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2. 청송


Contax IIa / Carl Zeiss Jena Orthometar 3.5cm f4.5 / Kodak 400TX / IVED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Kodak 400TX / IVED







































2017.08.24 경주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Kodak 400TX / IVED






































































2017.09.23. 포항


Leica M3 / Canon 28mm f2.8 LTM / Kodak 400TX / IVED






























2017.08.05. 청송


휴가의 끝자락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Kodak 400TX / IVED

































































2017.09.23. 포항 송도


옛 동명여관 주인 할머니. 송도해수욕장이 쇠락하면서 동명여관의 영광의 지난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덕분에 7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실 수 있었다고 하셨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보태어 글을 적어보기로.


위 에서 첫컷만 Rollei 35SE / Kodak 400TX

나머지는 모두 Leica M3 / Canon 28mm f2.8 LTM / Kodak 400TX

근대 문화 유산에 대한 개인적 흥미로 인해 오랜 모습을 간직한 곳을 방문하기를 즐긴다. 물론 우리에게 ‘근대’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무척 혼란스럽다. 새로운 기술과 가치관이 쏟아지던 ‘모던’의 향수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대상 탓에 근대 문화 유산을 사진에 담는 작업은 그래서 또 곤혹스럽고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아직 정리할만한 사진도, 자료도 또 그럴만큼 많은 작업을 하지도 못했지만 지난 출장 길에 들렀던 대전의 옛 충남도청 사진들을 올려본다.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에 위치한 옛 충남도청 건물. 1932년에 지어져 2012년까지 도청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내포 신도시로 도청이 이전한 이후 현재는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에는 2층으로 건설되었으나 해방 후 3층을 추가로 얹었다. 당당하게 자리잡은 건물은 현재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과 일직선으로 이어져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에 들어선 일제의 통치시설 답게 권위적이고 위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런 이 건물에서 권위를 느껴야하는 것 또한 우리 근대사의 아픔일 수 밖에 없다.





1층 복도의 모습. 샹들리에 조명 위와 바닥에 별 문양이 보인다. 이 별 문양은 건물 벽면을 비롯한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데 조선총독부에 있는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한 때 논란이 되었다고 하는데 ‘큰 의미’는 없는 것으로 밝혀져 지금껏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진짜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는 쪽국애들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추론해보자면 교통의 중심지 대전이니 나침반의 방위각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건물외벽에도 이처럼 별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사실 이런 문양은 우리에겐 그 개념이 없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이화(배꽃)문양도 사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거기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들이 많다. 사실상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해진 일본이 자신들의 지방 정부와 같은 정도로 격하하기 위해 문양 사용을 강요했다는 얘기부터 그렇지 않은 자주권의 발현이었다는 얘기까지 있지만 뭐가 맞든지 간에 힘없는 나라의 슬픈 역사는 달라지지 않는다.





80년이 넘은 건물이니만치 그동안 창틀 정도는 교체되었을 만도 한데 여전히 원형 그대로인 것으로 보였다. 오래 되었어도 튼튼하게 남아있는 교량이나 건물들을 보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하시던 얘기가 떠올랐다. ‘일본놈들이 말이야. 뭐니뭐니 해도 저런거 만들어 놓은거 보면…’





2층으로 올라가보기로 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은 반들거렸고 넓은 채광창은 별다른 장식조차 없이 단조로워 사무공간다운 딱딱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계단을 오르다 뒤돌아서 입구로 누군가 들어오길 기다려봤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던 차에 그나마 한 분이 나타나셔서 셔터를 눌렀다.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온지라 전시관 문도 열리지 않았고 찾는 이도 없었다.





사람이 너무 없다보니;;





2층에 오르면 한 가운데 도지사 집무실이 있다. 개방되어 실내를 구경할 수 있지만 역시 너무 이른 시간이 문이 닫혀 있었다. 결국 도지사 집무실을 등지고 한 컷.





도청 바로 옆에는 충남지방경찰청 옛 건물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해방 후의 건물이지만 일제 당시에도 도청 바로 옆에 경찰서 건물이 자리하여 행정과 치안의 핵심이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상무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곳은 일제 당시 일본 경찰들이 유도 등 무예를 수련하고 신체를 단련하던 ‘무덕전’이라는 일본식 건물이 있던 자리로 해방 후 원래 건물은 소실되고 1963년에 그 기초를 이용해 다시 지어진 것이다.



광주에 있던 무덕전.  1967년에 철거되던 모습이다.



일제는 이처럼 각 지방 경찰서에 무덕전이라는 건물을 지어 경찰들이 유도를 수련하게 했는데 軍도 아닌 경찰에서 ‘武’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 것만 봐도 그들의 통치, 치안 철학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보니 해방 후에 새로 지어진 이 건물의 이름도 ‘상무관’이다. 일제가 남긴 것은 소나무의 상채기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오는 바람에 전시관을 보지 못해 얻을 수 있었던 정보와 자료를 접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언젠가 다시 방문할 일이 있기를 기대하며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017.04.15. 대전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Ilford HP5+ 400 / IVED


빛이 좋은 오후다.


간만에 미세먼지도 황사도 없어 하늘이 청명하다. 낮은 해가 만들어주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세상에 입체감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사진가들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황금 시간대, 이대로 사무실에 쳐박혀 있을 수는 없겠다. 단촐한 카메라 하나를 달랑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밥은 안먹어도 상관없다.




회사에서 차로 10분이면 올 수 있는 금척리. 경주와 건천을 동서로 잇는 도로 양편에 38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산재한 곳이다. 금척이란 금으로 만든 자를 말하는데 이 곳에 금척이 묻힌 무덤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금척리다. 금척리 고분군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는데.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당나라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적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척리 고분군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초판 1994., 개정판 23쇄 2012., 돌베개)




금척리로 가는 길. 오후 5시가 넘자 인근 농공단지 등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주민들이 띄엄띄엄 퇴근해서 오고 있었다. 평소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이 곳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낯선 이를 홀깃 쳐다 보셨다.




금척리 고분군은 도로를 따라 좌우로 나뉘어 있는데(정확히는 도로가 신라의 국립묘지를 감히 가로질러 난 셈) 북쪽보다 남쪽에 더 많은 고분들이 산재되어 있다. 1951년 도로 확장 공사당시 파괴된 상태의 고분 2기를 급한대로 발굴 조사를 했고 금귀고리와 곡옥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밝혀졌다. 




51년의 조사에 이어 76년에도 밭 사이에서 소고분들이 발견되어 발굴이 이루어졌고 81년에도 민가 보수 중 발견된 파괴된 소고분들을 발굴한 적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금척리 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대규모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알려진 부분은 많지 않다. 비교적 도굴이 힘든 돌무지덧널무덤이긴 하다만 유물들이 멀쩡히 잘 남아있길 바란다.




공원으로 깔끔히 조성된 대릉원 쪽과 달리 금척리 고분군은 주변 정리 정도만 해둔 상태로 유지되고 있어 태고의 신비와 같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신라 고분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외국인이 이 사진을 본다면 아주 특이한 지형을 찍은 것이라고만 생각할 것 같다. 얼핏 제주의 오름을 찍은 것 처럼도 보이고. 




황남대총 같은 대릉원 쪽 고분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오늘날 고만고만한 촌동네에 불과한 이 곳에 당시에는 어떤 강성한 세력이 자리했었기에 이토록 많은 고분들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문헌 자료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우리나라 고대사의 한계로 인해 풀리지 않는 비밀은 너무나 많은데 신라 지배층의 정체에 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금 부장품이 유독 많고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일대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무덤의 형식으로 인해 4-5세기 신라의 지배층은 스키타이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계가 한반도까지 남하한 무리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 일대가 정비되기 전에는 분명 무너져내린 봉토 사이사이에 민가와 밭들이 들어차 있고 겨울이면 동네 꼬마들이 고분 위에서 눈썰매를 타곤 했겠지만(아마 지금도?) 지금은 중간중간 멋지게 서있는 나무들 말고는 넓은 풀밭으로 정리되어 있다. 고도제한으로 인해 높은 건물이 적은 경주이긴 하지만 경주의 서쪽 변경 건천에서 만나는 넓은 하늘은 답답한 가슴을 제법 시원하게 뚫어준다. 오늘처럼 청명한 날씨라면 더할 나위없다.




주인 모를 고분에 세들어 살고 있는 묘도 있다. 사적으로 지정된 이곳에 제단석까지 놓인 묘가 쓰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적 지정 전부터 있던 묘라면 이해가 간다. 천년이 넘는 세월의 간격이 있겠지만 같은 공간을 나눠쓰며 또 천년을 갈 것이다. 




필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셨다. 늘상 듣게 되는 '뭐 찍는교? 어디서 나왔는교?' 따위의 질문을 예상했으나 잠시 쳐다보시곤 갈 길을 가셨다. 자전거 바퀴가 구르기도 힘든 풀밭에 왜 들어오셨나 했더니 바로 옆 대밭에서 가는 대나무 몇 그루를 잘라 가셨다. 




이 회사를 다닌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이 곳을 카메라에 담다니. 역시 가까운 곳은 언제나 홀대하기 마련인가. 해가 짧아지면 5시부터인 저녁시간에 나와서 이 곳을 찍기도 버거워 질테니 틈나는 대로 소소하게 담아봐야겠다.






2017.04.12. 경주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Ilford HP5+ 400 / 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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