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유람을 마치고 단동에서 집안으로 이동~
원체 땅이 넓은 중국이다 보니 단동에서 집안 정도면 가까운 편이다. 고속도로였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꽤나 아름답다. 특히 뽀얀 옥빛의 물색깔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는데 텐트 쳐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휴게소도 아닌 작은 공터에서 휴식 중. 우리나라와 달리 국도변이라도 휴게소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적당히 화장실만 있는 곳이면 잠시 쉬어 간다. 단동에서 집안으로 넘어가면서 문득 만족(滿族 = 여진족) 자치구도 들러보고 싶었지만 오늘날 여진족은 고유의 문화는 물론 언어 마저 거의 잃어버렸다고 하니 가봐야 별 것 없을 것 같기는 하다. 흉노, 선비, 돌궐, 말갈, 거란, 여진 등 중원을 정복한 강성했던 유목 민족들 중 그나마 명맥을 이어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몽골 뿐이니 7~8천만에 가까운 인구가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살아남은 우리 민족도 참 위대하단 생각이 든다.




드디어 집안(集安)에 도착했다. 집안은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오랜 수도로 고구려의 유명한 유적들이 대부분 위치하고 있는 실질적인 고구려의 발상지다.  




이것이 흔적만 남은 고구려의 도성 국내성의 성벽이다.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남아있는 석축은 정말 가지런하다. 도시개발과 더불이 국내성의 훼손은 가속화되고 있다. 천년도 넘게 지난데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민족이 쌓은 성이었으니 이 정도 남아있는 것만 해도 신기할 정도다.




이 쪽에는 성벽에서 돌출된 구조물의 흔적이 보인다. 옹성이 있던 자리인지 아니면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의 흔적인지 애매했는데 아래 지도를 보니 아마도 서문의 옹성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사진을 찍은 성벽이 바로 국내성의 서쪽 성벽으로 서쪽은 통가강이 남쪽은 압록강이 흘러 천연 해자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지금도 도로가 통과하는 곳이니 당시에도 서문이 위치했을 수 있고 서문이 있었다면 옹성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니 위 사진의 돌무더기는 치 보다는 옹성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치는 성벽 중간 중간에 __∩___∩__ 형태로 튀어나온 성벽으로 보통 그 간격은 활의 사정거리 정도를 유지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을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방어시설이며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문 앞으로 진입한 적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 반월 형태로 둘러싼 성벽을 말하는데 서울 동대문에 있는 그것과 같은 것이다. 


어쨌든 초라하게 남은 국내성의 흔적에 가슴아파할 겨를도 없이 주변에는 우리말로 참깨 사라며 달려드는 중국 상인들이 시끌벅적해졌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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