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8. 포항

Ricoh GR1s / Kodak 400TX / IVED


아빠가 되었다.


그동안 시장 바닥이나 낡은 포구, 재개발 지역 등지를 돌아다니며 거실에도 걸어두지 못할 '쓸데없는' 사진이나 찍어오던 사진질은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유행하는 말로 '뭣이 중한디?!'였다. 아빠 사진가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결국 딸냄의 성장 기록을 남기는 일이 아닌가. 아빠가 되면서 사진 생활의 주제가 아주 단순 명확해졌다.


 


 


실내에서 최적일 것


자, 그렇다면 육아 사진은 무엇으로 찍어야할까? 지금 생각해도 좀 어이없지만 '어떻게' 찍을 것인가 보다 당장 '무슨 카메라로' 찍을지가 가장 큰 고민으로 다가왔다. (마땅치 않으면 이 기회에 하나 더 사는거다..) 하지만 이미 육아 사진을 핑계로 삼아 Nikon D700에 꽂을 SB-700과 AF 35mm f2.0D를 들인지라 카메라를 또 사기엔 명분이 서질 않았다. 책장 위에서 몇년째 놀고 있는 카메라가 한두개가 아닌데 저 중에 육아 사진을 찍을만한 카메라가 한 대도 없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통할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 있는 걸로 찍자.'

새 카메라에 대한 욕심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이 중요한 임무에 투입할 최적의 무기가 무엇일지 검토해보기로 했다. 육아 사진이니 당분간은 대부분 실내에서만 촬영이 이뤄질 것이다. 당연히 이 작업에 투입될 카메라의 작전 요구 성능의 기본은 '실내 촬영에 최적일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밝은 개방값과 저진동 저소음, 실내에서 빠른 포커싱, 가벼운 무게 등을 필요 조건으로 들 수 있겠다.


이 기준에 의거 갖고 있던 카메라들을 하나하나 따져봤다. 제일 먼저 SLR들이 전원 탈락헸다. 그렇잖아도 셔터스피드 확보가 어려운 실내인데 블러를 유발할 '철푸덕!'은 안될 말이었다. 반면 RF기종들이라면 이 부분에서는 유리하겠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CONTAX IIa나 LEICA M3 같은 기종들은 노출계도 없고 움직이는 딸냄이에 재빨리 포커싱하기가 쉽지않아 아무래도 셔터 찬스를 놓칠 일이 많을 것 같다.(RF는 역시 조여서 찍을 때 진정한 매력이..) 결국 얘들도 일단 보류. 똑딱이 CONTAX T3는 크기도 작고 렌즈 성능도 좋고 AF도 되니 다 좋았는데 최대개방값이 2.8로서 다소 어두운데다 결정적으로 저속 셔터스피드가 정확히 얼마인지 표시가 안되어 실내에선 불안하기 그지 없다. 1/15초인지 1/4초인지 알아야 조심을 하는데..  결국 얘도 탈락했다.


 


 


Konica Hexar AF


이것저것 빠지고 나니 남은 것이 몇년동안 쓰지도 않고 쳐박아 둔 HEXAR AF였다.

Konica에서 내놓은 이 카메라의 가장 큰 특장점으로는 구동 소음을 최소화한 '사일런트 모드'와 우수한 성능의 35mm 렌즈를 들 수 있었다. 모터 와인딩 소음의 억제에 많은 공을 기울인 '사일런트 모드'는 당시의 대다수 자동 카메라들에 비해 상당히 조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동식 RF카메라들에 비할 바는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의미를 높게 두진 않는 편이다.

하지만 섬세한 묘사력과 현대적이고 깔끔한 콘트라스트를 보여주는 렌즈의 성능 만큼은 정말 훌륭하여 예전부터 사진가들 사이에서 '주미크론'에 필적한다는 소문이 회자될 정도였다. 이 같은 호평에 힘입어 코시나에서는 이 렌즈를 스크류 마운트로 별도 제작하여 한정 발매되기도 했다.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로 한정 발매되었던 UC-HEXANON 35mm f2.0. 지인의 렌즈다.


반면 HEXAR AF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최고 셔터스피드가 1/250초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아니, 1/1000초도 대낮에 감도 400필름을 개방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판에 고작 1/250초라니... 주로 조리개를 조여서 찍는 편이라 사실 셔터스피드의 한계는 촬영시에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막상 들고 나갈 카메라를 고르는 순간 주저하게 만드는 심리적 부담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렌즈의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HEXAR AF는 그리 자주 사용되지 못하고 집에서 오랜 세월 놀고만 있던 중이었다.

그렇지만 주로 실내에서만 사진을 찍는 용도라면?

그랬다! 실내에서만 찍는다면 녀석의 치명적인 셔터스피드의 한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 않은가. 감도 400짜리 필름을 넣어도 1/60초를 넘기는 경우조차 거의 없으니 말이다. AF의 정확도도 우수하고 속도도 빠른 편이라 셔터 찬스를 잡기에도 용이하며, 렌즈 교환식 RF기종들에 비해 최단거리도 조금 더 짧은데다(0.6m) 파인더 내의 프레임 라인은 시차 보정도 거리에 연동해 이루어지니 좁은 공간에서도 활용도가 높다. 구동 소음을 최대한 억제한 사일런트 모드는 딸냄이가 자고 있는 모습을 살짝 찍기에도 부담이 적다. 게다가 데이터백도 기본으로 달려있어 기념할 만한 날에는 날짜를 찍어줄 수도 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육아 사진에 최적의 카메라가 아닌가?!



7개월이나 된 후에야 필름으로 사진을 담기시작했음이 후회스럽다. / Ilford Delta 400




쿠션을 좋아하는 딸냄 / Ilford Delta 400




청송 외가집에서 / Ilford Delta 400




엄마보다 먼저 일어난 아침 /  Ilford Delta 400




꽤 늦게까지 떼지 못했던 쪽쪽이 / Ilford HP5+400




걸음마 연습 중 / Kodak TMY




돌사진 찍으러 간 스튜디오에서 / Kodak TMY




아빠랑 같이 찍은 사진은 이런 것 뿐이다 / Ilford Delta 400




바나나 먹으며 신난 딸냄 / Ilford HP5+400




할미랑 영상통화 / Ilford HP5+400




엄마 따라 톡톡톡 / Ilford HP5+400




하나 둘 찰칵! / Ilford Delta 400




자동카메라 하나를 줬더니 자기거라고 잘 들고 다닌다 / Ilford Delta 400




베개 위에서 장난치며 / Ilford Delta 400




목욕하고 나서 기분좋은 딸냄 / Ilford Delta 400



4-5년간 멈췄던 필름 사진질을 다시 시작한 건 딸냄의 성장 과정을 조금은 더 '의미있는 수단'으로 기록해주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렇게 한정적인 용도에서만 조금씩 '아껴가며' 필름을 쓰겠다는 다짐과 달리 다시 시장 바닥이나 찍고 돌아다니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중요한 주제는 가족의 일상을 담아내는 개인적이고도 소박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HEXAR AF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메라는 아니겠지만 가장 고맙고 기특한 카메라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이 카메라가 없었다면 딸냄의 성장 과정을 편안하게 기록할 카메라를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었을 지 선뜻 떠오르지가 않는다.


오늘날 HEXAR AF는 중고가 기준으로 50만원 내외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끝내주는 헥사논 35미리 렌즈의 성능을 놓고 보면 사실 렌즈를 사면 바디는 그냥 따라오는 격이나 마찬가지. 주머니 사정 가벼운 아빠 사진가들이 가족의 일상을 촬영하는데 이만한 카메라가 또 있을까. 작은 문제를 탓하며 팔아 치워 버리지 않았음이 새삼 다행스럽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세상 모든 것에도 길고 짧음이 존재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잣대로 그 길고 짧음을 따져보며 인생의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방향을 결정한다. 99%가 맘에 들어도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1%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못난 모습이 내 눈에는 보기 싫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덮고도 남을 정도의 매력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줏대있는' 결정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크게만 보였던 단점이 더이상  밉지 않자 너무나 예쁘게만 보이는 HEXAR AF














2016.10.03. 포항

Ricoh GR1s / Kodak 400TX / IVED



2016.10.03.

동네 편의점에서 밤마실 중이면 자주 마주치는 녀석

Ricoh GR1s / Kodak 400TX / IVED




















2016.09.22 경주

Minolta AF-C / Kodak 400TX / IVED
















2016.09.19. 경주

Minolta AF-C / Kodak 400TX / IVED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7만원에 산 카메라가 이 정도 나와주면 감사하다.



세상이 시끄럽다.


 

내 삶도 만만치 않게 시끄럽다. 당장 내 지갑에서 돈이 들고 나는 일이 아니라면 마음을 쓰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요지경 같은 세상은 보였고 경악과 좌절의 비명 소리가 들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믿어야 하고 또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지 두렵다.


요순시대, 유토피아, 샹그릴라, 그리고 율도국(?). 그래. 어차피 그런 이상향이 실존하리라 믿은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곳에 가까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함이 옳지 않은가. 이 땅의 그저그런 필부 중 하나인 나로서는 요즘을 감당하기가 더욱 벅차진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비열한 거짓들 앞에서 나는 더욱 작아진다.


 

 


M3를 느끼다


 

하릴없이 멍할 때면 M3를 만지작 거리곤 한다.

셔터를 누르는 것 보다 셔터를 장전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초기형에서만 느낄 수 있는 더블스트로크의 손맛은 M3를 사용한다면 포기하기 어려운 매력이다. 부드럽고 매끈하면서도 절도 있게 끊어지는 그 느낌은 마치 볼트액션식 소총을 장전하는 듯, 셔터를 장전하는 순간의 설레임과 흥분을 극대화 해준다. 엄청난 수의 부품들이 투입된 M3의 파인더는 완벽 그 자체다. M라인업 중 유일하게 화이트 아웃 현상이 없고 등배에 가까운 0.91배의 배율은 내 눈의 시야 그대로, 과장과 왜곡없이 솔직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셔터는 매우 부드럽게 작동하며 아주 정숙하다. 물론 일회용카메라들도 조용한 소리를 들려주긴 한다. 하지만 그들의 '틱'하는 맥없는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데 이를 단순히 '조용하다'라고 표현하긴 부족하다. M3의 셔터음은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조용조용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면서도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그 속에 강단이 느껴지는, 그런 소리라 하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챡!'


 


M형 라이카의 시작과 끝, 완벽을 추구했던 카메라


 

내가 가지고 있는 833XXX시리얼의 M3는 56년 생산분으로 올해로 무려 환갑을 맞이하셨다. 라이츠사가 M3를 개발하며 얼마만큼의 기대수명을 목표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M3는 쌩쌩하다는거다. 그것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재미로' 사용하는 일부 클래식 카메라들과 달리 M3는 최신 라이카 카메라와 다를게 없을만큼 편리하다.


M3는 등장과 동시에 그야말로 경쟁사들과 사진가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바르낙의 많은 단점들을 일거에 해결해 버렸고 자동으로 변환되는 3개의 프레임을 내장한 밝고 시원한 파인더와 자동으로 리셋되는 필름 카운터, 최고의 조작감과 우수한 내구성의 부품들과 만듦새, 유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운 디자인과 정밀한 상판 각인, 새로운 베이요넷 M마운트의 도입과 동시에 출시된 우수한 렌즈들까지 더해졌다. 제작단가와 생산효율 보다 제품의 완벽을 우선시한 다시 나오기 힘든 카메라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M3의 완벽함은 라이츠사에게도 부담일 수 밖에 없었는지 이후의 M라인업들은 원가절감의 논리가 적용되며 완성도가 저하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보다 다양한 화각의 프레임을 지원하게 되거나 보다 빠른 필름 로딩과 되감기가 가능해지는 등의 아주 더디고 소소한 개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M3의 장점들이 유지되지 못한 부분은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그랬기에 가능한 모든 부분에서 완벽을 추구하고자 했던 M3의 상대적 지위는 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이처럼 M3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시작과 동시에 끝판왕이 되어버린 무결점의 카메라였고 마치 1회초 선두타자가 끝내기 홈런을 쳐버린 것과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카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자신만만했던 Leica M3의 등장


 


 


세상은 M3 같아야 한다.


 

M3를 만지고 있으면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60년전 독일의 숙련공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거짓없는 기계를 만들어낸 것은 최고의 제품을 향한 그들의 순수하고 정직했던 열정과 장인정신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져 60년을 버텨온 M3와 달리 누군가에게는 5년도 버거워보인다. 속임수와 거짓은 완벽할 수 없다. 오래가지 못한다. 언젠가는 탈이 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다해 존경할 사람이 없는 요즘이라 오히려 낡은 카메라 하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이 또한 슬픈 일이긴 하나 그런 카메라 하나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말이지.. 유토피아나 샹그릴라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세상은 M3 정도는 되야할 거 같다.





나의 Leica M3




작례 몇 장


























2016.06.06. 포항

Leica M3 / 50mm f2.8 Elmar / Kodak 400TMY / IVED






“라이카 바디에 왜 다른 렌즈를 꽂아?”


사진을 하며 알고 지낸지 오래된 후배는 작년에 M6와 현행 50미리 엘마를 손을 떨며 겨우 마련했다.  50미리를 좀 쓰다보니 역시 0.72배율의 M6에게 최적인 35미리 라이카 렌즈가 간절해졌다. 하지만 그의 작은 간과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는 쉽사리 Summicron ASPH 따위를 덜컥 지를 수는 없었다. 결국 Voigtlander의 렌즈들 따위를 사면 어떻겠냐고 나에게 종종 물어봤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런거 쓰려면 M6는 뭐하러 샀냐? 성능이 좋아서 라이카 쓰냐? 그냥 라이카라서 쓰지.”


솔직히 나는 그랬다. 라이카를 쓰는건 그냥 라이카니까 쓰는 거였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예쁘다는 거? 토이 카메라 따위가 아니라면 내 눈에 광학적으로 몹쓸 렌즈는 별로 보질 못했고 해상도나 콘트라스트, 색감, 왜곡 억제력 등은 예민하고 냉철한 분들이 리뷰에서 친절하게 분석해주시면 ‘음 그렇군.’ 하는 정도였고, 결국 내가 사진을 찍고 나면 어느 렌즈, 어느 카메라든지 나름대로 괜찮았다. (나는 사실 장비 쪽엔 상당히 박애 주의자였던?) 그렇지만 어차피 라이카 바디를 쓴다면 라이카 렌즈가 맞다고 봤다. 이미 라이카를 쓴다는 것 부터가 어쩌면 ‘실용’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닌가.


그런데 M6를 쓰면서 굳이 타사의 렌즈라니. 성능이야 좋겠지. 값도 싸지. 모양도 나름 어울려. 하지만 라이카가 아니야. 그런건 사면 결국 바꾸게 돼. 그를 말렸다. 총알을 좀 더 모으거나 Summicron보다 저렴한 Summaron 괜찮은 물건이 나오길 기다려보자고.




Summaron 3.5cm f3.5


그러던 차에 라이카 쪽에서는 나름 전문성을 가지고 오랜기간 비교적 신뢰가 축적됐다고 하는 ‘ㅈ카메라’와 ‘ㅇ카메라’에 거의 동시에 주마론 매물이 올라왔다. 아쉽게도 M마운트가 아닌 스크류 마운트였지만 우리에겐 LTM이라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ㅈ카메라’의 매물엔 마침 LTM아답터도 포함되어 있었고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미크론 ASPH 중고가의 25% 정도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달려 보는거다. 후배에게 연락했다. 이거나 사봐라.




"쓸 시간도 없는데 나한테 보내."


위탁상품이라 현금 박치기를 해도 한 푼도 안깎아주더라며 후배는 볼멘 소리를 했지만 거기서 깎아봐야 얼마나 깎겠느냐고 상태만 좋으면 몇만원 더 준건 아까워하지 말라며 녀석의 말을 잘라 버렸다. 며칠 후 택배로 물건을 받은 후배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상태를 보여줬다. 사진 찍는다는 녀석이 찍은 제품 사진치곤 너무 X판이라 짜증이 밀려왔다. ‘아 잘 좀 찍어서 보내봐. 렌즈 알 좀 보이게.’


녀석의 허접한 제품 사진으로도 일단 렌즈의 상태는 꽤 좋아 보였다. 주마론이야 이쁘기로 치면 주미크론 1st 8매와 같은 디자인의 2.8 주마론이 최고지만 얘는 엄청 구닥다리처럼 생긴 스크류 마운트 3.5cm 주마론이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생산된 올드 자이즈 렌즈는 그렇게나 좋아했으면서 스크류 마운트 라이카 렌즈들에 관심이 없었던 건 뭔가 덜 떨어져 보이는 외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나의 편견도 50미리 엘마를 쓰면서 사라졌고 라이카 올드 렌즈 특유의 굵은 표현력과 질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주마론도 참 궁금해졌다.


주말에 나가서 얼른 찍고 결과물 좀 보여달라고 후배를 재촉했건만 주말에도 연이어 출근이 잡힌 그는 좀처럼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었다. 나같으면 회사에 들고 가서라도, 점심을 굶고 나가서라도 후딱 찍어볼텐데 이 녀석은 궁금하지도 않은지 천하태평이다. 결국 안달이 난 내가 (근데 왜 내가 안달이..) 연락을 다시 했다.


“야 쓸 시간도 없는데 그냥 나한테 보내라. 내가 자~알 테스트 해줄게. 그리고 M6도 같이 보내. 알다시피 내 M3에는 35미리 프레임이 없어.”




주인보다 먼저 써보게 된 렌즈.


순둥이 후배는 형의 말에 별 대꾸도 않고 카메라를 다음 날 보냈다. 물론 한 마디를 하긴 했다. 경주에 지진 자꾸 나는데 자기 카메라 잘 지켜달라며… -_-  어쨌든 평일에 무조건 도착하게 하라는 지시를 잘 지켜 금요일 오후에 택배가 도착했다. 사무실에서 박스를 호들갑스럽게 뜯어봐야 ‘저건 또 뭘 샀나?’ 하는 팀장의 눈초리만 받을 것 같아 박스를 안고 차로 쏙 들어와서 뜯었다. ‘자식, 딴에 엄청 아끼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하게 완충제가 들어간 포장을 풀자 그의 M6와 주마론이 나타났다.





가까이 있는 지인은 늘 블랙 바디에 실버 올드 렌즈의 조합이 참 예쁘다고 얘길 했었다. 깔맞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리 공감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나쁘지 않다. (물론 블랙페인트 IId였어야 더 멋질 듯..)





렌즈 상태도 꽤 괜찮아 보인다. 외관은 아주 깨끗하고 렌즈 알의 코팅이 상한 부분도 없어 보인다. 밝은 빛에 비춰보면 내부의 헤이즈나 클리닝 기스가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까진 해보지 않았다.




Summaron으로 찍은 두 롤의 흑백 필름


새 카메라, 새 렌즈를 만져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비록 내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M6를 가지고 놀며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감상하며 금요일 오후를 버텼다. 내일 좀 찍어줘야지. 당장 찍을 것도 아니면서 AGFA APX100 한 롤을 넣었다. 역시 퀵로딩이 편하긴 하구나. M3가 갑자기 조금 원망스럽다.




첫 테스트 : 2016.09.24. 포항 / Agfa APX100


토요일 오전, 집에 놀러온 처제네와 함께 포항 환호해맞이공원에 나들이를 가서 M6와 주마론을 꺼냈다. 카메라 보는 눈이 이제 예리해진 와이프가 ‘그건 또 뭐야?’ 라고 물었지만 준비했듯이 당당하게 후배의 카메라라고 얘길했다. ‘이젠 카메라도 돌려 써?’ 라고 했지만 그 이상 잔소리는 없었다. 가족들과 산책을 하며 유유자적 몇 컷을 찍고 오후에 장보러 간 효자시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 롤을 모두 소진했다. (그렇다. 지난 포스팅에 썼던 GR1s 테스트와 같은 날이다.)





환호해맞이 공원에서 내려다 본 영일만 바다. 노출차가 극명한 상황을 일부러 택해보았는데 역광에서의 빛 번짐도 없고 넓은 계조를 보여준다.





오후의 테스트는 장보러 효자시장에 온 김에 주변을 돌아다녔다.
저 쪽 골목 끝에서 자전거 한 대가 오는 것을 봤다. 건물 뒤에 몸을 숨기고 렌즈의 거리를 5피트(약 1.5미터) 정도에 맞춰두고 조리개를 조였다. 그리고 잠시 뒤 자전거가 다가온 순간 카메라를 들어 바로 셔터를 눌렀다. 약간 흔들렸는데 의도치 않게 패닝효과가 되어 다행이다.





늦은 오후의 낮은 햇살이 만들어주는 그림자는 별 것 아님을 알아도 자꾸만 찍게 되는 매력이 있다. 자신의 그림자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의 심리는 무엇일까. 거울에 비친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자신감 부족? 아니면 은연 중에 나를 보이고 싶은 욕망? 일단은 흑백에 어울리는 질감이 좋아 찍었다. 계조가 참 좋다.





누가 지나가길 기다렸으나 실패.





위의 컷을 찍고 자리를 옮기니 이런 타이밍이 온다. 역시 급하게 눌러서 흔들렸으나 아까보다 더 패닝이 잘 됐다. 패닝 전문작가로 나서볼까 하는 1%의 객기가 잠시 솟았다. 하지만 이거슨 필름. 비싼 필름으로 이제 그런 짓은 못하겠다. 그리고 원래 이런 컷은 하려고 하면 잘 안되더라는 건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진실이다.




두번째 테스트 : 2016.09.26. 경주 / Kodak 400TX





회사에서는 저녁도 준다. 고맙게도.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는 건 칼퇴를 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의사표시가 되버린다. 저녁을 먹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칼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녁 먹는 대신 나는 카메라를 들고 회사 뒷 길을 빠져나와 인근 촌 동네로 왔다. 용명리사지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차에서 내려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저 덩쿨은 더 올라갈 줄이 있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라는 쓸데없는 궁금증이 들었다. 평소라면 이런 건 찍지도 않았을테지만 흐린 날의 희뿌연 풍경들이 이 날따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런 날씨의 풍경은 ‘덜 떨어진’ 주마론의 성능과 어울어져 뭔가 회화적 이미지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이 곳은 몇년전 경주개 ‘동경이’ 마을로 지정된 곳이다. 동경이는 진돗개와 비슷한 생김새이나 꼬리가 아주 짧은 것이 특징으로 경주 지역 토종견으로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아쉽게도 마을에서 개 그림만 잔뜩 보았을 뿐 정작 동경이는 한 마리도 보질 못했다.





용명리사지 삼층석탑. 그리 큰 탑은 아니나 균형미를 갖춘 세련된 탑이다. 탑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서 쉬고 계셨다.





평소 조리개를 개방해서 사진 찍을 일이 많이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렌즈 테스트차 빌려온 것인데 이런 컷은 하나 찍어봐야하지 않나 싶었다. 보들보들 예쁘기만 한 현행 렌즈들의 보케에 비해 더 아련하고 따스한 느낌이 참 좋다.





요즘은 해가 짧다. 흐린 날이라 더 어둡고 더 이상 찍기는 힘들것 같다. 그래도 400TX를 넣길 잘 했다 생각하며 길을 내려간다.




세번째 테스트 : 2016.09.27. 경주 / Kodak 400TX





오늘은 해가 나왔다. 그래서 또 저녁을 안먹기로 했다. 이렇게 밥까지 굶어가며 사진질을 하고 있노라니 진작 공부를.. 아니 공부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도 이렇게 열정을 다했다면 대성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 대성할 수 있을까?) 지나다니면서 꼭 찍고 싶던 낡은 이발소를 담아봤다.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며 좁고 어둑한 실내에서 21미리를 가지고 1600으로 증감한 400TX로 다큐를 찍고 싶지만, 그 전에 일단 내 머리를 그에게 맡기며 말문을 트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리라. 물론 내 머리를 그에게 맡기는 것에도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하교길의 아이들. 작고 여린 여학생들의 그림자가 비현실적으로 커지는 오후의 낮은 빛





다 쓰러져 가는 헛간과 아무렇게나 심은 호박에선 꽃도 피고 저 멀리에는 아파트가 보인다. 건천 지역은 인근 산업단지가 커지면서 유입 인구가 늘고 새 건물들이 많이 생겨나 몇년전에 비해 스카이라인이 많이 달라졌다.





지은지 얼마나 된 집일까. 벽의 단면만 찍은 이 장면만으로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은 주마론이 1950년산이니 그와 비슷할까? 아니 오히려 이 집이 덜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교길의 여학생. 하늘이 넓게 들어가는 역광에선 콘트라스트가 낮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런게 또 올드 렌즈의 맛이라면 맛이고 재미라면 재미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지 제 몸만한 트렁크를 들고서 씩씩하게 걸어가던 여학생. 대문 옆에 투박하게 쓴 ‘방있음 2층’이 인상적이었다.





지진의 흔적. 곳곳에 돌담이 무너진 집들이 제법 보였다. 살면서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공포였다.





건천1리 공부방.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서울(특히 이른바 강남 8학군)과 이런 시골의 학업 성적, 상위 학교 진학율의 차이가 많이 나는 건 결국 개인의 역량보다도 주어진 환경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은 아닐까. 경쟁의 수준 부터가 다르기에 여기서 공부를 좀 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막상 나가보면 우물안 개구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그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 일지도 모른다.





대략 이렇게 일주일간 갖고 놀며 두 롤의 흑백 필름으로 주마론을 겪어봤다. 충분한 소회를 풀어내기에 일주일은 짧은 기간이었고 72컷으로 이 렌즈의 특성을  파악하기에 나는 너무나 막눈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흑백 사진을 위주로 찍는다면 굳이 비싼 주미크론이 아니어도 라이카의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한 렌즈라는 점이다. 세필로 그린 듯한 섬세한 묘사력과 뛰어난 왜곡 억제력,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성능의 주미크론 ASPH도 좋지만 약간 뭉툭해진 2B 연필로 그린 듯한 굵고 묵직한 묘사를 보여주는 주마론의 느낌도 개인적으로는 참 마음에 들었다.


주머니가 가벼워 대안으로 택했던 땜빵 렌즈가 이 정도라면 사실 더 바랄게 없다. 후배에게 다시 렌즈와 카메라를 싸서 보내며 문자를 보냈다.


“야 렌즈 대박 좋더라. 잘써라.”


(그리고 이 렌즈를 써본 덕에 나는 뜬금없이 2.8cm Summaron에 꽂혀 버렸다..)


2016.10.13. 회사에서



몇 년은 쓸 줄 알았던 필름이 슬슬 바닥을 보이자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한참 열심히 찍던 시절에 비하면 많은 것도 아니지만, 한 달에 10롤 정도를 찍어대니 넉넉할 줄 알았던 수십롤의 비축 물자도 얼마 버티질 못했다. 이렇게 많이 찍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필름을 다시 쓰기 시작하니 디지털에는 손이 가질 않는다.



지인과 함께 면세 한도를 꽉꽉 채워 주문한 필름은 2주일 하고도 며칠이 더 걸려 뉴욕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회사로 날아왔다. 박스 겉면에 무슨 이유인지 받는이의 이름이 빠져 있었는데도 내용물이 적힌 스티커에서 'Kodak Potra 160'이라고 적힌 것을 본 여직원이 알아서 가져다 준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것과 반비례하여 마음은 넉넉해졌다. 이제 또 몇 개월을 버틸 수 있겠다는 안도와 그보다 더 큰 설레임. 포장도 뜯지 않은 새 필름임에도 벌써부터 저 필름에 남길 추억과 이미지에 들뜨는 가을날이다.

































































2016.09.04. 포항






























































2016.09.10. 포항






























2016.08.30. 경주





2003.07.23. 서울

청계고가 철거 당시





































































2016.07.30. 울진

















































2016.07.16. 포항



2016.08.15.







































2016.08.14.













































































































2016.07.23. 포항





































































































































2016.08.04~05. 오다이바








































































































































2016.08.04. 우에노 공원, 아메요코 시장, 신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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