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 포항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Kodak 400TX / IVED




2017.09.21.


중앙카메라 수리실 입원했다가 드디어 돌아옴. 거의 세달만인듯! ㄷㄷ


2009.08.08. 포항

Contax IIa / Carl Zeiss Sonnar 50mm f1.5 / Kodak 400TX / IVED


















































2017.08.11 건천


Contax IIa / Carl Zeiss Jena Orthometar 35mm f4.5 / Kodak 400TX / IVED













































2017.08.12. 동네


Contax IIa / Carl Zeiss Jena Orthometar 35mm f4.5 / Fujifilm RVP 100 / IVED





















































































2017.08.20. 경주 안강


Contax IIa / Carl Zeiss Jena Orthometar 35mm f4.5 / Kodak 400TX / IVED


사실 창고가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은 '서재'라고 부르고 싶은 내 방 책꽂이 한 켠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수백롤의 필름이 차곡차곡 담겨져 있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필름들을 보다 못한 와이프가 넣어준 것들이다. 내 저것들을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텐데 하며 가끔 노려보기도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만다.


'에이, 나중에 하자.'


그러다 지난 금요일밤 괜히 한번 상자를 열어봤다. 마구잡이로 섞인 필름들을 천장의 형광등에 비추어보며 간만에 추억에 젖다가 송도 해수욕장을 촬영한 필름 하나를 발견했다. 36컷을 모두 살펴봐도 그 필름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는 단 한 컷도 없었다. 메모조차 해두지 않아 언제 찍은 건지도 알 수 없는 필름 속 이미지들은 전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빠듯한 용돈 사정으로 인해 인화지 한 장이 아쉬웠다. 그래서 굳이 '불필요한' 밀착 인화는 생략했고 확대 인화 역시 한 롤에서 고르고 고른 몇 컷 외에는 하지 않았다. 이 버릇은 나중에도 그대로 이어져 스캔할 때도 한 롤 전체를 긁지 않고 네가티브를 비추어 보다 괜찮다 싶은 몇 컷만 추려 스캔을 해왔기에 네가티브를 보다가 새롭게 눈에 띄는 컷이 있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롤에서 한 컷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아도 이 건 단 한 컷도 스캔하지 않은채 쳐박힌 필름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도대체 이 필름은 왜 버림받았을까? 일단 한롤을 채로 긁어보기로 했다. 







송도의 뒷골목 입구에서 부터 내 발걸음은 시작되고 있었다. 







모래사장의 유실로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송도 해변의 회생을 포기하고 해안 도로가 건설되던 때의 막바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산책로는 거의 다 되었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던 시점이다. 







지금 평화의 여신상이 있는 광장 해안 축대 옆의 테트라포드들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산책로에는 아직 모래가 많이 남아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아이들이 두꺼운 차림에 장갑까지 끼고 있는 걸 보니 제법 추운 날이었나보다. 







우리의 기억은 이미지와 글에 얼마나 의존적인가. 21미리로 강아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찍었을 정도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현상 후 스캔조차 하지 않았던 탓에 이날 촬영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송도 해변 일주도로 건설을 맡았던 청구 건설의 현장 사무소







송도 해변 방파제 위에는 허름하고 어설픈 포장마차촌이 있었다. 송도 해수욕장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이 곳도 사라졌다. 당연히 무허가 불법이었을테고 태풍이라도 오는 날엔 위험하기 그지 없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쉽기도 하다.







동남아의 수상가옥 마냥 방파제 한 귀퉁에 의지하여 바다 위에 자리 잡았던 포장마차들. 자리에 앉으면 판자로 만든 바닥과 천막 틈 사이로 파도가 출렁였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들으며 회 한 접시에 소주를 마시고 모래사장에 세워둔 차에서 눈을 붙히고 아침에 바로 출근했던 날도 있었다.







천막을 뒤집어 씌웠던 철골과 계단의 녹물이 방파제 바닥 곳곳을 붉게 물들였던 것이 기억난다.







배에서 내린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 손길들. 포장마차가 사라진 지금, 더이상 배들은 이 곳에 접안하지 않는다.







방파제 왼쪽의 풍경. 송도 해변과 포항 구항이 멀리 보인다. 늘상 보는 장면이라 새롭지 않지만 이곳이 동해안에 몇 없는 지형인 영일만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다소 과다현상이 되어 콘트라스트가 강한 네가티브가 되었다. 암부가 많이 죽었음이 느껴진다만 평소 사진의 톤에 비해 칼칼한 것이 또 나쁘지 않다. 







방파제에서 굿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인가, 요즘은 송도에서 굿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변해버린 방파제 위 풍경과 달리 송도의 퇴락한 뒷골목은 이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골목 사이를 누비면서 정적인 사진에 동감을 불어 넣고자 누군가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래본들 무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사진이 되겠나 싶다. 부질없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낡은 하얀 벽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흑백인데도 차갑고 투명한 겨울 공기가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려온다. 늙은 듯 ㄷㄷ







이 사진 덕분에 이 필름이 언제 찍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8년전의 블로그 포스팅에는 Nikon D700으로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이 날 찍은 파일은 모두 지워 버렸다는 내용이 있었다. 찍은 사진도 맘에 안들고 앞으로 어떤 사진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유와 함께. 아마 그래서 이 날 찍은 필름도 스캔조차 하지 않고 던져뒀던 듯 싶다. 





같은 위치에서 찍은던 사진. 이 컷을 제외하고 RAW파일은 모두 삭제됐다.






8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날 느꼈던 회의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뭘 찍어야 하고 뭘 표현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찍어야 하는가. 아니 그런 것에 답은 있는가. 답을 찾을 필요는 또 있는 것인가. 여전히 머리 속은 복잡하지만 이렇게 출토된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사진들이라도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니 기록으로라도 가치가 있겠다 싶으니 그건 또 다행이라 해야하나. 아직도 모르겠다. 





2009.12.26. 포항 송도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Kodak 400TX / IVED
















2015.09.29 경주


간만에 21mm 4.5 Biogon으로.

"아, 콘탁스 그거 정말 좋은 카메라였는데!"


내 목에 걸린 카메라를 보시자 마자 최민식 작가께서 내뱉으신 말씀이었다. 해운대에 있는 고은사진미술관에서 그의 전시회를 관람하고 나오던 길에 우연히 마침 전시회장에 나와계시던 작가를 마주쳤던 것. 연예인이라도 만난 듯 흥분하여 사인을 받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졌었다. 그리고 얼마 후 작가께선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 만남이 새삼 얼마나 소중한 기회였나 싶다. 최민식 작가께서도 한 눈에 알아보신 콘탁스. 작가께서는 주로 라이카와 니콘을 사용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에게도 콘탁스는 참 좋은 카메라로 각인되어 있었나보다. 







2006년 구입당시 처음 찍어줬던 증명사진. 칼라다이얼의 후기형에 T코팅 Carl Zeiss Jena 50mm 2.0




보석같은 카메라?


사실 흔히 얘기되는 '보석같은 카메라'라는 표현에 크게 공감해본 적은 없다. 어디서부터 유래된 말인지 모르지만 해외 사이트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혹은 일본에서만 통용되는 표현만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나는 보석보다는 오히려 딱 카메라다운, 오로지 기능을 위해 설계된 듯한 공학적 아름다움을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제 공산품 같은 투박하고 실용적인 느낌만의 디자인은 아니다. 





우아한 라이카와 달리 다부진 콘탁스는 왠지 흑백으로 다큐를 찍으면 저절로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줄 것만 같았다.



보석같은 카메라라는 별명은 아마도 콘탁스 곳곳의 아름다운 가공 처리 때문일 것이다. 2차대전 전의 Contax II에 비해 전쟁 후의 IIa는 크기가 작아지고 몇가지 소소한 기능의 개선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외관의 크롬처리와 소재의 고급스러움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수준이었다. 보통 오랜 전쟁을 겪고 난 후 공산품의 품질이 열악해지거나 원가절감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다소 의외다.





아름다운 실버 크롬의 Contax IIa


콘탁스의 실버크롬은 갓 잡은 갈치 마냥 반짝이는 광택을 자랑하는데 이는 어느 다른 카메라 보다도 아름답게 반짝인다. 다만 코팅의 두께는 다소 얇은 듯하다. 일반적으로 실버크롬 바디들은 황동이 드러나기 쉽지 않은데 Contax IIa는 모서리 부분의 황동이 드러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매끈하게 폴리싱 처리된 독특한 구조의 마운트


렌즈 마운트부와 다이얼 곳곳에는 바디의 크롬코팅과는 또 달리 매끈하게 폴리싱 처리되어 있어 단조로울 수 있는 표면에 포인트를 준다. 마치 스위스 시계의 브레이슬릿을 보는 듯한데 적지 않은 가공 비용이 들었음이 짐작된다. 콘탁스의 마운트는 특이하게도 내부는 50mm용, 외부는 광각과 망원용으로 이중 설계되어 있고 초점 조절 또한 렌즈를 직접 돌리거나 바디 전면의 톱니바퀴를 돌려서도 가능하다. 이렇게 설계한 까닭이야 있었겠지만 그냥 나사식으로 돌려끼우던 바르낙에 비해 생산 단가를 올리는데 큰 영향을 줬을 것 같다. 





양가죽 커버와 조금씩 솟아오른 '자이즈의 혹'


바디를 감싸고 있는 가죽은 모로코산 양가죽이라고 하는데 라이카의 볼커나이트도 당시로선 최첨단 소재였다고 하나 이쯤되면 사치스럽다고 여겨질 정도다. 오늘날에는 가죽을 붙힌 접착제 성분이 오래되면서 부풀어올라 '자이즈의 혹'을 만들어내는 문제가 있다. 심하지 않으면 '애교'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 





라이카를 압도했던 성능적 우위


콘탁스는 동시대의 라이카의 바르낙보다 성능적으로 우월한 부분들이 많았다. 


일단 통채로 열리는 뒷덮개와 편리하게 끼울 수 있는 필름 스풀로 인해 바르낙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하고 빠른 필름 로딩이 가능했다. 또한 초점 맞춤과 구도 확인이 하나의 파인더에서 가능한 점과 하나의 다이얼에서 전 구간의 셔터스피드를 설정할 수 있다는 점도 초점 맞추고 구도 맞추고, 저속따로 고속따로 맞춰야하던 바르낙에 비해 훨씬 편리한 촬영을 가능케한 부분이었다. 바르낙 III모델 이전까지 1/500초가 한계였던 시기 콘탁스는 이미 1/1250초가 가능했다. (근데 굳이 1/1250초는 무슨 의미였을까..)


설계 부분을 보더라도 셔터스피드 다이얼, 셔터릴리즈 버튼, 필름 카운터, 필름 진행 와인더가 하나의 축에 붙어 있고 이는 필름타입 설정 다이얼이 있는 필름 되감기 놉과 좌우대칭을 이루며 간결한 상판 디자인을 구성하고 있다. 이것저것 다 따로 놀고 있는 바르낙의 상판과 비교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필름 리와인딩 해제 버튼도 바닥에 깔끔하게 함몰되어 있어 깔끔하다. 또한 Contax II에 비해서는 짧아졌다지만 여전히 긴 Contax IIa의 기선장은 초점 맞춤의 정밀도에서도 바르낙에 비해 유리했다.





이처럼 통채로 열리는 뒷판으로 인해 좁은 홈을 통해 필름을 쑤셔넣는 수고따위 없이 현행 카메라처럼 쉽게 필름 장착이 가능했다.





필름 스풀에는 이같은 돌기가 있어 쉽고 빠르게 필름을 걸 수 있고 절대 풀리지 않는다. 다만 되감을 때 무리하게 잡아당겨서 필름이 뜯기면 그 조각이 간혹 셔터막으로 들어가 고장의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하니 주의. 적당히 감다가 멈추면 그대로 뒷판을 열고 빼는 것이 좋다.





바르낙의 미학적인 아름다움은 둘째로 하고 콘탁스가 얼마나 간결하게 설계된 카메라인지 알수 있는 상판 배치



깡패의 등장. Leica M3, 그리고 화석이 되어버린 보석


하지만 바르낙에 대한 콘탁스의 비교 우위는 너무나도 유명한 라이카 M3 등장으로 한방에 역전되고 만다. M3는 뭐 어디에서도 얘기가 빠지지 않는 그야말로 RF카메라계의 깡패인 듯. 흔히 M3의 등장이 니콘과 캐논의 RF카메라 개발 의지를 꺾어 SLR로 집중하게 했다고 하는데 자이스이콘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싶다.  


3개의 프레임을 지원하는 밝고 시원한 파인더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고, 뒷판도 이제 열려 바르낙의 대표적 불편함을 해결했다. 돌려감기식이 아닌 레버식의 채용으로 빠른 필름 장전이 가능해졌고, 필름 카운터도 자동으로 리셋됐다. 새로운 베이요넷 M마운트의 채용과 오늘날도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1세대 주미크론 등의 우수한 렌즈 라인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기가 막힌 조작감과 정숙한 셔터음, 우수한 내구성 등등 뭐 그야말로 역사적 명기의 등장이었던 것. 이후에 나온 모든 라이카 M라인업도 M3 앞에서는 한두가지씩 모자랄 정도니 말 다한 듯. 


이렇듯 완벽한 카메라의 등장 이후 자이스이콘은 기가 질렸는지 더이상 콘탁스의 후속기를 내놓지 못했고 Contarex와 같은 SLR 라인업을 출시하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가 했지만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자이스이콘 입장에서 대세는 이제 SLR이라고 판단했었던 걸수도 있지만 콘탁스의 후속이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르낙과 M사이. 콘탁스는 그렇게 어중간한 위치에서 결국 진화를 멈추고 말았다.



오늘날 가장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오리지날 독일제 시스템 RF카메라로서의 가치


자이스이콘도 망하고 그렇게 잊혀진 옛 명기가 돼버린 콘탁스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계기는 뭐니뭐니해도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라는 책의 출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 인지도의 상승이 꼭 인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 오늘날에도 콘탁스 매니아는 소수일 뿐이다. RF카메라는 어쩌면 '라이카와 나머지들'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라이카 M의 위상이 워낙 독보적이라 콘탁스의 존재감은 약할 수 밖에 없고 막상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보관 상태가 좋은 콘탁스는 드물고 50mm Sonnar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교환 렌즈들은 구경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대체품이 많지도 않아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나 M마운트와 달리 호환되는 렌즈나 바디도 거의 없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아서 코시나에서 발매했던 R2C/S와 니콘의 S2, SP같은 기종과 2차대전 승전의 전리품이 된 소련의 키에프를 들 수 있는데 문제는 얘네들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는 거다.





매니악한 기질의 코시나에서 내놓은 R2C. 미묘하게 다른 니콘 마운트용 R2S도 함께 발매됐다. 구입하진 않았지만 이런게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도 당시 너무 고마워 했었다.





콘탁스 마운트를 기본으로 많은 부분을 개선해서 내놓았던 니콘의 S시리즈 중 S2 모델. 니콘의 F시리즈보다도 더 야무지고 솔직하게 생겼다. 남대문을 뻔질나게 다니던 대학교 시절 쇼윈도 넘어 처음 보았던 이 카메라가 콘탁스에 꽂히게 되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대안은 소련에서 생산한 Contax II의 카피 Kiev. 50년대 초반까지의 생산제품들은 오리지널 Conatx II의 부품을 그대로 썼다고 해 품질 차이가 없어 가격대도 꽤 비싸게 거래되고 있지만 그 이후로 갈수록 품질이 조악해진다. 내가 써본 사진의 것은 플라스틱 부품이 많이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품질이 저하되기 시작한 후기형과 초기형의 사이 정도. 생각보다 렌즈의 성능은 괜찮았다. 키에프는 Contax II와 기본적으로 같은 카메라라 Contax II를 사용하는 이들이 서브로 쓰거나 부품용으로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콘탁스의 가격은 번들 렌즈처럼 따라다니는 우수한 성능의 50미리 조나 렌즈를 포함해도 4~50만원대로 저렴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는 오히려 구입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유리하게도 작용하고 있다. 라이카는 언감생심 꿈도 못꿀 형편이라면 오리지널 독일제 RF카메라를 저렴하게 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할까. 그것도 한 때 광학적, 성능적으로 라이카를 압도했던 자이스이콘의 카메라와 렌즈를 말이다. 





50미리를 애용한 것으로 유명한 브레송의 경우도 콘탁스용 50mm 1.5 Sonnar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마도 그의 초창기 작업 시절에는 라이카의 빠른 50mm가 마땅치 않아서였을지도. 아쉽게도 그가 조나를 사용하는 사진은 찾지 못했다. 대부분 1세대 주미크론 침동식과 1.5 주마리트를 사용하고 있는 사진으로 보이는데 M마운트의 밝은 50mm 렌즈들이 나오면서부터 아답터를 사용해야하는 불편한 자이즈 렌즈는 더이상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게 아닐까 추측된다.



- 해외 어느 포럼에서 본 댓글 -





브레송도 사용했다니 다시 보이는 50mm 1.5 Sonnar




Conatx를 쓴다면 꼭 가져봐야할 전설의 광각렌즈. 21mm 4.5 Biogon


앞서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독일제 RF라고 했는데 저렴하게 누릴 수 있는 재미는 딱 50미리까지! 

50미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교환렌즈들은 모두다 구하기 어렵고 되팔기 어렵고 가격도 저렴하지 않은 금단의 영역들이다. 50mm중에서는 유독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는 50mm 3.5 Tessar라든지 35mm 2.8 Biogon, 35mm 3.5 Planar, 21mm 4.5 Biogon등이 대표적인 명렌즈들. 그 중에서 내가 소유한 것은 21미리 비오곤이다.





21mm 4.5 Biogon과 전용 파인더를 장착한 Contax IIa


전설도 많고 명기도 많은 카메라/렌즈의 세계에서도 20세기 최고의 광각 렌즈로 손꼽히는 21미리 비오곤이다. 렌즈 후면이 필름면 근처까지 바짝 붙는데 이로 인해 왜곡 억제력이 우수하다고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렌즈의 광학적 성능을 논할 전문적 지식도 없고 대형 인화를 자주 하지도 않기에 성능을 체감할 경우가 많지는 않다. (자가 인화를 하던 시절이 그립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란 '종교적 신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결과물 역시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21미리라는 화각이 다소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적응되자 의외로 편안하고 시원한 화각이었고, 스냅에서도 상당히 편리한 면이 있다. 깊은 심도로 인해 초점 맞춤에 신경을 덜 써도 되고 어차피 외장 파인더로 구도를 잡으니 어둠침침하고 흐린 카메라의 파인더도 상관이 없었다. 감도 400이상의 필름을 넣고 조리개 팍 조이고 돌아다니다 게눈 파인더로 보고 그냥 찰칵 하면 끝이다. 부드러운 조리개와 묵직하면서 적당한 저항이 느껴지는 초점링, 견고하게 체결되는 마운트의 조작감까지 단연 최고다. 




M의 그림자만 벗어난다면 행복하다.

콘탁스에 대해 혹평하는 이들은 대부분 M형 라이카를 사용하는 이들이다. M시리즈를 한번이라도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다행히 나는 라이카보다 콘탁스를 먼저 사용했기에 어둡고 작은 뷰파인더가 불편한지 몰랐고(안경을 안쓰기에 가능했을 수도..) 유럽식 셔터스피드 다이얼도 상관없었다. 자그마한 크기에 반짝이는 크롬 코팅이 더해진 멋진 디자인과 금속제 셔터막이 내주는 카랑카랑한 셔터소리와 양가죽의 부드러운 질감은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만족을 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라이카 M을 부러워하지 않고 충분히 만족하며 콘탁스를 휘두르고 다녔던 시절이 참 즐거웠고 60년이 다된 카메라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했었다. M과 비교하자면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은 카메라지만 패자와 약자에겐 어차피 조금은 너그러운 잣대를 들이대는게 보통의 심리가 아닐까. 기백만원을 주고 산 카메라가 아니기에 '그래 괜찮네.' 그렇게 만족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꼽사리로 등장하는 나의 Leica M3. 한번은 써보고 죽자며 뒤늦게 들였는데 의외로 받아들고 나서 별 감흥이 없었다. 한 롤도 찍기 전에 'Elmar가 좋아봐야 Sonnar 보다 못할 거 같은데 그냥 다시 팔아버릴까?' 하며 고민을 꽤 하긴 했었다. 



그리고 Robert Capa


브레송이 라이카와 자연스레 연상되는 작가라면 콘탁스를 사용한 작가로는 단연 로버트 카파가 유명하다. 스페인 내전부터 2차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까지 전장을 주로 누빈 그에게는 콘탁스의 편리함이 크게 어필했던 것일까. 한 때 카파에 푹 빠져 그의 사진집을 주구장창 보던 시절도 있던 나였기에 그가 사용했던 카메라를 쓰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미군 공수부대 점프 수트를 입은 카파(왼쪽)와 조지 로저(오른쪽)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진. 카파의 목에 걸린 Contax II가 보인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오마하 해변에서 목숨을 내놓고 귀중한 상륙작전 1진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 날의 소중한 기록은 훗날 '라이언 일병 구하기' 상륙작전 씬을 연출하는데 결정적 자료가 되기도.. 





카파가 남긴 마지막 컷. 1차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54년 5월, 노르망디 해변에서도 무사했던 그의 운명이 다한 날이 찾아왔다. 정찰 부대를 따라 이동하던 카파는 사진을 찍기 위해 지프에서 내려 움직였고 얼마 뒤 지뢰를 밟고 쓰러졌다. 그의 손에는 Contax IIa와 Nikon S가 들려있었다고 한다.





카파의 사진집과 내 콘탁스들. 교환렌즈를 갈아끼우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21mm Biogon용 바디를 하나 더 들여 2대가 되었다. 




역사상 다시 나올 수 없는 카메라에 대한 애도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패자의 비장한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이 가고 대중적으로 선호되지 않는 것을 소유할 때는 더 많은 애착이 가기 마련이다. SEIKO의 쿼츠 시계가 스위스 기계식 시계 산업을 고사 직전으로 몰아붙여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만들던 명가 여럿을 망하게 만들었 듯, 니콘, 캐논 등의 일본 메이커들로 인해 어차피 자이스이콘, 그리고 콘탁스의 명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을 것이다. 제품 원가와 생산 효율만을 앞세우지 않고 장인 정신을 쏟아내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한 콘탁스라는 명기는 라이카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훌륭한 카메라로 기억되기 충분하다.


내게 와있는 2대의 콘탁스는 서독 슈트르가르트에서 태어나 60년의 세월동안 전 세계 어디에서 누구의 손에서 무엇을 찍다가 나에게 왔을까? 오랜 세월에도 곱게 늙은 상태로 별 탈없이 내 손까지 온 얘들의 마지막 주인은 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버홀 해줘야 되는데..)



마무리 안되는 사용기는 몇몇 작례들을 늘어놓으며 슬쩍 끝내겠다. 2010년 이후 한동안 필름으로 사진을 안찍다보니 다 예전 사진;





2008.03 부산 / 21mm 4.5 Biogon / TMY





2008.03 부산 / 50mm 1.5 Sonnar / 400TX





2008.03 부산 / 21mm 4.5 Biogon / TMY





2008.03 부산 / 50mm 1.5 Sonnar / 400TX





2008.03 부산 / 21mm 4.5 Biogon / 400TX





2007.08 대구 / 50mm 2.0 Sonnar / Delta100





2007.10 경주 / 50mm 2.0 Sonnar / Agfa ULTRA100





2007.11 포항 / 50mm 2.0 Sonnar / Agfa ULTRA100





2007.12 포항 / 50mm 2.0 Sonnar / Reala



2007.12 포항 / 50mm 2.0 Sonnar / Reala





2007.12 포항 / 50mm 2.0 Sonnar / Reala





2007.12 포항 / 50mm 2.0 Sonnar / Reala





2007.12 포항 / 50mm 2.0 Sonnar / Reala





2007.12 포항 / 50mm 2.0 Sonnar / Reala





2008.02 청도 / 50mm 1.5 Sonnar / Autoauto200





2008.02 포항 / 21mm 4.5 Biogon / TMX





2008.03 포항 / 21mm 4.5 Biogon / 400TX





2008.05 나가사키 / 21mm 4.5 Biogon / 400TX





2008.05 나가사키 / 21mm 4.5 Biogon / 400TX





2008.05 구마모토 / 50mm 1.5 Sonnar / 400TX





2008.09 경주 / 21mm 4.5 Biogon / Agfa ULTRA100




2008.10 포항 / 21mm 4.5 Biogon / RVP





2010.03 포항 / 21mm 4.5 Biogon / TMX





2010.03 포항 / 21mm 4.5 Biogon / TMX





2015.07 경주 / 50mm 1.5 Sonnar / TMX





2015.07 경주 / 50mm 1.5 Sonnar / TMX





2009.01 포항 / 50mm 1.5 Sonnar / 400TX





2015.09 경주 / 21mm 4.5 Biogon / APX100





2015.09 경주 / 21mm 4.5 Biogon / APX100




-끝-














































2015.07.04 안강


거의 5년만인가. Contax IIa로, 그리고 필름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 이날 이후 다시 손맛이 그리워 필름으로 요즘은 열심히 사진질 중이다. 최근 몇년간 느껴보지 못한 오랜만의 열정과 설레임이 솟아나는 필름 사진의 르네상스 2015년. 


송도 해수욕장의 모습을 뒤바꿔놓은 해안도로 공사도 거의 마무리되었다.




축대가 쌓아지고 아스팔트가 덮인 도로가 차지해버린 모래사장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뭐 이미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던 송도해수욕장이었지만 한적한 분위기를 느끼러 찾아오기 좋았던 곳 하나가 결국 사라졌다.




반면 다 쓰러져가던 빈 집들과 상가들은 이 도로의 개통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될지.. 오늘 신문기사를 보니 모래사장을 엎어서 도로를 만든 포항시에서 송도해수욕장 모래사장 복원을 추진할 계획이라던데 파괴하기 만큼 복원하기도 쉬울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어쨌든 모래사장이 포항시의 계획대로 성공적으로 복원되고 다시금 많은 관광객들이 찾게 될 명소로 거듭난다면 이런 흉물스런 폐가들 대신 번듯한 건물들이 삐까뻔쩍하게 들어설지도 모른다. 광안리처럼 변해버린 북부해수욕장처럼.




프레임만 남은 문. 송도의 골목길.




방파제 근처의 선착장 주변. 21mm Biogon의 광활함을 다루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사진은 뺄셈의 예술이라 했건만 이것저것 다 들어오는 화각은 절제를 요한다.




꽃샘추위도 이제 거의 물러간 듯 하다만 바닷바람은 쌀쌀하다. 아직은 저 난로와 잡목 땔감이 유용하리라.




방파제 위에는 허름한 횟집들이 모여 있지만 언제나 한산하다. 누군가는 이 허름한 곳에서 투박하게 썰은 회 한점에 소주를 털어넣는 운치를 즐기겠지만 내가 한 번 그렇게 해본바로는 이 곳의 회 맛은 솔직히 그닥이었다.




송도해수욕장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이 '평화의 여상' 뿐인듯 하다. 촌스럽기도 하고 조형적으로도 우수해보이진 않지만 송도 해수욕장에 대한 크고 작은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송도의 상징으로서 뇌리에 기억될 수 있는 것 중 하나일 듯 하다. 나 역시 해안도로가 건설된다고 했을 때 이 것은 좀 남겨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다행히 위치를 조금 옮겨 보존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무조건 갈아 엎어버리는 불도저식 개발 시대는 지나갔음을 느낀다.

어쨌든 송도의 변화에 대한 큰 가치 판단없이 심심할 때면 들러 셔터를 눌러온지도 몇 년이 되었다. 그동안 송도의 모래사장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이제 또 복원을 한다니 틈날 때면 한번씩 들러 또 그 모습을 담담하게 기록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2010.03.28 포항 송도



2009.08.08 포항

죽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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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26  포항 구룡포




2008.10.03  단양

단양 8경 중 가장 유명한 도담삼봉의 전경. 명승 제 44호로서 조선 개국공신이자 우리 집안으로선 원수가 된 정도전이 지었다는 멋드러진 정자가 있는 곳이다. 저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위에 흡사 조경석 마냥 어우러진 세 기암이 있고 그 중앙봉에 아담한 정자 하나 지어두고 나룻배를 타고 노 저어 건너가 책을 읽고 시를 읊고 술한잔 걸치던 그 순간 만큼은 고려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손에 묻혀야했던 많은 피와 한맺은 이들의 충혈된 눈동자의 마지막 모습도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잠시나마 그런 쓸데없는 상념에 젖을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모터보트 타는 곳의 확성기에서는 '신명나는' 뽕짝 메들리와 '보트가 곧 들어오니 승선 대기하시라'는 안내방송이 우렁차게 울려퍼진다. 될 수 있는대로 나와 관련없는 일에는 신경꺼서 스트레스도 받지 말고 괜한 에너지 소모도 하기 싫지만 짜증이 밀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자연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강변에 흉물스런 쇠파이프 뼈대에 철판 지붕을 덮은 저 따위 건물을 허가해준 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며 자신의 사업이 심각한 소음 공해와 시각 공해를 동시에 유발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저 모터 보트 업주의 무지함은 어째야 할 것이며 평화롭고 잔잔한 수면 위에 상처같이 날카로운 궤적을 남기며 달려가는 모터 보트를 어이없게 쳐다보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왁자지껄한 관광객들 모두 안타깝다. 관광(觀光)...진정 을 보았습니까?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게 여전히 수준 떨어지고 촌스러운 저질 후진국스런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정말이지 손발이 오그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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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포항

일제시대에는 조선 10경에 들만큼 솔밭과 모래사장이 끝내줬다는 송도해수욕장의 퇴락한 마지막 모습들. 이미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간혹 바다를 보고 싶을 땐 가장 금방 도착해서 바람을 쐴 수 있던 곳이었으나 이제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모래사장을 뒤엎고 해안을 따라 일주도로가 건설 중에 있다. 송도해수욕장은 이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p.s. 몇개월만의 현상, 그리고 몇 개월만의 스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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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9  경주 불국사

요새 정말 사진에 소홀했던 것 같다. 정말 간만의 포스팅인 듯.
스캔할 필름은 쌓여있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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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

원폭 피해 현황과 처참한 사진자료들을 보고 있는 일본인들



한국하면 아직도 한국전쟁을 떠올리는 외국인이 많다는 뉴스를 가끔 접하곤 한다. 내심 못마땅해 불쾌해 하기도 하고 올림픽 / 월드컵을 거치면서 그러한 부정적 인식을 떨쳐버리고 있음을 뿌듯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는 원자폭탄이지 않을까? 워낙에 충격적이었던 인류가 만들어낸 가공할 무기의 첫 실전 사용이었기에 그들이 원치 않더라도 타인의 인식 속에서 잊혀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율을 경험한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시 예상되는 인명 피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이는 때마침 개발된 신무기를 써보고 싶은 유혹을 더욱 부채질 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용으로 특수 개조된 4발 중폭격기 B-29 '에놀라게이'호가 날아가 작고 길쭉한 모양 때문에 '리틀보이'란 별명을 붙은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항복이 없자 3일이 지난 8월 9일 통통한 형태라 '팻맨'이라 별명이 붙은 두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이 가공할 무기는 수 만명의 목숨과 도시를 한 순간에 새까만 재로 만들어 버렸고 이에 굴복한 일본은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그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던 나가사키의 평화공원과 원폭기념관에는 원폭 투하 전 평화로운 시내의 전경부터 시작해 원폭 투하 직후의 폐허가 된 시내의 모습, 불에 타 쓰러진 시신들, 생존자들의 절규, 환자 구출 및 필사의 복구 활동, 원폭의 위력과 공포, 폐허 더미에서 가져온 잔해, 원폭이 폭발한 순간 멈춘 시계 등등을 전시하여 관람객들의 가슴을 교묘하게 무겁게 만든다. 마치 일본인들이 전쟁의 피해자인양. 정말 인류에게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단 느낌이 들도록. 더군다나 더 가관인 것은 '미국 너네가 원폭을 떨어뜨려 우리만 죽은게 아니다. 봐라 괜한 외국인들도 이만큼이나 죽었다.'라고 얘기하는 듯한 외국인 원폭 피해 현황도 있는데 그 중에 한국인이 가장 많음은 뭐라 설명해야 할런지.

아직도 끊이지 않는 헌화와 편지들에는 No War, Peace, Love 등 좋은 말은 다 적혀있었다. 과연 원폭 폭발 중심지의 평화공원에서 일본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잔인한 식민지배와 중일전쟁과정에서 일어난 남경대학살 등의 참상은 알고서 저리도 침통한 표정을 짖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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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잡은 고기를 냉동하기 위해 배에 넣어둘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던 부둣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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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정말 일본'틱'했던 母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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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완전 역광이 되는 상황에서 보여준 비오곤의 플레어. 그다지 보기 싫지는 않다. 전용 후드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구하기도 어렵고 있다해도 가격은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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