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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샵이라 입금도 하기전 물건부터 도착!  08.11.19

중학교 이후 지금까지 약 13년간 사진 생활 중 니콘은 9년간 나의 주력 라인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꽤 많은 니콘 카메라들을 갖고 써봤지만 정작 디지털 시대에서 니콘의 DSLR을 써본 것은 작년 이 맘 때쯤 질렀다 금방 팔려나간 D70S가 유일했다. 호기심에 한번 구입했지만 짜증나게하는 제 멋대로의 화이트밸런스가 가장 큰 방출 이유였다. (절대 나는 화밸에 극도로 민감한 유저가 아니다) 그 후 역시 디지털은 재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DSLR쪽은 관심끄고 고급 똑딱이인 파나소닉 LX3나 한번 질러볼까하는 생각을 하던 중 그나마 모아둔 총알은 자전거 사는데 수십을 소모하여 자연스레 다시 디지털은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던 중 모처럼 잘나가는 회사 분위기를 타 이때다 싶어 업무용 카메라를 사달라고 팀장을 졸라 의외로 간단히 허락을 득했으니 바로 니콘의 D60.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MF렌즈들은 물론 AF렌즈들과도 완벽한 호환이 되지 않는 이 저가형 보급기가 눈에 찼을리는 없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예산한도와 더 비싼 모델을 꼭 사야만 하는 이유를 사진에 문외한은 결재권자에게 설득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괜히 욕심부리다 사리사욕을 위해 회사예산을 남용한단 비난을 피하고자 적정수준에서 타협한 것. 리뷰나 샘플이미지를 봐도 기계적 성능엔 한계가 있어도 이미지 품질면에선 나름 최신 기종이니만치 꽤 만족스러워보였다. 업무용으로는 당연히 충분하고 간간히 내가 쓰더라도 그런대로 괜찮은 이미지를 만들기에 부족하지는 않을것으로 판단되었고 어쨌거나 내가 보유하고 있는 니콘 렌즈를 사용할 수 있어야하니 타 메이커는 고려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D60말고는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아직 몇 컷 찍지도 못했지만 일단 노이즈 수준도 양호해보이고 D70S 시절과 비교했을 때 화벨은 놀라울 정도로 잘 맞는다. 흰 벽지가 있어도 노출보정을 하지 않았음에도 언더로 떨어지지 않는 꽤 괜찮은 3D-분할측광도 맘편히 쓰기 부족함이 없고 캐논의 보급기에는 빼놓기 십상인 스팟측광도 있다. (사실 스팟측광은 몇년전부턴가 거의 안쓰고 있긴하다) 그리고 딸려온 허접 번들 렌즈는 그나마 번들치곤 이쁜 편이고 VR기능이 있어 저속에 대한 부담이 많이 줄어든다. 확대해보니 색수차가 좀 보이지만 ED렌즈가 안들어갔다고 꼭 그런것만은 아니니 욕심을 버리자~ L렌즈에서도 색수차가 심하게 보이던데 플라스틱 마운트의 허접 번들에게 많은 것을 바래선 안될 일이다.

어쨌든 뜬금없이 DSLR이 하나 생겼다. 사는 김에 좀 더 상위 기종을 얻었어야 뿌듯했겠지만 완전 초짜들도 편하게 해주려는 여러 편의장치와 인터페이스가 나름 귀엽고 편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부담없이 즐기기에 딱 좋은 DSLR이 아닌가 싶다. 일단 여러 설정으로 테스트를 해보며 특성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겠다. 주말에 간만에 카메라를 들고 나설 이유가 생겼다. :)



08.11.09  포항

연이어 신경쓸 일이 많았던 한 주였다.
토요일도 출근모드 강행 후 일본시리즈 6차전을 시청하다 스르르 죽은듯이 기절했다 깨어난 일요일 아침. 날씨는 흐렸지만 마를린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지곡 한바퀴 돌기로 하고 나선 라이딩의 피크는 역시나 영일대 부근. 예년만 못하지만 단풍이 든 산책로를 라이딩하다 보니 나름 일주일의 스트레스도 훌훌~ ㅎㅎ  한강처럼 죽죽 달릴만한 코스는 없지만 동네에서 이 정도 매력적인 구간을 라이딩할 수 있단 것도 꽤나 복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슬로핑 탑튜브 덕에 싯튜브가 불안한 게리피셔 프레임이라 얼마전 그냥저냥 싼 BBB社의 400mm 싯포스트로 바꿔주고난 후 심리적으로는 많이 안심이 된다. 조금 더 올려볼까 하고 오늘 싯포스트를 한계선까지 뽑아봤지만 오히려 페달링시 좌우로 흔들리고 힘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다시 1센치정도 낮추었다. 지금 핏팅이 최적인듯 하다.

어쨌거나 오늘은 산책모드로 22km정도 샤방샤방 탔더니 평속은 평소보다 2km/h정도 감소.  
현재와 어려서부터 레고조립, 야구, 프라모델링, 서바이벌게임, 사진까지 모든 취미를 함께 해왔다만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둘이 동시에 미쳐있는 것이 요즘있다면 다름아닌 자전거. 들여놓지 말아야할 곳에 발을 들인듯한 것도 사실이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인 분야임엔 틀림없다. 더군다나 운동도 되니 일석이조. 9월을 기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각자 게리피셔의 MTB로 지른 후 현재가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내려와 처음으로 합동 라이딩을 가졌다.

코스는 지곡을 출발해 위덕대 앞 도로를 지나 안계댐을 오른 후 산길을 넘어 양동마을 도착 후 다시 안계댐을 넘어 외팔교를 지나 자명리로 들어와 지곡으로 넘어오는 구간. 대략 20키로 조금 넘는 얼마 안되는 코스이긴 하지만 페달링에 꽤 힘 좀 들어가는 업힐 구간은 물론 그에 따르는 신나는 다운힐, 오프로드의 갈증을 조금은 풀어줄 우둘투둘한 시멘트 포장길, 통행차량이 거의 없고 형산강을 풍경을 즐기며 30km/h 이상의 고속으로 질주할 수 있는 외팔교 구간 등 나름 알짠 코스.




꽤나 가파른 안계댐 업힐 후 1차 휴식 중인 현재와 나의 자전거. 좌 : '09 게리피셔 어드밴스 / 우 : '08 게리피셔 마를린. 프레임에 맞춰주는 헬멧의 칼라는 기본. ㅎㅎ  확실히 게리피셔의 긴 탑튜브는 전반적으로 프레임이 날렵해 보이긴 한다. 팔이 길어서 그런지 별 불만없음. '09 어드밴스는 청량한 파란 색깔과 화려한 데칼이 정말 멋진듯. 8단 스프로켓과 변속기가 좀 등급이 낮아 아쉽지만 9단으로 업글하고 데오레급 드레일러와 변속 쉬피트만 바꿔줘도 입문용으론 충분할 듯. 

안계댐에 올라보니 자전거가 없었다면 이런 곳에 올 일도 없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차가 적게 다니는 샛길을 찾고 풍경 좋은 길들을 찾다보니 가까운 곳에도 가볼만한 곳이 많다. 처음 이 곳에 혼자 올랐을 때는 실신 직전에 도착했지만 두번째라 그런지 그나마 다리에 여유가 있었다. 무조건 힘으로 오르기 보단 적절한 기어비를 사용해야 함이 중요할 듯. 그러다 보니 시속 9-10km/h로 겨우 오름. 엔진업글이 되면 이런 구간도 슉슉 오를 수 있을라나..






안계댐을 지나 양동마을로 넘어가는 구간. 헉헉대며 안계댐을 오른 이후 이어지는 거친 시멘트 길은 대체로 다운힐이라 MTB의 앞서스펜션을 믿고 신나게 내려올 수 있다. 안계댐을 힘들게 오르는 것도 이 코스의 매력 때문인 듯. 길이 좁고 코너링이 많아 마주오는 차나 다른 라이더를 조심해야 하기에 브레이크 살살 잡고 벨도 자주 울려주며 안라~




양동마을 도착 후 비포장 길을 발견 후 신나게 달려봤다. 은근한 업힐에 노면마저 불량하니 기어비는 순식간에 1x3으로 떨어지고..-_-;  안강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잠시 휴식. 여기서 돌아갔어야 하나 다시 산으로 이어진 길로 달려봤다. 올라가는데까지 올라가보자고;






문제의 구간. 여긴 안갔어야 했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간 한계 지점인데 바닥에 푸석푸석한 자갈도 많고 경사가 심해져 더 올라가기 어려웠다. 포기하고 내려서 기념 사진 찍은 후 신나게 다운힐을 시작했는데 결국 앞브레이크 잘 안쓰고 속도만 내며 달려내려오다 불량한 노면 상태에서 자빠링을 하고야 말았다. 넘어지자 마자 몸은 안보고 자전거부터 봤는데 다행히 마를린의 빨간 프레임엔 기스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다만 데오레 뒷변속 쉬프트의 변속 인디게이터가 날아가고 말았다는..-_-;  팔에 난 기스보다 가슴이 아팠다 ㅡㅜ 어쨌든 자빠링계에 데뷔하면서 느낀 생각은 역시 안전장구는 필수라는거. 불과 얼마전에 장만한 스페셜라이즈드 장갑 덕에 손에는 상처가 없었다. 장갑 없었다는 손바닥 까지고 난리도 아니었을 듯. 조만간 팔꿈치 보호대도 사야겠다;  


10년넘은 취미인 사진을 멀리하게 된 이유 자전거, 그리고 라이딩. 속도와 스릴도 좋지만 항상 안전에 유의하며 욕심을 버려야겠다. 언제나 안라~





08.10.11 경주 형산강변 자전거 도로에서 한 컷

역시 미벨은 좀 그렇던가. 그라스호퍼도 싼 가격에 민첩하고 스피드 빠르고 좋긴 했다만 역시 노샥의 부담과 낮은 기어비로 인한 업힐에서의 압박, 그리고 뽀대의 부족(이게 항상 문제)으로 MTB를 지르고 말았다.

뭐 정말 비싼 자전거들도 많으니 이 정도는 '입문용'이라다만 내가 정말 산에 올라가서 탈 일은 없을 것 같고 시마노 데오레급 구동계열에 락샷 다트2의 서스펜션 포크가 달린 이 정도 스펙만 되도 충분할 거 같다. 게리피셔는 09년 모델들이 워낙 이쁘게 나왔지만 08년 모델이 오히려 심플하면서 산악자전거 본연의 느낌이 나는듯 하다는 억지를 부려본다. 같은 스펙에 08년 모델들이 훨씬 싼 것도 구매 결정에 일조. 결국 이 녀석으로 인해 현재와 더불어 게리피셔 유저 형제가 됐다. 현재의 잔차는 09 게리피셔 어드밴스. 전반적인 부품 등급은 낮지만 멋진 파란색 프레임과 데칼만으로도 멋지다. 부품이야 업글하면 되는거고..

탑튜브가 긴 편인 게리피셔의 프레임은 동양인들에게 잘 안맞다느니 말들이 많아 프레임 사이즈를 좀 작은 편인 15.5로 주문하고 시트를 뒤로 조정했더니 딱 맞는듯 하다. 허리, 손목, 무릎 한 군데도 아프지 않으니 피팅은 딱 맞게 된듯. 이제 그만 지르고 엔진업글에 주력해야할 듯. 항상 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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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자전거의 미니벨로 '그라스호퍼(Grasshopper)'


직접 구매한 자전거는 이 녀석이 처음이다. 어쩌다 공교롭게 자전거에 눈이 멀어 임금협상 종료 후 한가한 8월말부터 종일 회사에선 자전거만 검색했었다. 이 넘의 자전거는 왠 모델이 이리도 많고 가격대도 다양하고 특성도 제각각인지 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자전거에 비해 그나마 카메라는 비싼게 좋다고 오히려 선택이 간편한 편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최초의 목적인 '차로 여행가서 한적한 코스는 자전거로 이동한다'는 컨셉에 맞추려면 접이식이던 아니던 차에 싣고 다닐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크기가 작은 20인치 이하급 바퀴의 미니벨로들이 물망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전역 후 빌려타던 알루미늄 프레임에 앞 쇼바, 시마노 21단의 기어를 가진 꽤 괜찮은 유사 MTB모델의 성능에 감탄했던 나였던지라 생긴것 부터 일단 작은 미니벨로는 평소 시덥잖게 여겨왔었다. 그렇지만 차에 싣기 위해선 별다른 대안이 없었고 구입 당시만 해도 얼마나 자전거를 부지런히 탈지는 자신이 없던터라 가격대도 20만원 내외로 정했다.
 
이왕이면 앞 쇼바 정도는 있었으면 했으나 그 정도 가격에 쓸만한 앞 쇼바가 달린 모델도 흔치 않은데다 노샥 모델이 오히려 스피드 면에서 나으니 승차감 따위는 포기했고, 디자인은 다이아몬드 프레임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좋았고 기어변속도 그립쉬프트 방식이 아닌 시마노의 원치식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뭐 이래저래 AS의 용이성과 택배 수령을 안해도 된다는 장점까지 겹쳐 삼천리의 '그라스호퍼'로 낙찰된 것이다. 약 3일간의 고민을 끝내고 칼퇴근 후 경주 시내의 대리점으로 달려가 현금으로 사버렸다. 일단 사고 나면 고민안하겠지 하며..-_-;  어쨌든 인터넷 최저가 보다 오프매장에서 더 싸게 된지라 가격대도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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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 첫 날 무열왕릉 앞 텅텅빈 넓은 주차장에서 주행 테스트 하던 중>


구입 후 2주간 열심히 달려본 시점에서 보자면 일단 최고의 장점은 가볍다. 그리고 작다는 것. 알루미늄 프레임에다 크기가 작아 10.9Kg밖에 안되어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문제가 없고 굳이 Q/R방식의 앞바퀴 분리 레버를 쓰지 않고서도 차 뒷자석에 쏙 들어간다. 그리고 노샥이라 힘손실이 없고 폭이 좁고 매끈한 로드형 타이어라 마찰이 적어 스피드도 꽤 괜찮다. 물론 자전거의 스피드와 업힐 능력은 라이더의 엔진이 가장 크게 좌우하겠지만 일단 오늘 순간 최고 시속 42Km/h를 찍었을 정도. 덤으로 캐츠아이의 RD-200 속도계도 달아줬더니 여러가지 면에서 더욱 재미있는 듯. 라이딩 시간, 이동거리, 현재 속도, 평균 속도, 최고 속도, 분당 크랭크 회전수, 누적 거리 등등을 확인할 수 있으니 체계적인 운동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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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최고 시속 42Km/h 기록, 물론 등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줬다>


반면 단점은 노샥 모델이라 지면의 충격을 흡수해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 울퉁불퉁한 인도를 달려도 생각보다 그 충격은 손목에 압박을 준다. 다운힐시 가속이 붙은 상태에 예상치 못한 과속 방지턱이나 도로의 패인 곳 등을 만날 경우 바퀴가 작고 앞 샥이 없어서 그대로 튕겨 날아가기 딱 좋다. 역시 앞 샥 정도는 있는 모델이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을 가지며 다운힐의 스피드를 즐기기 보단 안전을 중시하며 브레이크를 당겨주고 있다; 또 하나의 단점이라면 로드형 타이어라 MTB들에 비해 매끈하고 폭이 좁아 접지력이 떨어지다 보니 조향성이 좋지 않고 아스팔트가 젖거나 잔 모래들이 있을 때 잘 미끄러진다는 점. 이런 문제들로 굳이 헬멧까지 쓰고 다녀야 하나 했던 내가 결국 헬멧을 사고야 만 것이다. 자빠링의 두려움에서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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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OGK REGAS 모델. 정작 싼 자전거가격의 반을 넘는다만 어차피 계속 쓸 수 있으니까;>


글을 쓰다보니 단점이 장점보다 많아 보이지만 이래저래 입문용 모델로 만족스러운 편인 것 같다. 현재로선 추가된 악세사리는 속도계, 안장가방, 앞뒤 경고등 정도지만 핸들그립, 페달, 안장 정도는 바꿔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역시 뭐든 하자면 돈 안드는게 없는듯. 최대한 자제하며 운동한다는 데 만족하며 욕심을 비워야할텐데. 잘될 지는 의문. ㅎㅎ

언제나 안전 라이딩~

어린이날로 이어지는 토,일,월 황금연휴를 놓치지 않고 5월 2일(금)에 월차신공을 더해 3박 4일 일정으로 2004년에 이어 일본으로 향했다. 부산항에서 고속훼리를 타고 간 길이기에 목적지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였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하우스텐보스나 유후인으로 향하지만 그다지 흥미있는 곳이 아니었다. 규슈에 가게되면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가토 기요마사의 성인 구마모토성이었다. 후쿠오카 역에서 쓰바메 특급을 타고 내린 구마모토역에서 구마모토 성까지 도보로 이동하며 곳곳의 모습을 스냅으로 담으며 1시간 정도 후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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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은 마침 축성 4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동안 계절 단위로 나눈 축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을 3월 중순 ~ 4월초였다면 더욱 끝내주는 풍경을 보여줬겠지만 그만큼 붐볐을 생각을 한다면 뭐 이 정도 시점도 나쁘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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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구마모토성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동상이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한자 발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많이 부르는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을 떠올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가는 정도의 유명세(?)를 보유한 일본의 맹장이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의 많은 장수들 중 유독 가토 기요마사의 이미지가 강렬한 것은 동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하고 선조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은 전공 외에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성안의 모든 사람과 가축까지 몰살시킨 잔인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 특유의 갑옷 형태와 무사계급들의 상징이던 두 자루의 칼, 가토가 즐겨썼다는 긴 형태의 특이한 투구와 원모양의 문양까지 조각되어 있는 섬세한 형태다. 수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이 동상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웃고 있었다. 구마모토성에 한국인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이 동상과 그 앞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는 일본인들을 보며 이들이 과연 이 녀석이 저지른 잔인한 학살극을 알기나 할런지 하는 생각이 들며 우리에게 원수와도 같은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선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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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동상 아래에 있던 영문 설명문. 그의 삶을 간단히 요약한 이 설명에서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쪽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리가 일대 회전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언급만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는 이에야스의 편에 섰고 역시 눈부신 전공을 세우며 이 곳 구마모토 일대에 영지를 하사받고 구마모토 성을 7년에 걸쳐 세운다. 정작 우리에게 가토의 이미지를 심어준 임진왜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는데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에 대해 굳이 드러내기 싫었을테고 규슈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에 민감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오히려 그래서 구마모토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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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된 안내도 충실하다. 허접한 번역으로 인한 어색한 표현과 오류가 보이지 않는 완벽한 수준으로 규슈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임을 실감케 한다. 위 설명에 나오는 수많은 실전 경험 중의 하나인 정유재란 당시 울산성 전투에서 얻은 교훈 중의 하나가 구마모토성 건축에 영향을 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뒤에 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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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외곽의 해자. 이건 뭐 참호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거의 강이다. 상당한 폭도 폭이거니와 둑의 높이에 축대의 높이 만으로도 공격군의 기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고려 이후 중앙집권적인 왕권 조직을 갖춘 우리나라는 전쟁 발발시 중요 거점에 위치한 산성으로 이동하여 방어전을 수행하는 방식이었지만 일본은 19세기까지도 막부 체제 하 지방 영주들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며 각자의 영지에서 성을 쌓고 살았다. 더군다나 전국시대에 서로가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논리 속에서 일본의 성은 철저하게 실전적인 형태로 발전했을 듯하다. 우리의 거점 방어같은 형태가 아닌 하나의 요새로서 건설된 일본의 성은 이 처럼 해자에서부터 우리와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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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벽 위에는 위처럼 조총을 쏠 수 있는 총안구가 빽빽하다. 16세기 무렵 유럽에서 도입된 조총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서 조총의 충격은 6.25 때 겪은 북한의 T34 전차에 대한 공포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성은 이 처럼 사수가 완전이 보호를 받은 상태로 사격이 가능한 형태로 이루어져있어 실제 외부에서 내부의 사수를 조준해 명중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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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성의 중요한 특징. 바로 꺾어진 출입구. 성문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ㄴ','ㄷ'자형 등으로 꺾인 길을 통과해야 한다. 성문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아 화포나 공성기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될 수 있으며 성문으로 도달하는 동안 방향을 틀어야하는 공격군은 전방과 좌우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총탄으로 부터 몸을 숨길 곳이 없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이 성문을 보호하듯이 성문 전면에 반원형으로 외성을 친 형태가 일부 있긴 하지만 일본의 성처럼 보편적인 설계방식은 아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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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안에서는 축성 400백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 중이었다. 위 사진은 더운 날씨에 구마모토성의 마스코트 분장을 하고 고생 중인 어느 녀석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퀴즈를 내는 진행자인데 일본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대략 '구마모토성을 지은 사람은 누구일까요?'였다. 답은 당연히 가토 기요마사였고 곁다리 답안으로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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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의 가장 핵심부인 혼마루 쪽은 입장료를 지불해야했다. 500엔이었나. 우리나라 기준으로 봤을 때 입장료는 꽤 비싼 편이지만 그럼에도 성 안엔 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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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의 중심, 하긴 구마모토 성 뿐 아니라 일본식 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텐슈가쿠(天守閣). 엄청난 높이의 기단부 석축 위에 우뚝 솟아있다. 구마모토성은 일본의 3대 성(城)의 하나로 꼽힐만큼 그 규모와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실제 2004년 오사카성을 찾았을 때 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 때는 일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인지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인지도.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은 정말 진리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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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웅장한 건물을 보고 있노라니 화가 울컥 나기도했다. 우리나라를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가토는 자신의 영지에서 이처럼 웅장하고 강한 성을 지어서 부귀영화를 누렸단 말이지.. 가토가 7년 동안 공을 들여 지은 이 성은 19세기 세이난(西南)전쟁에서 많은 건물이 불타 사라지고 복원된 것이다. 오사카성도 히데요시가 지을 당시의 엄청난 규모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실제 일본 관광을 위해 알아보던 자료에서 보던 웅장하고 멋진 목조건물들은 대부분 원형대로 복원되었거나 아예 콘크리트로 재건축된 것들도 적지 않다. 2차 대전 당시 미공군 B-29 폭격기에 연일 융단 폭격 당했던 일본의 주요 도시에 있던 유적들은 더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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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유적, 구마모토성 안에 있는 우물터, 보호 철망이 덮혀져 있지만 우물의 깊이는 엄청났다. 안내 표지판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농성(籠城)에 대비해 구마모토성 안에 우물을 120여 곳이나 팠다고 되어있다. 여기서도 일본 녀석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생략하고 있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집착적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우물을 파게 된 계기는 바로 정유재란 당시의 울산성 전투였다. 가토가 주둔하고 있던 울산성을 완전히 포위한 조,명 연합군은 수일동안 공격을 퍼부었지만 가토 기요마사의 악귀처럼 공격을 막아 버터냈다. 더군다나 태화강 하구로 밀려오는 원군들로 인해 조,명 연합군은 퇴각하고 마는데 결국 막대한 인명피해만 내고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울산성을 사수한 가토의 군사들은 갈수로 인한 처절한 경험을 해야했다. 말을 잡아 피를 마시고 소변을 받아 마시기도 했으며 식량이 떨어져 성벽의 흙을 긁어 먹을 정도로 처절했던 전투가 울산성 전투였다. 가토는 할복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그가 구마모토로 돌아와 성 안에 우물을 120여개나 팠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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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으로 들어가는 바로 입구 쪽도 만만치 않은 경사의 성벽과 굽이굽이 계단과 통로로 성 내부에 진입한 적들이라 해도 천수각을 침범하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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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으로 들어가는 입구. 2004년에 갔던 오사카성과 달리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내부 개방이 되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아무리 든든한 축대 위에 세워졌지만 이처럼 많은 관광객이 올라가도 괜찮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내부는 애초 60년대 복원 당시 부터 박물관 형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란 측면에서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건물의 유지와 보수, 활용성 측면에선 합리적인 선택인 듯 했다. 저 문양은 가토 가문에서 쓰인 것 같았다. 가토의 투구는 물론 그릇 같은 생활 용품에도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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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넘의 우물은 천수각 안에도 또 있었다. 정말 울산성에서 고생 많이 한 듯. 일본 측에서 그린 울산성 전투도를 봐도 왜군은 처절한 상황을 겪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론 가토가 조명연합군을 격퇴함으로써 그의 무용담에 결정적 순간을 더해준 격이 되버렸지만. 여담이지만 사천왜성을 쌓고 남해안에 머물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명군을 박살내버린 무용담 역시 일본에선 나름 유명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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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초상. 이순신 영정이나 다 똑같이 생긴듯한 논개, 춘향이 영정 그림 처럼 상상의 그림이 아닌 당시에 직접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德이 느껴지는 상은 절대 아니다. 눈빛에선 냉정함과 교활함이 보이는 듯도 하고 감히 마주 보지 못할 강한 포스도 느껴진다. 일본에서 이처럼 그림이 남겨진 이들은 당시에도 권력이 있던 이들이고 대부분 무사계급이었으므로 우리 선비들의 상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 달리 험상궂고 거칠고 냉정한 인상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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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마사公의 생애'라는 전시코너 쪽엔 태어날 때의 일화부터 동네의 분쟁을 해결하는 대범함과 판단력을 보여준 성장기의 가토의 모습 등 가토 기요마사는 분명 일본의 영웅 중 하나로 추앙받는 듯 했다.  특히 군사 뿐 아니라 건축, 토목 등 다양한 방면에 재주가 많아 오늘날 구마모토현의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위 그림은 영지로 부임하는 가토의 모습인데 그가 썼다는 긴 투구와 문양인 'O'가 선명하다. 뱃머리에 서서 붉은 갑옷을 입고 서있는 가토의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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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투구가 위의 그림에 나오는 긴 형태의 투구.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썼던 바로 그 투구라고 한다.  다른 장수들의 투구와 달리 전투에 적합한 형태는 아니지만 가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좋은 독특한 모양이다. 가토가 저걸 쓰고 조선에도 왔었을거란 생각이 드니 400여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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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 꼭대기 층에 가까워 올 수록 전시물의 내용은 구마모토성이 불탔던 세이난(西南)전쟁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루기 시작한다. 사쓰마 군이 맹공을 펼치고 있고 구마모토성에서 군사들이 농성하고 있는 그림이다. 아쉽게도 세이난 전쟁에 대한 사전 지식은 거의 없었다. 관련 내용은 더 공부해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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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듯한 더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줄을 지어 겨우 올라간 천수각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천수각은 구마모토시 전체를 거의 조망할 수 있는 사령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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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까마득해 보인다. 우리나라에 황룡사 9층 목탑이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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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올라간 천수각을 내려와 전 날 편의점에서 사둔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충 떼우고 성을 빠져나와 다시 걸어걸어 구마모토역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 날 의외로 빡쎈 왕복 도보 이동경로와 천수각 내부에서의 지체현상에서 체력소모가 커 후쿠오카로 돌아가서 들르기로 계획했던 후쿠오카 타워와 후쿠오카돔은근처에도 못가고 호텔에 뻗어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머리 속에 최우선 순위로 잡혀있던 구마모토성을 봤기에 그 정도쯤은 생략해도 별로 아깝지 않았다. 이번 구마모토성을 찾음으로써 가토가 지은 성 3곳이나 답사한 셈이 됐다. 가토가 조선에 장기 주둔하며 지었던 울산성과 서생포왜성, 그리고 이번 구마모토성까지.


가토 기요마사라는 한 인물도 그렇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처럼 복잡한 생각이 교차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런지 모르겠지만 일본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수천년을 마주해온 우리는 또 앞으로 그렇게 일본과 손도 잡고 싸우기도 할 것이다. 구마모토성을 빠져 나오면서도 내 머리속에는 일본과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2007. 12. 23

 두번째 진주성 답사. 2003년 여름에 학군단 동기 둘과 진리산 종주를 마치고 내려온 곳이 진주라 잠깐 들렸었지만 다시 와보니 새롭다. 답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이동간에 진주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사실적으로 기술된 '이순신의 두 얼굴'이란 책에서 1,2차 진주성 전투 부분만 발췌해 읽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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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서 바라본 성의 북쪽. 지형을 끼고 도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읍성 형태이지만 사실 그다지 방어에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 작은 성에서 수만의 왜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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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안에서 내려다 본 성밖 진주 시가지의 모습. 왜란 당시에는 총안구를 비롯한 성곽이 지금만큼 완벽하진 않았겠지만 이 얼마 높지도 않은 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활과 총통을 쏘아대며 죽을힘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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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생각없이 온다면 괜찮은 산책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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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는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으로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수군의 연전연승에는 이와 같은 우수한 화포의 위력과 튼튼한 판옥선의 함선구조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위 총통들에 장전된 무기는 대장군전이라는 일종의 관통탄으로 수군들에 의해 많이 쓰였다. 요즘으로 치면 하푼 대함미사일 정도? -_-;
우리 포병의 병과 마크에도 총통 2자루가 교차하고 가운데 대장군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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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에 대한 컴플렉스. 굳이 추장이라고 명칭할 필요가 있었을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은 왜란 동안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의 전공도 전공이지만 특히 선조의 왕자들이 가토에 의해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우월한 전력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에 가토를 포위하고 수일동안 공략했으나 악귀처럼 농성한 가토는 결국 조명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격퇴시키는 등 우리에게 많은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일본의 맹장이었다. 일제의 말도 안되는 주장인지 모르겠으나 '쾌지나 칭칭 나네~'에서 쾌지나 칭칭이 '가등청정'나오네~에서 변형되어 구전된 것이라는 말도 있으며 조선의 집에서는 악귀를 쫓는 신앙물로 가등청정 인형을 두기도 했다는 등 가토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은 상상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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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 죽을 힘을 다해 농성한 울산성 전투도. 당시 왜군의 처절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가토 기요마사는 왜란 참전 일본장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는데 실제 고니시의 부대와 벌였던 충주 탄금대 전투도 가토의 부대와 교전끝에 신립의 조선군의 전멸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노인이 있었을 정도다. 우리에겐 아주 악질같았던 생각도 하기 싫은 일본 장수의 이름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였던 것이다. 이 비문에도 결국 가등청정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억지로라도 격을 낮추고 싶었는지 추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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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 2차 진주성 전투로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에 살아있던 모든 조선 사람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개, 닭까지 모조리 죽였다.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도요토미의 직접적인 지시로 이루어진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성 함락 후 위의 촉석루에서 연회가 벌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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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바위 의암에서 논개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웃긴것은 20세기 초반 군국주의 일본이 과거의 침략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포장하는 과정에서 병신같이 여자 안고 히히덕거리다 물에 빠져 죽은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미화하고자 논개를 그 병신의 연인으로 둔갑시켜 일본에 사당까지 만들어뒀단 것인데.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에서 발칵 뒤집혀 난리 좀 떨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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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논개는 기녀였는지 아니었는지 설이 분분하다. 위와같이 '義妓論介'라고 써진 비각이 있는데 의기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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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은 남강을 끼고 있는데다 절벽위에 성벽을 더 쌓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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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내에는 3.1운동기념비는 물론 6. 25당시 진주지구전적비도 있는데 아무래도 진주성의 메인테마는 임진왜란 당시의 장렬했던 두 번의 전투라 얘네들은 곁다리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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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좀 되었으나 온 김에 안 보고 갈 수는 없어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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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기본 테마는 임진왜란. 조선과 왜의 장수 투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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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자료. 왜란 후 무공을 세운 무장들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 졸렬한 임금 선조를 따라다니며 도망다니기 급급했던 문신들은 수도 없이 많은 상을 받아놓고 싸움터에서 분투한 무장들에게 내린 논공행상은 선무공신이 달랑. 선무일등공신에 봉해진 3명 중 2명은 그나마 전사한 장수다.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 그 3명이다. 사실 원균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하고 조선 수군이 전멸하게 된 것은 결국 해전에 어두웠던 도원수 권율의 책임과 선조의 무능함이 크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사수하고 전사한 김시민은 2등에 봉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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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 순절도. 1592. 4. 15. 부산진을 함락시킨 다음날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여 싸우겠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는 팻말을 세우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戰死易假道難'(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비장한 글을 적어 던졌다. 이 그림에는 동래성남문 앞에 떨어진 송상현이 쓴 글과 성을 넘어 도망가는 이곽(?..이름이 지금 기억이 안나는데..동래성의 장수. 후에 결국 적전도피죄로 참형당하는데 저리 도망하면 어쩌겠단 말인지.)의 모습, 성이 함락되자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한 후 한치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는 송상현의 모습등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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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양국의 갑옷 및 병기 비교. 우리 장수의 갑옷은 대부분의 기마민족들이 그러하듯 보호성보단 기동성과 움직임에 중점을 둔 가벼운 형태의 것이고 일본의 것은 오랜 전란을 겪으며 상당히 세심한 방호능력을 가지고 있다. 팔목은 물론 손등까지 덮을 수 있는데다 가면 형태로 얼굴도 박아주는 등 칼 위주의 근접전에 능한 일본의 전술과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장수의 투구와 갑옷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없어져 보존 상태가 훌륭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밖에도 진주성과 진주성 내에 있는 박물관에는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이 정도로 마치고.. 제발 때와 장소를 못가리는 개념 안드로메다 간 인간들이 좀 사라지길 희망해본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뭔가 확 치밀어 오를 때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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