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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번 국도변의 작은 휴게소, 동활휴게소에서 휴식 중

생각보다 7번 국도는 정체가 거의 없었다. 아침이라 피서 차량들이 몰리기 전이었을 듯. 울진까지 거침없이 북상하여 월천교를 지나 태백 방향으로 연결되는 416번 도로로 빠졌다. 넓고 쭉쭉 뻗은 바닷가의 7번 도로를 벗어나 416번 도로에 진입하면 강원도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물씬 든다. 들은 좁아지고 산은 높아지고 골짜기는 깊어지고 코너는 가파르다. 그렇지만 오가는 차도 적고 주변의 풍광에 젖어 운전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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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첫번째 목적지 삼척시 가곡면 신리의 너와집 앞에 도착했다. 이 너와집이 없다면 이 곳을 지나는 차가 하루에 몇 대나 될까 싶을 정도로 한적하고 조용한 산골이다. 신리의 너와집은 언젠가 찾았던 적이 있는데 워낙 오래되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크게 없는 것 같지만 주차장이 조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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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한옥의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지역적, 환경적 특색이 드러나는 가옥 형태인 강원도의 너와집. 강원도 깊은 산골에 정착한 화전민들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나무였을 것이다. 가난한 그 들이 기와를 올릴 수는 없을 것이고 벼농사가 어려운 곳이 많았으니 일반 농촌처럼 볏짚을 올려 초가지붕을 올릴 수도 없어 아예 나무 판자로 기와를 대신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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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옥의 형태를 대청마루로 대표되는 남방계 주거 문화와 온돌이라는 북방계 주거 문화의 조화라고 말하기도 하던데 너와집은 개방적 구조의 남방계 주거 문화의 요소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혹독하게 추웠을 깊은 산골의 겨울을 버티기 위한 구조였을까. 건축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는 없지만 답답하고 어두워 보이는 너와집. 건물 내부를 구경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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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굴뚝도 나무로 만들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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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의 너와집에는 드문드문 관광객들이 꾸준히 찾아와 잠시 둘러보고 발길을 돌렸다. 오늘날의 이런 호기심어린 관심이 사치스럽다 생각들 정도로 옛 시절 강원도 산골 화전민들의 삶은 치열했을 것이다. 험한 산세와 좁은 경작지에서 먹고 살기 위해 험한 산비탈을 개간하고 쌀 대신 감자와 옥수수로 연명하며 벌목과 사냥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했으리라. 물이 있고 조그마한 터라도 있으면 이 좁은 국토 어디에서도 마을이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생명력은 끈질기고 강했음을 강원도 여행길에서는 절실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너와집은 특이한 옛날 집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 남았던 강원도 사람들의 질긴 삶의 흔적으로 더 가치있을 것이다.





흑백 필름으로 뭔가 운치있는 장면을 찍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쨍한 날씨의 강한 콘트라스트에서는 별로 원하는 장면이 나올거 같지 않았다. 막연한 기대일지 모르지만 새벽이나 해질 무렵이라면 모를까 벌건 대낮에는 역시 어쩔 수 없다. 자 이제 태백으로~



2010.08.05 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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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한 이번 휴가 기간의 끝 물. 이대로 흘려보냈다간 분명히 후회하리라. 1박 2일 일정으로 잠시라도 어디든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 날씨는 보는 바와 같이 아주 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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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일찍 출발해야 했으나 전 날 늦게 잠드는 바람에 그만큼 기상도 늦었다. 해가 일찍 뜨는 여름에는 도로의 정체와 더위를 피해 새벽 6시면 출발해야 하거늘 이미 지표면이 달궈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출발하게 되었다. 목표한 출발 시간보단 늦었지만 그래도 해가 긴 여름날이니 계획한 일정을 소화하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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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의 목적지는 바로 강원도 태백. 마지막으로 태백에 여행 갔던 것이 현재 군입대 전 태백산 일출산행을 했던 2003년 초였던가..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밤기차를 타고 떠났던 그 때의 운치만 하겠냐만 어쨌든 올 휴가는 태백이다. 7번 국도를 따라 북상해서 울진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태백까지 향하는 정석적인 코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휴가철을 맞아 7번 국도에 차량들이 넘쳐나지 않을까 걱정도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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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고고고~


2010.08.05

김치볶음밥과 샌드위치~





야외에서 본연의 진가를 발휘하는 로지텍 Pure-Fi Anywhere / iPod Touch ~  집에서 들을 때 보다 밖에서 들으니 오히려 소리가 더 나아보인다. ㅎㅎ





셀프타이머가 원래 없는 Rollei35이기도 하지만 선이 무척 긴 에어릴리즈가 있으니 둘이서 사진 찍기 참 편하다. 





꼼지락꼼지락~ 





만고땡~ 여유로운 일요일 점심 시간~


2010.07.18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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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5 영덕


전형적인 풍경사진을 찍으러 갈 때마다 늘 그렇지만 별 기대도 않고 바람이나 쐬자는 취지로 나섰고 역시나 특별할 것 없는 사진들을 건져왔다. 그래도 일주일 동안 학수고대하던 늦잠까지 포기하며 새벽부터 설쳐야 하는 일요일 아침 출사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주말을 그나마 알뜰하게 보내게 해준다.
중학교 1학년이던 1994년에 읽었던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 1권의 첫 부분에는 칠천량 해전의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있었다. 훗날 알게된 실제 전투 과정과는 상이한 부분이 많지만 소설답게 칠천량 전투의 긴박함과 절망적인 조선 수군의 모습들이 생생했다. 이순신 위인전이나 국사 교과서 등에서 자랑스럽게 외치는 한산도 대첩이나 명량대첩과 달리 패배, 그것도 궤멸적 타격을 입은 칠천량 해전은 그다지 알려져있지 않았음에도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통해 내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고 있는 동안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전멸당한 칠천량 해전. 그 허망한 패전의 현장을 다녀왔다.



 

거제에서 칠천도로 건너가기 직전 도로 우측편에 있는 칠천량해전비. 이 전에는 관심도 없었는지 비가 생긴지는 얼마 되지도 않은 듯 하다. 2010년 1월 12일에 제작된 비석이다. 역시 패전의 수치스러움과 이순신과 상반되는 이미지의 원균이 어우러져 묻히고 잊혀진 역사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라면 절대 이렇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늦게 나마 생긴 비석의 비문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수전에 어두운데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한 선조와 권율의 무모한 작전 수행 지시와 원균의 꼼꼼하지 못한 작전 지휘등 가치 판단에 대한 부분은 생략한채 담담하게 칠천량 해전의 결과를 얘기하며 이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침몰 거북선 찾기 탐사를 추진 중이라고 마무리 하고 있다. 칠천량 해전의 안내문인지 '우리 거북선 찾기 운동하고 있다규!' 라고 홍보를 하는 것인지...이 해역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의 수가 단일 전투에서는 가장 많을텐데 전몰장병 위령비라도 하나 세워두는 것이 보다 모양새가 맞지 않나 싶다.




거제도와 칠천도를 연결하는 칠천교. 이 다리가 가로지르는 좁은 해협이 칠천량이다. 이 좁은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칠천량 해전이다.





칠천량에서 동쪽인 부산 방향을 바라본  모습이다. 저 멀리서부터 가덕도, 안골포 등지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의 전선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대략 조선수군 100여척, 일본 수군 1천척 가까이 벌어진 전투였는데 이 좁은 바다에 그만큼 많은 전선들이 들어 찼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수한 함포를 이용한 포격전이 유리한 조선 수군은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진을 펼치고 함포 사격을 통해 적을 제압해야 하거늘 좁은 해협에서 진을 펼치지도 못한채 적의 기습을 받아 근접전을 허용하게 되었으니 애초에 칼싸움에서는 일본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칠천량에서 바라본 서쪽 통영 방향의 모습. 포위 당한 조선 수군이 한산도로 퇴각하기 위해 어떻게든 뚫어야 했던 퇴로다.





칠천도와 그 주변의 지도. 화살표 표시가 된 부분이 칠천량이다. 지도 우측 상단의 가덕도에서 전투 후 칠천도로 물러나 정박해있던 조선 수군은 가덕도와 부산포, 안골포, 웅포 등지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고 칠천량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벌였다. 간신히 칠천량이라는 호구를 벗어난 나머지 수군들은 당시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로 어떻게든 철수해야 했으나 한산도로 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통영과 거제 사이의 견내량 마저도 일본 수군에게 봉쇄당해 향하지 못하고 고성의 춘원포로 밀려나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통제사 원균 역시 그 곳에 상륙하였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한 이유는 칠천량 해전에서 목숨은 부지한 선전관 김식(金軾)의 보고서에도 전사한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없고 일본측 기록에도 적의 사령관을 포획 혹은 사살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지라..

선전관 김식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왜선 5,6척이 갑자기 소동을 일으키며 불질을 하여 우리나라 함선 4척이 전부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여러 장수들이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진을 벌리지 못하였습니다. 닭이 울 무렵에 왜선들이 헤아릴 수 없이 와서 서너겹으로 에워싸고 형도 근처에 가득히 널린 채 싸우거나 물러가거나 하여 도저히 당적할 도리가 없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고성 땅 춘원포로 물러나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적세가 하늘을 찔러 우리 배들이 전부 불타서 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도 모두 불타 죽고 빠져 죽을 때에 신은 통제사 원균과 순천 부사 우치적과 같이 몸을 빼어 육지로 올랐습니다. 원균은 나이가 많아 달아나지를 못하고 홀로 칼을 짚고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왜병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면서 원균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는데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결국 칠천량이란 좁은 바다에서 불시의 기습을 당한 조선 수군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며 제대로된 호쾌한 반격 한번 못해보고 무너진 것인데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수군 총사령관이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조선 수군이 전멸당하자 일본 수군은 거칠 것이 없어졌다. 지상군의 진격을 수군이 지원하는 수륙병진책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며 임진년에는 무사할 수 있었던 호남지역 마저 위태하게 되었으며 뻥 뚤린 남해안의 뱃길을 통과해 서해안을 따라 한강으로 적이 치고 올 수도 있게 되었으니 칠천량 해전 한 번의 패배로 인한 결과는 가혹했던 것이다.

철천량 해전에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적과의 교전을 앞두고 적전 도피한 수사 배설의 이야기다. 배설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잽싸게 퇴각하여 호구를 빠져나갔는데 이 덕분에 경상우수영 소속 판옥선 12척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적전 도피죄를 지은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어쨌든 도망하는 와중에도 정신줄 놓지 않고 한산도에 들려 통제영을 불살라 무기와 식량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훗날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비장한 심정으로 쓴 장계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이나 있사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 그 12척이 되어줬다. 여기까지라면 비록 적전 도피를 하였다 하나 현명한 판단으로 목숨을 부지해 훗날 조선 수군의 눈물겨운 감동의 드라마 '명량대첩'의 밑거름이 되어준 것으로 인정해주겠는데 배설은 결국 명량대첩을 앞두고도 또 도망가고 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결국 체포되어 참형을 담하고 마니..ㅉㅉ  어쨌든 그렇게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판옥선 12척을 제외하고 거의 불타 사라지는 최악의 패배가 바로 칠천량 해전이었다.





그리고 칠천량 해역에서 거북선을 찾기 위한 탐사선. 아무래도 이 해역에서 괘멸적인 타격을 입었기에 거북선의 잔해가 있다면 칠천량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자랑스런 역사와 기술을 상징하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란 용어는 이제 쓰지 않기를 바라지만 갑판에 지붕을 씌우고 그 위에 장갑을 덧대어 적의 총, 활로 부터 전투원을 보호하며 적진 속을 종횡무진 누비며 격파하는 돌격 전투함이라는 창의성은 거북선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거북선 철갑 조각이라도 한 점 꼭 찾아주길 바란다.



 
2010.02.27 칠천도





















2010.02.28 지심도


겨울의 끝자락부터 봄기운을 완연케 하는 동백을 보러 찾아간 지심도.
해마다 동백을 일찍 만나러 보길도나 여수 오동도 등 남해안의 동백섬들을 찾고 싶은 마음은 꿀뚝 같았지만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렵던 중 올 해는 드디어 다녀왔다 ㅎㅎ 

동백은 다른 꽃들이 시드는 모습과 달리 꽃송이의 모양 그대로 땅에 툭 떨어지고 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참형을 당해 머리가 댕강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남해안 섬 등지로 귀양을 왔던 사람들이 재수없다고 여겨 많이 베어버리기도 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땅에 떨어지고도 동백은 한동안 그 모습을 유지하며 쉽게 시들어버리지 않는데 곱고 하얗던 자태를 뽐내기를 얼마만에 금방 꽃잎이 뚝뚝 떨어져 거무죽죽하게 시들어가는 목련과 달리 한동안 꼿꼿이 서서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동백의 모습은 여타 꽃들과 달리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나무에 피어있을 때 보다 땅에 떨어진 모습이 더욱 애절하고 처연한 동백이라 사진도 거의 땅에 떨어진 녀석들 위주구나.. 










2010.02.15 포항


블로그에서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와 생각들은 언제나 많지만 요즘은 마음에 여유가 잘 안나네.
그래도 나름 잘 지내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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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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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영주

순흥 읍내리 벽화 고분 - 사적 313호



2009년의 마지막 여행지로 영주를 택했다.
언제가도 좋은 부석사와 그 외 몇군데를 들를 생각이었는데 코스를 짜며 지도를 보던 중에 우연히 신라시대 벽화 고분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 1993년 겨울 당시 과천 현대미술관까지 올라가 고구려 고분 벽화전을 봤던 강렬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와중에 남한 지역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벽화 고분들 중 보존 상태도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라니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부석사로 향하는 길 가에 위치해 동선이 꼬이지도 않으니 금상첨화. 사진에 보이는 고분은 원형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일반인들도 저 돌 문을 열고 들어가 구경해볼 수 있다. 실제 벽화는 보존 관계상 들어가볼 수 없는데 아무리 복제한 모형이라지만 무덤 속에 들어가는 기분은 꽤나 깨름칙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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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석문을 열면 '┌ ' 으로 꺾어지는 입구가 나온다. 입구 양쪽 벽면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듯한 우람한 사내들이 그려져 있다. 이 좁은 문을 통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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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쪽으로 들어와서 바라본 모습.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무용 장면이라던지 사냥 장면, 씨름 장면 등이 많이 나와 사료적인 가치도 뛰어날 뿐더러 북두칠성은 물론 삼족오(三足烏)나 주작, 백호, 청룡, 현무 등등 종교적인 관념도 볼 수 있으나 이 그림은 상당히 특이하다.

무덤을 지키는 무사(?) 쯤으로 보이는 이 사내는 뱀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용맹을 보여주고 있는데 신기한 헤어스타일은 물론이며 우람한 체격과 큰 코와 구릿빛 피부는 아무리 봐도 동양인인 신라인의 모습이 아니다. 아래위로 심하게 돌출되어 그려진 송곳니도 그렇고 무섭고 강한 인상으로써 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무덤을 지키기 위한 과장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왠지 경주 괘릉에서 본 아랍인의 모습을 본 뜬 석상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국적이고 특이한 인물의 모습도 그렇지만 마치 펜으로 그린 듯한 그림의 스타일이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마저 주는데 그림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웠던 고구려 벽화들과 달리 이 고분의 벽화는 조선시대 민화를 보는 듯한 투박하고 어설픈 서민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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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통로 안쪽의 꺾이는 부분 상단에 있는 이 그림은 작지만 눈길을 끈다. 벽면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이 곱상한 여성분의 얼굴은 살아남았다. 바로 옆의 구름 그림도 있어 선녀를 그린 것으로도 생각되는데 앞서 우락부락하기만 한 사내의 그림과 달리 이 여성의 얼굴은 참 곱게도 그렸다. 낮은 코와 작은 눈, 통통한 볼과 작지만 도톰한 입술과 기품있어 보이는 긴 목.. 당 현종 때 양귀비도 그랬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얼굴이 통통한 편을 좋아했다고 하니 신라에서도 꽤 괜찮은 미모였으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이 그림은 마치 오늘날 만화를 보는 듯한 획 놀림을 보여주는데 정말 요즘 그림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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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건 뭐 낙서인지 뭔지;; 그리다 만 것인지. 뭘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계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는 보이지 않는 무질서가 혼란스럽다. 신라의 중심이던 경주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이 곳에 존재했던 지방세력의 무덤이었을테니 세련된 기법과 웅장한 규모를 바래선 안되겠지만 고개가 계속 갸우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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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관이 놓여졌던 곳이다. 편편한 바닥에는 적어도 관 2개 정도는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나온다. 벽면의 벽화는 훼손이 심해 거의 알아볼 수 없고 단서가 될 만한 유물은 토기 파편 5개만 남고 모두 도굴당했다고 한다. 또 피가 끓어오르는데 벽화는 거의 지워지고 유물은 다 사라지고 뒷받침할만 사료도 없으니 이 고분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비단 이 작은 고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도굴로 인해 잃어버린 역사의 조각이 얼마나 될지, 또 그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책의 어느 페이지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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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몇평 되지도 않는 좁은 무덤에서 이제 산 사람 세상으로 나가야겠다~ 무섭다고 안들어오고 있다가 내가 나오자 카메라를 들이대는 혜정이~ ㅎ


좁은 무덤 안에서 비록 복제한 벽화들이지만 꽤나 리얼해서 실제 고분을 발견하여 발굴하는 듯한 느낌을 가져볼 수 있는 괜찮은 경험이었다. 이 투박한 작은 벽화 고분을 들여다봐도 놀랍고 흥미로운데 중국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들을 직접 들어가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실감이 안난다.

시간내서 고구려고분벽화 도록이나 오랜만에 펼쳐봐야겠다.


2009.12.26  포항 송도


촬영을 하려거든 관할인 동대구역의 정식 승인을 얻으라는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는 효자역 직원들의 짜증섞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오랜만에 들른 송도 해수욕장. 2-30년전만 해도 피서객들로 붐비던 모래사장 위에는 이제 냄세나는 검은 아스팔트가 한참 깔리고 있었다.

백사장은 매끈한 새 도로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송도해수욕장이 오염되면서 빈민가 처럼 변한 주택가는 여전하다. 해수욕장의 옛 추억을 덮어버린 쭉 뻗은 새 도로의 개통과 함께 바닷 모래 날리는 퇴락한 이 곳에도 재개발의 열풍과 인생 한방의 역전 홈런이 터질지 모른다.

어쨌든 비교적 가까운데다 찾는 사람이 적어 조용히 바람쐬러 자주 들렀던 한적한 모래사장이 없어졌고 어제보다 매서워진 찬 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여 카메라를 들고 기웃거린 결과물은 이 사진 한장만 남기곤 모두 삭제. 필름이고 디지털이고 간에 맘에 안든다고 통채로 지워버린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종일 찍은 결과물이 모두 맘에 안든다.

저 사진 한 장 만으로 앞으로 어떤 사진을 해야할지 고민스러웠던 오늘의 나를 보여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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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정선 5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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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QUE moisture surge extended thirst relief (이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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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CITANE  Hand Cream Trio Set

서울 출장길에 구해온 혜정이 생일 '늦은' 선물 겸 크리스마스 '미리' 선물~


갖고 싶어하는 두 상품의 이름을 완벽히 외워 매장에서 자연스레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몇번이고 봐도 외워지지 않는 크리닉의 저 모이스춰 크림과 록시땅의 핸드크림의 이름~;;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여자 화장품에 문외한인 나로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니.. 결국 영구보관함에 옮겨둔 문자메세지를 보면서 물건을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정도면 비싼건지 얼마나 좋은건지 개념조차 안잡히지만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롯데 잠실점의 탁하고 더운 공기 속에서 이마에 땀 송글송글 맺혔던 잠깐의 고생에 대한 위안이 된다. 어릴 적에도 잠실 롯데(롯데월드 마찬가지)의 탁한 실내 공기는 참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수 년만에 다시 찾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 그리고 간만의 ai-s 28mm 2.8을 이용한 접사~ 굳이 힘들게 구했던 이 28mm는 Nikkor 28mm 중 CRC설계가 되어 0.2m의 근접 촬영이 가능하단 거~ ㅎㅎ  맘에 들어~


2009.12.13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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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 서울 강남역

오랜만에 만난 형석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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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8 경남 고성

작년 휴가 때 해안도로를 달리던 중 바다가 너무나 파래서 방파제로 몰고 들어가 차를 세웠었다. ㅋㅋ  지금은 철호에게 시집간 아방이와 함께한 마지막 하계휴가~

올 휴가도 이제 한달 조금 덜 남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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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해인사

여름휴가를 절에서 보내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단순한 템플스테이일 수도 있고 짧은 휴식기간 동안 마음을 수양하고 영적인 재충전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한국 불교(비단 불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에도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것 보다 참선을 통한 자기 수양을 중요시하는 일반 신도들이 많이 늘었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문득 고 3때 나름의 스트레스 속에서 간절히 바랬던 산속 암자에서의 며칠간의 휴식이 생각난다.

 

















2008. 08  부안

곰소염전

평소엔 기본값으로 스캔해도 괜찮더니만 요새 마젠타가 너무 많이 끼는듯..


2009.01.05

잘 사용중이던 쿨스캔 4ED(Coolscan IVED)의 스캔 이미지 품질이 현격히 떨어지기 시작한지도 몇개월이 지났다. 네가티브보다 포지티브 스캔시에 명확히 드러나는 하이라이트 경계부의 빛번짐 현상. 결국 한동안 포지티브 필름은 스캔도 잘 하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미루고 미루던 스캐너 자가청소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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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전자기기는 무식하게 뜯었다가 제대로 조립못하면 끝장나는 수가 있어서 나도 웬만하면 무모한 시도를 안하는데 의외로 무척 간단했다. 뒷면에 나사들 죄다 풀어서 외부 케이스를 뒤로 뽑아내고 전면 커버 떼어내고 상판의 얇은 철판을 나사 두개 돌려서 빼내면 일단 준비 끝. 하이라이트 경계부의 빛 번짐 현상은 분명 미러가 더러워 진 것일게다. 렌즈에 얼룩이었다면 어쩔 수 없이 AS센터로 갔어야겠지만..역시나 렌즈 앞의 작은 미러가 뿌옇게 먼지가 묻어있었다. 이걸 잘 닦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문제는 위치가 면봉을 집어 넣기가 까다로워서 애를 먹었다는 점인데 면봉을 길게 잡고 뻘짓을 할게 아니라 반으로 똑 부러서 짧게 만드니 어느정도 미러를 빡빡 닦아줄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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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케이스 조립하지 않은 상태로 테스트 스캔해보니 프리뷰 상으로도 확실히 그 전의 빛번짐 현상이 현저히 줄어듬이 보였다. 그러나 아직 완벽치 않아 다시 위의 과정을 반복하며 구석구석 다시 닦아주고 최종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아래에~ ㅎㅎ

나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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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클릭하세요~


2008. 07  통영

전망대에서 일몰을 바라보는데 문제는 없지만 나무가 많아 적절한 앵글이 나오지 않아 고심하며 누른 컷.
일몰의 색이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눈으로 본 것 보단 괜찮게 나왔다. 역시 벨비아인가? ㅋㅋ 
2008. 07.  포항

요근래 주말 중 날씨가 양호했던 7월의 마지막 일요일. 가족들과 남산에서 간단히 트래킹을 즐기고 돌아와 바로 카메라를 챙겨들고 모교인 포항체절중학교로 향했다. 스포츠토토 후원 전국 유소년야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기간이었고 그 다음주엔 남해안 일대를 3일간 둘러보고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라 시간은 이 날 하루 뿐이었다.

한동안 바깥 바람을 쐬지 못한 AF85mm1.8과 AF180mm2.8ED를 챙겨들고 운동장에 도착하니 광주 화정초등학교와 순천 남산초등학교의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아마 야구는 7회까지로 알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야구는 한 이닝이 더 짧은지 나름의 전광판(?)에는 6회까지만 표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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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투 중인 광주 화정초등학교의 투수. 조금은 자신 없는 투구로 감독의 질책을 받고 마운드를 내려오긴 했지만 수차례 위기를 넘기며 순천 남산초등학교의 타선을 중반까지 무실점으로 묶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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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에서 몸을 푸는 화정초등학교의 투수. 직구를 던지기 위한 그립을 한 채 투구판을 밟고 와인드업하는 모습에서 어린 나이답지 않은 비장한 표정과 진지함이 인상적이었다. 이 녀석은 첫 번째 사진의 투수에 이어 등판해 경기 종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체격 조건도 좋아보였고 또래의 초등학교 선수들이 쉽사리 배트를 갖다대기 어려운 묵직한 직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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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락 아웃! 자기 스윙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당하고만 남산초등학교 타자. 시종일관 화정초등학교의 마운드에 눌린 남산초등학교는 수비에서도 매끄럽지 못한 플레이로 주지 않아도 될 실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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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의 사인을 주시하고 있는 화정초등학교 포수. 마스크를 썼지만 어린 나이 답지 않은 예리한 눈빛이 인상적. 투수를 리드하고 수비 라인을 조율할 수 있어야하는 포수라는 직책에 어울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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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은 엄마가 보살펴줘야하는 어린이 :)   무실점으로 한 이닝을 마치고 들어와 마스크와 보호구를 벗으며 타격 준비하는 아들의 땀을 닦아주는 엄마는 아들이 대견하기도 하겠지만 학원 스포츠계에서 만연한 뒷돈 문화 등을 떠올리면 이 부모의 고생길도 훤하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음은 슬픈 현실이 아닐까. 상위 학교 진학 혹은 프로 입단에 올인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오는 여러 병폐를 막으려면 결국 클럽 스포츠의 형태로 변화되어야 할텐데 그것도 말처럼 한 순간에 쉬이 바뀌기는 어렵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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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도 할 건 다 한다. 다음 타순의 타자는 대기 타석에서 상대 투수의 투구 동작에 호흡을 맞추며 배팅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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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시타가 터지고 1루 주자는 2루로 내달린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생각보다 안타나 득점이 이뤄져도 선수들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화이팅이나 패기보다는 군기가 바짝든 그런 딱딱한 모습은 보기에 다소 안쓰러워 보이기 조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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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로 열심히 진두지휘 중인 화정초등학교 감독님. 더위 때문인지 흥분한 탓인지 얼굴까지 시뻘개져가며 수비위치부터 투수의 볼배합까지 큰 소리로 지시하고 있었다. 사실 감독님의 표정과 흥분도를 봐서는 지고 있는 팀의 감독으로 보였지만 투수들의 호투와 타선의 집중력, 상대 실책을 이용하는 효율적인 주루 플레이로 이 날 화정초등학교는 남산초등학교에게 영봉패를 안겨주며 완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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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의 공이 날아들기 직전의 순간. 한 점도 못내고 영봉패를 당했지만 순천 남산초등학교의 선수들은 벤치에서도 쉴새없이 화이팅을 외치며 최선을 다했다. 사진으로 보니 두 학교의 유니폼이 아마 선수단임을 감안하면 참 세련된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봉황기나 청룡기 중계를 간혹 보면 정말 너무하다 싶은 유니폼들도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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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야구 특유의 맞으면 '땡강~'하는 소리가 나는 알루미늄 배트들. 야구 경기를 보는 내내 만화 '까치'가 생각났다. ㅎㅎ


중학교 때 우리 학교 야구부가 결승에 진출해서 영남대학교 운동장까지 가서 응원했던 이후 아마 야구를 직접 지켜 본 것은 처음이지 않나 싶었다. 애(?)들 답게 어이없는 실수도 하고 귀여운 플레이도 하길 기대하고 찾아간 자리였지만 생각보다 실력도 뛰어나고 너무 진지해서 원하던 컨셉의 사진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이 날 만난 아이들 중 10년 뒤 이름을 휘날릴 친구가 나타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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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하동


3월에 월차신공으로 평일에 조용히 다녀왔던 섬진강.

하동을 빠져나와 남해안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달리던 중 보이는 간판 '최참판댁'
적어도 운치있는 고택과 최참판이 하동 마을 주민들에게 베풀었던 넉넉한 마음씀씀이 등의 훈훈한 일화를 떠올리며 핸들을 꺾었던 나의 기대를 무참히 깨준 곳이었다. 드라마 '토지' 세트장이었다는 민속촌 비스무리한 초가집들과 각진 목재로 새로 깨끗이 만들어진 최참판댁과 이런 것들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받는 어이없는 상황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야했다. 더군다나 수많은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단체 관광객들의 왁자지껄함에 질려버렸음은 물론이다.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소설의 감흥을 느끼고자 찾은 애독자는 있기나 했을까.

어쨌든 괜히 왔다라는 생각을 되뇌이며 세트장을 빠져나오며 만난 마을은 그나마 위안을 주는 모습이었다. 요즘 농촌 답게 빈 집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섬진강변의 넓은 들을 끼고 있는 곡창의 마을답게 여유가 느껴지는 한적한 마을이었으며 돌담도 예전 그대로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런 돌담을 보기도 어려워져 돌담도 보존해야할 향토 유적으로 분류될 정도이니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이런 골목길을 만나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골목을 돌아다니며 TMX가 들어있는 Nikon FM과 내가 제일 좋아했던 렌즈 ai-s 28mm2.8로 몇 컷을 담았다. 어딜가나 골목길은 셔터를 누르게하는 묘한 매력이 가득한 공간이다. 괜찮다 싶은 곳에선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재빨리 셔터를 누르곤 하지만 뭐 사실 딱히 대단한 사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감이 느껴지는 골목길에 사람이 없다면 허전하다는 나름의 고정관념으로 해마다 이 같은 사진을 수십장 남기게 하는 듯 하다. 작고한 김기찬 작가는 골목길만을 평생동안 필름에 담았다고 하니 골목길의 매력은 사진가들에게 남다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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