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이던 1994년에 읽었던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 1권의 첫 부분에는 칠천량 해전의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있었다. 훗날 알게된 실제 전투 과정과는 상이한 부분이 많지만 소설답게 칠천량 전투의 긴박함과 절망적인 조선 수군의 모습들이 생생했다. 이순신 위인전이나 국사 교과서 등에서 자랑스럽게 외치는 한산도 대첩이나 명량대첩과 달리 패배, 그것도 궤멸적 타격을 입은 칠천량 해전은 그다지 알려져있지 않았음에도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통해 내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고 있는 동안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전멸당한 칠천량 해전. 그 허망한 패전의 현장을 다녀왔다.



 

거제에서 칠천도로 건너가기 직전 도로 우측편에 있는 칠천량해전비. 이 전에는 관심도 없었는지 비가 생긴지는 얼마 되지도 않은 듯 하다. 2010년 1월 12일에 제작된 비석이다. 역시 패전의 수치스러움과 이순신과 상반되는 이미지의 원균이 어우러져 묻히고 잊혀진 역사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라면 절대 이렇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늦게 나마 생긴 비석의 비문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수전에 어두운데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한 선조와 권율의 무모한 작전 수행 지시와 원균의 꼼꼼하지 못한 작전 지휘등 가치 판단에 대한 부분은 생략한채 담담하게 칠천량 해전의 결과를 얘기하며 이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침몰 거북선 찾기 탐사를 추진 중이라고 마무리 하고 있다. 칠천량 해전의 안내문인지 '우리 거북선 찾기 운동하고 있다규!' 라고 홍보를 하는 것인지...이 해역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의 수가 단일 전투에서는 가장 많을텐데 전몰장병 위령비라도 하나 세워두는 것이 보다 모양새가 맞지 않나 싶다.




거제도와 칠천도를 연결하는 칠천교. 이 다리가 가로지르는 좁은 해협이 칠천량이다. 이 좁은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칠천량 해전이다.





칠천량에서 동쪽인 부산 방향을 바라본  모습이다. 저 멀리서부터 가덕도, 안골포 등지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의 전선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대략 조선수군 100여척, 일본 수군 1천척 가까이 벌어진 전투였는데 이 좁은 바다에 그만큼 많은 전선들이 들어 찼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수한 함포를 이용한 포격전이 유리한 조선 수군은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진을 펼치고 함포 사격을 통해 적을 제압해야 하거늘 좁은 해협에서 진을 펼치지도 못한채 적의 기습을 받아 근접전을 허용하게 되었으니 애초에 칼싸움에서는 일본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칠천량에서 바라본 서쪽 통영 방향의 모습. 포위 당한 조선 수군이 한산도로 퇴각하기 위해 어떻게든 뚫어야 했던 퇴로다.





칠천도와 그 주변의 지도. 화살표 표시가 된 부분이 칠천량이다. 지도 우측 상단의 가덕도에서 전투 후 칠천도로 물러나 정박해있던 조선 수군은 가덕도와 부산포, 안골포, 웅포 등지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고 칠천량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벌였다. 간신히 칠천량이라는 호구를 벗어난 나머지 수군들은 당시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로 어떻게든 철수해야 했으나 한산도로 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통영과 거제 사이의 견내량 마저도 일본 수군에게 봉쇄당해 향하지 못하고 고성의 춘원포로 밀려나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통제사 원균 역시 그 곳에 상륙하였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한 이유는 칠천량 해전에서 목숨은 부지한 선전관 김식(金軾)의 보고서에도 전사한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없고 일본측 기록에도 적의 사령관을 포획 혹은 사살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지라..

선전관 김식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왜선 5,6척이 갑자기 소동을 일으키며 불질을 하여 우리나라 함선 4척이 전부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여러 장수들이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진을 벌리지 못하였습니다. 닭이 울 무렵에 왜선들이 헤아릴 수 없이 와서 서너겹으로 에워싸고 형도 근처에 가득히 널린 채 싸우거나 물러가거나 하여 도저히 당적할 도리가 없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고성 땅 춘원포로 물러나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적세가 하늘을 찔러 우리 배들이 전부 불타서 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도 모두 불타 죽고 빠져 죽을 때에 신은 통제사 원균과 순천 부사 우치적과 같이 몸을 빼어 육지로 올랐습니다. 원균은 나이가 많아 달아나지를 못하고 홀로 칼을 짚고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왜병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면서 원균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는데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결국 칠천량이란 좁은 바다에서 불시의 기습을 당한 조선 수군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며 제대로된 호쾌한 반격 한번 못해보고 무너진 것인데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수군 총사령관이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조선 수군이 전멸당하자 일본 수군은 거칠 것이 없어졌다. 지상군의 진격을 수군이 지원하는 수륙병진책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며 임진년에는 무사할 수 있었던 호남지역 마저 위태하게 되었으며 뻥 뚤린 남해안의 뱃길을 통과해 서해안을 따라 한강으로 적이 치고 올 수도 있게 되었으니 칠천량 해전 한 번의 패배로 인한 결과는 가혹했던 것이다.

철천량 해전에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적과의 교전을 앞두고 적전 도피한 수사 배설의 이야기다. 배설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잽싸게 퇴각하여 호구를 빠져나갔는데 이 덕분에 경상우수영 소속 판옥선 12척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적전 도피죄를 지은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어쨌든 도망하는 와중에도 정신줄 놓지 않고 한산도에 들려 통제영을 불살라 무기와 식량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훗날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비장한 심정으로 쓴 장계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이나 있사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 그 12척이 되어줬다. 여기까지라면 비록 적전 도피를 하였다 하나 현명한 판단으로 목숨을 부지해 훗날 조선 수군의 눈물겨운 감동의 드라마 '명량대첩'의 밑거름이 되어준 것으로 인정해주겠는데 배설은 결국 명량대첩을 앞두고도 또 도망가고 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결국 체포되어 참형을 담하고 마니..ㅉㅉ  어쨌든 그렇게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판옥선 12척을 제외하고 거의 불타 사라지는 최악의 패배가 바로 칠천량 해전이었다.





그리고 칠천량 해역에서 거북선을 찾기 위한 탐사선. 아무래도 이 해역에서 괘멸적인 타격을 입었기에 거북선의 잔해가 있다면 칠천량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자랑스런 역사와 기술을 상징하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란 용어는 이제 쓰지 않기를 바라지만 갑판에 지붕을 씌우고 그 위에 장갑을 덧대어 적의 총, 활로 부터 전투원을 보호하며 적진 속을 종횡무진 누비며 격파하는 돌격 전투함이라는 창의성은 거북선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거북선 철갑 조각이라도 한 점 꼭 찾아주길 바란다.



 
2010.02.27 칠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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