 군사들은 갈수로 인한 처절한 경험을 해야했다. 말을 잡아 피를 마시고 소변을 받아 마시기도 했으며 식량이 떨어져 성벽의 흙을 긁어 먹을 정도로 처절했던 전투가 울산성 전투였다. 가토는 할복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그가 구마모토로 돌아와 성 안에 우물을 120여개나 팠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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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으로 들어가는 바로 입구 쪽도 만만치 않은 경사의 성벽과 굽이굽이 계단과 통로로 성 내부에 진입한 적들이라 해도 천수각을 침범하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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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으로 들어가는 입구. 2004년에 갔던 오사카성과 달리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내부 개방이 되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아무리 든든한 축대 위에 세워졌지만 이처럼 많은 관광객이 올라가도 괜찮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내부는 애초 60년대 복원 당시 부터 박물관 형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란 측면에서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건물의 유지와 보수, 활용성 측면에선 합리적인 선택인 듯 했다. 저 문양은 가토 가문에서 쓰인 것 같았다. 가토의 투구는 물론 그릇 같은 생활 용품에도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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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넘의 우물은 천수각 안에도 또 있었다. 정말 울산성에서 고생 많이 한 듯. 일본 측에서 그린 울산성 전투도를 봐도 왜군은 처절한 상황을 겪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론 가토가 조명연합군을 격퇴함으로써 그의 무용담에 결정적 순간을 더해준 격이 되버렸지만. 여담이지만 사천왜성을 쌓고 남해안에 머물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명군을 박살내버린 무용담 역시 일본에선 나름 유명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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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초상. 이순신 영정이나 다 똑같이 생긴듯한 논개, 춘향이 영정 그림 처럼 상상의 그림이 아닌 당시에 직접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德이 느껴지는 상은 절대 아니다. 눈빛에선 냉정함과 교활함이 보이는 듯도 하고 감히 마주 보지 못할 강한 포스도 느껴진다. 일본에서 이처럼 그림이 남겨진 이들은 당시에도 권력이 있던 이들이고 대부분 무사계급이었으므로 우리 선비들의 상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 달리 험상궂고 거칠고 냉정한 인상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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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마사公의 생애'라는 전시코너 쪽엔 태어날 때의 일화부터 동네의 분쟁을 해결하는 대범함과 판단력을 보여준 성장기의 가토의 모습 등 가토 기요마사는 분명 일본의 영웅 중 하나로 추앙받는 듯 했다.  특히 군사 뿐 아니라 건축, 토목 등 다양한 방면에 재주가 많아 오늘날 구마모토현의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위 그림은 영지로 부임하는 가토의 모습인데 그가 썼다는 긴 투구와 문양인 'O'가 선명하다. 뱃머리에 서서 붉은 갑옷을 입고 서있는 가토의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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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투구가 위의 그림에 나오는 긴 형태의 투구.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썼던 바로 그 투구라고 한다.  다른 장수들의 투구와 달리 전투에 적합한 형태는 아니지만 가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좋은 독특한 모양이다. 가토가 저걸 쓰고 조선에도 왔었을거란 생각이 드니 400여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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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 꼭대기 층에 가까워 올 수록 전시물의 내용은 구마모토성이 불탔던 세이난(西南)전쟁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루기 시작한다. 사쓰마 군이 맹공을 펼치고 있고 구마모토성에서 군사들이 농성하고 있는 그림이다. 아쉽게도 세이난 전쟁에 대한 사전 지식은 거의 없었다. 관련 내용은 더 공부해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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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듯한 더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줄을 지어 겨우 올라간 천수각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천수각은 구마모토시 전체를 거의 조망할 수 있는 사령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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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까마득해 보인다. 우리나라에 황룡사 9층 목탑이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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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올라간 천수각을 내려와 전 날 편의점에서 사둔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충 떼우고 성을 빠져나와 다시 걸어걸어 구마모토역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 날 의외로 빡쎈 왕복 도보 이동경로와 천수각 내부에서의 지체현상에서 체력소모가 커 후쿠오카로 돌아가서 들르기로 계획했던 후쿠오카 타워와 후쿠오카돔은근처에도 못가고 호텔에 뻗어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머리 속에 최우선 순위로 잡혀있던 구마모토성을 봤기에 그 정도쯤은 생략해도 별로 아깝지 않았다. 이번 구마모토성을 찾음으로써 가토가 지은 성 3곳이나 답사한 셈이 됐다. 가토가 조선에 장기 주둔하며 지었던 울산성과 서생포왜성, 그리고 이번 구마모토성까지.


가토 기요마사라는 한 인물도 그렇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처럼 복잡한 생각이 교차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런지 모르겠지만 일본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수천년을 마주해온 우리는 또 앞으로 그렇게 일본과 손도 잡고 싸우기도 할 것이다. 구마모토성을 빠져 나오면서도 내 머리속에는 일본과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2007. 12. 23

 두번째 진주성 답사. 2003년 여름에 학군단 동기 둘과 진리산 종주를 마치고 내려온 곳이 진주라 잠깐 들렸었지만 다시 와보니 새롭다. 답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이동간에 진주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사실적으로 기술된 '이순신의 두 얼굴'이란 책에서 1,2차 진주성 전투 부분만 발췌해 읽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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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서 바라본 성의 북쪽. 지형을 끼고 도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읍성 형태이지만 사실 그다지 방어에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 작은 성에서 수만의 왜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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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안에서 내려다 본 성밖 진주 시가지의 모습. 왜란 당시에는 총안구를 비롯한 성곽이 지금만큼 완벽하진 않았겠지만 이 얼마 높지도 않은 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활과 총통을 쏘아대며 죽을힘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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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생각없이 온다면 괜찮은 산책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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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는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으로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수군의 연전연승에는 이와 같은 우수한 화포의 위력과 튼튼한 판옥선의 함선구조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위 총통들에 장전된 무기는 대장군전이라는 일종의 관통탄으로 수군들에 의해 많이 쓰였다. 요즘으로 치면 하푼 대함미사일 정도? -_-;
우리 포병의 병과 마크에도 총통 2자루가 교차하고 가운데 대장군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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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에 대한 컴플렉스. 굳이 추장이라고 명칭할 필요가 있었을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은 왜란 동안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의 전공도 전공이지만 특히 선조의 왕자들이 가토에 의해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우월한 전력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에 가토를 포위하고 수일동안 공략했으나 악귀처럼 농성한 가토는 결국 조명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격퇴시키는 등 우리에게 많은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일본의 맹장이었다. 일제의 말도 안되는 주장인지 모르겠으나 '쾌지나 칭칭 나네~'에서 쾌지나 칭칭이 '가등청정'나오네~에서 변형되어 구전된 것이라는 말도 있으며 조선의 집에서는 악귀를 쫓는 신앙물로 가등청정 인형을 두기도 했다는 등 가토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은 상상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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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 죽을 힘을 다해 농성한 울산성 전투도. 당시 왜군의 처절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가토 기요마사는 왜란 참전 일본장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는데 실제 고니시의 부대와 벌였던 충주 탄금대 전투도 가토의 부대와 교전끝에 신립의 조선군의 전멸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노인이 있었을 정도다. 우리에겐 아주 악질같았던 생각도 하기 싫은 일본 장수의 이름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였던 것이다. 이 비문에도 결국 가등청정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억지로라도 격을 낮추고 싶었는지 추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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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 2차 진주성 전투로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에 살아있던 모든 조선 사람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개, 닭까지 모조리 죽였다.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도요토미의 직접적인 지시로 이루어진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성 함락 후 위의 촉석루에서 연회가 벌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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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바위 의암에서 논개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웃긴것은 20세기 초반 군국주의 일본이 과거의 침략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포장하는 과정에서 병신같이 여자 안고 히히덕거리다 물에 빠져 죽은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미화하고자 논개를 그 병신의 연인으로 둔갑시켜 일본에 사당까지 만들어뒀단 것인데.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에서 발칵 뒤집혀 난리 좀 떨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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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논개는 기녀였는지 아니었는지 설이 분분하다. 위와같이 '義妓論介'라고 써진 비각이 있는데 의기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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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은 남강을 끼고 있는데다 절벽위에 성벽을 더 쌓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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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내에는 3.1운동기념비는 물론 6. 25당시 진주지구전적비도 있는데 아무래도 진주성의 메인테마는 임진왜란 당시의 장렬했던 두 번의 전투라 얘네들은 곁다리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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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좀 되었으나 온 김에 안 보고 갈 수는 없어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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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기본 테마는 임진왜란. 조선과 왜의 장수 투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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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자료. 왜란 후 무공을 세운 무장들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 졸렬한 임금 선조를 따라다니며 도망다니기 급급했던 문신들은 수도 없이 많은 상을 받아놓고 싸움터에서 분투한 무장들에게 내린 논공행상은 선무공신이 달랑. 선무일등공신에 봉해진 3명 중 2명은 그나마 전사한 장수다.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 그 3명이다. 사실 원균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하고 조선 수군이 전멸하게 된 것은 결국 해전에 어두웠던 도원수 권율의 책임과 선조의 무능함이 크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사수하고 전사한 김시민은 2등에 봉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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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 순절도. 1592. 4. 15. 부산진을 함락시킨 다음날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여 싸우겠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는 팻말을 세우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戰死易假道難'(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비장한 글을 적어 던졌다. 이 그림에는 동래성남문 앞에 떨어진 송상현이 쓴 글과 성을 넘어 도망가는 이곽(?..이름이 지금 기억이 안나는데..동래성의 장수. 후에 결국 적전도피죄로 참형당하는데 저리 도망하면 어쩌겠단 말인지.)의 모습, 성이 함락되자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한 후 한치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는 송상현의 모습등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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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양국의 갑옷 및 병기 비교. 우리 장수의 갑옷은 대부분의 기마민족들이 그러하듯 보호성보단 기동성과 움직임에 중점을 둔 가벼운 형태의 것이고 일본의 것은 오랜 전란을 겪으며 상당히 세심한 방호능력을 가지고 있다. 팔목은 물론 손등까지 덮을 수 있는데다 가면 형태로 얼굴도 박아주는 등 칼 위주의 근접전에 능한 일본의 전술과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장수의 투구와 갑옷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없어져 보존 상태가 훌륭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밖에도 진주성과 진주성 내에 있는 박물관에는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이 정도로 마치고.. 제발 때와 장소를 못가리는 개념 안드로메다 간 인간들이 좀 사라지길 희망해본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뭔가 확 치밀어 오를 때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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