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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하동

하동 송림 밑 섬진강 변에서 재첩을 잡으시던 아저씨와 한참을 얘기하며 사진을 찍었다.
외지에서 온 낯선 녀석이 들이대는 카메라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실 만도 했건만 그다지
의식하지 않으시고 간간히 던지는 질문에 답변해 주셨다. 사진 나오면 한장 보내드릴까요? 하고
물었지만 됐다며 손사레치셨는데..사실 사진 보내주기로 하고 보내준 것이 몇 장 안되는 것이 현실.
08. 3. 10 () - 월차를 내다!

 봄을 맞이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내게는 역시 섬진강을 찾는 길이 최고의 선택인 것 같다. 올해로 벌써 4번째나 찾는 봄의 섬진강. 3월 중순이면 섬진강 따라 피어나는 매화꽃의 무리는 정말로 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 물론 2월부터 피어나기 시작하는 남해안과 일부 섬의 동백꽃과 복수초들도 빼놓을 수 없지만 매화의 세밀하고 야무진 꽃잎이야 말로 그 중 최고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군자라 불리우던 매난국죽(梅蘭菊竹) 중 매화가 가장 첫째인 것도 괜한 것은 아니리라.

 아침 7시경 출근하듯이 집을 나서 포항-대구 고속도로를 통해 서대구 IC를 거쳐 마산외곽순환도로를 통해 남해안 고속도로에 합류하여 경남 하동을 향해 달렸다. 이틀전 엔진오일을 간 덕에 18만 키로의 주행기록에 달하는 내 12년된 아반테는 이날따라 아주 날아갔다. 밟으면 밟는대로 죽죽 나가는 평소답지 않은 놀라운 엔진파워를 보여주며 3시간 여의 질주 끝에 하동에 도착했다. 대학 다닐땐 여수행 마지막 무궁화호를 타고 내려오곤 했던 이 곳에서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언제나 하동 송림이다. 언제부터인지 입장료를 받고 있지만 최소한의 관리비라 생각하고 기꺼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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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송림에서 바라본 섬진강. 이 강을 경계로 저 건너편은 전남 광양이다. 조영남의 노래에 나오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에~의 그 섬진강. 당연히 차가 없던 대학생 시절 새벽에 도착한 섬진강가는 언제나 차가운 바람으로 몸을 움츠리게 했다. 저 다리를 건너 광양 다압면 매화마을까지 걸어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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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의 재첩을 건지는 아저씨. 이른 아침 갑자기 나타난 카메라를 주렁주렁맨 낯선 이의 인사도 반갑게 받아주시며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다. 매화꽃은 아직이라며 다음주 정도는 되어야 절정에 이를 것이라는 말에 광양으로 건너가기에 앞서 약간 걱정이 든다. 재첩은 국으로 밖에 안먹냐는 질문에 숙회로도 먹는다는데 아직 먹어보진 못했다. 해마다 섬진강에 들르면 꼭 찾게되는 것이 재첩국이었다. 미각을 화려하게 자극하는 전세계의 온갖 음식들에 익숙해진 오늘날 우리의 입맛에 특별한 맛을 선사하는 음식은 되지 못할지는 모르나 특별한 양념도 없이 재첩을 고은 뽀얀 국물에 부추 몇 조각이 떠있는 재첩국을 한 숟갈 입에 넣으면 섬진강과 봄의 향기가 온 몸에 퍼져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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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 어민회의 낡은 컨테이너 건물. 섬진강은 아직도 그 맑은 수질이 유지되고 있는 강 중 하나로서 재첩을 비롯하여 향긋한 향이 일품인 은어, 수질이 조금만 오염되어도 적응하지 못하는 민물참게가 잡힌다. 참게는 군사지역에서 보호받는 임진강 외에는 섬진강에서만 잡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마침 군복무했던 부대가 임진강과 가까워 참게 매운탕은 몇번 맛보았다. 이번 여행길은 혼자라 양이 많은 매운탕은 먹기 뭐해 참게장 정식을 먹었는데 평소 간장게장을 즐기지 않았으나 섬진강 참게장은 향긋하고 깊은 맛이 썩 괜찮았다. 이 모든 섬진강의 혜택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맑은 수질이 유지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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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 변에 피어난 매화. 역시 아직 이른 시기라 흐드러지게 핀 상태는 아니었지만 접사를 즐긴다면 꽃 잎이 싱싱한 이 시기가 더 제격일 듯 하다. 아마 이 번이 내가 섬진강을 찾은 네 번 중 가장 이른 시기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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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를 건너자 넓은 부지에 매화축제를 알리는 애드벌룬과 행사장 천막들이 눈에 띄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늘 찾던 그곳으로 향했다. 평일이라 역시 조용했고 서울에서 오셨다는 노부부께서 매화를 카메라에 담는데 열중이셨다. 요즘은 노인분들도 DSLR을 쓰시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 흔한 DSLR하나 없이 20년도 넘은 Rolleiflex와 니콘 F3HP와 FM을 들고온 나는 '저 보다 더 신세대이십니다.'라며 인사를 건냈고 할아버지는 우리야 잘 못찍으니 디지털을 쓴다고 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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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봄이다. 매화가 점점히 피어나는 섬진강변의 마을에서 모종을 심고 밭을 손질하는 일손이 바쁘다. 군대에 있을 땐 봄이 되면 부대 곳곳에 피어올라오는 달래를 뜯는 것도 소소한 재미 중의 하나였다. 달래를 뜯어 관사에서 후배 장교들과 모여 라면을 끓여먹으면 정말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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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필름에 담고 이 분은 캔버스에 담는 중. 파레트에 짜놓은 물감의 색채가 발랄하다. 학교 다닐 땐 그림은 좀 그리는 편이었는데 나중에 나이 들면 수묵화나 제대로 한번 배워봐야겠다. 돈이나 많이 벌어둬야겠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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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맑고 잔잔한 물, 깨끗한 백사장. 언제나 섬진강은 잔잔하고 고요하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휴식을 취하기 제격인 곳. 섬진강이 배출한 文人 김용택의 책을 가져갈 걸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시간나면 김용택의 글이나 다시 읽어봐야겠다.

- 하늘은 맑았으나 대기가 그리 청명하진 못했던 관계로 발색이 그다지 좋진 않은 듯. 흑백은 다음 기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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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2  동경 황성

전형적인 일본식 축성법을 보여주는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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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2  일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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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1  일본 도쿄

그래도 젊었던 시절이었나부다.
야경이 있는 걸 보니 삼각대를 대낮부터 들고 다녔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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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1  일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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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1  일본 도쿄

일본스럽던 느낌의 거리.
사실 도쿄나 오사카는 서울과 다를바가 없어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다음엔 규슈나 훗카이도를 가봐야겠다. 일본은 시골 여행이 더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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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01  베트남 호치민시

호치민에서 지내는 동안 자주 만나서 놀던 친구들.
호치민 정보대학교 한국어학과 3학년이던 얘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한국말을 잘했다.
귀국하고 나서도 메일을 자주 주고 받았는데 사진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아직도 못지키고 있으니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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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베트남 호치민

여기가 시청이었던가. 벌써 5년이 흐르니 기억도 잘 안나는구나..
프랑스 식민지 시절 지어진 서구양식의 건물.
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곳이다.
사진을 찍어주며 파는 베트남사진사 아저씨를 하나 만났는데 Canon AE-1을 사용 중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 처음 쓴 카메라라며 통하지 않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우리 기념 사진을 부탁했었던..


2003.07.23 청계천 삼일아파트


2003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 의한 청계고가 철거와 청계천 복원 사업은 단연 나의 관심을 사던 사건이었다. 마침 발표수업 과제로 청계고가 철거에 관한 조사를 해왔던 터라 충분한 back data도 수집된 상태였다. 하계훈련을 들어가기 전에 틈틈히 청계8가 일대를 돌아다니며 고가가 사라지기 전의 모습을 남겨두었다. 다만 청계고가의 철거 시작일에는 꼼짝없이 성남 학군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이라 국방일보를 보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훈련을 퇴소하자마자 다시 카메라를 들고 청계천을 찾았다. 청계고가는 이미 철거작업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청계천 일대를 좀더 높은 곳에서 조망하고자 삼일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이 할아버지를 만났다. 고향이 전주라는 이 할아버지는 청계천에서만 30여년을 살아오신 분이셨다. 80이 넘으셨지만 정정하셨던 할아버지의 말씀은 이가 많이 빠졌던 관계로 모두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아주 담담한 입장이셨다.



2007. 12. 31. 포항-동대구간 통일호의 마지막 운행

2008년 부터는 무궁화호가 대신하게 되지만 요금은 거의 2배로 올랐고
지하철같은 구조의 통일호에 비해 내부 여유공간이 부족한 무궁화호 객실이
많은 짐을 가지고 기차에 오르는 시골 할머니들에게 과연 어울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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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호치민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이 그러하듯 자동차보다는 오토바이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다. 길거리에서 신호등을 찾기는 쉽지 않고 교차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은 편인 호치민시에서 수많은 오토바이들로 인해 공기는 좋지 않은 편이고 이처럼 뒤엉켜 도로를 질주해도 내가 본 교통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할 수 있지만 그 들 나름의 질서 속에 오토바이들은 제 갈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다만 불안한 마음에 베트남 친구들에게 제발 헬멧 쓰고 다니라고 했지만 더운 나라에서 그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인듯 그다지 귀담아 듣는 것 같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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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호치민시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나 여전히 베트남에는 불교인구가 가장 많은 듯 하다.
우리와 자주 만났던 한 여대생은 교회에 다닌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자 이해를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다지 종교에 대해 심취하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사실 현실에 충실한 삶이 어쩌면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반면 티벳 사람들이 그들의 티벳불교(라마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생업을 포기하고 오체투지에 나서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고 영적으로 아름다워 보이지만 당나라의 공주가 시집올 만큼 강성했던 토번왕국이 쇠약해진것도 어쩌면 불교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하게 불교를 받아들였어도 '살생유택'이라 하여 필요하면 살생도 가능하다고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통일 전쟁을 수행한 신라와 비교되는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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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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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베트남 호치민市

짬을 내어 베트남 전통 수중공연을 보러갔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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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베트남
다랏을 둘러보고 돌아오던 길.
어둑어둑해진 밤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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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바이칼을 떠나며..
다시 올 수 있을지 알수 없는 곳이라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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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벌써부터 그리워 지는 곳.
환바이칼 열차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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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가라강 건너편의 뽀르트바이칼과 마주한 작은 마을
말이 호수지 바다와 같은 면적이다 보니 파도(?)가 높아 배가 못 뜰 뻔 했지만 다행히 겨우 날이 개이고 약간 높은 파고를 무시하고 배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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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6  서울역

아마 나의 마지막 휴가였던가..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짠해질 때가 있다.
그래도 간절하게 기다리던 뭔가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던 시기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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