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에 갈 때면 언제나 카메라부터 챙긴다.




옷가지며 세면도구 등 챙길 것이 무척 많은 아내가 짐 싸기에 분주한 사이, 나의 어느 카메라를 가져 가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 이 놈 저 놈 한참을 들었다 내렸다 하다가 아내의 시선이 신경 쓰일 때 쯤 결국 손에 잡히는 녀석 하나를 몇 롤의 필름과 함께 가방 한 구석에 쑤셔 넣는다. 길게 고민해 봤자 결국은 수십년된 낡고 속닥한 카메라들 중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롤라이 35가 될 때도 있고 콘탁스나 바르낙에 렌즈 몇 개가 더해 지기도 한다.




내 처가는 경북 청송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발전이 가장 더딘 곳 중 하나인 이 곳에 나의 처가가 있다. 마을 입구의 잘 가꾸어진 솔밭과 주변의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고 계곡에 흐르는 작은 개천과 개천을 따라 이어진 논밭, 그리고 낮고 소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 곳에는 어느새 보기 힘들어진 제비들도 여전히 찾아 오는데 녀석들의 날렵한 비행을 구경하거나, 달 밝은 여름밤 열어둔 창문 너머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잠 드는 것은 내가 처가에서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신행을 다녀와 처음으로 자던 날, 해가 어둑어둑해진 후 동네 곳곳에서 은은하게 퍼져오는 군불 연기 냄새를 맡으며 조금은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을 안 공터에 있는 게시판. 저기에 마지막으로 공지가 붙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늘 궁금하다.






이 곳에서 자란 나의 아내는 여름에는 물고기와 가재를 잡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동네 오빠야들을 따라 뒷 산을 내달리고, 보자기를 휘감고 논두렁에서 뛰어내리는 슈퍼맨 놀이 따위를 하며 즐거운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마치면 버스비를 아낀 돈으로 점방에서 군것질을 하고는 세상 바쁠 일 없이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집까지 처제와 재잘거리며 걸어오곤 했는데 우연히 장인 어른의 경운기라도 만나는 날이면 ‘아빠!’하고 달려가 경운기 뒤에 타고 올 수 있었다며, 그게 그 때는 그렇게도 좋았다고 하는 나의 아내. 나는 아내가 그런 소박하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음이 감사했고 나의 처가가 그런 곳이라 퍽 마음에 들었었다.







외가에서 시골의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건 딸냄을 위해서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처가에 도착하면 보통의 경우 장인어른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한겨울의 농한기를 제외하곤 장인어른은 언제나 사과밭에 계시는 것 같다. 두어차례 왕복하며 차에 실린 짐을 날라두자 마자 나는 곧장 장인어른께 인사 드리러 사과밭으로 가곤 한다. 




사과밭으로 가는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대추 나무가 하나 있다. 도랑 옆의 둑 위에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그 대추 나무는 제대로 관리된 조경수보다도 훨씬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데 계절과 시간대 마다 달라지는 빛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장면들이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논 너머 산자락에 곧게 뻗은 낙엽송들이 배경으로 멋드러지게 어우러져 꽤나 그럴싸한 풍경이 되어 준다. 







아마 처가에서 가장 많이 찍었던 풍경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대추나무를 두어컷 찍어주고 나면 장인어른의 사과밭에 도착한다. 이쑤시개 같던 묘목들을 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빽빽하게 우거진 사과밭 이 골 저 골을 오가며 장인어른이 어디 계신가 찾는다. 


'어, 왔나? 피곤한데 쉬지 뭐하러 왔노?' 


늘상 있는 장인어른의 첫 마디다. 올 해는 폭염 탓에 사과들도 버티지 못해 농약을 쳐두지 않으면 다 상할 판이라며 다시 바삐 움직이신다. 도와드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모양새가 좋겠는데 할 줄 아는 거 하나 없으니 '날씨가 이래서 어쩝니까.' 하며 괜시리 주변을 서성일 뿐이다. 그렇게 얼마간 옆에서 기웃 거리고 있다 보면 장인어른도 신경이 쓰이시는지 이만 물러가라 하신다. 


'날 뜨거운 데 집에 내려가 있재?' 


그제서야 나는 못이기는 척 사과밭에서 나온다. 







하늘에 달린 일 인지라 어찌 할 수 없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 장인 어른의 속도 타들어 간다.  






땅 한 줌 없이 이 마을로 들어 오셨던 장인, 장모님은 그야말로 두 분의 땀과 눈물로 한 평, 두 평 논밭을 늘려 가며 아내를 포함한 삼남매를 반듯하게 키워 내셨다. 이제 좀 쉬셔도 될 법한데 땅 노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게 농부의 천성인지라 농사 좀 줄이라는 자식들의 원성에도 '내년부터는...' 이라는 말씀만 몇년째다. 







산 중턱을 개간한 고추 밭은 그렇게 두 분 삶의 터전이 됐다.






능소화가 지고 구절초가 피기 시작하면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바로 고추와 사과 수확철이 다가오는 것. 이 시기가 되면 누구보다 착한 우리 처남은 회사 일이 바빠도 꼭 휴가를 내고 내려와 큰 힘이 되어 준다. 막내다 보니 아직도 어린 취급을 당하며 매번 장인 어른의 괜한 잔소리를 듣긴 하지만 그래도 보고 배운게 있어 나름 전문 기술(?)을 요하는 일을 맡아 묵묵히 큰 몫을 하는 반면, 아는 게 없는 나와 동서는 그저 몸으로 떼우는 단순노무직을 맡는다. 따놓은 고추 포대나 사과 상자를 나르는 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분야. 학교 다닐 때 야구를 해서 그래도 좀 건장한 동서와 달리 나는 허우대만 멀쩡한 약골이라 사실 이 마저도 시원찮다. 







그 해 마지막 고추를 따던 날, 허리를 숙인채 작업해야하는 고추 수확은 '놉'하는 할매들도 꺼릴 정도로 고되다.







장인어른 만큼이나 말수가 적은 처남이지만 부자지간의 호흡에는 말이 필요없어 보인다.






일하는 와중에도 주머니 속의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대는 철부지 같은 사위에게 어느덧 적응이 되신 탓에 장인장모님을 비롯한 처가 식구 그 누구도 이제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던 한번은 역시나 일 하다 말고 갑자기 카메라를 빼어든 나를 보고 장모님께서 물으셨다. '우서방, 사진은 그렇게 찍어서 어디다 쓰려고 그러나?' 딱히 그럴싸한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그저 '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겁니다.' 하고 대답했고 '이런 것도 찍어서 다 쓸 데가 있나?' 하고 장모님은 그저 웃으셨다. 그 순간, 장모님이 보여준 그 웃음이 나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10여년 전 나는 로버트 카파의 사진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어찌나 그의 사진을 들여다 봤는지 어느 날은 디데이에 독일군의 MG42 총탄이 쏟아지는 노르망디 해안에 서 있는 듯한 착각(환각?)마저 들면서 심한 두통이 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 때는 정말이지 카파처럼 세상을 돌아 다니며 원 없이 사진만 찍으며 살고 싶었다.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나이가 들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현실의 부대낌 속에서 '사진까지 꼭 그렇게 치열하게 해야 하느냐!' 는 자기 변명의 방어기제는 날로 두터워져 갔고 이런 저런 핑계가 많아질 수록 그에 비례해 나의 사진은 참을 수 없이 가여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럴싸한 흉내를 낸들 나를 속일 수는 없었고 다가가도 다가간 게 아니란 걸 알게 될 즈음 나는 비로소 욕심을 버렸다. 아니 그래야 했다.




구글 캘린더에 빼곡히 적힌 회의 일정과 당면 업무들을 체크해 나가며 한 주 그리고 또 한 주를 넘기는 삶이란 얼마나 건조한가. 갖고 싶던 렌즈를 구하느라 일전에 연락드렸던 L선생님은 한번 잘 찾아 보겠노라며 '매화꽃 필 때까지는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답장을 보내 오셨다. 2월말이나 3월초가 아니라 '매화꽃 필 때' 까지라니. 봄은 그렇게 오는게 아니던가.  







여전히 공기는 차갑지만 햇살은 따스해지고 있다. 봄이 머지 않았다.






시퍼런 사무실 조명 아래서 인생의 대부분을 팔아 먹어야 하는 서글픈 인생은 경북 산간의 작은 마을에서 위로를 받는다. 넓은 하늘 아래서 빛과 계절의 변화를 비로소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 그리고 그 곳에서 서로 익숙해져 가는 우리 가족들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 눈 감으면 아련히 다가올 빛나는 순간들. 기억이란 무언가에 의존하기 마련이라 필름에 담아두지 못하면 곧 잊혀질 것만 같은 강박을 어찌 하지 못하는 나는 짐 안챙기고 또 카메라만 챙기느냐는 잔소리를 들어도 꿋꿋이 카메라부터 가방에 쑤셔 넣는다. 




처가에서 찍어온 흑백 필름을 현상하고 스캔했다. 평소 '쓸데없는' 내 사진들을 볼 때와는 달리 제법 오랫동안 물끄러미 사진들을 바라보던 아내에게 '우서방, 그렇게 사진 찍어서 어디다 쓰려고 하나?' 하셨던 장모님의 질문에 해야했던 대답을 들려 주었다, 





'나중에 보면 눈물 날거야.'
































사실 창고가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은 '서재'라고 부르고 싶은 내 방 책꽂이 한 켠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수백롤의 필름이 차곡차곡 담겨져 있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필름들을 보다 못한 와이프가 넣어준 것들이다. 내 저것들을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텐데 하며 가끔 노려보기도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만다.


'에이, 나중에 하자.'


그러다 지난 금요일밤 괜히 한번 상자를 열어봤다. 마구잡이로 섞인 필름들을 천장의 형광등에 비추어보며 간만에 추억에 젖다가 송도 해수욕장을 촬영한 필름 하나를 발견했다. 36컷을 모두 살펴봐도 그 필름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는 단 한 컷도 없었다. 메모조차 해두지 않아 언제 찍은 건지도 알 수 없는 필름 속 이미지들은 전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빠듯한 용돈 사정으로 인해 인화지 한 장이 아쉬웠다. 그래서 굳이 '불필요한' 밀착 인화는 생략했고 확대 인화 역시 한 롤에서 고르고 고른 몇 컷 외에는 하지 않았다. 이 버릇은 나중에도 그대로 이어져 스캔할 때도 한 롤 전체를 긁지 않고 네가티브를 비추어 보다 괜찮다 싶은 몇 컷만 추려 스캔을 해왔기에 네가티브를 보다가 새롭게 눈에 띄는 컷이 있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롤에서 한 컷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아도 이 건 단 한 컷도 스캔하지 않은채 쳐박힌 필름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도대체 이 필름은 왜 버림받았을까? 일단 한롤을 채로 긁어보기로 했다. 







송도의 뒷골목 입구에서 부터 내 발걸음은 시작되고 있었다. 







모래사장의 유실로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송도 해변의 회생을 포기하고 해안 도로가 건설되던 때의 막바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산책로는 거의 다 되었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던 시점이다. 







지금 평화의 여신상이 있는 광장 해안 축대 옆의 테트라포드들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산책로에는 아직 모래가 많이 남아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아이들이 두꺼운 차림에 장갑까지 끼고 있는 걸 보니 제법 추운 날이었나보다. 







우리의 기억은 이미지와 글에 얼마나 의존적인가. 21미리로 강아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찍었을 정도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현상 후 스캔조차 하지 않았던 탓에 이날 촬영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송도 해변 일주도로 건설을 맡았던 청구 건설의 현장 사무소







송도 해변 방파제 위에는 허름하고 어설픈 포장마차촌이 있었다. 송도 해수욕장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이 곳도 사라졌다. 당연히 무허가 불법이었을테고 태풍이라도 오는 날엔 위험하기 그지 없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쉽기도 하다.







동남아의 수상가옥 마냥 방파제 한 귀퉁에 의지하여 바다 위에 자리 잡았던 포장마차들. 자리에 앉으면 판자로 만든 바닥과 천막 틈 사이로 파도가 출렁였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들으며 회 한 접시에 소주를 마시고 모래사장에 세워둔 차에서 눈을 붙히고 아침에 바로 출근했던 날도 있었다.







천막을 뒤집어 씌웠던 철골과 계단의 녹물이 방파제 바닥 곳곳을 붉게 물들였던 것이 기억난다.







배에서 내린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 손길들. 포장마차가 사라진 지금, 더이상 배들은 이 곳에 접안하지 않는다.







방파제 왼쪽의 풍경. 송도 해변과 포항 구항이 멀리 보인다. 늘상 보는 장면이라 새롭지 않지만 이곳이 동해안에 몇 없는 지형인 영일만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다소 과다현상이 되어 콘트라스트가 강한 네가티브가 되었다. 암부가 많이 죽었음이 느껴진다만 평소 사진의 톤에 비해 칼칼한 것이 또 나쁘지 않다. 







방파제에서 굿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인가, 요즘은 송도에서 굿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변해버린 방파제 위 풍경과 달리 송도의 퇴락한 뒷골목은 이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골목 사이를 누비면서 정적인 사진에 동감을 불어 넣고자 누군가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래본들 무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사진이 되겠나 싶다. 부질없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낡은 하얀 벽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흑백인데도 차갑고 투명한 겨울 공기가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려온다. 늙은 듯 ㄷㄷ







이 사진 덕분에 이 필름이 언제 찍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8년전의 블로그 포스팅에는 Nikon D700으로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이 날 찍은 파일은 모두 지워 버렸다는 내용이 있었다. 찍은 사진도 맘에 안들고 앞으로 어떤 사진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유와 함께. 아마 그래서 이 날 찍은 필름도 스캔조차 하지 않고 던져뒀던 듯 싶다. 





같은 위치에서 찍은던 사진. 이 컷을 제외하고 RAW파일은 모두 삭제됐다.






8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날 느꼈던 회의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뭘 찍어야 하고 뭘 표현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찍어야 하는가. 아니 그런 것에 답은 있는가. 답을 찾을 필요는 또 있는 것인가. 여전히 머리 속은 복잡하지만 이렇게 출토된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사진들이라도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니 기록으로라도 가치가 있겠다 싶으니 그건 또 다행이라 해야하나. 아직도 모르겠다. 





2009.12.26. 포항 송도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Kodak 400TX / IVED

"거 뭐 찍는데요?"


날선 목소리가 들렸다. 자주 겪는 일이다. 


"아, 이 집이 특이해서 좀 찍고 있습니다."


"이 집이 뭐가 특이한데요?"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라서요. 좀 찍어두려구요."


"이건 뭐하려구요?"


"원래 일제 시대 흔적이나 이런 것에 관심이 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좀 찍어두고 있습니다."


"뭐하는 사람인데요?"


이럴 때 아마추어 사진가는 참 궁색해진다. 차라리 대학교 때 사진찍을 땐 편했다. 사진찍는 학생이라고 얘기하면 충분했지만 사진찍는 회사원이라고 할 수도 없고.


".... 그냥 취미로 사진 찍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보통의 경우와 달랐다. 


"그럼 찍지 마세요."


응?


"이런 곳에 왔으면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공부를 하고 그래야지 그렇게 재미로 찍고 그럴거면 찍지 마세요."


취미로 찍는 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셨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취미'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유희와 오락의 이미지 때문인가 잠시 황당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생각하시는 것처럼 재미로 놀러 다니는게 아니라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 이런 곳에 혼자 올 정도면 저도 나름대로 관심이 있어서 온 것 아니겠습니까. 군산이나 포항에 남아있는 일제 시대 흔적도 몇차례 찾아다녀봐서 진해에도 많은 곳이 남아있다고 해서 이번에 처음 들러본 길입니다."


"여기에 이런 건물들이 왜 많이 남아있는 줄 알아요?"


"일본이 진해에 군항을 만들면서 계획 도시로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그게 일본 군항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대로 공부하고 알아야한다는거야. 그런것도 모르면서 뭘 사진을 찍겠다고.."


진해의 군항이 일본의 것이 아니면 어느 나라 것이란 말인가. 


건물 안에 앉아 창문 너머로 빤히 나를 쏘아보는 노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니 뭐 군사기밀 시설도 아니고 여긴 엄연히 진해에서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해 이곳저곳에 안내 간판도 붙은 일제시대 장옥거리가 아닌가. 사진 한장 찍는데 왠지 억울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 따져보고 싶다가 포기했다. 


"네 그럼 안찍겠습니다."


그러고도 발걸음이 바로 돌아서지지가 않아 잠시 서있으니 노인이 나를 부른다.


"이리 들어와봐요."




방금전까지 무척이나 공격적으로 쏘아붙이던 노인에게 은근이 짜증이 났었지만 들어오라는 소리에 이게 웬일인가 싶어 얼른 들어갔다. 노인의 집은 '황해당 인판사'라는 간판이 붙은 오래된 일본 가옥이었다. 사무실인지 창고인지 구분이 안되는 그의 방에는 오래된 낡은 서적들과 각종 서류, 인쇄물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고 바로 옆에는 인쇄기, 복사기 등이 있었다. 쏘아붙이실 때는 언제고 그래도 들어오라고 해주시니 급 황송해져서 이곳저곳 눈을 굴리고 있으니 앉으라고 하신다.








"진해가 일본 군항으로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죠? 사실은 그게 아니야.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그는 너저분한 책상을 잠시 뒤지더니 한문으로 쓰여진 낡은 문서를 하나 꺼냈다.



"무슨 내용인지 읽어봐요."



아놔.. 초서체로 흘려쓴 한자를 내가 읽어낼리가. 조사 따위만 한글로 적혀있었고 마지막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쨌든 보통 문서는 아니다 싶었다. 



"못읽겠는데요."


"전혀 못읽겠어요?"


"네."


"초서로 흘려써서 읽기가 어렵긴 하지. 근데 이것도 문제야. 이런 문서를 젊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정리를 해줘야하는데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점점 없으니. 자, 이게 무슨 내용이냐.."



그는 띄엄띄엄 한자를 읽어가며 한장짜리 계약서의 내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 문서는 대한제국 말기 일본이 진해에 대한제국 해군 기지를 건설해준다는 약정을 체결한 서류로서 대한제국의 해군이 체계가 갖추어지면 일본이 시설 및 이용권을 다시 돌려준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애초에 일본 군항을 만든다는 얘기가 없었어요. 한국 군항을 만들어준다고 했다니까. 근데 그 때 우리나라에 해군이 있었어요? 해군도 없는 나라에 군항을 왜 만들어줬겠어요? 결국은 자기들이 쓸거였다고. 그런데 명목상은 대한제국 해군 군항을 만들어준다고 눈속임을 한거에요. 물론 우리도 알았겠죠. 힘이 없는데 어차피 막을 수도 없었을거고. 이런걸 아무도 몰라. 이런걸 알아야한다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합니다. 그죠? 그 때 일본이 어떻게 이기는줄 알아요?"


시종일관 그의 질문하는 투는 '너 이거 알아? 알면 한번 얘기해봐.'라는 식이었다. 아는 건 아는대로 모르는 건 모른다고 대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뭐라고 대답해도 노인이 만족할만한 대답이 나오기 어렵겠다는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뤼순항을 공격해 러시아 해군을 격파하고 대한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일본 해군 함대가 러시아 본국으로 부터 급파된 발틱함대를 전멸시키게 된 것이 결정타가 아니었습니까?"


"그건 어떻게 알아요?"


"짜르의 마지막 함대라는 책을 예전에 봤습니다."


"그 발틱함대가 어디로 왔는지 알아요?"


"희망봉을 돌아서 왔습니다."


"왜 희망봉을 돌아서 왔죠? 더 가까운 길이 있는데. 그게 어디였겠어요?"


"수에즈 운하요?"


"그렇죠. 그런데 왜 수에즈 운하로 못왔죠?"


파상공세가 끝이 없었다.


"영국이 방해해서요?"


"그렇죠. 영국이 통과를 불허했어요. 그러니 긴 항해 기간동안 지친 발틱 함대가 매복하고 기다리던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걸려서 작살이 났던거죠. 그 때 일본 해군의 전함들이 어디서 만든지 알아요?"


"그것도 영국이죠."


"영국이 만들어 줬어요. 물론 그냥 준건 아니고 판거지만. 당시 최신예 전함이에요. 함부로 팔지는 않는다고. 당시 일본의 기함의 이름이 뭔지 알아요? 전투에서 포탄을 몇발이나 맞았어요?"


와 더이상은 못버티겠다. 


"아뇨 그런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도 잘 알아야한다니까.."








기다려보라며 노인은 일어나 옆 방으로 넘어갔다가 종이 두장을 복사해 들고 왔다. 거기에는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가 탑승했던 기함 미카사호에 대한 글이 있었다. 무려 33발의 명중탄을 얻어 맞고도 승리를 거두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일본놈들을 조심하고 경계해야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렇게 영국이 일본을 도와줬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했어요? 2차대전에 일본이 영국을 공격하죠? 아주 배은망덕한 놈들이에요. 우리는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일본놈들한테 당했단 말이에요. 임진왜란 때 일본이 왜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걔들이 내세운 명분은 정명가도였지요."


"그게 뭐예요?"


"명을 정발하려고 하니 길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진짜 그거였을까요?"


"음.. 뭐 전국시대 무장들의 논공행상 문제도 해결하고 영주 세력들의 강성한 군사력도 소모시키려고 했고.. 뭐 그런 이유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교과서에서 배우는거죠? 사실은 다른 이유가 또 있어요."


"소서행장이 조선에 침공하면서 포루투갈 신부가 하나 따라왔어요. 왜 왔겠어요?"


질문 공세는 어느새 다시 시작되었다. 


"고니시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뭐냐면 유럽 제국들이 일본에게 전쟁을 부추겼어요. 왜? 일본이 조선에서 노예를 잡아오면 노예 무역을 해보려고 했던 것도 있고 일본은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해와서 고급 도자기를 생산해서 유럽에 팔아먹으려고 했어요. 아주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들이 깔려 있다고.."


이 노인은 보통 분이 아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이 묻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더라도 꾸역꾸역 대답을 하는 젊은이와 얘기를 하면서 신이 나시는지 노인은 계속해서 뭔가 자료를 가져와 펼쳐놓고 설명을 이어가시다 집을 보여주시겠다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신문이나 책을 찍어내던데 쓰이던 활자. 노인께서 직접 손수 깎은 것이라 하셨다. "요즘은 이런거 쓰지를 않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이쪽으로 와바. 여기는 원래 예전에 뭐로 쓰인 방이냐면..." 구경하려 따라가랴 셔터 누르랴 바빴다.







"내가 육이오 때 월남해서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는데 학교를 제대로 못나왔다 뿐이지 공부는 나름대로 엄청 많이 했어." 그의 식견으로 보아 절대 틀리거나 과장된 말이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90년대 내무부에서 출간한 '대한민국 도장 대전(?)' 팜플렛을 하나 꺼내어보여줬다. 그 중 그가 만든 도장이 수상작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왜 하필 자칫 '유치'하거나 허황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세계평화'라고 새기셨냐고 여쭈었다. 




"내가 육이오 때 월남해서 해병대에 입대해서 해군으로 옮겨가며 전쟁을 치루고 제대를 했어요. 그 난리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세계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건지 알수가 없어요. 내 가장 큰 소망은 우리 모두, 세계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거 그게 가장 큰 소망이야."







그가 만든 도장을 들고 있는 정노인







창밖에선 정노인의 친구분께서 '저 놈들의 얘기는 언제 끝나나.' 하고 기다리고 계셨다. 진해에서 교장 선생으로 퇴임하셨다는 친구분은 정노인에게 점심으로 국수나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채근했지만 정노인은 집사람이 냉면을 삶아 뒀다면서 냉면을 먹어야 한다고 사양했다.





이른 새벽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옆에서 자고 있는 와이프와 딸냄이 깰라 얼른 알람을 끄고 이불 밖으로 기어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동생도 부시시한 얼굴로 거실로 나와있다. 얼굴에 물만 바르고 카메라를 챙겨 차에 올랐다. 여름이라 벌써 밖이 환하다. 지금 가도 드라마틱한 장면을 만나기엔 늦었겠다 싶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강바람 맞으며 잠시 유유자적하면 될것인데. 상관없다.







30여분을 달려 두물머리에 도착했다. 역시나 새벽부터 부지런함을 떤 수많은 사진가들이 진을 치고 있다. 팔당호를 지나며 보니 물안개가 제법 피었던 것 같은데 저들은 늦잠을 포기한 보람이 어느정도 있었을 것 같다. 다 늦은 시간 도착해 삼각대도 없이 허접해보이는 낡은 카메라를 들고 기웃거리는 나를 보고 혀를 찼을 이도 있었으리라. '난 꼭 사진찍으러 온게 아니라니깐.' 괜히 속으로 변명해본다.







사실 저들처럼 나도 두물머리를 자주 찾은 적이 있었다. 회기역 뒷편에서 버스를 타고 '오늘은 물안개가 피어올라줄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사실 잘 찍어봐야 달력 사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겠지만 그 땐 그래도 그 한 컷을 건지고 싶었다. 일교차가 큰 늦가을, 초겨울에 주로 찾아야 했던 탓에 강가의 새벽 한기에 오들오들 떨어야 했고, 심지어 두물머리에 가면 서 있는 커다른 나무 아래 벤치에 누워 쪽잠을 자며 밤을 샌 적도 있었지만 한번도 마음에 쏙 드는 장면을 만나지 못했다.  두물머리 출사는 고생에 비해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았다. 








해가 이미 높다. 작정하고 사진을 찍으러 왔으면 역시 더 일찍 왔어야겠다. 예쁜 풍경 사진, 이른바 달력 사진은 전형적인 아마추어들의 몫이지만 어쨌든 부지런하지 않으면 그 또한 쉽지 않다. 







동호인들의 카메라 화망 앞으로 배 한척이 지나간다. 요새 하도 만들어내는 사진들이 많다보니 저 배도 동호회에서 돈을 지불하고 연출하려고 움직이는 배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의구심이 들었다.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구성된 동호회 회원들은 이제 철수를 시작했다. 저마다 최신의 DSLR에 짓조 삼각대 따위를 갖추고 있었다. 같은 위치에서 우루루 모여서 셔터를 눌러댔으니 얼마나 다른 컷들이 담겨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기대를 안고 메모리 카드를 PC에 꽂아 오늘의 수확물을 확인하며 즐거워 하리라. 저 모임 안에서도 이른바 사진을 제일 잘 찍는다는 에이스가 있을거고 좋은 장비를 많이 가져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이들도 있겠지. 고만고만한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누가 더 잘 찍고 못 찍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역시 '이놈의 사진 찍어봤자 뭐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연배가 지긋해보이는 분에게 셔터를 좀 눌러달라고 부탁드렸다. '하나~두울~ 셋!' 셔터를 누르시고 나더니 버릇처럼 카메라 뒷면을 보신다. '아 이거 필름 카메라네요? 라이카네.' 내 니콘 D700은 제습함에 들어가 나오지 못한지가 1년도 넘은 것 같은데 세상의 주류는 역시 디지털인갑다.







여전히 나 하고 싶은건 하겠다며 돈지랄인 필름 사진질을 놓지 않고 있는 나와 달리 직장 생활과 육아에 지친 동생은 이제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다. 대학교 다닐 땐 이 곳에서 찍은 슬라이드 컷으로 학교 동아리 전시회에 걸기도 했던 동생이지만 이제는 핸드폰으로나 두물머리의 풍경을 찍고 있다.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면 그렇게 어른이, 가장이 되어가는건가 싶기도 하고 피곤에 찌든 그의 모습을 볼 때면 늘 안쓰럽다. 







동생은 3군 사령부 직할 통신대에서 운전병으로 군생활을 했다. 선임들이 칼 같이 다려준 전투복을 입고 100일 휴가를 나와 할머니께 '선봉!'하고 경례를 붙이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휴가 나올 때와 달리 복귀 때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않을 정도로 의기소침했던 동생은 부대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도 아직 복귀 시간이 남았다며 들어가기 싫어했다. 돌아갈 길이 먼 부모님과 나는 그냥 일찍 들어 가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복귀 시간까지 더 있어줬고 그래서 시간을 떼우러 들른 곳이 이 곳 두물머리였다. 동생의 중대는 이 근방이었다.







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주차장도 넓게 만들어져 있고 주변엔 까페도 많이 생겼다. 땅값도 제법 올랐을텐데 상수원 보호지역이라 개발이 호락호락하지 않은지 낡은 빈집은 그대로 남아있다. 변하지 않은 건 한강 뿐인가.






두물머리는 그동안 찾은 횟수에 비해 건진 사진이 그리 없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곳이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제법 많은 추억이 쌓여진 곳이었다. 이제 예전처럼 여기에 오면서 뭔가 '작품'을 건져야겠다는 욕심은 들지 않지만 서울에 오게되면 동생과 드라이브 삼아 찾고 싶은 곳은 여전히 두물머리긴 하다. 벌써 10년이 다되어 간다는 사실이 소스라치게 놀랍지만, 동생이 막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출장 길에 서울에 들른 나는 늦은 밤에 문득 두물머리에 가보고 싶다고 했고 '지금 가보지 뭐.' 라며 동생은 차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물려준 구형 SM520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중형차라 하기에 실내 공간도 좁고 인테리어도 올드했지만 전형적인 세단처럼 생긴 디자인이 멋졌고 탄탄한 서스펜션의 주행감각도 나름 좋았다. (게다가 수동 미션이었다) 동생이 운전하는 그 SM520을 타고 음악을 크게 틀고 하늘만큼 캄캄한 한강을 거슬러 두물머리로 향하던 그 날 밤이 문득 그립다.





2017.06.04. 양평


Leica IIIa / Elmar 5cm f3.5 / Kodak 400TX / IVED


 





케케묵은 고물 카메라와 렌즈를 사용하는 일은 생각보다 꽤 성가신 일이다.




다분할 멀티측광에 초당 수컷이 촤르르 찍히는 모터드라이브, 순식간에 초점을 맞춰주는 AF기능이 기본이 된 오늘날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칠순이 훌쩍지나 팔순을 바라보는 바르낙옹을 손에 쥐고 다니는지 스스로도 가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노출계는 당연히 없고 셔터스피드도 유럽식이라 1/40, 1/100, 1/200 같이 애매하게 되어있다. 여기에다 오늘 붙혀둔 Elmar 3.5cm는 또 어떠한가. 코팅도 적용되어 있지 않은 맨유리알인데다 조리개 수치도 4.5, 6.3, 9, 12 등으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노출계야 외장으로 쓴다 쳐도 측광값을 카메라와 렌즈에 적용하기 참 난감하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녀석을 데리고 다니자면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한다. 1/3스탑 단위로 브라캐팅을 하던 결벽증 따위는 저 멀리로 던져 버리고 부처님같은 관용도의 400TX를 믿고 '대충' 맞춰서 셔터를 눌러야 한다. 무코팅이라 역광에 맞서는 무모한 짓도 최소화한다. 파인더를 들여보다 영 자신이 없다 싶으면 포기하면 된다. 태양에 맞서봤자 Summicron 35mm ASPH같은 사진을 만들어줄리는 만무하다. 이 녀석으로 잘할 수 있는 장면에 그저 충실하기로. 그것이 이 오래된 카메라와 렌즈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진질이다.




이 불편함과 명확한 성능상의 한계는 이미지 퀄리티라는 측면에서는 어쨌거나 모든 면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취미 사진가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무조건 단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보다 유리한 빛의 상황을 파악하고 단점은 커버하고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면과 피사체를 찾아나서게 한다. 그야말로 쇠붙이와 유리로만 만들어진 정직하고 단순한 기계로 세상과 1:1로 마주한다는 느낌. 여기서 오는 소탈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기름지게 번들거리는 현행 렌즈의 화려한 코팅색도 부럽지 않고 최첨단 기능이 녹아있는 멋드러진 DSLR도 부럽지 않다. 밧데리 없으면 찍지도 못하는 거. 




내 처가는 경북 청송이다. 경북에서도 산간 내륙인 이 곳은 전국적으로 봐도 가장 발전이 더딘 곳 중 하나다. 처가가 있는 마을은 청송군에서는 비교적 큰 곳인 청송읍과 진보면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제법 잘 가꾸어진 너른 솔밭이 푸르고 시원한 그늘을 선물해주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산 사이로 흐르는 작은 개천과 그 개천을 따라 이어진 논밭이 제법 너르게 자리한, 작지만 아담한 동네다. 이 곳에서 자란 나의 아내는 어릴 적 동네 오빠야들을 따라 산을 뛰어다니고 논두렁에서 뛰어내리며 슈퍼맨 놀이를 하고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하교길에 장인어른의 경운기라도 만나면 '아빠!'하고 달려가 점방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오던게 그렇게 좋았다고 하는 나의 아내. 나는 나의 아내가 그런 소박하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겪었음이 감사했고 나의 처가가 이런 곳이라 퍽 마음에 들었었다. 




처가를 갈 때면 언제나 카메라를 챙겨간다. 넓지 않은 동네라 돌아다녀봐야 찍을 것이 많지 않지만 계절과 빛의 변화가 보다 솔직하게 드러나는 이 곳에 가면서 카메라를 챙겨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 주말 찾았던 처가에서 속닥한 카메라 하나를 손에 쥐고 논길과 농로를 따라 걷고 두리번거리며 2롤의 필름을 찍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 곳에서 빠르고 편리한 카메라가 장점을 발휘할 일은 없다. 정직하게 제 속도에 셔터가 끊기고 빛이 들어오는 구멍만 제대로 조절되면 그걸로 족하다.




그 다음은 나의 몫이다. 






















































2017.05.06~07 청송








Leica IIIa / Elmar 3.5cm f3.5 (uncoated) / Kodak 400TX / IVED



'다라이'에 담겨 있던 커다란 방어들 중 한 마리가 팔렸다. 아직 살아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방어를 회로 먹을 수 있는 철은 지났기에 누가 어떤 용도로 사가는지 궁금해진다.







방어가 움직이지 못하게 무릎으로 누르고 아가미 안 쪽에 칼을 집어넣는다. 살고자 몸부림치는 방어의 힘은 대단해서 미끄러운 바닥에서 방어가 튀어나가지 않게 하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넓은 바다를 누비다 좁은 다라이 안에 담겨진 방어들은 견디지 못하고 파닥거려 보지만 벗어날 수 없다. 이들도 곧 앞선 동료와 같은 운명에 맞이할 것이다. 지능이 낮은 어류라고는 하지만 겪어본 적 없는 낯선 환경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리가 있을까.







아주머니께서 잡으신 방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다. 방어는 크기가 제법 큰 어류다 보니 몸에서 나오는 피의 양도 적지 않다. 칼라였다면 더 날스러운 사진이 되었으리라.






아가미에 칼이 들어갔는데도 방어는 죽지 않고 이따금씩 발작하듯 파닥거린다. 몇차례 다시 찌르는 걸 보고 있노라니 한번에 숨통을 끊으려고 칼을 찌르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로 유지시켜 피를 빼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움직임이 점차 뜸해지는 방어의 머리를 아주머니께서 토닥이며 뭐라고 얘기를 하시는게 아닌가. 뭐라고 하시는 건가 궁금해지던 차에 아주머니 쪽에 더 가까이 있던 일행이 내게 돌아와 얘기를 해준다. 




"아주머니께서 방어한테 '미안하다~ 미안하다~ 좋은데 가거라.' 하고 계세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더이상 카메라를 겨누지 못했다. 그저 그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그런 마음으로 생명을 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속으로 되뇌일 뿐. 


팔닥거리는 싱싱한 물고기들이 넘쳐나는 어시장은 그래서 활기차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지만 그 싱싱한 물고기들은 결국 '아직 죽지 않은, 곧 죽을' 물고기들이다. 주인이 나타나면 곧바로 도마 위에 올려져 목이 달아나고 몸통이 갈라져 살점이 발라진다. 태어나 죽기를 바라는 생명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살고자 하고 죽지 않고자 함은 본능이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며 모든 생명체는 저항하지만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물고기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처절하게 보여서인지 대부분 잔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6년전에 제주 모슬포항에 방어회를 먹어보러 들렀었다. 여느 횟집들이 그러하듯 손님들이 주문을 하면 뜰채를 들고가 수족관에서 물고기를 잡아 건져 올린다. 그런데 그렇게 수족관에서 꺼낸 커다란 방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횟집 아주머니께서 방망이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미끈거리는 물고기이니 빗맞기도 하고 제대로 맞지 않으면 한번에 기절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러차례 방망이를 내려치는데 이 모습은 적잖이 충격으로 남고 말았다. 먹어야 하는 것이니 죽여야 하겠지만 저런 방법 밖에 없나 싶었지만, 또 생각해보니 가만히 잡고 있을 수도 없으니 때려서 기절이라도 시켜야 칼을 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회를 먹으려던 마음이 많이 불편해지는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래도 잘 먹긴 먹었다는 ㄷ)




어업이 생업인 분들께는 사실 물고기를 죽이는 일에 복잡한 생각을 가지실 이유도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 분들에겐 반복되는 일상이자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찌른 칼에 피를 쏟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방어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미안하다'고 속삭여주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은 정말이지 놀랍고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록 생계를 위해 방어의 목숨을 앗아야 하지만 생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저런 분이라면 평소 생활에도 얼마나 따스함이 가득할까 생각해 본다. 





2017.04.02. 포항 죽도시장


Leica IIIa / Elmar 5cm f3.5 / Ilford HP5+ 400 / IVED







2003년 가을의 어느 날. 


후배 몇몇과 함께 청량리 경동시장을 찾아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어느 골목길을 지나다 길바닥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계신 노숙자 분들을 마주쳤다. 허락을 득하고 사진을 찍어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함께 갔던 여자 후배 한 명이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아저씨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라고 여쭙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느닷없는 제안이 통했던 것인가 '아 그래 찍어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겁 없는' 후배의 용기도 놀라웠지만 사진을 찍으라는 그 분의 말씀에 귀를 의심했다.



'아니 뭘 이런걸 찍어. 아 찍지 말고 그냥 가요!'

'아냐아냐! 우리나라엔 아직도 우리같이 힘든 사람들이 많아. 이런 모습도 찍어서 세상에 알려야지. 찍어. 괜찮아.'



일행들 몇분이 반대했지만 괜찮다고 찍으라고 하시는 아저씨 덕분에 쭈뼛쭈뼛 카메라를 들고 몇 컷을 누르기 시작했다. 동전 가득 푼 돈이 모여 이렇게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중이라 하시던 노숙자 아저씨들은 우리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도 해주시고 우리의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고향과 과거에 '잘나갔던 시절' 얘기를 하며 잠시나마 즐거워하셨지만 가족들의 얘기를 할 때면 고개를 숙이고 어깨가 쳐지곤 했다. 우리도 아예 바닥에 앉아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씩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쉽지 않은 경험이라 제법 가슴이 콩닥이는 순간이었다. 보통의 경우 이런 촬영은 상호간의 축적된 오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길 가다 불쑥 드린 당황스런 부탁인데도 학생들이니 찍어도 좋다며 허락해주신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이 XX들 여기서 뭣하는거야!'



갑자기 등 뒤에서 험한 말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나타난 다른 노숙자분이 우리에게 욕을 하며 다가오고 계셨다. 후배들이 놀라며 카메라를 빼고 물러났다. 



'니들은 뭔데 여기서 사진을 함부로 찍고 그래! 뭐하는 놈들이야!'

'아 내가 찍으라고 했어. 냅둬.'

'냅두긴 뭘 냅둬. 야 너네들 어디서 나왔어. 허락없이 사진을 막 찍어도 돼?'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던져버릴 듯한 기세로 아저씨가 달려들자 사진을 찍으라고 허락하셨던 아저씨께서 일어나 말려 주셨지만 겁에 질린 후배들은 연신 죄송하다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손을 저으며 얼른 가라고 하셨지만 무작정 자리를 피해 이 상황을 모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해서는 안될 짓을 하다 쫓겨나는 모양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얼어붙은 후배들을 보내고 혼자 남았다.



여전히 화가 나 계신 그 분께 오해를 풀 수 있게 얘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나의 이런 태도가 다소 황당하셨는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고 하셨다. 담배가 필요할 것 같아 주머니를 뒤져보니 갖고 있는 현금이 정말로 2천원 뿐이었다. 바로 옆 슈퍼에서 디스 한 갑을 겨우 사서 나와 아저씨께 한 개비를 권해드리고 나도 고개를 돌려 불을 붙였다. 얘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을 찍으려면 좋은 곳도 많은데 그런데 가서 찍을 일이지 왜 굳이 이런 곳에서 노숙자들을 찍어? 여기 사람들 십원 짜리, 백원 짜리 모아다가 몇천원 되면 겨우 이렇게 막걸리나 몇 병 사서 나눠 마셔. 그러다가 취하면 아무데나 누워서 잠들고. 그렇게 살아. 하루하루. 이런 거 찍어다 어디다 쓸거요?' 

'아름다운 장면을 아름답게만 찍는 것은 제겐 별로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세상엔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몰라주는 부분, 어두운 부분. 이런 곳에도 관심이 필요하구요 그 관심을 일으키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사진 찍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게 하루 이틀일인가. '

'네.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더 심각한 것 아닐까요. 저는 세상이 달라지는데 사진으로라도 뭔가 기여를 하고 싶어요. 언젠가 저도 나이들고 용기가 없어지면 이런 사진은 못찍고 예쁜 꽃이나 멋진 풍경 사진을 찍고 다닐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직 젊은데 벌써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조금은 더 의미있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저씨들 사진을 찍었습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접근한 것이거나 몰래 찍으려 한 건 아닙니다.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한 오해는 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나를 나무라시던 아저씨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셨다. 그렇게 길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눈 후에 우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연락처가 궁금하시다는 아저씨께 핸드폰 번호를 적어드리며 다음엔 여기서 막걸리라도 같이 한잔 하시자고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그렇지만 사실 사진 한 장으로 무었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회의 현실을 사진으로 알리고 싶다고 그 분께 얘기하며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순전히 나의 가식적인 말발 덕뿐이었다. 피사체로서의 호기심에 이끌려 셔터를 누른 후 그럴싸한 언변으로 포장한 것일 뿐 내가 이 사진으로 뭔가를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 22세에 불과했던 철없던 나의 오만함으로 가득찬 '설교'가 통했음에 으쓱하며 '나 이렇게 진지하게 사진을 합니다. 예쁜 감성 사진이나 찍는 사람들과는 달라요~' 라며 자부했던 허영심과 과시욕이 전부였다.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14년전 그 때와 달리 지금은 이 사진들을 마주 보기가 어렵다.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많은 감정들이 날카롭게 내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진 삶을 누리고 있다지만 마음 씀씀이는 더욱 각박해졌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취약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자칫 발을 헛딛으면 다시 올라올 수 없을 골짜기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아 두렵다. '불쌍한 남의 일'이라기 여겼던 저 분들의 모습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 요즘이다. 






사진 속 오른쪽 앞에 앉아 계신 아저씨가 일행 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진을 찍으라며 허락해주신 분이다. 당신인들 당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찍히고 싶으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니 내 기꺼이 찍혀 주겠다시던 그 말씀이 너무나 감사하다.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신지도 알 수 없지만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 분의 눈빛에서 세상을 향한 오기가 보여 다행이다. 보다 좋은 환경에서 잘 지내고 계시길 바래본다.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아저씨께서 내게 이렇게 물어봤을 때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래, 자네 잘 살고 있는가. 자네가 하고 싶다던 그런 사진도 잘 찍고 있나?'




2003.09.24 서울

Nikon F90X / ai-s 28mm f2.8 / Kodak TMY / IVED




     

자신과 가까운 주변의 모습은 원래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까? 

포항에 살면서도 포항에는 참 사진 찍을 곳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유명한 명승고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서깊은 오랜 동네도 없으며 시가지의 모습도 그리 포토제닉하지 않다. 게다가 대중교통이 그리 편리하지 않은 지방 도시라 어딘가로 갈 때도 걷기 보단 자가운전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우연에 기댄 필연의 순간을 포착할 기회마저 우리에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뉴욕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서울 정도만 되었어도 걸어다니다 셔터를 누를만한 다양한 순간을 매일 같이 거리에서 마주했을텐데 말이다.




사진을 오래 찍어왔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마찬가지겠지만 우루루 몰려다니는 출사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유희로서의 즐거움은 분명하나 사진 자체를 위해서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의 위치와 간격을 수시로 파악하고 의식해야 하다보니 촬영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 어쩌다 동시에 꽂히는 장면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모두가 달려들어 셔터를 눌러대기 십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너무나 쉽게 눈에 띈다는 점이다. 여럿이 몰려다니며 사진을 찍는다는 건 스냅 작가로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스스로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럿이 출사를 나가게 됐을 때 분명 부인하기 어려운 장점 하나가 있다. 바로 든든하다는 것! 군대도 다녀오고 마흔이 다되어가는 사내들이라 하더라도 혼자 사진을 찍으러 다닐 때는 사실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도 시비걸지 않는 풍경 사진을 찍는다면 차라리 속 편하겠지만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촬영 스타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험한 꼴을 당할 각오를 해야한다. 하지만 여럿이 되면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안심이 되는 것이다. 설사 내가 생선 파는 아줌마로부터 소금물 한 바가지를 얻어 맞거나 왜 내 사진을 찍었느냐며 달려드는 거친 바다 사내에게 맞서야할 상황이 벌어질 때, 적어도 말려줄 사람은 있지 않은가. 




정식 모임 이름도 없고 정기적으로 만나지도 않지만 어느새 고유 명사가 되어버린 '포항지부'의 존재는 그런 측면에서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이도 직업도 고향도 모두 달랐지만, 스냅 사진을 절대적으로 선호하고 작고 단정한 카메라를 즐긴다는 취향이 서로 맞았다. 억지스럽게 서로를 배려하지 않아도 각자가 알아서 편안하게 사진을 찍기에 부담이 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한 교집합들로 인해 느슨하면서도 은근히 야무진 결속력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고 이러한 든든함을 바탕으로 비로소 죽도시장을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서로가 없었다면 사실 쉽지 않았을 작업들. 어느새 1년이 넘도록 죽도시장을 꾸준히 다니고 있다. 포항에 사진 찍을 곳이 없던게 아니었다. 




그러던 중 중간 정산의 의미로 지난 1년간의 작업을 정리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포항에 사는 이상 계속해서 이어나갈 작업이긴 하지만 지난 사진들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방향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통합된 주제전의 형식보단 멤버들 각각의 사진을 병렬식으로 나열하여 그들의 다양한 시선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형태로 진행해 보기로 정했다. 다같이 모여 포트폴리오를 보며 일관되고 흐름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선별하여 구성해보고 싶었지만 직장인이자 가장인 우리가 그런 시간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10컷의 선택은 전적으로 각자의 판단에 맞길 수 밖에 없었다. 사전 조율없이 제출된 40장의 사진이라는 구슬을 꿰어야 하는 나로서는 적잖이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비슷한 이미지들이 중복되거나 구성의 흐름을 해치는 컷들이 많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얘기가 나오고 불과 이틀 만에 40장의 사진이 정해졌다. 그렇게 각자가 고른 40컷을 보고 있노라니 일부러 모여서 셀렉팅을 한 것 이상으로 조화로운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동안 서로가 찍어온 컷들을 봐왔기에 죽도시장 사진을 내라면 누가 무엇을 낼 것인지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됐다. 그런데 이번에 모인 사진들을 보니 그 예상과는 많이 다르다. 이른바 '대박 컷'을 양보한 흔적이 역력하다. 단일 컷으로는 끝내주던 작품도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해 일관성이 다소 떨어질 수 있는 이미지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다른 멤버의 대박 컷과 중복될 만한 컷들은 아쉬워도 과감히 빼낸 듯 하다. 




내가 했던 걱정은 기우였음에 분명하다. 






▶ 민뿡


"죽도시장에 온전히 속해있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잠시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 어느 곳에도 편하게 속할 수 없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취미'라는 이름으로 셔터를 누르는 내가 설 자리는 마땅치 않았다. 그들과 같은 시선과 감정을 가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로 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카메라를 꺼내들 수 있었다. 어중간한 거리에서 어중간한 화각으로 담아낸 사진들을 보여준다는 것. 더군다나 다른 멤버들의 사진들과 함께라니 무척이나 부끄러워진다. 조심스레 골라본 나의 사진들을 사진 본연의 가치인 '기록'으로서 보아 주기를 바래본다."













































▶ 주아비


"한 주의 모자란 잠을 보충해야 할 주말 아침, 나는 죽도시장으로 향한다. 어판장의 아침은 싱싱한 생선과 활기로 충만하다. 이 곳에는 물 좋은 생선을 좋은 가격에 입찰하려는 어깨 넓은 중도매인들과 엄중한 카리스마로 이들을 리드하는 경매사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각본 없는 드라마는 때론 긴박하게 때론 느긋하게 스스로 완급을 조절하며 흐르고, 나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 든다. 주어진 셔터스피드는 1/60초. 어판장과 호흡을 맞추려 애쓰다보면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셔터를 릴리즈 할 때이다. 여기 2016년 한 해 죽도시장에서의 공명의 시간을 모아보았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1/6초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잠시나마 나의 주파수에 동조해주길 희망한다. STAY TUNED!"













































▶ 은빛연어


"어시장은 바다를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겉에서 바닷가 주변만 서성거리는 것에 비해 바다 속에서 건져올린 주인공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그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어시장이다. 이런 어시장이 평범한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활기는 바로 긴장과 속도에서 비롯된다. 아침 어시장은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분주하다. 그렇게 사람도, 사람의 말도, 눈앞의 생선도 급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유는 바로 생선의 신선도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갓 잡아올린 생명력을 최대한 보존해서 육지의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급하고 분주하고 긴장된 공간에서 사진 촬영은 무척이나 생경한 일이다. 촬영은 흐르는 시간을 정지시킨다. 찰나를 포착한다. 셔터를 누름과 동시에 뷰파인더 속에서 그 긴장감은 정지된다. 상인들의 생계, 생업의 순간을 정지시켜 아름다움과 예술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바다와 육지의 차이만큼 어시장 상인들의 활동과 촬영 활동은 서로 대칭에 있다. 이렇게 어시장에서 건져올린 사진 속에는 갓 건져올린 활기와 죽음, 속도와 정지, 생업과 예술 이란 여러가지 퍼즐들이 서로 대칭되어 담겨있다. 이런 여러가지 극단의 대비들을 사진 속에 건져올리는 것이 어시장 촬영의 매력이다."













































▶ PIYOPIYO


"비상식과 비효율로 가득찬 회사에서의 일주일을 겪고나면 내 몸과 마음은 지치고 피폐해진다. 힘겨운 일주일을 보내고 얻어낸 주말 아침, 늦잠을 자봐야 더 피곤하더라는 것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흑백 필름을 넣은 단촐한 카메라를 하나 들고 죽도시장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팔딱거리는 물고기 만큼이나 생기 넘치는 새벽 죽도시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분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 곳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생업의 현장을 그저 겉돌며 바라보기만 하는 나의 시선과 심리적 거리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 역시 결국은 피상적이고 심도 얕은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어서긴 어려우리라.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셔터를 정신없이 누르는 한시간 남짓의 시간은 지난 일주일간 복잡하게 뒤엉킨 내 머릿 속을 리셋하고 지친 마음을 재충전 하는데 충분한 시간이다. 죽도시장에 촬영할 거리가 많다기보단 그런 이유 때문에 죽도시장을 더 자주 찾았던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던 그 곳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다시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포항 죽도시장, 지난 1년의 기록들

사진 : 민뿡, 주아비, 은빛연어, PIYOPIYO

글 : PIYOPIYO




일본 여행은 여러가지로 참 편리하다. 

우선 생김새가 비슷하여 아무 말 않고 가만히 다니면 이방인 티가 많이 나지 않아 시선에 대한 부담이 적고(실제 나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사진을 좀 찍어달라며 부탁하는 일본인들도 많았다.) 일어나 영어를 못하거나 히라가나를 몰라도 한자를 배워온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필수적인 정보는 대략 식별할 수 있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잘 갖추어져 있고 치안도 좋아 돌아다니기에 불편함이 적으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나긋나긋 조용하다. 현지식도 우리 일상에서도 친숙한 일식이라 거부감이 들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도 일본 여행을 좋아한다. 여느 관광객들처럼 대형 쇼핑몰이나 백엔샵 따위에 들러 물건을 고르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맛집을 찾아 줄을 서서 기다려 가며 식도락에 탐닉하기도 하고, 사진도 신나게 찍으며 즐겁게 놀다 오곤 한다. 하지만 그런 즐겁고 편리한 일본 여행의 와중에 한편으로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고  불편해짐을 자주 느꼈었다.

성숙해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사회 문화적 수준은 그나마 많이 따라갔다고 하는 일본과의 경제력 격차만큼 금방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경우에서 확인할 수 밖에 없었고, 강박적이라고까지 보여지는 그들의 타인에 대한 철저한 배려, 그리고 질서 의식에 대한 부러움은 괜한 반발심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도 뭔가 못난 모습을 발견해보려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시선을 낭비하기도 했다.


무단횡단하는 아가씨1




무단횡단하는 아가씨2




그리고 간혹 다소 차갑고 고압적인 태도의 공무원 등을 마주치게 되면 일제 시대에 그들이 우리를 대했을 그런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며 식민지의 2등 신민이 겪었을 기죽고 서러운 감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씁쓸한 기분이 못내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봐도 비싼 돈 들여 재미있게 놀자고 가서는 이딴 생각이나 하고 다녔으니 나도 참 피곤한 사람이다 싶다.


삐딱하게 서서 '저건 뭐냐?' 하듯 나를 쳐다보던 츠키지 시장 입구의 경비원




반면 서양 관광객들 옆에선 기죽은 듯 왜소한 일본인의 표정에서 페리 제독과 맥아더 장군을 대했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일본을 작년 여름에 또 한번 찾았다. 어쨌든 일본 여행은 ‘편리’하니까. 도쿄는 두번째였다. 특별히 볼거리가 있어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은 아니었지만 2004년에는 일정상 패스했던 우에노 공원을 이번에는 들러보기로 했다. 그저 도쿄 시민들의 편안한 일상이 보고 싶었다.
























무더운 여름날, 공원의 큰 나무 그늘 아래선 가족들이 모여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잘 놀고 있다가 카메라를 겨눈 나를 보고 다소 당황한 듯한 여자아이들에게 괜시리 미안해졌고,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던 여자아이도 참 예뻤다. 자전거를 타고 산책나온 단란한 한 가정도 보기 흐뭇했고, 커피숍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젊은 청년이 만들어주는 막대 풍선을 구경하는 아이들도 평화로웠다. 그들을 보며 공원을 거닐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도 70여년 전이었다면 오늘같은 우에노 공원의 평화로움은 누릴 수 없었을테지..’

불행했던 그 시대의 아이들은 B-29 편대의 공습을 피해 겁에 질려 방공호로 뛰어들어야 했을 거고, 소이탄을 맞아 잿더미로 변해버린 동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잠들 때 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물으며 간절히 기다리던 그 아빠는 이오지마나 콰달카날에서 반자이 돌격으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의 큰 형은 꽃다운 나이에 해군 항공대 소위가 되어 제로센 전투기를 겨우 조종할 수 있게 되던 날, 돌아올 수 없는 연료와 폭탄을 싣고 날아올라 오키나와로 몰려오는 미해군 함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런 그의 비행기를 향해 사쿠라 가지를 흔들어주며 배웅하던 여학생들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켰겠지…

우에노 공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나니, 행복해 보이는 오늘 그들의 모습이 새삼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여겨졌다. 모두가 살기 어렵고 힘들기만한 요즘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성이 파괴되고 말살되는 전쟁과 같은 그런 처절한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 불행한 시대를 겪지 않았음에, 그래도 평화로운 지금에 살고 있음에 감사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에노 공원 사진들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잠시나마 일본 여행에서 느껴왔던 불편함이 사라진 순간이었고, 그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과 여전히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그들의 몰염치성에 지금도 분노하고 있다. 그들의 악랄한 식민 지배를 겪은 불행한 나라의 후손인지라 잊어서도 안될 일이고 그렇기에 일본 여행은 편리하면서도 내게는 또 불편한 것이었지만 우에노 공원에서는 잠시 그 마음이 누그러질 수 있었다. 문득, ‘그래.. 모든 인간은 행복해야 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2016.08.04. 도쿄

Leica M3 / Elmar-M 50mm f2.8 / Kodak 400TX / IVED


감히 김기찬 작가의 작품집 이름을 제목으로 쓰고나니 부담스럽고 송구스런 마음이 한가득이다.



나의 유년시절 추억 중 골목길과 관련된 것은 안타깝게도 거의 없다. 아파트 단지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게 골목길이 친숙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시작된 서울 생활부터였다. 학교 앞 주택가는 촌놈들이 기대하던 으리으리한 서울의 이미지와는 크게 달랐다.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복잡하고 좁은 골목길과 고르지 못한 보도블럭, 곳곳에 널린 쓰레기와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과 기울어진 전신주들... 하지만 그 낡고 지저분함 덕분에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카메라 한대를 어깨에 둘러메고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은 출사가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요란하지 않아도 됐다. 골목에는 거친 콘크리트의 질감이 있었고, 대문 옆에 놓은 작은 화분이나 보도블럭 사이에서 피어난 민들레 같은 소박하고 예쁜 눈요기 거리도 있었다. 다세대 주택의 가스배관들은 패턴을 만들어 줬고 대문과 창문의 모양도 저마다 다양했다. 그리고 골목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2000년 10월 녹천

Nikon F3HP / ai-s 50mm f1.4 / Kodak TMX




2000년 10월 녹천

Nikon F3HP / ai-s 50mm f1.4 / Kodak TMX




2001년 7월 황학동

Nikon F3HP / AF85mm f1.8D / Kodak TMX




2001년 9월 무악동

Nikon F3HP / AF85mm f1.8D / Kodak TMY




2001년 9월 신설동

Nikon F3HP / ai-s 50mm f1.4 / Kodak TMY




2003년 7월 이문동

Nikon F3HP / ai-s 28mm f2.8 / Kodak TMX




2003년 12월 이문동

Nikon F3HP / ai-s 28mm f2.8 / Kodak TMY




2003년 12월 이문동

Nikon F3HP / ai-s 28mm f2.8 / Kodak TMY



사실 나의 골목길 사진들은 농익지 않은 아마추어 사진가가 찍은 그저그런 사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큐라든지 기록이라든지 심도 깊은 고민과 주제 의식을 가지고 일관된 작업을 해왔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 찍은 이 장면이 지금이야 평범하고 흔한 모습이겠지만, 언젠가는 시간의 가치가 더해지리라는 막연한 기대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김기찬 작가께서 열정을 바쳐 평생 작업해왔던 사진들에 비해 겨우 흉내나 낸 내 사진들은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번뜩이는 감각과 창의적 예술성 따위란 애시당초 없었던 나의 한계로는 할 수 있는게 그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런 보잘 것 없는 내 사진을 나 혼자만이라도 소중히 생각하는 이유는 그 시절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돈은 떨어졌어도 카메라 하나, 필름 한롤만 있으면 몇시간이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낯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는 앳된 젊음이 있었다. 


그 시절 그 골목길들은 여의도나 강남같은 화려한 서울의 겉모습에 가려진 또 하나의 서울이었고 나에게는 오히려 더 어울리고 편안한 서울이었다. 서울이 고향이 아님에도 이따금씩 서울이 그리워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골목길과 그곳에서 만났던 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필름으로 사진을 마지막으로 찍은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하다. 2011년 여름, 티벳에서 좀 찍기는 했으나 Nikon D700이 주력으로 쓰이던 때라 필름은 F3에 넣은 흑백과 Rolleiflex의 슬라이드만이 보조적인 역할을 했고 그나마도 두 카메라를 합쳐 5롤도 안찍고 돌아왔다. 사실 티벳 여행 전에도 D700 구입을 기점으로 필름 소모량이 급격히 줄어 들었으니 이래저래 한 5년간은 필름을 놓았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은 Ricoh GR의 구입이라는 결정타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아, 이제 필름은 나도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굳어지던 2015년 봄이었다.


오랫동안 같이 사진을 찍어오던 지인이 다시 필름 라이카를 사겠다고 했다. (그도 나와 비슷하게 필름을 놓은지 몇년이 된 상태였다.) 뜬금없이 이제와서 무슨 다시 필름이고 하필 또 가성비 안나오는 라이카냐고 되물었지만, 육아에서 어느정도 해방(?)이 되면서 제정신이 돌아온 그의 의지는 강했다. 수년전에 내가 '이것만은 그냥 안쓰더라도 팔지 마라'고 했던 M7과 35미리 주미크론을 결국은 다시 사야겠다며 그는 다시 필름을 하자고 열심히 꼬셔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지 않던 나는 그리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정말 열렬한 필름 추종자였던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이제 와서 무슨 필름으로 뻘짓을 해요? 아, 난 못하겠어요. 시간도 없고 필름값도 너무 비싸고 이제.'

'야 네가 갖고 있는 그 좋은 카메라들이 아깝다.' 

'뭐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그것들 쓰자고 필름질은 못하겠네요 이제.'

'아, 재미없게 진짜. 혼자하면 심심한데... 그래도 내가 M7사면 같이 필름 카메라로 출사는 가줄거지?'

'그래요 그럼. 그거야 뭐 어렵나. 같이 갑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정말로 다시 M7과 Summicron-M 35mm f2.0 ASPH를 구입했다. 약속대로 그와 필름 카메라를 챙겨들고 출사에 동행해야 했다. 7월의 첫번째 주말에 안강 5일장날이 돌아왔다. 예전에 한창 포항지부가 활발했던 시절에 멤버들과 자주 왔던 곳이기도 하여 익숙하기도 하니 장날 구경이나 하며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손맛이나 보자 싶었다. 유통기한은 진작에 지났을, 그리고 이사하면서 다시 냉장고에 넣지도 않고 방치했던 TMX 한롤을 Contax IIa에 넣었다. 잘 나오긴 하려나... 다행히 몇년간 만져주지도 않았던 카메라는 잘 작동되고 있었다.




골목 귀퉁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잠시 어슬렁 거리다 첫 컷을 눌렀다. '챡!' 아.. 이 느낌이었다. 필름을 와인딩하고 셔터를 누르던 그 설레임의 순간, 잊혀졌다고, 다시 되돌아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던 필름의 기억이 그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몇 년만의 스냅질이라 번잡한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과 달리 몸은 예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컷을 제외하곤 사람이 없는 컷은 거의 찍지 않았다. 지인의 테스트 촬영에 그저 따라서 놀러온 것 뿐이었던 마음 가짐은 이미 사라졌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GR을 메인으로, 필름은 서브로만 적당히 찍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될 수록 이는 반대가 되었다. 함께 가져온 GR은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역시 두개로는 번잡하다.




이럴 줄도 모르고 한롤 밖에 안가져온 필름이라 아끼려 했건만 난사하던 버릇이 살아나니 이런 의미없는 컷도 마구 눌러보고..




주택가 골목길에 펼쳐진 좌판에서는 떠날 줄 모르고 서성이며 셔터찬스를 노렸다. 28미리로 바짝 들이대던 뻔뻔함까진 살아나질 못해 적당히 떨어져서 찍기 편한 50미리를 가져온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뒷배경에 나타난 신형 투싼이 아니라면 언제적 찍은 사진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 곳도 참 변화가 더딘 곳이다.




경운기를 찍었더니 나를 오늘 이 지경으로 몰고온 몹쓸 지인의 모습이 같이 담겼다. 




이 컷을 누르고 났을 때 설레임은 아직도 기억난다. 디카와 달리 어떻게 찍혔는지 알 수가 없는 필름질에서의 기대심리는 극에 달한다. (물론 결과물은 보시다시피 그냥 그렇지만..)




낡은 철물점에서 텐트칠 때 쓸 저렴한 해머를 구입한 지인




촬영을 마치고 캔커피를 곁들인 끽연의 여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What else?



많지 않은(물론 적지도 않지만;;) 나이에 비해 나름 사진을 찍은 햇수는 제법 오래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캐논 AE-1으로 처음 사진을 찍었으니 비교적 빨리 시작한 편이었다. 그러니 그동안 내가 나선 출사의 횟수는 적지 않다. 그 많은 출사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날이 있기 마련인데 이 날의 출사는 나의 사진 인생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날로 남았다. 정말이지 이날 느꼈던 설레임과 흥분은 처음 사진을 배웠던 20년전 그때 못지 않았다. 불과 하루의 촬영만으로 '왜 그동안 필름을 쉬었는가!'라는 자책과 후회가 들었고 디카로만 깔짝거렸던 지난 몇년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지난 날'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던 수년만의 필름 출사는 이후의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조금 싸다 싶게 필름이 나오면 '있을 때 사두자!'며 수십롤씩 사재기를 해서 냉장고에 쑤셔 넣었고 '이왕 이렇게 된거 남들 다 쓰는 라이카도 써보고 죽자.'며 라이카 M3도 들이고, 몇년 동안 놀면서 엉망이 된 필름 카메라들을 오버홀하느라 돈이 깨지는 수렁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이 날이었다. 

나에게는 필름 사진의 르네상스가 되었던 2015년. 그 해 7월 4일의 기록이다.


2015.07.04 경주 안강

Contax IIa / Zeiss-Opton 50mm f1.5 Sonnar / Kodak TMX / IVED


 






세상이 시끄럽다.


 

내 삶도 만만치 않게 시끄럽다. 당장 내 지갑에서 돈이 들고 나는 일이 아니라면 마음을 쓰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요지경 같은 세상은 보였고 경악과 좌절의 비명 소리가 들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믿어야 하고 또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지 두렵다.


요순시대, 유토피아, 샹그릴라, 그리고 율도국(?). 그래. 어차피 그런 이상향이 실존하리라 믿은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곳에 가까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함이 옳지 않은가. 이 땅의 그저그런 필부 중 하나인 나로서는 요즘을 감당하기가 더욱 벅차진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비열한 거짓들 앞에서 나는 더욱 작아진다.


 

 


M3를 느끼다


 

하릴없이 멍할 때면 M3를 만지작 거리곤 한다.

셔터를 누르는 것 보다 셔터를 장전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초기형에서만 느낄 수 있는 더블스트로크의 손맛은 M3를 사용한다면 포기하기 어려운 매력이다. 부드럽고 매끈하면서도 절도 있게 끊어지는 그 느낌은 마치 볼트액션식 소총을 장전하는 듯, 셔터를 장전하는 순간의 설레임과 흥분을 극대화 해준다. 엄청난 수의 부품들이 투입된 M3의 파인더는 완벽 그 자체다. M라인업 중 유일하게 화이트 아웃 현상이 없고 등배에 가까운 0.91배의 배율은 내 눈의 시야 그대로, 과장과 왜곡없이 솔직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셔터는 매우 부드럽게 작동하며 아주 정숙하다. 물론 일회용카메라들도 조용한 소리를 들려주긴 한다. 하지만 그들의 '틱'하는 맥없는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데 이를 단순히 '조용하다'라고 표현하긴 부족하다. M3의 셔터음은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조용조용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면서도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그 속에 강단이 느껴지는, 그런 소리라 하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챡!'


 


M형 라이카의 시작과 끝, 완벽을 추구했던 카메라


 

내가 가지고 있는 833XXX시리얼의 M3는 56년 생산분으로 올해로 무려 환갑을 맞이하셨다. 라이츠사가 M3를 개발하며 얼마만큼의 기대수명을 목표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M3는 쌩쌩하다는거다. 그것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재미로' 사용하는 일부 클래식 카메라들과 달리 M3는 최신 라이카 카메라와 다를게 없을만큼 편리하다.


M3는 등장과 동시에 그야말로 경쟁사들과 사진가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바르낙의 많은 단점들을 일거에 해결해 버렸고 자동으로 변환되는 3개의 프레임을 내장한 밝고 시원한 파인더와 자동으로 리셋되는 필름 카운터, 최고의 조작감과 우수한 내구성의 부품들과 만듦새, 유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운 디자인과 정밀한 상판 각인, 새로운 베이요넷 M마운트의 도입과 동시에 출시된 우수한 렌즈들까지 더해졌다. 제작단가와 생산효율 보다 제품의 완벽을 우선시한 다시 나오기 힘든 카메라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M3의 완벽함은 라이츠사에게도 부담일 수 밖에 없었는지 이후의 M라인업들은 원가절감의 논리가 적용되며 완성도가 저하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보다 다양한 화각의 프레임을 지원하게 되거나 보다 빠른 필름 로딩과 되감기가 가능해지는 등의 아주 더디고 소소한 개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M3의 장점들이 유지되지 못한 부분은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그랬기에 가능한 모든 부분에서 완벽을 추구하고자 했던 M3의 상대적 지위는 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이처럼 M3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시작과 동시에 끝판왕이 되어버린 무결점의 카메라였고 마치 1회초 선두타자가 끝내기 홈런을 쳐버린 것과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카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자신만만했던 Leica M3의 등장


 


 


세상은 M3 같아야 한다.


 

M3를 만지고 있으면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60년전 독일의 숙련공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거짓없는 기계를 만들어낸 것은 최고의 제품을 향한 그들의 순수하고 정직했던 열정과 장인정신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져 60년을 버텨온 M3와 달리 누군가에게는 5년도 버거워보인다. 속임수와 거짓은 완벽할 수 없다. 오래가지 못한다. 언젠가는 탈이 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다해 존경할 사람이 없는 요즘이라 오히려 낡은 카메라 하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이 또한 슬픈 일이긴 하나 그런 카메라 하나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말이지.. 유토피아나 샹그릴라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세상은 M3 정도는 되야할 거 같다.





나의 Leica M3




작례 몇 장


























2016.06.06. 포항

Leica M3 / 50mm f2.8 Elmar / Kodak 400TMY / IVED






"오빠 시장에 가서 쇠고기 안심이랑 감자랑 호박이랑 춘장 좀 사와요."



토요일 오후, 와이프가 심부름을 시킨다. 비싼 한우 안심은 내 입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딸냄이 태어나기 전 맞벌이 하던 때야 호기롭게 안심 한 근 정도 두툼하게 썰어와서 스테이크도 구워 먹고 했지만 이제 안심은 귀하신 딸냄이 입에만 들어가는 고급 식자재가 되었다. 감자랑 호박과 춘장은 와이프가 잘 하는 몇 안되는 요리 중 하나인 짜장을 만들기 위함이다. 얼마전 있었던 처남의 생일을 식구 모두가 (심지어 처남 본인마저..) 까먹은 것이 미안해 처남이 좋아하는 짜장을 만들어 담아 줘야겠다고 한다. (처남이 얼른 연애를 했음 좋겠다.)



아, 잡설이 길었다. 어쨌든, 이 심부름에서 내게 중요한 것은 어떤걸 사오라는게 아니라 '시장에 가서' 사오라는 부분이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대기업의 대형 마트도 있지만 몇몇 종목들은(딸냄이 전용 안심이라든지..) 마트보다 시장에 있는 가게에서 사오는 것이 낫더라는 경험치가 쌓였다. 그래서 오늘도 와이프는 내게 '시장에 가서' 그것들을 사오라는 거다. 괜시리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알았어~' 라고 대답했다. 오빠는 뭐 먹고 싶은게 없냐고 물었지만 와이프가 할 줄 아는 요리가 거기서 거기인지라 특별히 없다고 대답하곤 옷을 챙겨입고 나섰다. (먹고 싶은 건 없고 찍고 싶은 건 많았다 ㄷ)



시장은 걸어서 5분인 대형마트와 달리 차로 5분이면 가는 거리에 있다. 시장에 도착한 나는 심부름 따위는 금세 잊고 지갑 대신 카메라를 꺼냈다. 시장에 심부름을 오는 것이 내게 의미있는 이유다. 이 곳은 슬슬 돌아다니며 스냅을 찍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다. 아파트 단지와 인접하여 이제 재래시장의 느낌은 그다지 나질 않지만 여전히 이 곳은 '시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며 시장 뒤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30분 정도 한 바퀴 돌며 10여컷 정도는 셔터를 누를 만한 그런 곳이다. 



내 손엔 새로운 똑딱이 하나가 들려있다. 바로 Ricoh GR1s! 라이카 28미리나 하나 사볼까 해서 Contax T3를 팔아 먹었지만 원하는 매물이 나오지 않았고 그 사이 T3를 팔아 마련한 목돈은 야금야금 생활비로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생각해보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신품으로까서 10년도 넘게 멀쩡히 잘 사용하던 T3의 희생이 너무 의미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늘 휴대할 수 있던 똑딱이의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은 생각보다 그 빈자리가 컸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마지막으로 장터나 한 번 보고 와야지.' 하다가 마침 괜찮은 가격에 올라온 GR1s를 발견했고 결국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사버렸던 것이다. 써보고 별로면 다시 팔면 되지란 생각으로.. (다 이런 식으로 사놓고 정작 되판 경우는 극히 드물다.)



주중에 택배로 받은 녀석에게 첫 필름을 넣어줬다. 흑백 위주로 사용할 카메라지만 마침 후배가 새로 산 Summaron 3.5cm를 대신 테스트하는 중이라 Leica M6에 흑백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GR1s에는 첫 롤을 칼라 네가티브로 넣어주기로 했다. 앞서 얘기했듯 써보고 별로면 다시 팔려 나갈 수도 있는 카메라이기에 녀석은 명성대로 뭔가를 나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내가 잘 찍어야 하는게 아니고??)





노란 원색에 끌려 한 컷을 눌러봤다. 청명한 늦은 오후의 낮은 빛이 꽤나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줬다.





이 시간대에 이 곳을 오면 꼭 한번쯤은 카메라를 들이대게 되는 꽃집 비닐하우스와 담벼락. 왼쪽 편에 좀 지워져서 식별이 잘 안되는 'SEX'란 글씨에 매칭될만한 어떤 피사체가 지나가길 늘 기다려보지만 오늘도 아닌 것 같다.





스냅 사진에서 사람이 없는 컷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렇게 한적한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가장 뻘쭘하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면 '저 자식은 뭐하는 놈일까?' 라고 생각할 것만 같아 괜히 뒤통수가 따갑다. 애꿎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방금 전에 확인한 페이스북도 또 새로고침하고.. 그러면서 곁눈질로는 양쪽에 누가 오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아, 카메라의 초점은 원하는 위치에 고정해 뒀음은 물론이다. 


GR1s의 완소 기능으로 초점 고정 기능을 들고 싶다. 반셔터를 눌러 초점을 잡은 채로 mode 버튼을 길게 누르면 그 거리로 초점이 고정되는데, 카메라를 내린 채 쉬고 있다가도 타이밍이 오면 징징거리며 다시 초점을 잡을 필요없이 즉각 셔터를 누를 수 있다. 구도를 잡아두고 매복을 주로 하는 나에게 정말 유용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GR1v의 수동초점 기능이 조금 부러웠는데 이거면 됐다 싶다. 





세로컷으로 왜곡 정도는 어떤지 좀 확인해 볼까 싶었다. 하지만 그냥 찍기는 필름이 아까워 또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 보니 같은 구도로 쓸데없이 3컷이나 찍었다. 오토바이 한 대, 아저씨 한 분, 그리고 이 자전거. 이게 제일 나았다. 더 기다리긴 싫었다.





해가 점점 뉘엇뉘엇해진다. 아마 장사를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을 간판도 없는 빈 상가들의 이미지 덕에 실제 보다 더 오래되고 더 시골스러운 느낌이 드는 곳이다. 여기서 부턴 초점을 맞추지 않고 스냅 포커스 모드를 써보기로 했다. 앞서 언급한 초점 고정 기능이 원하는 곳에 초점을 맞춘 후 고정시키는 방식이라면 스냅 포커스 모드는 2미터로 고정된 방식이라는 점이 다르다. 28미리의 깊은 심도를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조리개를 조여두면 어지간한 거리는 웬만큼 초점이 맞으니 걸어다니며 찍는 길거리 스냅에서 아주 유용하다. 실제 GR1s의 AF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고 조금 어둡거나 콘트라스트가 낮은 환경에서는 버벅임이 심하기에 더욱 활용성이 높다. 





낡고 오래된 이미지와 달리 시장 너머 형산강 건너편엔 브랜드 있는 고층 아파트들이 쭉쭉 솟아 있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진부한 시선의 사진이지만 그래도 이 곳에 오면 꼭 한 컷씩은 찍게 되는 것 같다.





가게 한 곳이 다른 매장으로 바뀔 모양인지 내부 공사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현대의 렌즈답게 역광에서도 플레어나 콘트라스트의 저하가 거의 없다. 이 렌즈가 호평을 받아 L마운트로 출시되기도 했으니 광학적 성능은 믿고 산 카메라였다.



"어디예요?"


와이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은 안보고 테스트를 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다. 뜨끔하다. 왜 안오냐고 와이프가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따라 시장에 감자 팔러 나온 할머니들이 없어서 몇 바퀴 돌면서 찾고 있다고 먼저 얘기하며 버벅인다. 그런데 와이프의 본론은 '빨리와!'가 아니라 '빵 먹고 싶다~ 빵도 좀 사와요.' 였다. 내심 안도하며 얼른 사서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만하면 테스트는 대충 된 것 같다. 해상도와 콘트라스트도 괜찮고 GR 라인업다운 슬림한 디자인과 스냅 특화 기능들이 보여주는 이 카메라의 정체성은 역시 매력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28미리 화각이 아닌가. 다소 부족한 AF성능과 어둡고 흐릿한 뷰파인더가 좀 아쉽지만 완벽한 똑딱이는 결국 없기에 양보하기로 했다. (T3, TC-1, MINILUX 등등 이것들이 짜기라도 한 마냥 크고 작은 문제들이 꼭 한두개씩 있으니...)


이제 시장으로 심부름을 올 때면 카메라를 챙겨 나오는 날이 더 잦아질 것 같다. 그리고 와이프가 시킨 주문 중 그 날따라 꼭 못찾는 물건이 있어 난 30분 정도 더 늦을테고 말이다.



2016.09.24. 포항 효자시장




앙증맞은 후드까지 있는 Ricoh GR1s





이른 바 '예술'이라는 불리는 것들 중에서 사진 만큼 진입 장벽이 낮은 분야가 또 있을까.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촬영을 위한 거대한 카메라와 현상, 인화의 까다로움으로 소수 전문가들만이 다룰 수 있는 특수한 기술이었지만 코닥 필름의 출시와 라이카를 비롯한 소형 카메라의 대중화는 보다 편리하고 신속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지난 50년간의 변화를 뒤엎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던 디지털 카메라의 쓰나미가 밀려오면서 사진의 대중화는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상 그 자체가 되었다. 핸드폰 카메라의 성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고 사진을 기반으로 한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올리고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이런 디지털 시대의 사진 생활에서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면 이제는 누구나 내가 찍은 사진을 쉽게 편집하고 보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과거에는 사진을 찍고 나면 필름을 빼서 동네 사진관에 가져다주고 '사람수 대로 뽑아주세요.'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같은 필름도 사진관에 따라 사진의 색감과 노출이 다르게 뽑혀 나오기도 했지만 거기에 대해 불만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일반인은 거의 없었다.



보다 전문적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사진을 다루기 위해서는 암실에서의 현상/인화 테크닉을 어렵게 배워야했고 숙달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포토샵, 라이트룸 같은 전문 보정프로그램이 등장한 후에도 비싼 가격을 주고 구입해야했으며 능숙하게 다루는 일은 암실 테크닉 못지 않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Snapseed나 VSCO같은 어플리케이션을 핸드폰에 설치하기만 해도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사진을 보정할 수 있고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 전 필터 효과 몇개만 이리저리 적용해보아도 훨씬 분위기 있고 멋진 사진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어렵게 익힌 테크닉들이 터치 한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허무하기까지 할 지경이다. 



가끔 RAW 포맷으로 찍은 사진을 라이트룸에서 보정하지 않고 카메라에 내장된 현상프로그램을 통해 JPG로 변환하기도 한다. 주로 굳이 RAW로 찍을 필요가 없이 간단히 써먹을 사진들이다. 그런데 때론 라이트룸에 옮기기까지 기다리기가 귀찮아서, 빨리 결과물을 모니터로 보고 싶어서 카메라 내장 프로그램으로 현상해보기도 하는데 이게 간혹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 사진이 그런 경우로 Ricoh GR로 찍은 컷을 간단히 카메라의 포지티브 모드로 설정하여 JPG로 뽑아낸 컷이다. 포지티브 모드는 채도와 콘트라스트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세팅이 되어 있는데 보통의 경우 그 효과가 다소 과하여 크게 선호하지는 않았는데 유독 이 컷에는 꽤 어울려 라이트룸에서 다시 손 볼 생각도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모 사진 커뮤니티에 포스팅 했었다. '뭐 나름 볼 만하네.' 그런데 이 사진이 그 날 바로 베스트갤러리에 올라 버렸다. 너무나 쉽게 만들어낸 사진이라 그런지 별 애착도 없던 컷이 뜨거운 반응을 받으니 '응? 이게?' 하며 살짝 당황했던 것도 사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다. 사진은 결과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맞거늘 나는 언제나 그 과정과 수단에도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왔던 것은 아닌가. 아무리 좋은 사진을 봐도 그것이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면 '에이 저렇게 좋은 컷을 찍을거면 카메라로 찍지.' 라며 혀를 찼고 디지털 카메라로 좋은 사진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아 저 사람 필름으로 찍으면 더 좋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최신 DSLR과 AF렌즈를 사용해 찍은 다이내믹하면서 칼 같이 초점이 맞은 사진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구닥다리 라이카를 이용해 찍은 결정적 순간에는 더 후한 점수를 주며 감탄해 마지 않았고, 같은 프린트물이라도 작가가 FB인화지에 직접 수동 인화했다고 하면 '아 그래요?' 하면서 그제서야 다시 눈을 가까이 들이대고 작품을 살폈다. 



모든 기술은 보다 편리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칭송하고 편리함을 평가절하 하는 이 못된 심보는 아날로그부터 사진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꼰대스런 자부심인지, 아니면 프로와 달리 작업의 신속성이 중요하지 않고 대량의 이미지를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취미 사진가로서 즐길 수 있는 재미가 불편함 속에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너무 쉬우면 재미는 없지 않냔 말이지. 



저 방어 사진은 그 사진 커뮤니티가 사라지지 않는 한 베스트 갤러리에 남아 남들에게 보여지며 꾸준히 추천수가 한두개씩 더 늘어나겠지만, 너무 쉽게 얻어낸 사진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론 크게 의미를 두거나 애착이 가지 않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아무도 카메라 내장 프로그램으로 보정한 줄 모르고 안다고 한들 사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참 희한한 심리가 아닐 수 없다. 








2016.10.13. 회사에서



몇 년은 쓸 줄 알았던 필름이 슬슬 바닥을 보이자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한참 열심히 찍던 시절에 비하면 많은 것도 아니지만, 한 달에 10롤 정도를 찍어대니 넉넉할 줄 알았던 수십롤의 비축 물자도 얼마 버티질 못했다. 이렇게 많이 찍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필름을 다시 쓰기 시작하니 디지털에는 손이 가질 않는다.



지인과 함께 면세 한도를 꽉꽉 채워 주문한 필름은 2주일 하고도 며칠이 더 걸려 뉴욕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회사로 날아왔다. 박스 겉면에 무슨 이유인지 받는이의 이름이 빠져 있었는데도 내용물이 적힌 스티커에서 'Kodak Potra 160'이라고 적힌 것을 본 여직원이 알아서 가져다 준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것과 반비례하여 마음은 넉넉해졌다. 이제 또 몇 개월을 버틸 수 있겠다는 안도와 그보다 더 큰 설레임. 포장도 뜯지 않은 새 필름임에도 벌써부터 저 필름에 남길 추억과 이미지에 들뜨는 가을날이다.




2016.06.06 포항 죽도시장


파란 이불을 덮고 영원히 잠든 방어들. 

사람들이 잔인하게 개를 죽이는 장면을 보지 못하는 건 구슬프게 비명을 지르고 붉은 피를 흘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피라고 여겨지지 않는 투명한 피를 흘리는 조개류를 죽이는 장면은 아무도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붉은 피를 가졌지만 성대가 없어 소리를 내지 못하는 어류에도 마찬가지인데, 큰 물고기에는 왠지 연민이 가는 것이 참..멸치 한 마리나 방어 한 마리나 하나의 생명인데 말이다. (물론 제주도 갈 때 마다 방어회를 먹는건 함정..ㄷㄷ)



Kodak 400TX 30롤 도착


필름이 하나둘 단종되면서 과거의 인기있던 필름들도 이제는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선택이 폭이 확 좁아진 와중에 그래도 흑백 필름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코닥 400TX는 아직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넓은 계조와 특유의 질감과 증감현상시에도 좋은 표현력을 갖고 있는 400TX는 1954년 출시이후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필름이라 제발 이것만큼은 단종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데 슬금슬금 가격이 계속 올라 요즘은 롤당 8천원을 넘으니 이 정도 가격이면 예전에 E100VS나 벨비아 같은 고채도 포지티브 필름 가격이다. 


뭐 꼭 비싼 400TX를 써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쓰던 버릇은 무시못해 코닥 흑백 필름이 단종되는 그 날까지는 계속 쓰고 싶어 조금 싸다 싶으면 작년부터 자꾸 필름을 사재기해 두고 있었는데, 냉장고에 필름을 더 쑤셔 넣기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라 자제하고 있었다만 B&H에서 400TX의 가격이 꽤 괜찮은게 아닌가. ㄷㄷ 고민하다 결국 지인과 반씩 30롤을 주문. 언젠가 다 찍겠지;; 환율도 요즘 불리하고 배송비까지 더해지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이제 롤당 8천원이 넘는 상황이라 이렇게 구입하는 것이 더 싸게 먹혔다. 


근데 뉴욕에서 한국까지 굳이 3주씩이나 걸려서 와야하는거냐..-_-





대학교 입학 후 사진동아리에 들어갔던 2000년. 


카메라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동아리 특성상 신입생들의 가장 큰 목표는 '내 카메라'를 장만하는 일이었다. 나는 다행히 아버지가 원래 사진을 취미로 하셨기에 집에서 동생이 쓰던 니콘 FM에 50미리 표준렌즈를 들고 왔다. (사실 난 캐논 AE-1을 중학교 때부터 쓰던 캐논 유저였지만 당시에 동생이 사둔 52미리 구경 필터가 많다는 이유로 FM을 들고 왔었다. AE-1에 붙은 FD50mm1.4는 구FD라 필터구경이 55mm였음) 카메라를 들고 온 동기는 20여명 중 나를 포함해 단 4명 정도였는데 한 명은 펜탁스의 명기 MX, 한 명은 미놀타의 명기 X-700, 그리고 당시에 모두 부러워하던 F90X를 들고 온 동기도 있었다. 


하여튼 이 소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카메라를 장만하기까지 선배들의 카메라를 빌려가며 매주 일요일마다 촬영에 나섰다. 사실 이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만두는 친구들도 종종 있었으니 바로 카메라를 사는건 경제적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한두달 정도 동아리에 정이 들고 사진에 재미가 들리게 되면 여름방학 때 9박 10일로 떠나는 우리 동아리 최고의 행사 '하계촬영'을 앞두고 대부분이 카메라를 장만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카메라라는 것이 당시로도 학생들이 사기엔 비싼 가격이라 몇달간 알바를 해가며 산 카메라를 자취방에서 끌어안고 잤다는 얘기도 그 땐 그리 낯 간지럽지 않았다.


당시 동아리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던 기종은 두가지로 갈렸는데 바로 캐논의 대히트작 EOS-5와 니콘의 수동 명기 FM2였다. EOS-5는 통통 소리나는 프라스틱 바디의 부실함과 다이얼의 잦은 고장, 고질적인 그립부 벗겨짐 등 문제도 많은 카메라였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AF속도와 강력한 기능, 그리고 멋진 디자인에 생각보다 그리 비싸지 않은 중고 가격으로 큰 인기였다. 그렇지만 EOS-5는 기본적으로 AF카메라라 꽤 보수적인 우리 동아리에선 탐탁치 않게 보는 경향도 없잖아 있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캐논 AF의 부정확성은 확대 인화시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상하게 우리 동아리는 핀!에대한 강박관념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선배 기수들에 비해 우리 기수부터 EOS-5의 점유율은 크게 하락했다.


우리 기수부터 동아리 내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카메라는 단연 니콘의 FM2였다. 내가 사용하던 니콘 FM에서 셔터스피드가 1/4000초까지 올라간 FM2는 이미 1982년에 첫 발매된 카메라였는데 2000년이었던 그 때만 해도 출시 20년이 다되가는 노장이었다. 그럼에도 FM2는 실제 90년대까지 꾸준히 생산되었고 2000년에 밀레니엄 한정판을 마지막으로 단종되었으니 니콘의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FM2가 이처럼 긴 생명력을 유지한 이유는 명확했다. 


기본에 아주 충실한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카메라였기 때문이었다. 완전 기계식의 이 카메라는 노출계를 제외하고 배터리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1/4000초라는 고속의 셔터스피드와 1/250의 싱크로가 가능했다. 디자인은 그야말로 딱 카메라다운 실용적이면서 불필요하게 부린 멋이 없었고 실버크롬 도금은 단단해서 웬만해선 벗겨지지도 않았다. 바디는 황동으로 만들어져 견고했고 떨어뜨려도 고장도 잘 나지 않았다. (사실 고장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파인더 배율이 높고 스플릿 스크린이 명확해 초점 맞추기가 좋아 동아리 사람들은 배율이 낮지만 시야율이 100%인 최고급기 F3HP보단 FM2의 시원한 파인더를 훨씬 선호했다. 심지어 'FM2로 찍으면 핀(핀트)이 잘 맞는다~' 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전해졌으니..; 


당시 동아리 동기, 후배들 카메라 구입에 조언과 더불어 직접 남대문 동행, 직거래 동행 등을 쉴새없이 하던 나는 현대기아차 마냥 독과점의 지위를 누리는 FM2가 괜히 싫어 같은 디자인에 같은 기계적 성능이지만 조리개 우선까지 가능한 FE2나 F3 다음의 준플래그쉽이었던 FA, 그것도 아니면 FM2의 반값에 구할 수 있던 펜탁스의 MX나 ME-SUPER 등으로 꼬셨지만 대다수의 답변은 '오빠 그래도 FM2 살래요'였다. 사실 FE2의 조리개 우선 방식은 무척 편리했지만 보기에 명확한 FM2의 - O + 의 빨간색 노출 지시계와 달리 바늘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노출 지시계는 보기에 그리 편한 편은 아니었고 야경 촬영이라도 하는 날은 바늘이 잘 보이지 않기 일쑤였다. 펜탁스 MX는 작고 예뻤지만 셔터스피드가 1/1000초까지만 지원하는데다 파인더도 FM2만큼 시원스럽지 못했고 ME-SUPER는 조리개우선으로만 사용하기에 편한 방식이었고 FM2를 빌려쓰며 익숙해진 후배들에게 버튼으로 조절하는 셔터스피드는 뭔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그냥 샵에 가서 FM2 있는거 다 꺼내달라고 펼쳐놓고는 시리얼넘버를 보고 셔터막을 보고 이래저래 수많은 FM2를 골라줬었다. 그당시엔 하도 많이 사러 다녀서 시리얼번호만 보고도 대략 몇년도 생산 바디라는걸 알아서 '이건 몇년도 생산바디니 좀 더 깎아 주세요' 라며 흥정을 하기도 했다. 당시 샵 사장들이 날 이상하게 쳐다보며 뭐하는 사람이냐 물어본 기억도 난다.


하여튼 그렇게 우리는 너도나도 노란색 니콘 스트랩에 번쩍이는 은색의 FM2를 어깨에 걸고 서울 곳곳을 누볐고 빈 매거진에 100피트짜리 TMX롤필름을 돌돌 말아넣은 일명 '마끼'를 아껴가며 찰칵찰칵 찍어댔다. 사실 FM2의 조작감은 F3의 그것에 비해 꽤 싼티나는 것이었지만 꾸밈없이 사진을 찍는데 충실한 가장 듬직한 도구가 되어줬다. 진흙탕에 넣었다 꺼내도 격발이 가능하고 고장도 잘 안나는 AK-47같은 그런 카메라였다고나 할까. FM2는 정말 믿음직한 친구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즐기던 그 시절은 사실 필름 시대의 끝자락이었고 2000년대 후반부터는 필름으로 사진을 하기엔 점점 힘든 현실이 닥쳐왔다. 주머니 사정 가벼운 우리가 그나마 가장 싼값에 필름이나 인화지, 약품을 살 수 있었던 종로의 삼성사도 결국 사라져버렸고 코닥이 파산하며 필름은 하나둘 단종되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버렸다. 그리고 이젠 그 많던 현상소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그나마 나는 길게 버틴 편이라 생각하지만 2009년에 D700을 구입하고 나서는 사실상 필름 사진은 거의 접었다. 이제는 현상하고 인화할 시간도 부족하고 그리고 가격이 너무 비싸져 버렸다.


아쉽지만 추운 새벽 손을 호호 불어가면 사진을 찍고 노출계가 죽을까 품속에 카메라를 안고 돌아다니고 뭘 사먹을 돈은 없어도 필름은 몇롤이라도 가방에 있어야 든든했으며 그렇게 찍어온 필름은 동아리방에 와서 현상하고 물이 뚝뚝 떨어지던 필름을 건조대에 걸어두고 기대에 부풀어 지켜보던 일. 그리고 확대기에 걸어서 빛을 쏘고 약품에 담궈서 흔들며 8*10인화지에 상이 맺히길 기다리던 그 시간과 설레임은 이제 진짜 추억으로만 남았다. 


그 추억을 니콘이 기억해주고 되살려 주고 싶어서일까. 카메라 신제품 루머를 주로 떠벌리는 www.cameraegg.org 에서 지난 20일에 한가지 믿기 힘든 소식을 게시했다. 바로 FM2 디자인을 계승한 DSLR의 발표를 니콘이 준비하고 있다는 것! 이 사이트에 따르면 D4와 동일한 센서에 엑스피드3 화상처리 엔진을 탑재한 DSLR을 1-3주 이내에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마운트는 여전히 니콘의 F마운트. 올림푸스가 과거의 명기 펜이나 OM시리즈의 디자인을 계승한 카메라들을 내놓으며 인기를 끌자 니콘도 추억의 명기 FM2를 되살리기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과연 이게 사실일런지 모르겠지만 정말이라면 오랜 니콘 유저들에겐 정말 기쁜 소식이 될 것 같다. 소식을 접한 일부 지인들은 왜 하필 FM2냐고 하지만 F3같은 플래그쉽의 디자인을 계승하기엔 니콘도 부담이었으리라. F3의 디자인이라면 성능도 그에 맞는 최상급이 되야할테니 어찌보면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FM2야 말로 복각 디자인엔 제격이었을 것 같다. 


과연 사실일런지 기대되는 간만에 들뜨는 루머. ㅎㅎ



원글은 여기서


http://www.cameraegg.org/nikon-full-frame-hybrid-camera-with-a-d4-sensor-to-be-announced-within-1-3-wee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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