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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꽃들도 서리가 내리고 찬 바람이 불면 시들어 간다.

아직 이런 말 할 나이는 아니겠지만 팔팔(?)했던 20대 초중반의 젊음이 지나가버린 것이 안타깝고 억울하다. ;;

이제 이 꽃 처럼 시들어갈 뿐이지 않은가.

다만 얼마나 곱고 품위있게 그리고 천천히 시들어가느냐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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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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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하고야 말았다. ㅎㄷㄷ  창간 이래 수십년간 다큐 사진의 전성기를 이끌어간 주간지 '라이프'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세계 각국에 파견된 뛰어난 사진작가들로 부터 원고를 받아 생생한 현장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전달해 준 라이프. 특히 전쟁과 보도사진은 떼놓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2차대전을 거치면서 라이프는 급성장하게 되었는데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오마하 비치에서의 유명한 사진들도 라이프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갔다.

 자유 베트남 패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 라이프가 수십년의 화려했던 시절을 접고 폐간을 선고한 이후 이제 다큐사진은 끝났다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라이프는 오늘날 가판대에 넘쳐나는 수준 이하의 주간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다큐 사진에 관심을 가진 이 후로 라이프는 한번쯤 꼭 보고 싶은 잡지였다. 이 녀석의 실물을 처음 본 것은 작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로버트 카파展에서였는데 카파의 사진이 표지로 씌여진 라이프지가 유리액자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처음 느낀 것은 '생각보다 꽤 큰 판형이다'라는 생각이었고 한번 펼쳐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다시 라이프는 기억속에 잠들어 있다가 여름 즈음부터 나의 라이프 찾기는 시작되었다. 뜨거운 어느 여름 오후에 대구의 헌 책방 골목을 돌아다녀봤지만 라이프가 뭔지도 모르는 가게들에서 적잖은 실망만을 느끼고 말았고 미국에 나가있는 지인에게도 연락해보았으나 역시 구하기는 쉽지 않은 모양. 동대문 일대의 헌 책방들을 한번 뒤져야겠단 생각을 하던 중 일단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로 하고 나섰다. 인터넷상에서 영업 중인 헌 책 전문사이트는 수십군데나 있었지만 라이프로 검색하면 나오는 것은 대부분 라이프 폐간 이후 80년대 초에 한국일보와 타임-라이프에서 펴낸 단행본들이었다. 수십년간의 라이프지에서 엄선된 작품들이 주제별로 4권이 발매된 사실상 엑기스라고도 볼수 있지만 이 시리즈는 생각보다 구하기가 쉬운 편인 반면 정작 찾고 있는 라이프는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슬슬 눈도 피곤해지고 평소 같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만한 충분한 시간(약 2시간)이 넘어갈 무렵. 그 날 따라 왠지 오기가 생기더니만 드디어 6권의 라이프지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 순간의 벅참이란 이제까지 겪어봤던 그런 것과는 다른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고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6권을 모두 쓸어담아 결제해버렸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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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녀석들이 그 6권. 68년 12월 23일판은 나름 연말특집판 같은 스페셜 에디션이라 횡재한 기분이다. 마거렛 버크 화이트의 사진이 표지를 장식한 창간호나 종간호를 구하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잠깐 든다 ;;  이 6권들은 모두 67년 부터 70년 사이에 판매된 것들로 무려 40년이 넘은 AUGUST 21 / 1967 부터 MAY 25 / 1970 이 가장 최신(?)판. 조금 안타까운 것은 오리지널 미국판이 아니라 아시아판이라는 것인데 그런것 따질 만큼 구하기 쉬운 물건이 아닌 듯하기에 이거라도 구한 것에 감사. 사실 내용면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보이고 지면에 할애된 광고들에서 좀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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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 펜탁스의 걸작 SPOTMATIC광고, 펜탁스 외에도 캐논, 야시카, 페트리 등등 카메라 광고가 참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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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시대이기에 단연 월남전 기사가 많다. 베트남의 古都 HUE시 전투에서 부상당한 이 미군들의 칼라사진은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지나치게 리얼한 이미지가 반전 운동의 불을 지펴주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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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월남전 당시 케산 고지의 미군 방어진지의 모습. 사진이 주가 되는 잡지답게 넓은 양면을 가득 채우는 사진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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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처럼 흥미로운 기사도 있다. 1970년 5월 25일판으로 2차대전이 끝난지 불과 25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느껴지는 히틀러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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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권 중 한 권은 안국동 로타리에 있었던 協同書店에서 팔렸던 모양이다. 이 라이프 아시아 에디션의 앞 표지에는 국가별 가격이 그 나라의 화폐 기준으로 표시되어있는데 1967년 당시 한국은 70 Won이 정가였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버스비가 3원 정도였다고 하니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을듯. 더군다나 주간지인데도 말이다.

 사실 이 녀석이 회사로 도착한 후 너무너무 뜯어보고 싶었으나 이건 주위 사람들이 도저히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이해해 줄리 만무하다는 생각과 아무 생각없이 들쳐보다 찢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에 집에 와서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역시나 오랜 세월을 거친 책이라 손에 새까맣게 먼지가 묻어나지만 전반적인 보존 상태가 썩 훌륭한 편이라 돈 아깝단 생각은 안드는 중. 사실은 38년도 판 라이프도 한 권 찾았었는데 무려 9만원에 육박하는 가격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값을 떠나 국내에서 이제 라이프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더이상 취미의 범위가 고서 수집 쪽으로 확장되지 않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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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포항 송도
손님 뜸한 방파제 위 횟집의 난로

p.s. Contax T3의 흑백톤이 참 훌륭하단 생각이 드는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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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경주
골목길에서 시끄럽고 억센 사투리로 '야이 가시내야 어쩌고..' 떠들며 걸어오다 나를 보고 경계하던 여중생들.

솔직히 제목을 '촌년들'로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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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동대구역

역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

1. 휴가나온 장병
2. 담배 한 대 달라고 돌아다니는 노숙자
3. 그 꼴을 지켜보며 속으로 혀 차는 아저씨
4. 지인을 마중나온 사람
5. 껌 파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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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포항
군대가기 전에 M3 맡기고 가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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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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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건천
의도했던게 이게 아닌데.
맘에 안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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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포항
흐린날에 그런대로 어울릴 만한 묵직한 피사체
요새 싼 맛에 아그파를 애용했더니만 일포드가 역시 톤이 좋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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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봄  예천 용문사

칼짜이즈 테사렌즈가 장착된 자이스이콘 최후의 폴딩 중형 Superikonta 534/16
역시 좋은 카메라야. ㅎㅎ  이걸 이제 현상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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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호치민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이 그러하듯 자동차보다는 오토바이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다. 길거리에서 신호등을 찾기는 쉽지 않고 교차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은 편인 호치민시에서 수많은 오토바이들로 인해 공기는 좋지 않은 편이고 이처럼 뒤엉켜 도로를 질주해도 내가 본 교통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할 수 있지만 그 들 나름의 질서 속에 오토바이들은 제 갈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다만 불안한 마음에 베트남 친구들에게 제발 헬멧 쓰고 다니라고 했지만 더운 나라에서 그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인듯 그다지 귀담아 듣는 것 같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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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호치민

나라면 이방인이 들이대는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사심없이 웃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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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호치민시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나 여전히 베트남에는 불교인구가 가장 많은 듯 하다.
우리와 자주 만났던 한 여대생은 교회에 다닌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자 이해를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다지 종교에 대해 심취하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사실 현실에 충실한 삶이 어쩌면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반면 티벳 사람들이 그들의 티벳불교(라마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생업을 포기하고 오체투지에 나서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고 영적으로 아름다워 보이지만 당나라의 공주가 시집올 만큼 강성했던 토번왕국이 쇠약해진것도 어쩌면 불교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하게 불교를 받아들였어도 '살생유택'이라 하여 필요하면 살생도 가능하다고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통일 전쟁을 수행한 신라와 비교되는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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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31 포항-동대구간 마지막 통일호 열차 촬영 中
촬영을 보다 즐겁게 해주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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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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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TIME 홈페이지 >

Street Fighting
Kenji Nagai, a Japanese photographer, falls to the ground after being shot in confrontations between Burmese protesters and government security forces. Kenji later died.

죽는다고 모두가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저널리스트들의 접근성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때가 많다. 월남전 참전 당사국인 우리나라의 기자들에 의한 사진들은 월남전 당시 퓰리쳐는 물론 월드프레스 포토같은 저명한 분야에서 수상작이 한 장도 없는 반면 일본의 기자들은 수상한 바가 있고 종군하며 전사한 기자들도 꽤 되건만 우리나라 기자들은 몸 성히 모두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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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TIME 홈페이지 - Photo by Chip Somodevilla >

The Killer Among Us

The class photograph of Seung-Hui Cho is isolated in the 2002 yearbook of Westfield High School in Falls Church, Virginia. Twenty-three-year old Cho went on a shooting rampage that claimed the lives of 32 Virginia Tech students and faculty members.


한국과 관련된 사진이 있나 싶어 보던 중..어쨋거나 관련은 있는건가..
 2007. 12. 23

 두번째 진주성 답사. 2003년 여름에 학군단 동기 둘과 진리산 종주를 마치고 내려온 곳이 진주라 잠깐 들렸었지만 다시 와보니 새롭다. 답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이동간에 진주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사실적으로 기술된 '이순신의 두 얼굴'이란 책에서 1,2차 진주성 전투 부분만 발췌해 읽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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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서 바라본 성의 북쪽. 지형을 끼고 도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읍성 형태이지만 사실 그다지 방어에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 작은 성에서 수만의 왜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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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안에서 내려다 본 성밖 진주 시가지의 모습. 왜란 당시에는 총안구를 비롯한 성곽이 지금만큼 완벽하진 않았겠지만 이 얼마 높지도 않은 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활과 총통을 쏘아대며 죽을힘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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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생각없이 온다면 괜찮은 산책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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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는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으로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수군의 연전연승에는 이와 같은 우수한 화포의 위력과 튼튼한 판옥선의 함선구조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위 총통들에 장전된 무기는 대장군전이라는 일종의 관통탄으로 수군들에 의해 많이 쓰였다. 요즘으로 치면 하푼 대함미사일 정도? -_-;
우리 포병의 병과 마크에도 총통 2자루가 교차하고 가운데 대장군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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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에 대한 컴플렉스. 굳이 추장이라고 명칭할 필요가 있었을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은 왜란 동안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의 전공도 전공이지만 특히 선조의 왕자들이 가토에 의해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우월한 전력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에 가토를 포위하고 수일동안 공략했으나 악귀처럼 농성한 가토는 결국 조명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격퇴시키는 등 우리에게 많은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일본의 맹장이었다. 일제의 말도 안되는 주장인지 모르겠으나 '쾌지나 칭칭 나네~'에서 쾌지나 칭칭이 '가등청정'나오네~에서 변형되어 구전된 것이라는 말도 있으며 조선의 집에서는 악귀를 쫓는 신앙물로 가등청정 인형을 두기도 했다는 등 가토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은 상상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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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 죽을 힘을 다해 농성한 울산성 전투도. 당시 왜군의 처절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가토 기요마사는 왜란 참전 일본장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는데 실제 고니시의 부대와 벌였던 충주 탄금대 전투도 가토의 부대와 교전끝에 신립의 조선군의 전멸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노인이 있었을 정도다. 우리에겐 아주 악질같았던 생각도 하기 싫은 일본 장수의 이름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였던 것이다. 이 비문에도 결국 가등청정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억지로라도 격을 낮추고 싶었는지 추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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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 2차 진주성 전투로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에 살아있던 모든 조선 사람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개, 닭까지 모조리 죽였다.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도요토미의 직접적인 지시로 이루어진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성 함락 후 위의 촉석루에서 연회가 벌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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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바위 의암에서 논개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웃긴것은 20세기 초반 군국주의 일본이 과거의 침략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포장하는 과정에서 병신같이 여자 안고 히히덕거리다 물에 빠져 죽은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미화하고자 논개를 그 병신의 연인으로 둔갑시켜 일본에 사당까지 만들어뒀단 것인데.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에서 발칵 뒤집혀 난리 좀 떨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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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논개는 기녀였는지 아니었는지 설이 분분하다. 위와같이 '義妓論介'라고 써진 비각이 있는데 의기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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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은 남강을 끼고 있는데다 절벽위에 성벽을 더 쌓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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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내에는 3.1운동기념비는 물론 6. 25당시 진주지구전적비도 있는데 아무래도 진주성의 메인테마는 임진왜란 당시의 장렬했던 두 번의 전투라 얘네들은 곁다리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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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좀 되었으나 온 김에 안 보고 갈 수는 없어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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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기본 테마는 임진왜란. 조선과 왜의 장수 투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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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자료. 왜란 후 무공을 세운 무장들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 졸렬한 임금 선조를 따라다니며 도망다니기 급급했던 문신들은 수도 없이 많은 상을 받아놓고 싸움터에서 분투한 무장들에게 내린 논공행상은 선무공신이 달랑. 선무일등공신에 봉해진 3명 중 2명은 그나마 전사한 장수다.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 그 3명이다. 사실 원균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하고 조선 수군이 전멸하게 된 것은 결국 해전에 어두웠던 도원수 권율의 책임과 선조의 무능함이 크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사수하고 전사한 김시민은 2등에 봉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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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 순절도. 1592. 4. 15. 부산진을 함락시킨 다음날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여 싸우겠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는 팻말을 세우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戰死易假道難'(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비장한 글을 적어 던졌다. 이 그림에는 동래성남문 앞에 떨어진 송상현이 쓴 글과 성을 넘어 도망가는 이곽(?..이름이 지금 기억이 안나는데..동래성의 장수. 후에 결국 적전도피죄로 참형당하는데 저리 도망하면 어쩌겠단 말인지.)의 모습, 성이 함락되자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한 후 한치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는 송상현의 모습등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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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양국의 갑옷 및 병기 비교. 우리 장수의 갑옷은 대부분의 기마민족들이 그러하듯 보호성보단 기동성과 움직임에 중점을 둔 가벼운 형태의 것이고 일본의 것은 오랜 전란을 겪으며 상당히 세심한 방호능력을 가지고 있다. 팔목은 물론 손등까지 덮을 수 있는데다 가면 형태로 얼굴도 박아주는 등 칼 위주의 근접전에 능한 일본의 전술과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장수의 투구와 갑옷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없어져 보존 상태가 훌륭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밖에도 진주성과 진주성 내에 있는 박물관에는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이 정도로 마치고.. 제발 때와 장소를 못가리는 개념 안드로메다 간 인간들이 좀 사라지길 희망해본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뭔가 확 치밀어 오를 때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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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몽골 울란바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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