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에 들렀던 선진리성과 조명군총을 두번째로 다녀왔다.

경남 사천에 있는 선진리성은 정유재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주둔하던 성이다. 서생포나 웅천 등 다른 곳의 왜성들과 달리 애써 왜성이라는 용어를 피해가며 그동안 선진리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일본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이 못내 찝찝하고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의 유적이라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2007년에는 설명문에 애써 왜성이 있기 전부터 전략상의 요충지라 산성이 있었고 그 위에 다시 일본이 성을 쌓았단 설명을 구차하게 달아서 왜성이란 오명을 피하고자 하는 흔적이 역력했지만 무지 덥던 그 여름날, 아무도 없는 빈 성터를 돌아다니던 난 이 성이 왜성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일본이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파괴되고 방치되었던 유적들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인지라 1년 반만에 다시 찾은 선진리성은 많은 부분이 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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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리성의 입구와 주차장. 예전엔 없었던 것 같은데..포장마차들이 좀 생겼다. 크게 많은 사람들이 찾진 않을 것 같은데 장사나 될지 모르겠다. 봄에 벚꽃이 피면 사람들이 꽤 올 것같긴 하다만.. 어쨌든 성에 도착했을 이 때만 해도 2007년과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안내판부터 이미 내용이 달라져있었다. 선진리성은 왜성이라는 것을 확실히 명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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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만 해도 왜성임을 애써 부인하는 분위기에서 180도 달라진 모습. 일본성에만 있는 천수각(天守閣)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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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복원한 성이지만 일본식 성곽 답게 비스듬히 기운 성벽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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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으로 들어서자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것이 튀어나온다. 성문을 복원해 놓은 것. 이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인데 사천시에서는 선진리성의 성문을 복원해두었다. 다만 안하느니 못한 어설픈 복원에 약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일본 히메지성을 본따 만들었다고는 하는데 저 낮디 낮은 성벽과 무성의하게 만들어둔 총안구는 뭐냔 말이다;; 거기다 우리나라 기와가 얹어진 지붕은 뭥미..국내의 왜성들에 찾아오는 일본인 관광객들도 적지 않고 유명 관광지가 아닌 이런 사적에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이 분야에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답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일텐데 제발 비웃음이나 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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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성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꺾여진 길을 따라 진입하는 수 밖에 없다. 공격군의 정면에 성문이 노출되지 않아 공성기를 이용해 성문을 파괴할 수도 없고 병력들이 성문으로 진입하면서 양쪽에서 쏟아지는 총탄과 화살에 벌집이 되기 딱 좋다. 전형적인 일본성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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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쪽에서 바깥으로 바라본 장면. 이제까지 가본 서생포, 울산, 순천 왜성에 비해 사천 왜성은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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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비해 확 달라진 곳. 성의 중심부인 텐슈가쿠(천수각 : 天守閣). 2007년에 왔을 때는 천수각이란 설명은 전혀없이 저 충령탑에 대한 안내판만 있었는데 이제는 천수각터라며 친절히 안내판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원형이 훼손되었던 충령탑으로 오르는 계단도 없어지고 주변을 싹 정비하면서 기단부를 복원해내었다. 천수각의 기단부만 봐도 이 곳 사천왜성의 천수각은 그렇게 크고 높진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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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2007년 7월 당시의 모습. 일제 시대에는 저 충령비가 있는 자리에 시마즈家의 후손들이 찾아와 무슨 비석을 만들어 세워뒀다는데 해방후 당연히 깨어지고 6.25 및 대간첩작전에서 전사한 공군장병들을 위한 충령탑이 서있다. 분명히 위치나 흘러내리긴 했어도 기단부를 보면 천수각 터가 분명한데 한마디의 언급도 없어서 이 주위를 한바퀴 돌며 유심히 살펴보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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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에서 바라다 본 남해 바다. 대부분의 왜성은 이 처럼 보급이 용이하고 유사시 배로 탈출할 수 있도록 바다를 연하고 있으며 곳곳의 요지를 점하고 있어 조선 수군의 활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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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의 아래쪽. 바로 뒤편은 경사가 심하고 바다라 적이 접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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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성벽의 모습. 참 어울리지 않는 세가지가 공존하고 있는 야릇한 광경이다. 일본이 쌓은 왜성의 성벽과 이들을 무찌른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승전비와 일제시대에 심었다는 사쿠라의 군락. 지금도 봄이 되면 수 많은 사람들이 벚꽃을 즐기러 찾는 곳이라니 역사란 참 재미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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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진리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조명군총. 사천왜성을 공격하던 조명연합군의 전사자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사천왜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사들을 몰아내고자 조명연합군 3만명이 공격을 퍼부었으나 오히려 시마즈 군의 역습을 받고 처절하게 패했다고 한다. 화포를 발사하다 오발로 인해 화약이 폭발하면서 진중에 혼란이 생긴 틈을 타 성안에서 농성하던 시마즈군이 쏟아져나와 결정타를 가했다고 하는데 정유재란 막바지에 경상도 해안의 일본군을 향한 공격 중 제대로 성공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참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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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의 조명군총 모습

어쨌거나 이 조명군총 역시 2007년에는 막 정비사업이 시행중이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왜란 후 수백년 동안 당병무덤(명,청나라가 들어섰어도 중국이라면 당나라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던것 같다)등으로 불리며 방치되었던 것인데 비록 명군의 수가 더 많았다 하나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엔 명군 뿐 아니라 조선군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 뒤늦은 정비 사업이 왜군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코와 귀까지 잘려나갔을 원혼들을 그나마 달래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선진리성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비교적 깔끔한 형태로 복원 유지되어 있어 다른 왜성들에 비해서는 접근성이 용이하여 답사하기는 무척 편한 성인것 같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사용한 최초의 전투를 벌였던 2차 출격의 해역이기도 하고 재유정란 때 조명연합군의 4로 병진책의 창끝이 향했던 격전지로서 의미가 있다. 바로 그 사천성 전투는 우리가 공격에 나서고도 큰 피해를 입은 전투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시바 료타료의 유명한 역사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얘기가 나올때면 늘상 사천전투에서 명군 5만명의 공격을 격퇴하고 반격에 나서 전멸시켰다는 묘사가 이어질 정도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떠올릴 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군의 정면을 돌파하여 탈출한 무용담과 더불어 꽤나 유명한 듯 하다. 어쨌거나 복원사업이 깔끔하게 마무리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앞으로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선진리성도 다른 곳 처럼 아예 이름을 사천 왜성으로 바꾸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그동안 방치되었던 왜성을 비롯한 일본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들은 새삼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의 일부라는 인식하에 재조명 받고 있는 듯하다.

2009. 01. 03


p.s. - 왜성을 답사할 때면 지극히 실전적인 축성기법과 규모가 놀랍기도 하지만 이런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몸 성히 살려보낸 것에 정말 열받는다;; 적어도 울산성에서 가토 정도는 잡았어야 할 거 아니냐고 ㅆㅑㅇ
 2007. 12. 23

 두번째 진주성 답사. 2003년 여름에 학군단 동기 둘과 진리산 종주를 마치고 내려온 곳이 진주라 잠깐 들렸었지만 다시 와보니 새롭다. 답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이동간에 진주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사실적으로 기술된 '이순신의 두 얼굴'이란 책에서 1,2차 진주성 전투 부분만 발췌해 읽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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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서 바라본 성의 북쪽. 지형을 끼고 도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읍성 형태이지만 사실 그다지 방어에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 작은 성에서 수만의 왜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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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안에서 내려다 본 성밖 진주 시가지의 모습. 왜란 당시에는 총안구를 비롯한 성곽이 지금만큼 완벽하진 않았겠지만 이 얼마 높지도 않은 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활과 총통을 쏘아대며 죽을힘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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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생각없이 온다면 괜찮은 산책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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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는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으로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수군의 연전연승에는 이와 같은 우수한 화포의 위력과 튼튼한 판옥선의 함선구조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위 총통들에 장전된 무기는 대장군전이라는 일종의 관통탄으로 수군들에 의해 많이 쓰였다. 요즘으로 치면 하푼 대함미사일 정도? -_-;
우리 포병의 병과 마크에도 총통 2자루가 교차하고 가운데 대장군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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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에 대한 컴플렉스. 굳이 추장이라고 명칭할 필요가 있었을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은 왜란 동안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의 전공도 전공이지만 특히 선조의 왕자들이 가토에 의해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우월한 전력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에 가토를 포위하고 수일동안 공략했으나 악귀처럼 농성한 가토는 결국 조명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격퇴시키는 등 우리에게 많은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일본의 맹장이었다. 일제의 말도 안되는 주장인지 모르겠으나 '쾌지나 칭칭 나네~'에서 쾌지나 칭칭이 '가등청정'나오네~에서 변형되어 구전된 것이라는 말도 있으며 조선의 집에서는 악귀를 쫓는 신앙물로 가등청정 인형을 두기도 했다는 등 가토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은 상상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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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 죽을 힘을 다해 농성한 울산성 전투도. 당시 왜군의 처절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가토 기요마사는 왜란 참전 일본장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는데 실제 고니시의 부대와 벌였던 충주 탄금대 전투도 가토의 부대와 교전끝에 신립의 조선군의 전멸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노인이 있었을 정도다. 우리에겐 아주 악질같았던 생각도 하기 싫은 일본 장수의 이름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였던 것이다. 이 비문에도 결국 가등청정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억지로라도 격을 낮추고 싶었는지 추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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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 2차 진주성 전투로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에 살아있던 모든 조선 사람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개, 닭까지 모조리 죽였다.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도요토미의 직접적인 지시로 이루어진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성 함락 후 위의 촉석루에서 연회가 벌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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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바위 의암에서 논개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웃긴것은 20세기 초반 군국주의 일본이 과거의 침략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포장하는 과정에서 병신같이 여자 안고 히히덕거리다 물에 빠져 죽은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미화하고자 논개를 그 병신의 연인으로 둔갑시켜 일본에 사당까지 만들어뒀단 것인데.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에서 발칵 뒤집혀 난리 좀 떨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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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논개는 기녀였는지 아니었는지 설이 분분하다. 위와같이 '義妓論介'라고 써진 비각이 있는데 의기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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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은 남강을 끼고 있는데다 절벽위에 성벽을 더 쌓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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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내에는 3.1운동기념비는 물론 6. 25당시 진주지구전적비도 있는데 아무래도 진주성의 메인테마는 임진왜란 당시의 장렬했던 두 번의 전투라 얘네들은 곁다리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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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좀 되었으나 온 김에 안 보고 갈 수는 없어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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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기본 테마는 임진왜란. 조선과 왜의 장수 투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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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자료. 왜란 후 무공을 세운 무장들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 졸렬한 임금 선조를 따라다니며 도망다니기 급급했던 문신들은 수도 없이 많은 상을 받아놓고 싸움터에서 분투한 무장들에게 내린 논공행상은 선무공신이 달랑. 선무일등공신에 봉해진 3명 중 2명은 그나마 전사한 장수다.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 그 3명이다. 사실 원균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하고 조선 수군이 전멸하게 된 것은 결국 해전에 어두웠던 도원수 권율의 책임과 선조의 무능함이 크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사수하고 전사한 김시민은 2등에 봉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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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 순절도. 1592. 4. 15. 부산진을 함락시킨 다음날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여 싸우겠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는 팻말을 세우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戰死易假道難'(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비장한 글을 적어 던졌다. 이 그림에는 동래성남문 앞에 떨어진 송상현이 쓴 글과 성을 넘어 도망가는 이곽(?..이름이 지금 기억이 안나는데..동래성의 장수. 후에 결국 적전도피죄로 참형당하는데 저리 도망하면 어쩌겠단 말인지.)의 모습, 성이 함락되자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한 후 한치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는 송상현의 모습등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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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양국의 갑옷 및 병기 비교. 우리 장수의 갑옷은 대부분의 기마민족들이 그러하듯 보호성보단 기동성과 움직임에 중점을 둔 가벼운 형태의 것이고 일본의 것은 오랜 전란을 겪으며 상당히 세심한 방호능력을 가지고 있다. 팔목은 물론 손등까지 덮을 수 있는데다 가면 형태로 얼굴도 박아주는 등 칼 위주의 근접전에 능한 일본의 전술과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장수의 투구와 갑옷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없어져 보존 상태가 훌륭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밖에도 진주성과 진주성 내에 있는 박물관에는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이 정도로 마치고.. 제발 때와 장소를 못가리는 개념 안드로메다 간 인간들이 좀 사라지길 희망해본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뭔가 확 치밀어 오를 때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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