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딱 파커스러운 디자인의 만년필. Parker 21. 

Parker 21은 Parker 51의 대성공 이후 일종의 보급형으로 1948년에 첫 출시된 모델로 디자인상의 차이는 거의 없고 파커 51의 레진 계열에서 재질이 플라스틱으로 바뀌면서 좀 더 저렴해졌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단순하고 둥글둥글한 외형이 P-47 Thunderbolt를 보는 듯해 처음에는 참 멋없다 싶었는데 자꾸 보니 이 단순함에서 실용이 느껴진달까? 은근히 매력적이기도 하다. 





이게 2차대전 당시 강력한 엔진과 두터운 철판으로 인한 맷집을 자랑하며 활약한 P-47 썬더볼트. 단순무식한 디자인이 파커 21과 비슷한 느낌. 





뚜껑은 부드럽게 체결되지만, 워터맨처럼 딸깍하지도 않고 스크류식도 아니라 열리기 쉬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는 상당히 부담스럽다.





몸통안에는 요렇게 생겼다.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고 뒷부분을 4차례 누르라고 되어있다. 요즘 만년필들의 스크류식에 비해 누를 때마다 들어간 잉크가 다시 새어나가서 제대로 들어가긴 하는지 못미덥지만 한번 넣고 나면 꽤 오래 쓰는걸로 봐서 잘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펜촉은 노출된 면이 거의 없는 후드닙 타입. 뚜껑을 열어두고 오래있어도 잉크가 잘 마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요즘은 이런 형태의 만년필이 많지 않다. 닙 정보가 따로 표기되어 있지 않은데 적어도 M 이상일 것으로 예상될 만큼 글씨가 아주 굵다. 다이어리나 수첩에 작은 글씨를 쓰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이면지 따위에 뭔가를 기안하며 휙휙 갈겨 쓰기에 좋다. 닙의 느낌은 상당히 둥글둥글하고 잉크 흐름도 줄줄줄 원활하다. 잉크 소모량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대략 악필이지만 시필샷. 저기 써진대로 잉크는 파커 큉크 블랙. 글씨가 워낙 굵다 보니 얘는 결재용으로만 사용 중인데 그 용도로는 딱 인듯 하다. 너무 굵어 마땅히 용도를 못찾던 중 얼마전부터 뜬금없이 날인대신 전 직원 서명으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져 신나게 사인해주는 중. 복사본 확인 차원에서라 사인용으로는 블루블랙 잉크로 하나 주문해뒀다.



Waterman Expert F Nib & Waterman Ink Serenity Blue



가장 오래쓰고 있는 만년필인 Waterman Expert. 그동안은 흔하디 흔한 Parker Quink Black만 넣고 써왔는데 워터맨엔 워터맨 잉크를 써보고 싶어 병잉크를 하나 들였다. 블루 계통에서 상당히 인기있는 Serenity Blue. 과거에 플로리다 블루로 나온 색인데 이름과 포장이 다소 바뀌었다. (예전게 더 이쁜듯)


어쨌든 칙칙한 Black과 Blueblack만 쓰다가 파란색을 넣어보니 산뜻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본격 필기용보다는 회사에서 흑백으로 출력된 서류에 첨삭하거나 하는 용도로 쓰면 좋을듯.



2015.01.23

퇴근 후 본가에 잠시 들러서 노닐다가 책상 위에 엄마 만년필이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요즘 만년필로 금강경 필사를 하신다더니 그 만년필인가보다. 어릴 적부터 봐왔던 만년필이었지만 그 때는 크게 관심이 없다가 오늘은 좀 유심히 살펴보며 이면지 위에 몇 자 휙휙 갈겨봤다. 파커답지 않게 글씨가 제법 가늘게 써지기에 닙을 봤더니 14K에 XF. 이정도면 분명 그 당시엔 제법 고가의 만년필이었으리란 예감이 든다. 


만지작 거리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그거 하나 더 있다.'고 하시며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하셨다. 어릴 적 부터 '엄마 만년필'로만 알고 봐왔던 만년필인데 이게 하나가 더 있었다니. 궁금 하다고 찾아 달라고 했더니 아버지도 오랫만에 생각이 나셨는지 서재 부터 안방 서랍장까지 뒤지시기 시작하셨다. 내려놓은 커피는 다 식어가는데 한참을 뒤지시더니 안방에서 가지고 나오신 주머니 안에는 부모님이 학창 시절에 쓰셨던 Parker, Pilot 같은 여러자루의 만년필이 들어있었고 그 중에 엄마 만년필과 똑같은 이 만년필이 한 자루 있었다.


바로 요 녀석.





구글을 통해 확인한 모델명 : Parker 75 - Stering Silver Cisele



좀 낡았다 뿐이지 요즘 나오는 파커 소네트 라인과 비슷한 음각 처리된 격자 무늬의 베럴과 늘씬한 라인은 세월이 지나도 무척 세련된 느낌이다. 거기에다 베럴과 뚜껑의 재질이 무려 은! 순은 다음으로 불순물이 적으면서 가공성을 갖춘 표준은(Stering Silver)을 사용한 모델이다. 예상대로 꽤 고가의 모델인 듯 구글에 자료도 엄청나게 나온다. 이베이를 뒤져보니 여전히 거래가 꽤 활발한데 제일 비싸게 올라온건 무려 $349.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50~200사이에 형성된 매물들이 제일 많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가격대로 거래되고 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정도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걸 보면 70년대 말 당시 우리나라 소득수준과 물가수준을 논외로 하고라도 꽤 고가였을듯 하다. 이 비싼 만년필이 왜 똑같은 것으로 두 자루나 있냐고 여쭤봤더니 대학원 시절 두 분이 사귀실 때 똑같이 사서 사용하시던 즉, 요즘 말로하면 '커플 만년필'이었다고 한다. ㅎㅎ





요즘도 어지간해서는 EF Nib 이하로는 보기가 어려운데 얘는 무려 XF Nib이다. 부모님이 학생 시절이었던 때 산 것이라 깨알같은 노트 필기를 염두에 뒀던 것일까.




두 분의 추억이 어린 40년이 다되가는 만년필을 내가 가져와도 되나 싶었지만 호기심이 발동해 가져가서 써보겠다고 세척을 시작했다. 펜촉을 물에 담그니 검은 잉크가 끝도 없이 나온다. 보통 여러차례 컨버터로 물을 빨아줬다 빼내면 더이상 잉크가 안나오는데 얘는 정말 한참을 반복해야 했다. 이 잉크는 언제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잉크였을지도 궁금했고 멀쩡히 잘 써질까도 걱정됐다. 내가 그렇게 촉을 청소하는 동안 아버지는 베럴을 치약으로 닦아 광택을 살리고 계셨다. 






청소를 다 하고 제 짝인 Parker Quink Black을 넣어주고 집에 돌아와 로디아 노트에 오늘자 일기 비슷한 내 잡설을 또 몇자 끄적여봤다. 초반에는 오래 안써서 그런지 다소 흐름이 원활하지 않더니 금세 부드럽게 술술 잘 나온다. XF Nib이라 그런지 파커 치고는 글씨도 가늘게 써져서 이런 줄 노트나 다이어리에도 충분히 쓸만한 것이 맘에 든다.지금도 세 자루의 만년필을 쓰고 있지만 이 파커 75는 메인으로 쓰기에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과 필기감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두 분의 젊은 시절 아름다운 추억과 이야기가 깃들어있을 소중한 만년필이라 더욱 가치가 느껴지는 이 만년필. 나도 오래오래 간직해야겠다..



p.s. 너무 간만의 포스팅이라 글도 안써진다. 



2015.03.10. 





Nib 부분 접사샷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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