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1 베트남 호치민


왠지 그냥 베트남이라면 이런 이미지가 딱 떠오른다. 다녀온지 10년도 넘게 지났으니 요즘은 얼마나 달라졌을런지.





2003.01 베트남 호치민



2001.07 서울


할부지 손 잡고 외출~



2001.01 안동



2000.10.19 녹천





2000년 가을 영종도


이 때만 해도 인천공항을 건설 중인 때라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 갔었다. 요즘도 이렇게 갯벌에서 조개를 캘 수 있는지.

사진찍고 아주머니들이 주시는 소주를 두어잔 받아마셨다. 진흙이 묻은 호미로 콕 찍어 주시던 사과 한조각이 안주.











2009.10.18 안면도

몇년만에 다시 찾은 안면도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001년이 마지막이었던가..
일몰을 담으려는 사진가들이나 많이 찾던 한적하던 안면도는 꽃박람회 등으로 유명세를 타며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활기찬 풍경도 나쁘지 않았던 청명한 하늘 아래 여유로웠던 지난 가을 여행. 입맛이 변했는지 대하는 이제 그닥 먹고 싶지 않다;


송도 해수욕장의 모습을 뒤바꿔놓은 해안도로 공사도 거의 마무리되었다.




축대가 쌓아지고 아스팔트가 덮인 도로가 차지해버린 모래사장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뭐 이미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던 송도해수욕장이었지만 한적한 분위기를 느끼러 찾아오기 좋았던 곳 하나가 결국 사라졌다.




반면 다 쓰러져가던 빈 집들과 상가들은 이 도로의 개통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될지.. 오늘 신문기사를 보니 모래사장을 엎어서 도로를 만든 포항시에서 송도해수욕장 모래사장 복원을 추진할 계획이라던데 파괴하기 만큼 복원하기도 쉬울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어쨌든 모래사장이 포항시의 계획대로 성공적으로 복원되고 다시금 많은 관광객들이 찾게 될 명소로 거듭난다면 이런 흉물스런 폐가들 대신 번듯한 건물들이 삐까뻔쩍하게 들어설지도 모른다. 광안리처럼 변해버린 북부해수욕장처럼.




프레임만 남은 문. 송도의 골목길.




방파제 근처의 선착장 주변. 21mm Biogon의 광활함을 다루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사진은 뺄셈의 예술이라 했건만 이것저것 다 들어오는 화각은 절제를 요한다.




꽃샘추위도 이제 거의 물러간 듯 하다만 바닷바람은 쌀쌀하다. 아직은 저 난로와 잡목 땔감이 유용하리라.




방파제 위에는 허름한 횟집들이 모여 있지만 언제나 한산하다. 누군가는 이 허름한 곳에서 투박하게 썰은 회 한점에 소주를 털어넣는 운치를 즐기겠지만 내가 한 번 그렇게 해본바로는 이 곳의 회 맛은 솔직히 그닥이었다.




송도해수욕장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이 '평화의 여상' 뿐인듯 하다. 촌스럽기도 하고 조형적으로도 우수해보이진 않지만 송도 해수욕장에 대한 크고 작은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송도의 상징으로서 뇌리에 기억될 수 있는 것 중 하나일 듯 하다. 나 역시 해안도로가 건설된다고 했을 때 이 것은 좀 남겨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다행히 위치를 조금 옮겨 보존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무조건 갈아 엎어버리는 불도저식 개발 시대는 지나갔음을 느낀다.

어쨌든 송도의 변화에 대한 큰 가치 판단없이 심심할 때면 들러 셔터를 눌러온지도 몇 년이 되었다. 그동안 송도의 모래사장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이제 또 복원을 한다니 틈날 때면 한번씩 들러 또 그 모습을 담담하게 기록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2010.03.28 포항 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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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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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6 서울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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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  서울놀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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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 서울놀이공원


할아버지가 안계셔서 그런가 2000년도에 별 생각없이 찍었던 이 사진들을 다시 보니 왜일케 애뜻한건지 모르겠다. 이게 핏줄의 정인가 싶은것이..ㅠㅁㅠ    저렇게 눈에 넣어도 안아픈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다니시던 할아버지 분들의 마음은 어떨까. 나 왜 이러지? 나이가 들었나 정말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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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의 골목길에서 만난 아이. 눈을 감았지만 그 때는 인화도 하지 않았던 이 사진이 왜 이렇게 맘에 드는지 모르겠다. 노출 완전 오버에 현상도 오버라 톤은 개판이지만 투박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흑백 사진을 처음 시작하던 초기의 네가티브들은 지금에 와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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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다듬던 할머니. 난곡의 좁은 골목에서는 할머니, 아줌마들이 나와서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나누며 나물을 다듬거나 하는 모습들이 흔했다. 집안이 좁고 어두워서이기도 했겠지만 재개발의 열풍이 몰아치기 전 난곡은 사람사는 냄새가 풍기는 정가는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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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의 경사가 심한 골목길은 노인들이 다니기에 절대 편하지 않았고 겨울에 눈이라도 와서 얼어붙으면 자빠지기 딱 좋았다. 골목을 지나다보면 염화칼슘 보관하는 집이라고 써진 집들이 한 두군데씩 있었다. 지금와서 보니 이 사진을 찍은 것도 가상하다. 사실 이 때는 왜 난곡에서 못사는 사람들 사진을 찍어야하는지에 대한 개념정립이 안된채로 헤매이기만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사진들을 찍어야 하는지 왜 좋은 사진인지 이해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 부터 사진을 찍어왔지만 대학교 1,2학년 때 난 내가 어떤 사진을 해야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도 아니고 내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사진을 대해야한다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난 내 사진의 색깔을 찾고 싶었고 여러가지 시도를 해봤고 다양한 책들을 읽어 나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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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사고. 세월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이런 장면 조차도 아련한 추억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흑백 사진으로 담은 스냅들은 꽤나 오래전의 장면을 보는듯한 착각을 준다. 그래도 21세기인 2000년도의 사진인데 무척이나 오래된 모습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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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간판의 오락실. 오락실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안타깝게도 난 학창시절 오락실을 들락거린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그다지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 앞 문방구 등에서 많이들 사먹었다는 달고나, 뽑기 등과 더불어 보편적인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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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곡에서 만난 희망들. 이 아이들을 만나기 전만 해도 난곡이라면 우울한 달동네..이거 하나만 생각했었다. 뭔가 진지한 태도로 뭔가의 스토리를 담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난곡 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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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들러서 쭈볏쭈볏 기웃거리다 선생님에게 애들 사진 좀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허락해주시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사진 제목에 달동네 아이들. 이런 식으로 안하실거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당부를 하던 그 유치원 선생님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복된 인연을 만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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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간 필름도 하필 감도 100인 TMX라 노출도 안나오는 상황에 이 녀석들은 부지런히 카메라 앞에 모여든다. 여기저기서 '나도 찍어주세요~','저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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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렇게 부대끼며 어울리고 장난칠 수 있는 친구들과 그러한 환경이 갖춰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나 이 사회에게나 행복한 일이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학원에서 시달리고 노는 시간엔 놀이터가 아닌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요즘 아이들의 성격 형성은 분명 앞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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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을 나서며...또 오라고 인사를 하던 아이들. 사진 인화해서 또 올게~ 라며 약속했지만 1년 후  내가 다시 찾았을 때 유치원은 벽돌 더미로 변해있었고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길이 없었다. 재개발 결정이 내려진 후 난곡엔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란 두 글자가 휘갈겨졌고 분위기는 흉흉했다. 그렇게 난곡에 대한 재개발 결정이 내려지고 집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나는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왜 그동안 난곡에 대한 사진을 더 많이 찍어두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바로 그거였다. 기록. 내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작업은 기록으로서의 사진이었다. 이 후 몇년간 나는 아마추어임에도 아마추어로서의 한계를 벗어넘고 싶었고 다큐 사진에 푹 빠져 많은 시도와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발점이 된 사건이 바로 난곡의 재개발이었다. 난곡은 어쩌면 내 사진의 방향이 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알려주고 사라진 소중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2000.05.17 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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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14

날씨가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하던 5월의 주말, 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여유
8년도 넘게 지난 이 필름들을 들여다보니 사람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본 지가 언제인가 싶다. 현상, 노출도 엉망일 만큼 기교도 부족하던 시절의 사진들이지만 필름 속에 사람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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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4.16  덕수궁

지금은 경복궁, 창덕궁은 물론 남한산성을 비롯한 성곽유적에서도 이와 같은 행사가 흔해졌지만 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던 2000년에는 아마 덕수궁에서의 수문장 교대식이 처음이었던걸로 기억한다. 혹자들은 규모의 화려함과 절도의 엄격함도 없는 옷입고 줄지어 왔다갔다 하는 엉성한 병정놀이같은 코스프레라고도 혹평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쓴다면 충분히 구경거리로 통할 수 있는 문화 상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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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4.05 경복궁

서울에서 무척 좋아하던 곳 중 하나였던 경복궁. 식목일을 맞아 촬영을 갔을 때 만났던 어느 꼬마. 벌써 8년이 훨씬 지난 이 시점에서 보니 좀 촌스러워보이기도 하다만 같이 온 엄마와 함께 꽤나 멋 좀 부린 차림이었다. 한 컷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그러라고 했고 꼬마는 알아서 포즈를 취했었다.


p.s. 필름에 기스와 먼지가 꽤나 생겼는데 대학시절 필름들은 왠만하면 그 분위기 그대로 놔두고 스캔하고자 한다. 물론 ICE가 되지 않는 흑백필름이라 일일히 작업해서 없애기도 귀찮기도 하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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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부산

영도대교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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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하동


3월에 월차신공으로 평일에 조용히 다녀왔던 섬진강.

하동을 빠져나와 남해안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달리던 중 보이는 간판 '최참판댁'
적어도 운치있는 고택과 최참판이 하동 마을 주민들에게 베풀었던 넉넉한 마음씀씀이 등의 훈훈한 일화를 떠올리며 핸들을 꺾었던 나의 기대를 무참히 깨준 곳이었다. 드라마 '토지' 세트장이었다는 민속촌 비스무리한 초가집들과 각진 목재로 새로 깨끗이 만들어진 최참판댁과 이런 것들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받는 어이없는 상황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야했다. 더군다나 수많은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단체 관광객들의 왁자지껄함에 질려버렸음은 물론이다.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소설의 감흥을 느끼고자 찾은 애독자는 있기나 했을까.

어쨌든 괜히 왔다라는 생각을 되뇌이며 세트장을 빠져나오며 만난 마을은 그나마 위안을 주는 모습이었다. 요즘 농촌 답게 빈 집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섬진강변의 넓은 들을 끼고 있는 곡창의 마을답게 여유가 느껴지는 한적한 마을이었으며 돌담도 예전 그대로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런 돌담을 보기도 어려워져 돌담도 보존해야할 향토 유적으로 분류될 정도이니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이런 골목길을 만나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골목을 돌아다니며 TMX가 들어있는 Nikon FM과 내가 제일 좋아했던 렌즈 ai-s 28mm2.8로 몇 컷을 담았다. 어딜가나 골목길은 셔터를 누르게하는 묘한 매력이 가득한 공간이다. 괜찮다 싶은 곳에선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재빨리 셔터를 누르곤 하지만 뭐 사실 딱히 대단한 사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감이 느껴지는 골목길에 사람이 없다면 허전하다는 나름의 고정관념으로 해마다 이 같은 사진을 수십장 남기게 하는 듯 하다. 작고한 김기찬 작가는 골목길만을 평생동안 필름에 담았다고 하니 골목길의 매력은 사진가들에게 남다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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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구룡포


대학 시절부터 군시절까지 이어진 약 7년 정도의 서울/경기권 생활을 정리하고 직장 덕에 다시 포항에 내려와서 좋은 점이 있다면 바다가 가깝다는 것이 아닐까. 간혹 갑갑하거나 하면 늦은 밤에도 송도 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아 바다 바람을 쐬며 담배 한대 피우며 걸을 수 있고 날씨가 좋을 듯한 날 저녁이면 다음 날 새벽 동해안으로 달려가 일출을 볼 수도 있으니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를 걷던 기분도 낼 수 있다.

3월의 네번째 토요일 나른한 오후 바닷 바람이나 쐬러 구룡포로 갔다. 그나마 가까운 어항인 구룡포에 가면 언제나 찍을 거리는 있다. 자주 가다보니 더이상 특이한 앵글이 나오지 않지만 제대로 된 작업을 해보고 싶은 소재는 많은 곳. 이 날은 몽골에서 활약한 후 전설의 명렌즈 Carl Zeiss Biogon 21mm4.5에 밀려 좀처럼 빛을 못본 니콘 ai-s 20mm2.8를 데려갔다. 사실 동일한 구도와 노출값으로 비오곤과 동시에 촬영해 비오곤의 명성을 새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 억지로 우겨야 비오곤이 조금 더 좋아보이는 수준이라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확대 인화시에 해상도가 얼마나 차이가 날런지 모르겠지만 사실 올드 렌즈들에 비해 현행렌즈의 해상도가 나쁠리도 없고 비오곤의 자랑인 왜곡억제능력도 크게 차이나는 편은 아니었다. 주변부 해상도는 확실히 비오곤이 훌륭해 보였지만 그런 세세한 차이를 확인하고자 필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노라니 드는 생각은 '객관적으론 돈지랄이다..' 이거 뿐.

이왕이면 좋은 카메라, 좋은 렌즈를 갖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욕심이겠지만 새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Rolleiflex와 Contax IIa에 밀려 찬밥이 되버린 나의 니콘 라인업들. 어쨌거나 가장 신뢰가 가는 10년지기 니콘에 Tri-X를 넣고 거리로 나가고 싶은 밤이다.



그러나 지금은 숙직 中      

젠장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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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먹고 지나가야 아쉽지 않은 대게
군대에 있을 땐 데리고 있던 계원 준용이 집이 영덕이라 택배로 받은 대게로
인사과 전체가 푸짐하게 먹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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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구룡포 어판장

겨울엔 과메기로 봄엔 대게로 붐비는 곳. 흐린 날이었음에도 이 날은 좀 활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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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하동

하동 송림 밑 섬진강 변에서 재첩을 잡으시던 아저씨와 한참을 얘기하며 사진을 찍었다.
외지에서 온 낯선 녀석이 들이대는 카메라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실 만도 했건만 그다지
의식하지 않으시고 간간히 던지는 질문에 답변해 주셨다. 사진 나오면 한장 보내드릴까요? 하고
물었지만 됐다며 손사레치셨는데..사실 사진 보내주기로 하고 보내준 것이 몇 장 안되는 것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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