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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

원폭 피해 현황과 처참한 사진자료들을 보고 있는 일본인들



한국하면 아직도 한국전쟁을 떠올리는 외국인이 많다는 뉴스를 가끔 접하곤 한다. 내심 못마땅해 불쾌해 하기도 하고 올림픽 / 월드컵을 거치면서 그러한 부정적 인식을 떨쳐버리고 있음을 뿌듯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는 원자폭탄이지 않을까? 워낙에 충격적이었던 인류가 만들어낸 가공할 무기의 첫 실전 사용이었기에 그들이 원치 않더라도 타인의 인식 속에서 잊혀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율을 경험한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시 예상되는 인명 피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이는 때마침 개발된 신무기를 써보고 싶은 유혹을 더욱 부채질 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용으로 특수 개조된 4발 중폭격기 B-29 '에놀라게이'호가 날아가 작고 길쭉한 모양 때문에 '리틀보이'란 별명을 붙은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항복이 없자 3일이 지난 8월 9일 통통한 형태라 '팻맨'이라 별명이 붙은 두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이 가공할 무기는 수 만명의 목숨과 도시를 한 순간에 새까만 재로 만들어 버렸고 이에 굴복한 일본은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그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던 나가사키의 평화공원과 원폭기념관에는 원폭 투하 전 평화로운 시내의 전경부터 시작해 원폭 투하 직후의 폐허가 된 시내의 모습, 불에 타 쓰러진 시신들, 생존자들의 절규, 환자 구출 및 필사의 복구 활동, 원폭의 위력과 공포, 폐허 더미에서 가져온 잔해, 원폭이 폭발한 순간 멈춘 시계 등등을 전시하여 관람객들의 가슴을 교묘하게 무겁게 만든다. 마치 일본인들이 전쟁의 피해자인양. 정말 인류에게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단 느낌이 들도록. 더군다나 더 가관인 것은 '미국 너네가 원폭을 떨어뜨려 우리만 죽은게 아니다. 봐라 괜한 외국인들도 이만큼이나 죽었다.'라고 얘기하는 듯한 외국인 원폭 피해 현황도 있는데 그 중에 한국인이 가장 많음은 뭐라 설명해야 할런지.

아직도 끊이지 않는 헌화와 편지들에는 No War, Peace, Love 등 좋은 말은 다 적혀있었다. 과연 원폭 폭발 중심지의 평화공원에서 일본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잔인한 식민지배와 중일전쟁과정에서 일어난 남경대학살 등의 참상은 알고서 저리도 침통한 표정을 짖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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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캐널시티

그다지 흥미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간 김에 한번 들리기라도 하자며 잠깐 스쳐지나간 후쿠오카 캐널시티.
써커스 중인 곡예단인데 일본인들도 그리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진 않는 듯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곡예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고 자극적인 것들이 지천에 널려있으니 뭐.

노출이 나올거 같지 않아 거의 쓴 적 없는 T3의 내장플래쉬를 강제 발광시켜봤는데 나름 적절한 사용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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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정말 일본'틱'했던 母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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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일본 후쿠오카


요번 일본행에서의 칼라사진은 후지의 대표적인 정색재현용 포지티브 Provia와 Contax T3가 맡았다.
사실 이 조합은 나로선 약간의 도박이었다. 일단 후지 프로비아는 나와 궁합이 안맞는 편이었다. 이상하게 정색재현용이란 이미지 때문인지 프로비아로 찍은 사진들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고 어차피 슬라이드라면 화려하게 가자는 생각으로 벨비아나 E100VS같은 Vivid계열만을 선택했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고급 P&S이라고 해도 어쨌든 똑딱이인 T3에 관용도 좁은 슬라이드를 넣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번의 그 시도는 아주 성공적. 의외로 프로비아와 T3의 눈 Carl Zeiss
35mm 2.8 T* Sonnar의 궁합은 참 훌륭했다. 차분한 편인 프로비아와 짜이즈 특유의 쨍함이 만나 적절한 수준의 톤과 색감을 만들어준 듯. 첫 번째 사진은 특히 나무 기둥의 질감이 참 기막히게 표현된 것 같다. 사진의 내용과 주제도 중요하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스캔빨잘 받고 색감이랑 톤이 맘에 든단 이유만으로 괜히 혼자 뿌듯뿌듯할 때도 있다.

노출계도 없는 수십년 된 카메라들을 쓸고 닦고 만지며 재미를 느끼기도 하지만 T3처럼 누르기만 하면 되는 똑똑한 녀석도 귀엽긴 하다. 앞으로 종종 슬라이드 물려줄 생각  :)


※ 사진들은 후쿠오카의 첫 날 열심히 삽질하며 돌아다니다 만난 아담한 작은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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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완전 역광이 되는 상황에서 보여준 비오곤의 플레어. 그다지 보기 싫지는 않다. 전용 후드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구하기도 어렵고 있다해도 가격은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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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
메가네바시(めがね橋)를 찾아가던 중.

나가사키 시내를 가르는 청계천 만한 개울에는 오래된 홍예교들이 여럿 놓여있는데 더 인상적인 것은 다리 아래 개울에는 잉어들이 돌아다니고 있더라는 점이다. 사실 구마모토성의 해자에도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는데 도심을 흐르는 개울도 관리가 잘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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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

뜨거운 햇살에 녹초가 되었던 날.
텐슈가쿠(天守閣)에 올라갔다 내려오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줄은 예상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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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기타오카신사(北岡神社)

현재 일본 천황(天皇)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 원년은 서기 1989년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일본 내에서는 많은 곳에서 쓰이고 있었다. 우리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늘 사용해왔고 우리나라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시절에 들어와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역사를 배우면서 임진왜란은 선조25년(서기1592년)이라는 식으로 불리지만 고려 / 조선을 거치면서 동북아 일대에서의 정치 문화적 흐름상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리라.

일본은 16세기 이후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 문물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19세기 즈음에 이르러서는 일본이 중국이나 조선보다 우월한 국가라는 인식이 두터워졌으며 페리 제독의 미국 함대에게서 굴욕적 불평등 조약을 맺은 후 빠르게 서구화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표되는 지식층은 탈아시아론을 내세우며 서구를 지향한 부국강병을 시도했다. 못된 것부터 배운 일본은 운요호 사건등을 일으키며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며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무찌르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며 러일전쟁 마저 승리한다.

이러한 일본의 자신감의 바탕을 이루는 한가지는 고대로 부터 일본의 정권은 천황을 그 정점으로 하여 바뀐적이 없다는 유래깊은 정통성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명목상 천황이 임명하는 최고 통수권자로 엄밀히 말해 일본의 왕이 아니라 오늘날 일본으로 치면 총리와도 같은 칸바쿠였다. 물론 이들은 조선과 중국과의 외교상에서 일본왕 혹은 일본대장군등으로 칭하며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일인자임을 자처했다. 반면 천황은 실질적으로 힘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음에도 일본은 수시로 유목민족에게 중원을 내주었던 중국이나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이 교체되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이야말로 정통성을 갖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원자폭탄 두 방을 얻어맞고 히로히토 천황이 '저는 신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라며 일본 국민의 전면적인 파멸을 막기 위해 연합군에게 항복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을 했음에도 천황은 여전히 정신적 지주로 남아있으며 헤이세이 연호는 잘도 쓰이고 있다. 우리 역시 해방 후 단군기원의 단기를 썼지만 박정희정권 시절 국제적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사실 기독교 문화권의 서구 사회에서 서기를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우리가 왜 서기를 써야하는지는 탐탁치 않다. 국제적으로 통일된 년도는 있어야하지 않냐고 반문한다면 일본처럼 병행 사용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이제와서 이런 얘기 꺼내봐야 좋은 얘기 돌아올 것은 별로 없을듯..

(열심히 떠들었지만 사실 나도 올해가 단기 몇년인지 모른다. 사천삼백몇십몇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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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장수국가로도 유명한 일본은 노인인구의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로 앞으로 우리 역시 동일한 형태의 연령구조가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건강하고 오래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고와 가치관이 건전하고 세련된 노인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며 우리도 그렇게 늙어가야 하겠다. 그런면에서 정갈한 옷차림으로 조용조용한 대화를 나누며 서있던 이들은 참 인상적이었다.

물론 깔끔함의 나라 일본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니다. 전철 역 앞에 널부러져서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노인들도 있고 담배 꽁초 중 긴 것을 찾으려 쓰레기 통을 뒤지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 비해 교양 수준이 높고 매너있는 노인들은 분명히 많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늘 倭놈이라고 비하하던 일본인들에게 국민소득은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 의식수준 면에서 우리는 오히려 배울 면이 많다. 일제시대라는 단절기를 통해 인,의,예를 숭상하던 품격높은 가치관을 잃어버린채 근본없이 헤매이는 우리의 정서와 가치관이 더욱 아쉬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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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이번 규슈 여행의 성과 중 하나는 평소 좋아하지 않던 RDPIII와 T3의 궁합이 꽤나 훌륭하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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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長崎)

스와신사의 휴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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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 나가사키(長崎)


우리나라에서는 60년대에 사라졌다는 전차가 아직도 유효한 교통수단으로 애용되고 있는 일본.

우리의 버스 중앙차선제와 비슷한 형태로 운용중인데 분명히 구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전차를 아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걷기엔 멀고 버스를 타기엔 가까운 정도의 거리를 타기에 제격. 요금은 구간 상관없이 100엔으로 저렴한 편이다. 더군다나 나가사키 역에서 1일 500엔 패스를 끊으면 하루종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 5번만 타면 된다며 충분히 본전을 뽑으리라 자신했건만 6번을 타며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었었다.

국내의 철도 매니아들이 전차를 타보기 위해서 일본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전차와 같은 감성적 사회 인프라도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비단 이 전차뿐이 아니라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는 근본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정말 대조되는 부러운 모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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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長崎)  메가네바시(めがね橋) 근처

일본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2년이라는 시간을 군에서 보내야 하는 우리와 비교해볼 때 그들은 더욱 자유롭고 여유로운 자신의 인생설계와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앞날에 '군대를 가게 된다면..' 이라는 걱정은 없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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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3  구마모토

가토 기요마사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일본인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인상적인 무장으로 우리에겐 악명이 드높았지만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는 물론 도요토미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무공으로 유명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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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02  후쿠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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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03  구마모토

하카타역에서 1시간 반 정도 쓰바메 특급을 타고 도착한 구마모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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