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터를 둘러본 후 점심으로 맛도 없는 숯불구이를 대충 먹고는 드디어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러 떠났다. 사실 이번 여행에 있어 백두산 천지 보다도 개인적으로 가장 설레는 코스가 바로 광개토대왕릉비였는데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최인호의 역사소설 '읽어버린 왕국'에서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이른바 '신묘년 기사'였기 때문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본의 대표적 역사서 '니혼쇼키(日本書紀)'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판한 부분과 더불어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기사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자로 몇번이나 써보았던 그 신묘년 기사는 다음과 같은데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고구려가 백제를 낮춰부르던 말),○○,○라(가야,신라로 추측)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기사는 위와 같이 해석한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때문에 비문이 19세기 말 일본의 육군 중위에게 발견될 당시 조작되었다는 설부터 기사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보아 거꾸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고 백제,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한다는 주장 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한, 중, 일 삼국간에 끊이지 않는 논쟁을 불러 일으켜온 아주 민감한 부분이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수년전 신문에서 본 기사에는 중국 측의 정밀검사 결과 비문에 대한 고의적인 훼손과 조작은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었다. 당시 무척 실망했고 중국의 검사라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어쨌든 그 후 비문조작설은 힘을 잃고 있어서 결국은 비문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설만 분분한 상태인 듯 하다.

어쨌든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던 당시 임나일본부설은 강제합병의 역사적 정당성을 찾기 위해 반드시 증명해내야할 가장 결정적 가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의 해석과 더불어 니혼쇼키의 기사를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를 찾기 위해 창녕일대의 가야고분들을 도굴과 다름없이 발굴해대며 뭔가가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던 결정적 자료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고 임나일본부설은 여전히 근거가 빈약한 '설'로 남아 한일간의 치열한 역사 전쟁의 최전선이 되어왔는데 얼마전 결국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고 인정하며 일단락되는 분위기이긴 하다. 물론 일본이 늘 그렇듯이 양심적 일부 학자들이 그렇게 얘기했다고 한들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해온 니혼쇼키의 임나일본부설을 쉽게 포기할 일본이 아니기에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는 언제나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사실 우리의 고대사는 그 사료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전무하여 삼국시대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 쓰여진 삼국사기 외에 이렇다할 정사(正史)가 없다보니 우리 스스로의 기록으로 역사를 증명해내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 와중에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는 더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우리 땅이 아닌 곳에 있어 우리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으며 비를 직접 촬영도 하지 못함이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 민족의 유적임에도 지안(集安)의 다른 고구려 유적들과 마찬가지고 광개토대왕릉비 역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비 자체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지라 비각역시 웅장하다. 저 안에 들어가서 비문을 한참을 들여다 보며 신묘년 기사를 직접 보고 싶었지만 글자의 마모도가 심하고 입체감을 더해줄 사광의 빛이 닿지 않아 육안으로 확인하는데는 실패했다. 사진 한 장 몰래 찍고 싶었지만 망할 중국 녀석이 곁눈질로 계속 감시를 해오고 있던터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충주에 남아있는 중원고구려비와 비석의 형태까지 거의 흡사하지만 역시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비석을 보면서도 직접 이 비를 보고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 가슴이 아픔은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는 흔히 광개토대왕이라 부르지만 저 비각의 현판에 보이듯이 중국에선 호태왕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부르는 명칭이 100% 정확한 것은 아니고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국강상(國岡上)은 광개토대왕릉이 있는 무덤의 언덕을 말하며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영토와 세력을 넓혔음을 의미하고 평안(平安)은 백성들이 평안하도록 다스렸으며 호태왕(好太王)은 왕중의 왕 왕중에서 제일 높은 최고 대왕이라는 뜻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광개토대왕릉비 인근에 위치한 왕릉으로 이동한다. 이 일대에는 민가들이 들어서있었지만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모조리 철거하고 정비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3,4면에 걸쳐서는 왕릉을 관리하는 임무와 역할에 대해 세세히 기록해두었는데 고구려 때는 이 곳에 주민들이 살며 왕릉을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문에 명시된 바와 달리 고구려의 패망과 더불어 왕릉은 관리되지 못했고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심하게 훼손되어 석축은 무너져내리고 잡초만이 무성하다.




더군다나 이 처럼 흉물스런 계단이 무엄하게도 왕릉 위에 놓여져 수많은 관광객들이 무덤위로 짓밟고 오를 수 있다.




못마땅하지만 나도 그렇게 올라가볼 수밖에 없다. 집안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들은 대체로 아래쪽의 석축은 거대한 반면 위로 갈수록 자갈과도 같은 돌무지들만 흘러내리듯 무너져있는데 장군총이라 불리는 장수왕릉과 달리 아래에만 큰 석축을 받치고 위쪽에는 작은 돌로 덮었던 것인지 아니면 훼손되어 이렇게 된 것인지 얕은 지식으론 알수 없었다.




계단을 다 올라오니 현실로 들어갈 수 있게 입구까지 만들어뒀다. 뭐 우리나라도 천마총을 비롯한 몇몇 고분들을 전시관 형태로 만들어둔 것이 있지만 중국넘들이 이렇게 해두니 기분이 나쁘다.




대륙을 호령한 대왕의 묘로 보기에 지나치게 수수하기까지 한 현실. 왕과 왕비의 관이 놓였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규모이며 집안의 다른 고분들에서 보이는 고분 벽화도 보이지 않는다. 부장품 따위는 이미 깔끔하게 도굴당한 상태로 인근에서 발견된 기와 파편의 호태왕이라는 명문마저 없었다면 광개토대왕의 릉이라고 확신하기 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볼 수 있으니 보고는 왔지만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춰주지 않은 중국의 유적 관리는 고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마음속으로나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왔다.


발해가 멸망한 후 그 넓은 요동과 만주 벌판을 잃어버리고 압록강 이남으로 좁아진 우리 민족의 역사 인식 속에 막연하게나마 남아있는 대륙의 기상과 그에 대한 로망은 광개토대왕이라는 한 영웅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어찌보면 반도 컴플렉스라고 해야할까? 성공 가능성도 희박했던 고려말의 요동정벌 계획과 효종의 북벌론을 떠올리며 만약 성공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어찌 달라졌을까하며 안타까워하는 우리지만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은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포기할 수 없는 웅대한 꿈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비록 대륙은 잃어버렸지만 대륙을 차지했던 수많은 민족들이 그 명맥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간 것을 보면 결국은 살아남은 자가 최종적으로 승리자가 아닐까 싶다.   


10.09.22 중국 지안(集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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