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카 바디에 왜 다른 렌즈를 꽂아?”


사진을 하며 알고 지낸지 오래된 후배는 작년에 M6와 현행 50미리 엘마를 손을 떨며 겨우 마련했다.  50미리를 좀 쓰다보니 역시 0.72배율의 M6에게 최적인 35미리 라이카 렌즈가 간절해졌다. 하지만 그의 작은 간과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는 쉽사리 Summicron ASPH 따위를 덜컥 지를 수는 없었다. 결국 Voigtlander의 렌즈들 따위를 사면 어떻겠냐고 나에게 종종 물어봤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런거 쓰려면 M6는 뭐하러 샀냐? 성능이 좋아서 라이카 쓰냐? 그냥 라이카라서 쓰지.”


솔직히 나는 그랬다. 라이카를 쓰는건 그냥 라이카니까 쓰는 거였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예쁘다는 거? 토이 카메라 따위가 아니라면 내 눈에 광학적으로 몹쓸 렌즈는 별로 보질 못했고 해상도나 콘트라스트, 색감, 왜곡 억제력 등은 예민하고 냉철한 분들이 리뷰에서 친절하게 분석해주시면 ‘음 그렇군.’ 하는 정도였고, 결국 내가 사진을 찍고 나면 어느 렌즈, 어느 카메라든지 나름대로 괜찮았다. (나는 사실 장비 쪽엔 상당히 박애 주의자였던?) 그렇지만 어차피 라이카 바디를 쓴다면 라이카 렌즈가 맞다고 봤다. 이미 라이카를 쓴다는 것 부터가 어쩌면 ‘실용’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닌가.


그런데 M6를 쓰면서 굳이 타사의 렌즈라니. 성능이야 좋겠지. 값도 싸지. 모양도 나름 어울려. 하지만 라이카가 아니야. 그런건 사면 결국 바꾸게 돼. 그를 말렸다. 총알을 좀 더 모으거나 Summicron보다 저렴한 Summaron 괜찮은 물건이 나오길 기다려보자고.




Summaron 3.5cm f3.5


그러던 차에 라이카 쪽에서는 나름 전문성을 가지고 오랜기간 비교적 신뢰가 축적됐다고 하는 ‘ㅈ카메라’와 ‘ㅇ카메라’에 거의 동시에 주마론 매물이 올라왔다. 아쉽게도 M마운트가 아닌 스크류 마운트였지만 우리에겐 LTM이라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ㅈ카메라’의 매물엔 마침 LTM아답터도 포함되어 있었고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미크론 ASPH 중고가의 25% 정도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달려 보는거다. 후배에게 연락했다. 이거나 사봐라.




"쓸 시간도 없는데 나한테 보내."


위탁상품이라 현금 박치기를 해도 한 푼도 안깎아주더라며 후배는 볼멘 소리를 했지만 거기서 깎아봐야 얼마나 깎겠느냐고 상태만 좋으면 몇만원 더 준건 아까워하지 말라며 녀석의 말을 잘라 버렸다. 며칠 후 택배로 물건을 받은 후배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상태를 보여줬다. 사진 찍는다는 녀석이 찍은 제품 사진치곤 너무 X판이라 짜증이 밀려왔다. ‘아 잘 좀 찍어서 보내봐. 렌즈 알 좀 보이게.’


녀석의 허접한 제품 사진으로도 일단 렌즈의 상태는 꽤 좋아 보였다. 주마론이야 이쁘기로 치면 주미크론 1st 8매와 같은 디자인의 2.8 주마론이 최고지만 얘는 엄청 구닥다리처럼 생긴 스크류 마운트 3.5cm 주마론이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생산된 올드 자이즈 렌즈는 그렇게나 좋아했으면서 스크류 마운트 라이카 렌즈들에 관심이 없었던 건 뭔가 덜 떨어져 보이는 외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나의 편견도 50미리 엘마를 쓰면서 사라졌고 라이카 올드 렌즈 특유의 굵은 표현력과 질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주마론도 참 궁금해졌다.


주말에 나가서 얼른 찍고 결과물 좀 보여달라고 후배를 재촉했건만 주말에도 연이어 출근이 잡힌 그는 좀처럼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었다. 나같으면 회사에 들고 가서라도, 점심을 굶고 나가서라도 후딱 찍어볼텐데 이 녀석은 궁금하지도 않은지 천하태평이다. 결국 안달이 난 내가 (근데 왜 내가 안달이..) 연락을 다시 했다.


“야 쓸 시간도 없는데 그냥 나한테 보내라. 내가 자~알 테스트 해줄게. 그리고 M6도 같이 보내. 알다시피 내 M3에는 35미리 프레임이 없어.”




주인보다 먼저 써보게 된 렌즈.


순둥이 후배는 형의 말에 별 대꾸도 않고 카메라를 다음 날 보냈다. 물론 한 마디를 하긴 했다. 경주에 지진 자꾸 나는데 자기 카메라 잘 지켜달라며… -_-  어쨌든 평일에 무조건 도착하게 하라는 지시를 잘 지켜 금요일 오후에 택배가 도착했다. 사무실에서 박스를 호들갑스럽게 뜯어봐야 ‘저건 또 뭘 샀나?’ 하는 팀장의 눈초리만 받을 것 같아 박스를 안고 차로 쏙 들어와서 뜯었다. ‘자식, 딴에 엄청 아끼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하게 완충제가 들어간 포장을 풀자 그의 M6와 주마론이 나타났다.





가까이 있는 지인은 늘 블랙 바디에 실버 올드 렌즈의 조합이 참 예쁘다고 얘길 했었다. 깔맞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리 공감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나쁘지 않다. (물론 블랙페인트 IId였어야 더 멋질 듯..)





렌즈 상태도 꽤 괜찮아 보인다. 외관은 아주 깨끗하고 렌즈 알의 코팅이 상한 부분도 없어 보인다. 밝은 빛에 비춰보면 내부의 헤이즈나 클리닝 기스가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까진 해보지 않았다.




Summaron으로 찍은 두 롤의 흑백 필름


새 카메라, 새 렌즈를 만져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비록 내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M6를 가지고 놀며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감상하며 금요일 오후를 버텼다. 내일 좀 찍어줘야지. 당장 찍을 것도 아니면서 AGFA APX100 한 롤을 넣었다. 역시 퀵로딩이 편하긴 하구나. M3가 갑자기 조금 원망스럽다.




첫 테스트 : 2016.09.24. 포항 / Agfa APX100


토요일 오전, 집에 놀러온 처제네와 함께 포항 환호해맞이공원에 나들이를 가서 M6와 주마론을 꺼냈다. 카메라 보는 눈이 이제 예리해진 와이프가 ‘그건 또 뭐야?’ 라고 물었지만 준비했듯이 당당하게 후배의 카메라라고 얘길했다. ‘이젠 카메라도 돌려 써?’ 라고 했지만 그 이상 잔소리는 없었다. 가족들과 산책을 하며 유유자적 몇 컷을 찍고 오후에 장보러 간 효자시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 롤을 모두 소진했다. (그렇다. 지난 포스팅에 썼던 GR1s 테스트와 같은 날이다.)





환호해맞이 공원에서 내려다 본 영일만 바다. 노출차가 극명한 상황을 일부러 택해보았는데 역광에서의 빛 번짐도 없고 넓은 계조를 보여준다.





오후의 테스트는 장보러 효자시장에 온 김에 주변을 돌아다녔다.
저 쪽 골목 끝에서 자전거 한 대가 오는 것을 봤다. 건물 뒤에 몸을 숨기고 렌즈의 거리를 5피트(약 1.5미터) 정도에 맞춰두고 조리개를 조였다. 그리고 잠시 뒤 자전거가 다가온 순간 카메라를 들어 바로 셔터를 눌렀다. 약간 흔들렸는데 의도치 않게 패닝효과가 되어 다행이다.





늦은 오후의 낮은 햇살이 만들어주는 그림자는 별 것 아님을 알아도 자꾸만 찍게 되는 매력이 있다. 자신의 그림자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의 심리는 무엇일까. 거울에 비친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자신감 부족? 아니면 은연 중에 나를 보이고 싶은 욕망? 일단은 흑백에 어울리는 질감이 좋아 찍었다. 계조가 참 좋다.





누가 지나가길 기다렸으나 실패.





위의 컷을 찍고 자리를 옮기니 이런 타이밍이 온다. 역시 급하게 눌러서 흔들렸으나 아까보다 더 패닝이 잘 됐다. 패닝 전문작가로 나서볼까 하는 1%의 객기가 잠시 솟았다. 하지만 이거슨 필름. 비싼 필름으로 이제 그런 짓은 못하겠다. 그리고 원래 이런 컷은 하려고 하면 잘 안되더라는 건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진실이다.




두번째 테스트 : 2016.09.26. 경주 / Kodak 400TX





회사에서는 저녁도 준다. 고맙게도.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는 건 칼퇴를 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의사표시가 되버린다. 저녁을 먹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칼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녁 먹는 대신 나는 카메라를 들고 회사 뒷 길을 빠져나와 인근 촌 동네로 왔다. 용명리사지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차에서 내려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저 덩쿨은 더 올라갈 줄이 있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라는 쓸데없는 궁금증이 들었다. 평소라면 이런 건 찍지도 않았을테지만 흐린 날의 희뿌연 풍경들이 이 날따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런 날씨의 풍경은 ‘덜 떨어진’ 주마론의 성능과 어울어져 뭔가 회화적 이미지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이 곳은 몇년전 경주개 ‘동경이’ 마을로 지정된 곳이다. 동경이는 진돗개와 비슷한 생김새이나 꼬리가 아주 짧은 것이 특징으로 경주 지역 토종견으로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아쉽게도 마을에서 개 그림만 잔뜩 보았을 뿐 정작 동경이는 한 마리도 보질 못했다.





용명리사지 삼층석탑. 그리 큰 탑은 아니나 균형미를 갖춘 세련된 탑이다. 탑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서 쉬고 계셨다.





평소 조리개를 개방해서 사진 찍을 일이 많이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렌즈 테스트차 빌려온 것인데 이런 컷은 하나 찍어봐야하지 않나 싶었다. 보들보들 예쁘기만 한 현행 렌즈들의 보케에 비해 더 아련하고 따스한 느낌이 참 좋다.





요즘은 해가 짧다. 흐린 날이라 더 어둡고 더 이상 찍기는 힘들것 같다. 그래도 400TX를 넣길 잘 했다 생각하며 길을 내려간다.




세번째 테스트 : 2016.09.27. 경주 / Kodak 400TX





오늘은 해가 나왔다. 그래서 또 저녁을 안먹기로 했다. 이렇게 밥까지 굶어가며 사진질을 하고 있노라니 진작 공부를.. 아니 공부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도 이렇게 열정을 다했다면 대성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 대성할 수 있을까?) 지나다니면서 꼭 찍고 싶던 낡은 이발소를 담아봤다.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며 좁고 어둑한 실내에서 21미리를 가지고 1600으로 증감한 400TX로 다큐를 찍고 싶지만, 그 전에 일단 내 머리를 그에게 맡기며 말문을 트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리라. 물론 내 머리를 그에게 맡기는 것에도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하교길의 아이들. 작고 여린 여학생들의 그림자가 비현실적으로 커지는 오후의 낮은 빛





다 쓰러져 가는 헛간과 아무렇게나 심은 호박에선 꽃도 피고 저 멀리에는 아파트가 보인다. 건천 지역은 인근 산업단지가 커지면서 유입 인구가 늘고 새 건물들이 많이 생겨나 몇년전에 비해 스카이라인이 많이 달라졌다.





지은지 얼마나 된 집일까. 벽의 단면만 찍은 이 장면만으로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은 주마론이 1950년산이니 그와 비슷할까? 아니 오히려 이 집이 덜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교길의 여학생. 하늘이 넓게 들어가는 역광에선 콘트라스트가 낮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런게 또 올드 렌즈의 맛이라면 맛이고 재미라면 재미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지 제 몸만한 트렁크를 들고서 씩씩하게 걸어가던 여학생. 대문 옆에 투박하게 쓴 ‘방있음 2층’이 인상적이었다.





지진의 흔적. 곳곳에 돌담이 무너진 집들이 제법 보였다. 살면서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공포였다.





건천1리 공부방.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서울(특히 이른바 강남 8학군)과 이런 시골의 학업 성적, 상위 학교 진학율의 차이가 많이 나는 건 결국 개인의 역량보다도 주어진 환경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은 아닐까. 경쟁의 수준 부터가 다르기에 여기서 공부를 좀 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막상 나가보면 우물안 개구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그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 일지도 모른다.





대략 이렇게 일주일간 갖고 놀며 두 롤의 흑백 필름으로 주마론을 겪어봤다. 충분한 소회를 풀어내기에 일주일은 짧은 기간이었고 72컷으로 이 렌즈의 특성을  파악하기에 나는 너무나 막눈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흑백 사진을 위주로 찍는다면 굳이 비싼 주미크론이 아니어도 라이카의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한 렌즈라는 점이다. 세필로 그린 듯한 섬세한 묘사력과 뛰어난 왜곡 억제력,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성능의 주미크론 ASPH도 좋지만 약간 뭉툭해진 2B 연필로 그린 듯한 굵고 묵직한 묘사를 보여주는 주마론의 느낌도 개인적으로는 참 마음에 들었다.


주머니가 가벼워 대안으로 택했던 땜빵 렌즈가 이 정도라면 사실 더 바랄게 없다. 후배에게 다시 렌즈와 카메라를 싸서 보내며 문자를 보냈다.


“야 렌즈 대박 좋더라. 잘써라.”


(그리고 이 렌즈를 써본 덕에 나는 뜬금없이 2.8cm Summaron에 꽂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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