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치 그라모폰 노트








데카 노트



사두고 안쓰는 노트가 몇 개인데.. 그래도 예뻐서 안살 수가 없었다. 특히 도이치 그라모폰의 노란 딱지가 있는 악세사리나 기념품 같은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기에.. 사진 찍으려고 배경 깔다보니 데카 레이블 음반이 나에게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2016.06.27


올해초에 발매된 엘렌 그리모의 'Water'


물을 주제로 한 다양한 곡들이 수록되어있고 '물'이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투명한 판이 아주 산뜻하고 예쁘다.


Thanks to Tom



금/월 휴가를 쓰고 5일만에 회사로 와보니 영국에서 소포가 딱 와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굳이 CD 한 장 달랑 주문한 것인데 EMI에서 나온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1978/1979년 콘서트헤보우 라이브 녹음 음반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슈만 환상소곡집 op.12는 개인적으로 최고다. 신들린 듯한 그녀의 연주가 너무나 강렬해 비교해보고자 사본 다른 음반들에서는 그 느낌을 받질 못했다. 심지어 그녀가 동일한 곡을 연주한 스튜디오 녹음반도 라이브 연주의 그 강렬함이 덜하여 이 곡은 무조건 이 음반이었다. 


고클래식으로 음원을 구입하긴 했는데 너무 좋은 연주라 CD로도 갖고 싶어 뒤져봤으나 알라딘에선 품절. EMI의 5CDs 모음 음반에는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런건 단독반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것 같아 이베이로~  의외로 배송료를 포함해도 상당히 저렴한 신품이 하나 있어 바로 결제해주었다. 그러부터 대략 일주일만에 온 것 같으니 해외배송치곤 상당히 빨리 온 편. 







케이스 내부. 이제는 워너뮤직에 흡수되어 버려 EMI CLASSICS의 빨간색  로고도 더 이상은 볼 수가 없다. 워너클래식의 로고는 안예쁜데 말이지 -_-







곡해설은 늘 그렇듯 같은 내용이 몇개국의 문자로 적혀있고 기대했던 사진 한 장 없다. 아쉽네.




사실 이 음반이 아주 희귀한 거나 인기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소장하고 싶던 음반이었다. 국내에 재발매될 것 같지도 않고 언젠가 또 새로운 편집 음반이 나올 때 꼽사리로 들어갈 확률이 높아 그러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불필요한 음반도 같이 구매하게 되는 셈이라 이렇게라도 구했으니 다행이다. 


이제 남은게 있다면 네빌 마리너 경이 지휘한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길다)의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음반인데, 영화 아마데우스의 첫 인상이 너무 강해 그 느낌을 주는 25번 1악장을 아직 못만나봤다. 아마존에 있긴 하던데 배송료가 아까워 바라만보고 있는게 몇년째. LP로 갖고 있는 아마데우스 OST 판으로 대리 만족 중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재즈 음반, 빌 에반스 트리오의 왈츠 포 데비. 

리마스터링되어180g 중량반으로 출시되었던 걸 사두었다. 이 판의 녹음이 CD와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트랙간의 이어짐이 아주 자연스럽게 처리되어있다는 점인데 첫번째 곡 'My Foolish Heart'가 끝나고 관객들의 짝짝짝 박수소리가 나는데 그 박수소리의 끝과 두번째 곡 'Waltz for Debby'의 시작이 중첩되며 마치 현장에서 듣는 듯한 느낌이 아주 자연스럽다. 


사실 클래식만 주로 듣다 재즈로 외도를 몇개월간 하며 음반도 좀 사보았는데 재즈가 클래식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아 결국 수박 겉핧기만 하다 아주 유명하고 대중적인 음반들만 계속 듣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이 앨범이 나에겐 페이버릿인 듯. 새 걸로 샀는데도 관리 부주의로 기스가 너무 많이 나서 안타깝다;



데카에서 나온 Martha Argerich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이 커플링 되어있다. 꽤 평가가 좋은 명반인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그렇게 좋아하는 곡이 아니라 사지 않았었는데 아르 누님의 연주가 너무 좋다기에 사봤다. 예쁜 사진도 많을텐데 왜 저런 사진을 썼을지 좀 의문이다.





그리고 요요마의 새 음반 'SONGS FROM THE ARC OF LIFE' 피아니스트 캐서린 스톳과 함께한 첼로 소품집. 편안하고 좋은 곡들 위주로 구성이 되어있어 듣기엔 좋을것 같은데 결국 요런 소품집은 잘 안듣게 되던데 이번엔 어떨런지. 최근 음반이니 만치 첼로 소리의 녹음 품질이 우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사본 음반. 






※ 작년 8월쯤에 써두고 저장해둔 걸 이제서야 발견하고 포스팅.. 



 광복절 기념으로 읽을 만한 책이 없을까하고 알아보던 중 눈에 띈 책이 있었다. 바로 이연석이 쓴 "조선을 떠나며"라는 이 책이다. 부제로 '역사 논픽션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가 붙어 있는데 말 그대로 식민지 조선의 지배자였던 일본인들이 패망과 함께 어떤 일을 겪으며 일본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서울시립대에서 한국현대사와 한일관계사를 공부한 저자는 20여년간 해방 후 한반도로 돌아온 이들과 떠난 사람들에 대해 연구하며 그 중 일본으로 돌아간 조선의 일본인들의 에피소드를 엮어 이 책을 쓰게 되었는데 통속적인 역사서가 아닌 개개인의 일기나 회고담, 신문기사 등을 통해 상당히 피부에 와닿는 세밀한 묘사를 보여준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 당선작이라는 영예도 안은 우수작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광복 당시의 모습은 그저 좋아서 만세를 외치며 길거리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이게 다 아닐까? 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 현실적인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항복이라는 표현을 애둘러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전쟁을 마쳐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고 중얼거린 일왕의 이른바 '옥음방송' (옥음은 무슨 ㅋ)을 들은 조선인 중 그것이 일본의 패전 소식으로 알아들은 사람은 의외로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당시 경성의 조선인들의 라디오 보유율은 일본인 보유율 70%의 1/10수준으로 그만큼 라디오를 가진 사람도 적었고 설사 들었다 해도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 줄도 몰랐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인지 광복 당일의 서울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대부분의 증언이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일장기 위에 덧대어 그린 제각각의 태극기가 나붓기고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조금 늦게라도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우리는 그 후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패망한 이 땅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1944년 독일로부터 해방된 파리에서는 레지스탕스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독일 협력자에 대한 즉결 처분과 독일군의 애인이었던 여성들에 대한 조리돌림과 삭발 등의 다소 잔인하기까지 했던 처단들과 달리, 우리는 언제 조선의 일본인들이 학살당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나 있었는가.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않고 곱게 그들을 보내줬던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에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적격이었다.


이 책은 크게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1장. 뜻하지 않은 재앙, 패전

2장. 사면초가에 처한 조선총독부

3장. 잔류와 귀환의 갈림길에 선 일본인들

4장. 억류,압송,탈출의 극한체험

5장. 뒤집어진 세상을 원망하며

6장. 모국 일본의 배신

7장.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른 기억들


 보다시피 목차만 봐도 이 책의 내용은 감이 온다. 하지만 각 장을 읽다보면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여러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어느정도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은 물론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만약 지금 나라면, 우리라면 과연 어떠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 그 누가 자신있게 답할 수 있을까. 후세의 평가는 단호하고 명료하게 내릴 수 있지만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처한 현실 속에서 가치판단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통하여 깨닫게 된 사실 중의 하나는 바로 일본애들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언제나 질서정연하고 도덕과 예의를 중시하고 집단의 가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거라 여겨지던 일본인들도 극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하고 추하며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여과없이 보여주더라는 점이다. 8월 15일 항복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총독 부인 일행이 귀국(도주)할 배편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우습게도 이 배는 부산을 출발하였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다. 그 이유는 이들 일행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가려다 과적으로 배가 기울자 상당량의 물건을 바다에 버려야했고 급기야 기관 고장으로 부산으로 다시 돌아왔던 것인데 이 처럼 권력과 부를 지닌 일본인들은 미군정의 행정력이 미치기 전에 미리 갖은 꾀를 부려 재산을 일본으로 반출하고 탈출하려 했고 이 사실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적잖은 충격과 배신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추한 모습은 곧 나머지 일본인들에게서도 재현되게 되는데 미군이 진주한 이후 미군정은 일본으로 돌아갈 일본인들의 반출 재산의 부피를 한 사람당 짊어질 수 있는 정도로 통제하고 현금 역시 일정액을 이상의 소지를 금해버렸다. 결국 수많은 일본인들이 짐을 쌌다 풀고를 반복하며 최대한의 재산을 가져가기 위해 연습까지 해가며 기를 쓰게 되고 밀선을 통한 탈출도 이어진다. 또한 그 동안은 거래대상으로도 여기지 않았던 조선인들에게 그들의 살던 일본식 가옥과 부피 큰 가재도구와 사치품들을 팔아넘기는데 혈안이 된다.

  이 와중에 우리의 추한 모습도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일본인들이 내놓은 고급 물품들을 조선의 부호들이 눈독을 들이며 사다 모았고 이는 결국 조선내에서 유통될 화폐의 유출로 이어져 경제 질서를 교란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환수하거나 몰수해야할 적의 재산을 유상으로 사들이는 부끄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일본인들의 재산 매도 행위를 금지 시켜달라는 요청을 하자 하지 중장의 답변은 '조선인들이 안사면 될 것인데 자꾸 사니 그런 것 아니냐' 였다. 결국 '니 들도 참 무지하고 답답하다' 라는 짜증이 섞여 있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日帝는 증오하면서도 日製에는 환장하던 당시의 모습은 오늘날과도 사뭇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곧바로 귀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역시 당연히 그들이 패망했으니 모두 돌아간 것이 아니었겠나... 아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2차대전 패전이 곧 우리의 해방이라는 공식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해외 식민지는 유지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놓지 않았다. 특히 조선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해 점령한 지역과 달리 이미 그 전부터 일본에 병합된 곳이었기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더욱 그런 희망이 강했다. 더군다나 이미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에서만 자란 2세들은 그들이 내지라고 부르는 일본 본토에는 가본적 조차 없어 조선은 그들에게 당연한 고향이었으며 이미 경제적 기반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그들이 갑자기 생면부지의 본토로 돌아가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 중 대다수는 정국을 지켜보며 설사 한국이 독립하더라도 외국인 신분으로라도 남아있고자 희망했다. 

 거기에다 일본 정부는 패전과 동시에 해외식민지와 전장에서 수백만의 일본인이 일시에 본토로 귀국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폐허가 된 좁은 국토에 갑작스러운 인구 유입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전후 일본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조선총독부에 될 수 있는한 현지에 남을 수 있게 조치하라는 애매한 지시를 내렸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그야말로 멘붕에 빠져든다. 이같은 일본의 소극적인 송환 노력은 결국 사할린에 남아 돌아오지 못한 우리 동포들의 처지와도 무관할 수 없다. 자국민도 나몰라라 했던 그들이 식민지 징용자들에게 쏟을 정성은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조선에 계속 머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은 돌이켜 생각할 수록 아찔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바램대로 일본이 비록 패전은 했다지만 협상을 통해 인도차이나와 태평양 일대의 군도와 만주나 대만등 승전국의 식민지나 영토만을 반환하고 중일전쟁 이전의 영토는 보장받았다면 우리는 광복도 없이 2차 대전의 종전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랬더라도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들처럼 50년대 말부터 60년대를 즈음해 독립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국가들처럼 여전히 일본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 속에 허덕이고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러한 헛된 희망과 오판으로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순식간에 역전된 그들의 처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는 조선인들을 보고 일본인들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을 느끼고 두문불출하기에 이르렀고 경찰서나 관공서 등에 대한 공격과 테러도 이어졌다. 이 같은 이른바 '불상사건'이 수백건 정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그 상세한 내용과 정확한 피해 현황은 찾을 길이 없었다. (무조건 곱게 보내주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에 고소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각종 공장과 회사, 관공서 등에서는 하루아침에 조선인 직원들이 일본인 상급자들을 몰아내고 '자주관리'에 들어갔으며 개인적 원한에 의한 일본인들에 대한 공격과 테러도 빈번했으며 특히 경찰서 같은 곳은 많은 습격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 상급자 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해방과 동시에 그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인데 이들은 과연 친일파로 단죄해야할 대상인가 아니면 해방 초기 행정력 회복과 건국 준비 과정에 공헌한 자들인가에 대한 판단은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이다.

 적극적인 친일에 앞장서고 일제로부터 남작등의 작위를 받은 인물들이야 변명의 여지도 없지만 일제 치하에서 어딘가의 자리에 앉아 있었단 것 만으로 친일로 몰기에 이 땅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남을지도 고민이고 그렇다고 예외를 봐주기 시작하면 친일이 누가 있겠냐는 반문이 든다. 적극 가담한 자들에게는 엄벌을, 그 정도가 약했던 자들은 그들대로 적어도 어떠한 형태로든 약간의 죄값을 통해 갱생할 수 있는 절차가 있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같은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데는 우리 정치 세력의 분열과 미숙한 행정력을 믿지 못한 미군정의 독단적인 정책(기존 총독부 체제를 통한 행정 관리를 선호했던)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하여튼 해방 후 알다시피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게 되는데 특히 소련군이 진주한 38도선 이북의 일본인들은 비참한 1945년 겨울을 보내야했다. 미군과 달리 소련군은 진주하면서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하고 재산을 압류했으며 남자들은 시베리아 등지로 보내 강제 노동에 종사하게 했으며 일본인 여성들은 능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독일을 점령한 소련군의 만행과 별 다를 것이 없었는데 이 와중에 일본인들은 보통의 선량한 대다수의 일본 여성 보호를 위해 차라리 위안대를 꾸려 소련군에게 보내기도 했다. 직업 여성들을 우선 선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 여성들도 포함되었고 집답 수용소에 수용된 16세 이상의 일본 여성의 숫자와 이름을 소련군은 파악하여 관리하였다. 이를 피하기 위해 나이를 속이기도 하고 머리를 잘라 남장을 하기도 했으며 끌려간 딸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부모들과 소련군에게 능욕을 피하기 위해 자결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도 있다. 

 자기 동포 여성들 마저 자체적으로 선발하여 위안대를 만들어 소련군에게 넣어줬던 그들이 식민지 조선의 여자들을 정신대로 보내면서 과연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생각해본다. 군의 사기를 높이고 현지에서 성군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논리로 동원된 정신대에게 그들이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이처럼 자신들에게 가장 쉬운 해결책이자 소수의 희생을 통해 다수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필요악이었다는 자기 합리화가 너무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련군에 의한 가옥에서의 강제 퇴거 조치, 재산 압류 등으로 45년 겨울에는 북한 지역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다수의 동사자와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소련군의 약탈 행위도 빈번하여 시계나 만년필, 라디오 등을 빼앗기기 부지기수였다. 이 역시 그들에게는 서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벌였던 태평양전쟁에서 수세에 몰리자 무기 생산에 필요한 구리 확보를 위해 제사사 때 사용해야할 제기 마저 약탈해 간 일제의 악랄함을 생각하면 자업자득, 인과응보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여튼 이처럼 북한 지역의 일본인들은 남쪽에 비해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소련군의 군기가 미군처럼 엄정치 못한데서 발생한 빈번한 약탈과 성폭행, 전쟁 보상의 명목으로 공식적으로 실시된 소련의 물자 반출, 그리고 공산주의 진영의 민족주의자들의 정권 장악으로 인한 일본인 및 친일파에 대한 과감한 청산이 이루어진 탓이었다. 

그에 반해 남쪽은 미군의 행패가 거의 없었으며, 한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진영의 능력을 불신한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일제시절의 일본인 및 조선인 관료들이 대부분 그 위치를 유지하며 행정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사정이 나을 수 있었다. 우리의 정권이 아닌 미군정 하에서 우리 스스로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며 극단적인 사회 혼란을 원치 않는 미군정은 행정력 장악과 효율적 통치를 위해 기존의 인재들을 그대로 활용하는 편의를 선택했다. 

 제조업 시설과 철도등 기간 산업 부분에서 일본인 간부들을 밀어내고 이를 접수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들로부터 고급 기술을 전수받지 못하고 단순 노무 및 하급 관리자들이었던 탓에 생산능력이 급감했고 기차도 운행되지 못하거나 정상적인 운영이 되지 못했다. 다른건 몰라도 우리에 비해 일제 청산은 잘했다고 평가받는 북한도 공장이 안돌아가자 결국 다시 일본인 기술자들을 후한 조건으로 복직시켜 공장을 재가동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화려한 환송회까지 열어주었으니 결국 이는 우리의 능력 부족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단 몇년간 점령당했던 프랑스가 나치 협력자들을 엄중 처단한 것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우리의 친일 청산은 편의성이라는 논리에 눌려 너무나도 어물쩡 지나가 버렸으니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어쨌든 패전 후 이처럼 자기들 딴에는 고초를 겪던 일본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결국 자존심을 버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하다는 일본인들의 특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 일본인들은 업신여기던 조선인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 일하기도 하고 잡역에 동원되어 길거리를 청소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오물을 싣고 지나가던 조선인이 일부러 오물을 길에 흘리며 웃고 지나가기도 하고 귀하신 일본 나으리가 이런 일도 하시네요? 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꾹꾹 참아낸다. 더럽다고 손님으로 받지도 않던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목욕탕을 빼앗아 운영하자 그 밑에서 일을 하기도 하던 모습에서는 사실 '고소하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통쾌함마저 들지만 일개 개인의 운명에서만 한정해서 보자면 연민의 정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국 국가가 힘이 없을 때 그 국민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렇게 고생 끝에 일본으로 돌아간 조선의 일본인들은 본토로 돌아가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전쟁 내내 지속된 공습으로 일본의 대도시는 잿더미였으며 해외 전선과 식민지에서 귀국하는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로 인해 일본의 인구는 급증했고 주택과 식량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항복 당시 조선총독부와 만주등에 최대한 현지에서 버티라며 그 곳의 일본인들이 본토로 귀환하는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본토인들은 식민지에서 돌아온 일본인들에게 식민지에서 호의호식한 부류로 취급하며 전쟁 때 날마다 공습과 전시 동원에 시달린 자신들에 비해 그 정도는 고생도 아니라는 차가운 시선을 보냈고 그들로 인해 부족해질 일자리와 식량, 주택 등을 이유로 문제아 취급했다. 여성들의 경우는 기타규슈의 하카타항에 내리자 마자 항구에 설치된 부인과에서 검진을 받고 필요시 강제 낙태 시술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식민지에서 소련군이나 미군에게 정조 마저 잃은 여성들이라는 낙인마저 씌운 행위였다. 마치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공녀들이 화냥년이라 불리며 오히려 멸시받았던 우리의 과거와도 꼭 닮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조선에서도 본토에서도 미운 털이 박힌 그들은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범죄를 일으키는 등 사회 문제도 만만치 않았으며 6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패전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잃어야했던 재산에 대한 보상을 청구했다가 패소하기도 한다. 전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측불가능한 전 국민이 입은 피해의 하나로서 헌법이 그 부분까지 보장할 수는 없다는 논리인데 이처럼 자국민들의 요구마저 묵살하는 일본이니 우리 강제 징용자들의 보상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경성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경성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야기도 많이 언급된다. 명동, 충무로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은 신식 문물과 함께 풍족한 삶을 즐겼으며 충무로 일대는 당시 도쿄의 긴자 거리 못지 않게 화려했다고 하니 경성의 일본인들은 좋았던 시절을 지금도 추억하는 이가 많은 모양이다. 그 시절이 그리워 한국의 서울로 딸을 데리고 여행온 일본 할머니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충무로, 명동 일대를 딸들 앞에 서서 자신있게 안내하며 '아 이 건물은 아직 남아있네. 엄마가 어릴 때..' 뭐 이런식으로 돌아다니던 그 할머니가 종로와 청계천에 이르러서는 어디로 가야할 줄 모르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종로와 청계천 쪽의 조선인 거주지로는 나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그들의 집단 거주촌에서 그들끼리 어울렸고 더럽고 지저분한 조선인들이 많은 곳에는 갈 일도 가본 일도 별로 없으며 조선인들과 얘기를 하고 지내는 경우는 그 쪽이 부유하고 세도가 있어 상당히 일본화된 경우였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관심조차 없으며 존재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끼리의 신천지에서 1등 신민으로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했으며 그러니 광복과 동시에 갑자기 숨죽여있던 조선인들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이 책은 여러 개인들의 다양한 관점과 경험들을 아주 짜임새있게 배치하고 활용하여 광복 후 몇 년간 일본인들이 겪었던 일들을 피부에 와닿게 얘기해준다. 그러나 이 책이 진정 가치있는 이유는 일본인들의 이야기와 기록에 바탕을 두어 글을 풀어 나가되, 우리의 관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증언에 기반한 책은 자칫 잘못하면 감상에 치우쳐 동정을 느끼게 하거나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나도 모르고 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렇게 살짝 정신줄을 놓을만 할 때 저자는 준엄하게 심판하듯이 무게추를 바로 잡아 준다. 개개인의 비극은 안된 일이긴 하지만 36년간 우리 민족이 겪었던 비극과 설움에 비하면 그 정도는 무겁지 않으며 그 기간도 대단히 짧았으며 그 무엇보다 그 원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일본 그들에게 있음을 이 책은 분명히 얘기해준다. 





 

Beethoven Masterworks / Deutsche Grammophon  / 50CDs + Bonus CD / Original Jacket Covers / 2013

 

 

최근 몇년간 클래식 음반 시장에는 이런 박스세트가 넘쳐나는 듯 하다. 최근 국내 회사에서 기획한 카라얀 60 / 70 시리즈를 비롯하여 데카 사운드, DG111, 빈필 교향곡집, 뭐 등등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박스반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데 단점이라면 일단 한번에 지르기는 가격이 부담스럽고 불필요하거나 기존의 음반과 겹치는 레파토리가 생긴다는 점과 앨범 한장 한장에 대한 애착이 덜하게 되고 결국 잘 안듣게 된다는 점인데 

 

반면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한 가격으로 상당한 레파토리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 Go Classic에서 WAVE음원으로 구입하면 물론 이보다 저렴하지만 CD 1장에 3천원 정도밖에 들지 않으니 클래식 입문자들에게 박스반은 축복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이것처럼 오리지날 커버를 사용한 시리즈는 낱장으로 구입했을 때와 앨범 커버까지 같으므로 완전 편집반보다는 만족감이 더 높은 편. 사실 베토벤의 곡들은 음원으로나 음반으로나 이미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데 막상 CD나 LP로 가지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Go Classic에서 구입한 WAVE파일들은 사실 굽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만 역시 ALAC로 변환하여 아이팟 클래식에서만 듣게되더라는.. 

 

결국 계속 듣게될 음악은 CD로 구하는게 좋을 거 같단 생각에 이번에 DG에서 출시한 베토벤 마스터웍스 정도는 구해둬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고 결국 어제 배송받았다. 한달도 전에 빌헬름 켐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과 바렌보임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지른지라 억울했지만 남아있는 바이올린 소나타 전 곡, 첼로 소나타 전 곡, 현악4중주 전 곡, 피아노3중주 전 곡, 아직 구입못한 교향곡 1,2,8번 등등을 따로 사는 거에 비하면 그래도 이게 남는 거 같았다는 자위를 하며..ㅠ

 

 

 

 



 

박스를 개봉하면 이렇게 LP미니어쳐로 담겨진 CD 51장이 빼곡히 들어있다. 요즘은 화려한 박스세트도 많은데 얘는 그다지 볼 건 없다. 그냥 음반만 빼곡히..

 

 

 

 



 

베토벤이 살아나서 사인해줬을리도 없고 그냥 인쇄된 베토벤의 사인.. 이 박스반도 나름 한정판이다만 어차피 이런 전집류는 앞으로 어떻게든 다시 나올 것이기에 목맬 필요는 없다. 워낙 박스반들이 많이 나오기에 냉철한 판단으로 지를 것과 패스할 것을 골라야하는 시대인듯 하다. 클래식에 막 관심갖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무조건 박스반 사라고 하고 싶다.

 

 

 

 



 

안에 들어있는 얄팍한 책자. 별로 두껍지 않은 걸로 보아 별 내용없겠구나 싶었는데..

 

 

 

 



 

역시 별 내용없다. CD 순으로 트랙 및 녹음 정보가 담겨져있다. 

 

 

 

 



 

교향곡 전 곡. 아바도의 1,2번과 전설의 명반인 클라이버의 5,7번. 가디너의 3번 '영웅'과 4번, 번스타인의 6번 '전원'과 8번, 그리고 카라얀의 80년대 녹음 9번이다. 이 중에서도 이미 클라이버와 카라얀의 녹음은 기존에 갖고 있던 녹음과 완전히 겹쳐 버렸다. 알고 샀지만 좀 억울하다. 리마스터링의 차이가 있을리도 만무하고. 흠.. 9번은 카라얀 말고 다른 걸로 넣어주지. 

 

 

 

 



 

똑같은 녹음의 카라얀 지휘의 교향곡 9번. -_-;   같은 카라얀 지휘라도 60년대나 70년대 녹음이었음 좋았을텐데 같은 80년대 녹음이다. 

 

 

 

 



 

CD는 오리지널과 차이가 많다. 박스반이다 보니 CD의 디자인은 모두 통일이고 넘버링이 되어 있다. CD에 프린트된 녹음 정보도 개별 발매반이 당연히 더 풍부하다. 

 

 

 

 



 

다음으로 겹치는 음반 중 하나인 에밀 길렐스의 피아노 소나타. 원래 음반에는 8번 '비창', 13번,  14번 '월광'인데 여기에는 8,12,13,14가 들어있다. 좀 헷갈리는 부분. 그래도 DG 본사에서 직접 발매한 박스반인데 커버만 오리지널을 사용하고 음원은 멋대로 편집하진 않았을거라 생각해본다. 

 

 

 

 



 

한가지 참고해야 할 점. 베토벤 마스터 웍스를 판매 중인 일부 국내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피아노 소나타 전 곡이 수록되있다는 표기를 해두었는데 보니까 아니다. 사실 DG 홈페이지에도 'Complete'라는 표현이 없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위 사진의 8장 짜리 빌헬름 켐프 연주 전곡 녹음 음반과 비교해보니 비는게 제법된다. 뭐 물론 제일 유명한 8번, 14번, 17번, 23번 같은 유명 곡들은 누락되지 않았기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매니아가 아니면 크게 문제되진 않을 것 같지만 교향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4중주 등등이 모두 Complete임에 반해 피아노 소나타에만 누락이 있는 건 다분히 고의적이라 보여진다. 

 

뭐 어쨌든 16만원 정도에 베토벤 레파토리를 끝냈다. 정말 좋아하는 곡은 어차피 개별 음반을 사서 더 들어보는게 정답이고 박스반은 한방에 빠르고 편하게 레파토리 구축을 해주는 것 같다. 얘네 리핑은 언제 하나.

 

 

                                                                             2013.03.02




※ 아래 문의 주신 분을 위해 피아노 3중주 CD 자켓 사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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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의 악마들 : Peter Hopkirk 지음 / 김영종 옮김 (원제 : 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

 파미르 고원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인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어릴적 즐겨 읽었던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왔던 그 지명만은 생생히 기억에 남는 걸로 봐서 파미르 고원은 세상의 지붕이라는 인식 처럼 뭔가 신비하고 모험이 가득한 그런 이미지로 내 뇌리에 남아있는가보다. 그 파미르 고원을 넘어 고대부터 중국과 로마를 이어주던 문명의 교통로 '실크로드'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실크로드를 걸었던 대상들의 무역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룬 책은 아니고 20세기 초반 이루어진 서구 열강의 실크로드 유적 탐험 / 발굴기다. 보다시피 책의 제목 위에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라는 글귀가 적혀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다분히 서구사회에서 바라본 시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 책의 진정한 주요내용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과 러일전쟁 이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일본의 중앙아시아 '문화재 약탈사'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중국의 서쪽 변방인 타클라마칸 사막과 텐진(天山)산맥 남단에 흩어져 있던 실크로드의 주요 교역로에 위치했던 찬란한 문명들의 유적지들이 수세기 전 급격한 사막화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가 서구 열강의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고 화려한 벽화와 수많은 조각상, 한자,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으로 적혀진 많은 고문서들이 어떻게 대영박물관과 루블박물관 등지에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는지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에 등장하는 스타인, 펠리오, 르쿡 등 열정적인 탐험가들은 개인적인 학구열에 의해, 자국의 문화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의해, 혹은 '주인없는' 화려한 유물들에 대한 소유욕으로 갖은 고생을 마다 않고 지금도 사람의 발길을 들여놓기 어려운 황량한 땅에 도전했다. 이 책은 1981년 영국에서 첫 출간이후 영국 도서상의 논픽션 부분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단순히 인문학적, 고고학적 수준을 넘어서 한 편의 소설을 보기라도 하는 듯 다이내믹한 전개와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물론 여기에는 깔끔한 번역과 저자의 오류를 바로 잡아준 주석을 아끼지 않은 김영종씨의 노력도 일조했다. 또한 지명이 낯설어 적절한 공간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을 출판사측에서 인지했었는지 부록으로 실크로드 일대의 지도도 들어있어 푸짐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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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의 인쇄수준은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지만 당시 탐험대에 의해 직접 촬영된 유적지의 발견 당시의 생생한 사진들이라 그들이 느꼈을 흥분된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충분이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이들이 발견할 당시 대부분의 유적들은 바람을 따라 이동하는 사구에 묻혀 높은 부분만이 간신히 남아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 유적지를 발굴하기 위해 이들은 현지의 유목민들을 인부로 고용해 모래를 퍼내고 건조한 기후 속에 모래에 파묻혀 훌륭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수많은 유물들을 수집하여 낙타나 말에 싣고 떠났다. 심지어 이들은 사원의 벽에 그려져있던 수많은 불화(佛畵)들을 표면 그대로 떼어 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화려한 벽화들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안료의 비밀을 밝히고 그리스 양식이 동양으로 퍼져가던 미술사적인 측면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오늘날 중국에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서양 학자들에 의한 유물 반출은 중국 인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사안이 되고 있다. 그 유명한 돈황석굴에서도 스타인과 펠리오 등의 학자들은 이 곳 사원을 관리하고 있던 승려를 감언이설로 매수하여 귀중한 불경 필사본을 수천본이나 가져갔으며 이 곳에서도 벽화를 뜯어가버렸다. 이 중에는 우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로 알려진 '금강경'도 있었다.(역자는 여기에도 주석을 달아주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이들이 한 행위들은 자국 문화재의 도굴이나 다름이 없었다. 20년대에 접어들어 중국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유적 발굴을 엄격히 통제했고 이 후 서양 탐험대는 발굴에는 참여할 수 있어도 그 어떤 것도 반출해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20여년에 걸쳐 가져간 수많은 유적들은 지금도 대영박물관과 루블박물관 등에서 전시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전세계에서 3번째 정도 손꼽히는 양과 질적으로 뛰어난 중앙아시아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일본의 오타니 백작이 이끄는 스파이인지 탐험단인지 모를 일본의 발굴단에 의해 수집된 것인데 일제 시대에 서울의 박물관에 보관되게 되면서 얼떨결에 우리의 소유가 된 것이라고 하니 이건 역사의 어부지리라고 해야 하는지..

 저자는 이 책 속에서 줄곧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발굴활동이 도굴이나 다름없는 도덕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사실임에도 그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며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인디애나 존스에서 느껴지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에 젖어 우리의 입장이 어느 쪽인지 망각하기 쉽다. 우리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당했던 역사가 있기에 이 흥미진진한 탐험기를 읽으면서도 맘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 때 그나마 그들이 가져갔기에 이렇게 연구되고 박물관에서 훌륭한 보존처리를 거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2차대전 당시 베를린이 폭격당하며 수천점의 귀중한 유물이 사라진 것을 보면 그 주장도 그리 떳떳하긴 어려울 것 같다.

 약탈이냐 발굴이냐. 이에 대한 입장 차이는 분명하겠지만 그러한 가치 판단은 제쳐두고라도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다. 실크로드 혹은 중앙아시아 내륙에 존재했던 다양한 민족들이 남긴 문화 유산을 알게 되면서 황량한 사막과 만년설이 뒤덮인 험준한 산맥 속에 야크나 낙타 떼나 몰고 다니는 유목민 밖에 없다고 여겨왔던 그 땅에도 화려한 문명과 생명력 강한 민족들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특성상 이 책에 이어 '유목민 이야기 - 김종래 著'를 읽고 있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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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하고야 말았다. ㅎㄷㄷ  창간 이래 수십년간 다큐 사진의 전성기를 이끌어간 주간지 '라이프'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세계 각국에 파견된 뛰어난 사진작가들로 부터 원고를 받아 생생한 현장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전달해 준 라이프. 특히 전쟁과 보도사진은 떼놓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2차대전을 거치면서 라이프는 급성장하게 되었는데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오마하 비치에서의 유명한 사진들도 라이프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갔다.

 자유 베트남 패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 라이프가 수십년의 화려했던 시절을 접고 폐간을 선고한 이후 이제 다큐사진은 끝났다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라이프는 오늘날 가판대에 넘쳐나는 수준 이하의 주간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다큐 사진에 관심을 가진 이 후로 라이프는 한번쯤 꼭 보고 싶은 잡지였다. 이 녀석의 실물을 처음 본 것은 작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로버트 카파展에서였는데 카파의 사진이 표지로 씌여진 라이프지가 유리액자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처음 느낀 것은 '생각보다 꽤 큰 판형이다'라는 생각이었고 한번 펼쳐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다시 라이프는 기억속에 잠들어 있다가 여름 즈음부터 나의 라이프 찾기는 시작되었다. 뜨거운 어느 여름 오후에 대구의 헌 책방 골목을 돌아다녀봤지만 라이프가 뭔지도 모르는 가게들에서 적잖은 실망만을 느끼고 말았고 미국에 나가있는 지인에게도 연락해보았으나 역시 구하기는 쉽지 않은 모양. 동대문 일대의 헌 책방들을 한번 뒤져야겠단 생각을 하던 중 일단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로 하고 나섰다. 인터넷상에서 영업 중인 헌 책 전문사이트는 수십군데나 있었지만 라이프로 검색하면 나오는 것은 대부분 라이프 폐간 이후 80년대 초에 한국일보와 타임-라이프에서 펴낸 단행본들이었다. 수십년간의 라이프지에서 엄선된 작품들이 주제별로 4권이 발매된 사실상 엑기스라고도 볼수 있지만 이 시리즈는 생각보다 구하기가 쉬운 편인 반면 정작 찾고 있는 라이프는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슬슬 눈도 피곤해지고 평소 같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만한 충분한 시간(약 2시간)이 넘어갈 무렵. 그 날 따라 왠지 오기가 생기더니만 드디어 6권의 라이프지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 순간의 벅참이란 이제까지 겪어봤던 그런 것과는 다른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고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6권을 모두 쓸어담아 결제해버렸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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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녀석들이 그 6권. 68년 12월 23일판은 나름 연말특집판 같은 스페셜 에디션이라 횡재한 기분이다. 마거렛 버크 화이트의 사진이 표지를 장식한 창간호나 종간호를 구하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잠깐 든다 ;;  이 6권들은 모두 67년 부터 70년 사이에 판매된 것들로 무려 40년이 넘은 AUGUST 21 / 1967 부터 MAY 25 / 1970 이 가장 최신(?)판. 조금 안타까운 것은 오리지널 미국판이 아니라 아시아판이라는 것인데 그런것 따질 만큼 구하기 쉬운 물건이 아닌 듯하기에 이거라도 구한 것에 감사. 사실 내용면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보이고 지면에 할애된 광고들에서 좀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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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 펜탁스의 걸작 SPOTMATIC광고, 펜탁스 외에도 캐논, 야시카, 페트리 등등 카메라 광고가 참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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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시대이기에 단연 월남전 기사가 많다. 베트남의 古都 HUE시 전투에서 부상당한 이 미군들의 칼라사진은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지나치게 리얼한 이미지가 반전 운동의 불을 지펴주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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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월남전 당시 케산 고지의 미군 방어진지의 모습. 사진이 주가 되는 잡지답게 넓은 양면을 가득 채우는 사진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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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처럼 흥미로운 기사도 있다. 1970년 5월 25일판으로 2차대전이 끝난지 불과 25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느껴지는 히틀러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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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권 중 한 권은 안국동 로타리에 있었던 協同書店에서 팔렸던 모양이다. 이 라이프 아시아 에디션의 앞 표지에는 국가별 가격이 그 나라의 화폐 기준으로 표시되어있는데 1967년 당시 한국은 70 Won이 정가였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버스비가 3원 정도였다고 하니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을듯. 더군다나 주간지인데도 말이다.

 사실 이 녀석이 회사로 도착한 후 너무너무 뜯어보고 싶었으나 이건 주위 사람들이 도저히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이해해 줄리 만무하다는 생각과 아무 생각없이 들쳐보다 찢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에 집에 와서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역시나 오랜 세월을 거친 책이라 손에 새까맣게 먼지가 묻어나지만 전반적인 보존 상태가 썩 훌륭한 편이라 돈 아깝단 생각은 안드는 중. 사실은 38년도 판 라이프도 한 권 찾았었는데 무려 9만원에 육박하는 가격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값을 떠나 국내에서 이제 라이프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더이상 취미의 범위가 고서 수집 쪽으로 확장되지 않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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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칼 : 문학동네 / 김종록 저 / 2002년 / 12,800원


 바이칼에 대한 서적은 국내에 정말 드물다. 비단 바이칼 뿐 아니라 시베리아를 비롯한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의 정보는 정말 부족하기 그지 없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소련,몽골,중국 등)에 속했던 지역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인류학, 지리학적으로 비인기 분야의 출판은 여전히 어려운 국내의 현실도 무시할 수 없을듯.

 몽골 / 바이칼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은 정보 수집이었다. 과거 두차례의 해외경험(베트남, 일본)의 경우에 충분치 못한 사전 정보수집으로 결국 보는 만큼 느끼지 못하고 돌아온 일은 안타까운 것이었다. 오히려 귀국 후 살인적으로 두꺼운 '호치민' 전기를 읽고 '세키가하라 전투', '올빼미의 성'과 같은 시바료타료의 일본 역사소설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전기를 읽는 뒷북을 둥둥 쳐야했다. 이번에는 되풀이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관련 서적을 찾았지만 정말 마땅한 서적을 발견하지 못하던 차에 유일하게 한 권을 만나게 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은 소설가 김종록의 몽골 / 바이칼 일대의 여행기다. 여러차례 다양한 사람들과 바이칼 일대를 여행하며 겪고 듣고 느꼈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어찌보면 이번에 내가 다녀온 여행 코스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몽골에서 바이칼로 향하는 루트가 가장 무난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목차를 간단히 살펴보자면..

서문 : 우리 영혼의 바탕골, 바이칼

1. 나는  왜 북방의 하늘을 보았는가?
2. 호 반 의  도시   이르쿠츠크  통신
3. 숲   의     귀   족,   자  작  나  무
4. 물  의  천 국 (天 國 ),  바  이  칼
5. 알   혼   을     노    래    하    라
6. 환  바  이  칼    철  도   위 에 서
7. 북 두 칠 성 의  고 향 을 찾 아 서
8. 대  지  의    신  은    평 안 하 다

후기 : 세계로 뻗어가기 위한 뿌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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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지 국립공원의 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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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을 할애하는 화보도 충실한 편>


 책을 구입함에 있어 의외로 상당히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표지 디자인과 내지(內紙)의 질, 시각자료의 유무 등을 들수 있는데 이 책의 경우 표지 디자인은 뭔가 좀 촌스러워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먹고 죽으려해도 바이칼에 관한 책은 이 것이 거의 유일무이한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괜찮은 인쇄질과 다양한 사진들로 바이칼을 답사하기 전에 꽤 유용한 자료가 되기도 했다.

 책 속에는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 바이칼 일대의 원주민 부리야트족, 예벤키족의 문화, 우리와 많은 연관이 있으리라고 여겨지는 샤머니즘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인류학적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한 전문성이나 심도는 깊지 않아 결국 다른 책을 찾아보고 싶게 만든다. 사실 여행기에서 그 정도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 과한 것이겠다. 어쨌든 이 정도 내용만 숙지하더라도 현지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은 크게 달라질 것이며 실제 가이드들이 설명하는 이야기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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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브리스트들을 따라 시베리아로 왔던 여자들의 이야기>


 다만 이 책의 저자 김종록씨는 문학하는 사람이라 너무 감성적인 것인지 좀 100%까지 동감하기 어려운 지나친 감정의 비약도 많이 보이고 바이칼을 우리 민족의 원류로 여기는 시각이 강하다. (이 사람은 바이칼 여행을 거의 성지순례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다) 전반적인 문체도 굳이 감상적으로 쓰려는 듯한 무리가 보이는 등 그리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라 내게는 읽는 맛이 쏠쏠한 맛깔스런 글은 아니었지만 출판 자체로 감사해야할 바이칼을 다룬 책이라 이 지역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할만한 책이다.

사실 이 책 말곤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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