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29 포항


칠포해수욕장 가는 길 근처의 '베네치아'라는 레스토랑에서 찍었던 해질 무렵의 바다


니콘답지 않은 부드러운 색감이 찍어놓고도 인상적이었다. 

한 주의 시작을 깔끔하게 휴가로 시작했다.

와이프 출근시켜 준 뒤 어디 멀리 가긴 뭐해 미뤄왔던 차 틴팅이나 하려고 루마 공식 대리점에 차를 맡겼다. 작업 소요에 3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거기서 기다릴 순 없어서 여기저기 도보로 돌아다니며 대충 막샷을 날려댔다. 간만에 차가 없이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으니 예전처럼 길거리에서도 계속해서 뭔가를 찍기 위해 눈을 번득이던 시절이 떠올랐다만 날씨가 더워서인지 솔직히 다 귀찮더라.. 괜히 무겁게 롤라이플렉스는 왜 챙겨 갔을꼬.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더워서 점심은 시원한 걸로.  부산이 태생이지만 경주에도 유명한 집들이 꽤 많은 밀면이다. 처음 먹었을 때는 참 맛있었는데 몇 번 먹고나니 그냥 그렇다. 면류는 거의 다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냉면 사촌들은 내 입 맛에 그다지 맞지 않는 듯. 어쨌거나 한그릇 뚝딱 헤치우기는 좋다.

 

 

 

 

 

 

점심 후 또 걸어걸어 꽤 좋아하는 커피 전문점인 '슈만과 클라라'에서 시간을 떼우기로 했다. 저녁에만 가봐서 벌건 대낮에 가니 어색하다.

 

 

 

 

'슈만과 클라라'라는 가게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곳 사장님은 클래식에 상당히 조예가 깊으신 듯 하다. 빼곡한 CD와 LP들은 물론 책꽂이에도 음악 관련 서적들이 즐비하다. 들어보고 싶은 앨범들이 많았지만 들려달라면 들려주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따뜻한 걸로 마실까 하다가 그냥 아이스로. 책꽂이에 꽂혀있던 음악 서적들 들춰보면서 한 시간 정도 잘 노닐었건만 갑자기 나타난 아줌마 무리들이 시끄러운 사투리로 마꾸 떠들어대서 바로 일어나버렸다.

 

 

 

 

또다시 한 30분을 걸어걸어 최초의 틴팅 가게로. 도착했을 땐 마지막으로 전면 유리에 필름을 붙이시는 중이었다. 차 출고시 영맨이 해준 싸구려 틴팅은 결국 색이 다 날아가 거의 맨 유리나 다름없게 되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 결국 이렇게 새로 하게 되는구나. 이번에 새로 하는 김에 전면까지 50%로 해줬다. 50%라 그리 짙은 편은 아니지만 밤에는 조금 더 조심해줘야지.

 

막상 쉬면 할 일이 무궁무진할 줄 알았는데 역시 더운 날 막상 할 만한 일은 없었다. 결국 틴팅 맞긴거 작업할 동안 돌아다니다 보니 대략 끝난 금쪽 같은 하루 휴가;

 

2012.06.18


예천 삼강 나루터.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거대한 철교 위로 차가 달린다. 대신 이 나루터에 있던 삼강주막은 복원되어 아직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회룡포로 향하기 전에 들른 용궁시장. 시골장터는 언제나 재미있다. 그리 크지 않은 시장이었지만 꽤나 괜찮은 곳이었다. 너무 으리으리한 장터 입구의 문보다도 적당히 촌스러우면서도 적당히 운치있는 형태의 입구도 맘에 든다.




따스한 햇살이 비춰지는 골목에 놓여진 연탄들.




용궁양조장. 1박2일에서도 방송을 탄 유명한 곳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제시대 전후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벽돌집은 이 양조장의 화려했던 시절을 대변해주는 듯 하다. 구경차 들어갔더니만 맛이나 보라고 한 사발을 주시는데 그것만 다 마셔도 알딸딸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막걸리의 가격은 한 병에 달랑 천 원! 두 병 사들고 나왔다. 아저씨 사진 한 장 찍어두는 건데 아쉽네.




꽤나 유명한 식당인 '단골식당'
진짜 막창으로 만든 순대와 순대국. 연탄불에 구운 오징어불고기 등이 맛있다. 앞으로 예천에 오면 점심은 여기서 해결해야겠다.




평범한 회룡포 사진. 사실 가을에 벼가 누렇게 익었을 때 찍었다면 더 예뻤겠지만 뭐 그냥 바람쐬러 온거지 대단한 거 찍겠다고 온 날도 아니었으니 대충 이정도로..;;  어쨌거나 간만에 AF20-35 2.8D로 찍었구나. 평소엔 별로 쓰지도 않지만 이럴 때 필요하니 팔기도 뭐하고 계륵이다.




350도를 강이 휘돌아감는 회룡포 마을은 섬이나 다름이 없던 곳이었고 요런 어설픈 다리들로 뭍(?)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철근으로 만들어져서 예전의 운치는 없지만 이제 큰 물이 와서 다리가 쓸려내려갈 일은 없다. 경북 북부에는 이런 마을들이 제법 있다.




예천하면 제일 유명한 절은 용문사지만 자주 가던 곳이고 이번엔 보문사라는 절에 와봤다. 절로 들어가는 길은 꽤나 운치있었지만 절 자체는 사실 볼품없었다.




보통의 절에서 보던 모습과 달리 아무렇게나 휙 벗어둔 고무신이 재미있다.




절 바로 옆에는 어느 예술가가 작업실로 쓰고자 구입해서 꾸민듯한 민가가 한 채 있었고 '관송정'이라는 운치있는 이름의 작은 정자도 지어두었다. AF20-35 2.8D 최대개방의 효과도 은근히 마음에 든다.



2011.12.31 예천


그냥 올라가도 힘든 계단을 무거운 짐을 들고 오르는 분. 천지 주변에서는 뭔지 모를 작은 토목공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힘든 노인들은 이렇게 가마를 타고 오르기도 하던데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해발 2700미터를 헥헥 거리며 오르다보니 나도 돈 내고 타고 싶은 생각도 없잖아 들었다.




오르다 힘들 때면 잠시 서서 뒤돌아보면 이처럼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지고..




하늘에 구름이 드문드문 끼었지만 천지를 볼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1년에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얘기가 천지를 못봐도 원성을 덜 들으려는 가이드나 여행사의 얘기인 것 같은 의구심이 강하게 들지만 재수없게 내가 못보게 될까 하는 걱정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천지는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기대했던 것 보다 크지 않아서 약간 실망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힘든 계단을 올라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천지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천지다!'하고 소리를 질렀으니.. 이상하게 짠해오는 벅찬 감동. 우리 땅인데도 중국을 통해 와야한다는 안타까움과 사실 천지를 신성시 여기는 것은 우리 민족 말고도 여진족을 비롯한 만주 일대의 많은 유목민족들이 그러했으니 중국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 이해는 간다.


그래도 우리 민족에게 백두산 천지는 남다른 감동을 주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태극기를 꺼내거나 무슨 구호를 외치거나 하면 절대 안된다는 주의를 받으면서도 심히 기분이 나빴고 돈을 쓰더라도 북한 땅을 통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마 대부분 중국에 돈 주면서 백두산을 오르진 않으리라.


함께한 일행 중에 미국에서 사업을 하시는 고종호님께서 자작시를 한편 쓰셨는데 화려한 문체와 음율은 아니었지만 백두산에 오른 벅찬 감동을 전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시며 아쉬울 것 없이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시고 전 세계의 명소를 두루 다니셨을텐데도 백두산은 백두산이라 천지를 보는 순간 눈물이 맺혔다고 하시는데..  양해를 얻어 그 시를 여기 옮겨 적어본다.


백두산

한민족의 성산이 백두산이라네
철이 들고 나이 들어
그렇게 보고 싶고 오르고 싶던 백두산

이제는 반 쪽되어 장백산이라 한다네
이 뼈 아픈 역사
누군들 좋아하리

삼팔선 가로막혀 중국땅 밟고
압록강 줄기따라
삼 일을 달려

백두산에 오르니
9월인데 벌써 하얀 눈이 마중하네

큰 호흡하며 감격하니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천지 내려다 보며
마음으로 대한만세 부르니
소원 풀었네


2010.09.23 백두산


의성 탑리. 탑리역 앞 조그만 공터에는 언제나 아무도 없다. 차를 세우고 길을 따라 내려오면 첫번째로 마주치는 건물. 특이한 형태의 2층 집은 구룡포에서 볼 수 있는 일본식 가옥의 흔적과도 닮았다.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낡은 빈 집. 예전에는 이른 바 '점방'이라 불리는 구멍가게였을 것 같지만 굳게 닫힌 문의 거친 질감은 이 곳에 들를 때 마다 카메라를 들이대게 한다. 요즘들어 카메라를 지르고 열심히 배우는 중인 우리팀 막내 두석이.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구도에 대한 감은 이제 두 번째 출사임에도 예사롭지 않다. 어떤 것을 찍어야할지 고민하지 않고 찍고 싶은 것을 마음가는 대로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이 좋다. 보다 많은 발전이 있기를..




골목에 나란히 놓여진 의자들. 동네 할머니들이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떨만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대낮에도 이 탑리에선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담쟁이가 뒤덮인 창고. 붉게 녹슨 철문의 색감과 질감이 꽤나 강렬했건만 흑백에선 그닥인 듯.




탑리의 교회. 비를 맞지 않고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구름 다리를 넣어 프레이밍해보니 독특한 느낌이 나는 교회처럼 보인다.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만 보다 이런 시골 교회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팔까 말까 망설이는 중인 AF20-35 2.8D는 일단 당분간은 갖고 있어봐야겠다.




시간이 멈춘듯한 탑리의 거리. 두 자리수 국번이 그대로 남아있는 서울세탁소의 간판.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포터와 스쿠터만 없다면 70년대 풍경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역시나 오래되 보이는 사진관. 이 앞을 지날 때 마다 기웃거려보다 용기를 내어 들어서봤지만 사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 듯한 할머니가 이제는 사진관을 하지 않는다며 손을 내저으신다. 나의 오래된 콘탁스 카메라를 보고 반가워하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줄 사진관 주인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던 로망은 사라졌다.




탑리 버스터미널.




매표소에는 판매원도 보이지 않고 버스를 기다리는 손님은 두 명 뿐. 대략 30분 정도 머물며 사진을 찍었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벽에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학생들의 낙서가 가득했다.




사용하면 좋을텐데!!




버스가 들어오는 모습을 찍고 싶었지만 도대체가 언제 오는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릴 수가 없어 돌아나왔다.




그리고 탑리가 탑리로 불리게 된 탑리 5층 석탑. 전탑과 목탑 형식이 가미된 초기 석탑의 형태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사지 탑처럼 웅장하지도 감은사지 3층 석탑처럼 당당하지도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이나 불국사 다보탑처럼 화려하지도 석가탑 처럼 완벽한 비례의 우아함도 없이 작고 초라하지만 보면 볼수록 단정한 느낌이 드는 석탑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조용하기 그지 없는 동네, 탑리. 그 마을의 모습과도 닮은 그런 탑이다.




2010.09.22 지안(集安)

무식하단 생각이 들기보단 깜찍했다고 해야하나? ㅎㅎ  실상 우리도 잘못된 외국어 표현을 쓰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은지라 비웃을 것도 아니다.

국내성터를 둘러본 후 점심으로 맛도 없는 숯불구이를 대충 먹고는 드디어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러 떠났다. 사실 이번 여행에 있어 백두산 천지 보다도 개인적으로 가장 설레는 코스가 바로 광개토대왕릉비였는데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최인호의 역사소설 '읽어버린 왕국'에서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이른바 '신묘년 기사'였기 때문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본의 대표적 역사서 '니혼쇼키(日本書紀)'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판한 부분과 더불어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기사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자로 몇번이나 써보았던 그 신묘년 기사는 다음과 같은데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고구려가 백제를 낮춰부르던 말),○○,○라(가야,신라로 추측)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기사는 위와 같이 해석한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때문에 비문이 19세기 말 일본의 육군 중위에게 발견될 당시 조작되었다는 설부터 기사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보아 거꾸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고 백제,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한다는 주장 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한, 중, 일 삼국간에 끊이지 않는 논쟁을 불러 일으켜온 아주 민감한 부분이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수년전 신문에서 본 기사에는 중국 측의 정밀검사 결과 비문에 대한 고의적인 훼손과 조작은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었다. 당시 무척 실망했고 중국의 검사라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어쨌든 그 후 비문조작설은 힘을 잃고 있어서 결국은 비문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설만 분분한 상태인 듯 하다.

어쨌든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던 당시 임나일본부설은 강제합병의 역사적 정당성을 찾기 위해 반드시 증명해내야할 가장 결정적 가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의 해석과 더불어 니혼쇼키의 기사를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를 찾기 위해 창녕일대의 가야고분들을 도굴과 다름없이 발굴해대며 뭔가가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던 결정적 자료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고 임나일본부설은 여전히 근거가 빈약한 '설'로 남아 한일간의 치열한 역사 전쟁의 최전선이 되어왔는데 얼마전 결국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고 인정하며 일단락되는 분위기이긴 하다. 물론 일본이 늘 그렇듯이 양심적 일부 학자들이 그렇게 얘기했다고 한들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해온 니혼쇼키의 임나일본부설을 쉽게 포기할 일본이 아니기에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는 언제나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사실 우리의 고대사는 그 사료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전무하여 삼국시대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 쓰여진 삼국사기 외에 이렇다할 정사(正史)가 없다보니 우리 스스로의 기록으로 역사를 증명해내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 와중에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는 더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우리 땅이 아닌 곳에 있어 우리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으며 비를 직접 촬영도 하지 못함이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 민족의 유적임에도 지안(集安)의 다른 고구려 유적들과 마찬가지고 광개토대왕릉비 역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비 자체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지라 비각역시 웅장하다. 저 안에 들어가서 비문을 한참을 들여다 보며 신묘년 기사를 직접 보고 싶었지만 글자의 마모도가 심하고 입체감을 더해줄 사광의 빛이 닿지 않아 육안으로 확인하는데는 실패했다. 사진 한 장 몰래 찍고 싶었지만 망할 중국 녀석이 곁눈질로 계속 감시를 해오고 있던터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충주에 남아있는 중원고구려비와 비석의 형태까지 거의 흡사하지만 역시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비석을 보면서도 직접 이 비를 보고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 가슴이 아픔은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는 흔히 광개토대왕이라 부르지만 저 비각의 현판에 보이듯이 중국에선 호태왕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부르는 명칭이 100% 정확한 것은 아니고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국강상(國岡上)은 광개토대왕릉이 있는 무덤의 언덕을 말하며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영토와 세력을 넓혔음을 의미하고 평안(平安)은 백성들이 평안하도록 다스렸으며 호태왕(好太王)은 왕중의 왕 왕중에서 제일 높은 최고 대왕이라는 뜻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광개토대왕릉비 인근에 위치한 왕릉으로 이동한다. 이 일대에는 민가들이 들어서있었지만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모조리 철거하고 정비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3,4면에 걸쳐서는 왕릉을 관리하는 임무와 역할에 대해 세세히 기록해두었는데 고구려 때는 이 곳에 주민들이 살며 왕릉을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문에 명시된 바와 달리 고구려의 패망과 더불어 왕릉은 관리되지 못했고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심하게 훼손되어 석축은 무너져내리고 잡초만이 무성하다.




더군다나 이 처럼 흉물스런 계단이 무엄하게도 왕릉 위에 놓여져 수많은 관광객들이 무덤위로 짓밟고 오를 수 있다.




못마땅하지만 나도 그렇게 올라가볼 수밖에 없다. 집안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들은 대체로 아래쪽의 석축은 거대한 반면 위로 갈수록 자갈과도 같은 돌무지들만 흘러내리듯 무너져있는데 장군총이라 불리는 장수왕릉과 달리 아래에만 큰 석축을 받치고 위쪽에는 작은 돌로 덮었던 것인지 아니면 훼손되어 이렇게 된 것인지 얕은 지식으론 알수 없었다.




계단을 다 올라오니 현실로 들어갈 수 있게 입구까지 만들어뒀다. 뭐 우리나라도 천마총을 비롯한 몇몇 고분들을 전시관 형태로 만들어둔 것이 있지만 중국넘들이 이렇게 해두니 기분이 나쁘다.




대륙을 호령한 대왕의 묘로 보기에 지나치게 수수하기까지 한 현실. 왕과 왕비의 관이 놓였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규모이며 집안의 다른 고분들에서 보이는 고분 벽화도 보이지 않는다. 부장품 따위는 이미 깔끔하게 도굴당한 상태로 인근에서 발견된 기와 파편의 호태왕이라는 명문마저 없었다면 광개토대왕의 릉이라고 확신하기 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볼 수 있으니 보고는 왔지만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춰주지 않은 중국의 유적 관리는 고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마음속으로나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왔다.


발해가 멸망한 후 그 넓은 요동과 만주 벌판을 잃어버리고 압록강 이남으로 좁아진 우리 민족의 역사 인식 속에 막연하게나마 남아있는 대륙의 기상과 그에 대한 로망은 광개토대왕이라는 한 영웅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어찌보면 반도 컴플렉스라고 해야할까? 성공 가능성도 희박했던 고려말의 요동정벌 계획과 효종의 북벌론을 떠올리며 만약 성공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어찌 달라졌을까하며 안타까워하는 우리지만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은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포기할 수 없는 웅대한 꿈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비록 대륙은 잃어버렸지만 대륙을 차지했던 수많은 민족들이 그 명맥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간 것을 보면 결국은 살아남은 자가 최종적으로 승리자가 아닐까 싶다.   


10.09.22 중국 지안(集安)


압록강 유람을 마치고 단동에서 집안으로 이동~
원체 땅이 넓은 중국이다 보니 단동에서 집안 정도면 가까운 편이다. 고속도로였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꽤나 아름답다. 특히 뽀얀 옥빛의 물색깔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는데 텐트 쳐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휴게소도 아닌 작은 공터에서 휴식 중. 우리나라와 달리 국도변이라도 휴게소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적당히 화장실만 있는 곳이면 잠시 쉬어 간다. 단동에서 집안으로 넘어가면서 문득 만족(滿族 = 여진족) 자치구도 들러보고 싶었지만 오늘날 여진족은 고유의 문화는 물론 언어 마저 거의 잃어버렸다고 하니 가봐야 별 것 없을 것 같기는 하다. 흉노, 선비, 돌궐, 말갈, 거란, 여진 등 중원을 정복한 강성했던 유목 민족들 중 그나마 명맥을 이어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몽골 뿐이니 7~8천만에 가까운 인구가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살아남은 우리 민족도 참 위대하단 생각이 든다.




드디어 집안(集安)에 도착했다. 집안은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오랜 수도로 고구려의 유명한 유적들이 대부분 위치하고 있는 실질적인 고구려의 발상지다.  




이것이 흔적만 남은 고구려의 도성 국내성의 성벽이다.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남아있는 석축은 정말 가지런하다. 도시개발과 더불이 국내성의 훼손은 가속화되고 있다. 천년도 넘게 지난데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민족이 쌓은 성이었으니 이 정도 남아있는 것만 해도 신기할 정도다.




이 쪽에는 성벽에서 돌출된 구조물의 흔적이 보인다. 옹성이 있던 자리인지 아니면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의 흔적인지 애매했는데 아래 지도를 보니 아마도 서문의 옹성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사진을 찍은 성벽이 바로 국내성의 서쪽 성벽으로 서쪽은 통가강이 남쪽은 압록강이 흘러 천연 해자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지금도 도로가 통과하는 곳이니 당시에도 서문이 위치했을 수 있고 서문이 있었다면 옹성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니 위 사진의 돌무더기는 치 보다는 옹성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치는 성벽 중간 중간에 __∩___∩__ 형태로 튀어나온 성벽으로 보통 그 간격은 활의 사정거리 정도를 유지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을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방어시설이며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문 앞으로 진입한 적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 반월 형태로 둘러싼 성벽을 말하는데 서울 동대문에 있는 그것과 같은 것이다. 


어쨌든 초라하게 남은 국내성의 흔적에 가슴아파할 겨를도 없이 주변에는 우리말로 참깨 사라며 달려드는 중국 상인들이 시끌벅적해졌다. -_-;   


 











중국 도착 후 이틀째 날 첫번째 일정은 압록강 유람선.  안개가 많이 끼면 건너편의 신의주가 보이지 않는다지만 다행히 전 날과 달리 날씨가 맑다. 




매표소 직원 비슷한 사람들. 제복을 입고 무표정한데다 꼭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입국 심사 때 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여권의 사진과 내 얼굴을 대조하며 아래위로 훓어보던 직원을 포함해 중국에서 만난 제복들은 인상이 너무 딱딱하다.




어디선가 중국에선 공안들 사진을 찍다가 걸리면 카메라 채로 압수한단 얘기를 들었는데 공안만 보이면 카메라를 근처에도 들이대지 않았다. 이 아저씨는 유람선 타는 곳에 관련된 분이니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거라 생각하고 그냥 180미리로 당겨 찍은 것. 




유람선 내부. 의외로 유람선은 깔끔했다. 우리나라의 섬 지역을 운행하는 유람선들 보다 더욱 쾌적한 편. 그러고 보니 강에서 유람선을 타본적이 있었나 싶다. 서울에 있을 때도 한강 유람선을 타본적이 없으니 호수를 제외하고 강에서 유람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압록강 상류 쪽으로 가는 중. 오른쪽 편이 바로 북한의 신의주다. 중국의 단동(丹東)과 북한의 신의주를 가로지는 이 곳은 압록강의 최하류 지점인데도 강폭은 생각보다 좁았고 물은 탁했다.




'중조우의교'를 지나는 중에 현재 사진 한 컷. 다리 이름의 뜻은 말그대로 중국과 조선의 우의의 다리인데 그 뒤로는 6.25 당시 미군 폭격으로 끊어진 구 철교를 그대로 두었다. 저 다리 끝 쪽에 가면 미공군이 폭격에 사용했던 불발탄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베트남에 갔을 때 들렀던 박물관에도 그런 전시물들이 한가득이었다.
 
6.25 전쟁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부르는 중국은 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어마어마한 대군을 파병했고 엄청난 인명 손실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한 방에 역전시켰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했던 연합군은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혹한 속에서의 사투를 벌이며 남쪽으로 밀려났고 군인과 피난민이 뒤섞여 제2의 덩케르크 철수라고도 불리는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탈출해야했다. 급기야 서울을 다시 뺐기는 1.4후퇴마저 일어나는데 어쨌든 중국은 6.25 참전의 대가로 역사 이래 이어져온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고 북한의 큰 형님 역할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사실 6.25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혼란스러운 시기로 대규모 참전, 더군다나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불가하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거시적인 안보 안정과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세계에 영향력 행사 등의 국익을 위해 세계 최강국 미국과 전쟁도 불사한 마우쩌둥의 결정은 대국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결국 우리만 통일을 눈앞에서 날려버렸다. 




위화도 근처에서 배는 다시 하류쪽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저기 평평한 섬이 위화도로 압록강 위에는 의외로 크고 작은 섬들이 꽤 있다. 이 중 대다수는 북한 영토로 되어 있고 일부는 중국 영토인데 위화도는 지금도 북한 소속이다. 섬에는 가옥들도 보이고 면적은 여의도 못지 않은 정도라고 하니 고려말 요동정벌을 떠난 고려군이 주둔할 만했다. 요동 정벌 당시 위화도에는 이미 부교가 부설되어 도하 준비가 끝난 상태였으며 선발대로 소규모 부대가 강을 건너가 노략질 비슷한 약간의 전과를 올리고 복귀하기도 했다고 한다. 4불가론을 내세우며 이 섬에서 군대를 돌린 이성계는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데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은 요동정벌을 위해 정예군을 쥐어주고 출병을 강요한 고려 조정의 무리수가 결국 망국을 재촉하지 않았나 싶다. 원명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요동 지역을 일시적으로 차지한다 하더라도 한반도와 달리 너무나도 넓은 그 지역을 우리가 추후 방어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리라 본다. 




배는 하류 쪽으로 이동하며 북한 쪽과 더욱 가까워졌다. ROTC 시절 판문점 회담장안에서 금을 넘어가서 명백한 '북한영토'를 '합법적'으로 밟은 적은 있지만 군인이 아닌 북한 주민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얼마전 엄청난 수해를 입은 신의주는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다. 유독 낚시를 하러 나온 주민들이 많이 보였는데 옷차림은 남루하고 얼굴에는 생기가 없다.



 
압록강의 모래를 퍼가는 것으로 보이는 작업 현장. 여기는 그래도 중장비들이 오가며 활력이 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국 관광객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텐데 손을 흔들어주는 북한 주민들... 촬영 당시에는 파인더를 통해 표정까지는 볼 수가 없었지만 호텔방에서 노트북을 통해 확인해보고는 그만 찡해버렸다. 허옇게 살찌고 좋은 옷을 입은 남한 사람들이 구경거리인 마냥 뱃전에 붙어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손을 흔들면 기분 나쁘고 배알 꼬일 법도 하건만 이렇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너무나 짠하다. 냉전 시대도 끝난 지금에도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멀리서 손 흔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을씨년하고 우중충한 건물들과 비웃기 보다 안타깝기만한 허황된 구호만이 가득한 신의주 쪽과 달리 중국의 단동은 이렇다. 제방부터 다르고 상큼한 색깔의 건물들은 멋들어졌다. 그 뒤로 새로운 고층 빌딩들도 쭉쭉 올라가고 있다.




교과서에 나왔던 민통선에서 펼쳐진 남북한의 각각의 선전 마을의 국기게양대 경쟁도 이 정도쯤 격차가 되면 이미 게임 끝이리라. 신의주와 단동은 이미 차원이 다른 도시가 되어 있다. 밤이면 강건너 휘황 찬란을 조명을 보는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어떨까 싶다. 그나마 중국과 이렇게 연한 북한 도시들은 다른 곳보다 비교적 생활 수준이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기념품들. 위조임이 뻔한 북한 화폐와 북한 담배들. 가짜인줄 알면서도 호기심 반 애뜻함 반에 사가는 우리 나라 사람들 덕분에 돈을 버는 이들도 있다. 북한을 통해 가볼 수 없는 백두산과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을 보기 위해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뿌린 돈으로 인해 중국의 동북 3성(요녕,길림,흑룡강)이 발전했다고 한다.

우리도 얼른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뿐이다.

2010.09.22 중국 단동(丹東)








2010.09.22 중국 단동(丹東)










2010.09.21 중국 단동(丹東)



2010.09.21 중국 대련(大連)

중국 도착 첫 날 부터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주셨다. 아직까지는 좀 더운 우리나라와 달리 꽤나 추웠는데 백두산 천지에 오르기가 걱정될 정도였다. 차례 안지내고 연휴랍시고 놀러나온 죄를 받는다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던 첫날의 오후.


2010.09.21 중국 대련(大連)

대련공항에 도착한 후 중국 일정의 첫 코스. 날씨 마저 비바람이 몰아쳐 공원 한 가운데쯤에서 동서남북으로 네 방향으로 우향우~우향우~ 하며 한 컷씩 찍고는 거의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공원 곳곳에 여러가지를 의미하고 상징하는 조각과 조형물들이 있지만 땅덩어리가 넓은 중국이라 그런지 크기와 규모에서만 압도할 뿐 아기자기하고 예쁜 조경을 갖춘 여의도 공원보다 나을게 뭐냐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일단 이번 여행은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 천지 등정이 최우선의 가치였기에 이런 곳은 전혀 관심 밖이었고 지금도 아쉽지 않다.






























2010.09.05 경주

오전이었음에도 해가 너무 뜨거웠지만 간만의 연꽃 촬영이었다. 연꽃 촬영이라는게 왠만한 독창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 밥에 그 나물. 별 다를거 없는 사진들 찍어오기 딱 좋지만 일요일 오전 바람이나 쐴 겸 다녀오기는 그만이다. AF180mm2.8ED는 정말 오랜만에 쓴 듯. 활용빈도가 무척이나 떨어지는 망원렌즈지만 간혹 있는 이런 경우에는 참 유용하다. ㅎ


대릉원의 동쪽에 위치한 경주 쪽샘지구. 4∼6세기에 걸쳐 조성된 삼국시대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으로 사적지구로 지정된 경주시 황오·황남·인왕동 일대에 해당하며, 총면적 38만 4,000㎡ 이다. 1960년대 이후 주택이 많이 들어서면서 고분의 훼손이 심해지자 2002년부터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680억 원을 들여 일대 민가 359가구와 사유지 등을 매입하고 2007년 3월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쪽샘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는 근래 들어 최대의 규모라고 할 수 있는데 2009년 6월 현재 적석목곽분과 목곽묘·석곽묘 등의 고분 150여 기가 확인되었고 3,000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사실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땅만 파면 뭐가 나온다는 것인데 천마총으로 유명한 대릉원 바로 옆인 쪽샘지구는 당연히 땅만 파면 뭔가가 쏟아질 것으로 대단한 기대를 모았던 곳이었으나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는 기대에 비해 다소 초라하다고 한다. (신라중장기병의 갑옷은 완벽한 세트로 출토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부분의 집들이 헐리고 없지만 아직 남아있는 집들도 있다. 아직 보상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떠나지 않은 집인지 철거를 기다리는 집인지는 모른다. 사진을 찍다보면 이야기보다 이미지에 치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건물의 잘린 단면이 왜 그렇게 색다르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폐가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이는 쓰레기더미들. 




대학교 시절 간혹 찾던 서울의 달동네 난곡에서도 봤던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긴 숫자들. 철거를 앞둔 집들이다. 문화재 발굴 때문에 정든 집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기 집 공사하다가 땅 밑에서 유적이 나오면 그냥 파묻어 버렸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으니 그따위 문화재가 무슨 소용인지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경주의 한 주택가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의 일부를 수돗가에서 빨래판으로 쓰던 것이 우연히 발견되었음에도 집주인은 포상금에 눈이 어두워 쉽게 내놓지를 않고 장장 9개월간이나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경찰까지 동원하여 강제로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웃기지도 않는 일도 있었다.




역시 철거를 앞둔 집들. 전반적으로 AF20-35mm2.8D는 Nikkor렌즈의 일반적인 특성과 달리 다소 부드러운 콘트라스트와 색감을 보여주는 거 같다. 




경주의 다른 구시가지와 마찬가지로 단층 가옥들과 좁은 골목길이 이어졌던 이 곳은 이제 넓은 공터가 되어 버렸다. 고도제한 때때문에 높은 건물이 별로 없는 곳이긴 하지만 그나마도 건물이 없으니 하늘이 탁 트이며 경주는 참 평평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형산강을 제외하고 그렇게 큰 강을 끼고 있지는 경주는 인근의 건천, 안강, 흥해와 더불어 꽤나 들이 넓어 한 국가의 도읍으로 괜찮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뜨거운 오후의 햇살을 양산으로 가리며 어디론가로 마실 나가시는 두 할머니. 쪽샘지구에 대한 발굴은 앞으로도 20년간 계속 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사의 조각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발굴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2010.08.29 경주 쪽샘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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