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23

 두번째 진주성 답사. 2003년 여름에 학군단 동기 둘과 진리산 종주를 마치고 내려온 곳이 진주라 잠깐 들렸었지만 다시 와보니 새롭다. 답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이동간에 진주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사실적으로 기술된 '이순신의 두 얼굴'이란 책에서 1,2차 진주성 전투 부분만 발췌해 읽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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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서 바라본 성의 북쪽. 지형을 끼고 도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읍성 형태이지만 사실 그다지 방어에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 작은 성에서 수만의 왜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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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안에서 내려다 본 성밖 진주 시가지의 모습. 왜란 당시에는 총안구를 비롯한 성곽이 지금만큼 완벽하진 않았겠지만 이 얼마 높지도 않은 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활과 총통을 쏘아대며 죽을힘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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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생각없이 온다면 괜찮은 산책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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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는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으로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수군의 연전연승에는 이와 같은 우수한 화포의 위력과 튼튼한 판옥선의 함선구조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위 총통들에 장전된 무기는 대장군전이라는 일종의 관통탄으로 수군들에 의해 많이 쓰였다. 요즘으로 치면 하푼 대함미사일 정도? -_-;
우리 포병의 병과 마크에도 총통 2자루가 교차하고 가운데 대장군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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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에 대한 컴플렉스. 굳이 추장이라고 명칭할 필요가 있었을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은 왜란 동안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의 전공도 전공이지만 특히 선조의 왕자들이 가토에 의해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우월한 전력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에 가토를 포위하고 수일동안 공략했으나 악귀처럼 농성한 가토는 결국 조명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격퇴시키는 등 우리에게 많은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일본의 맹장이었다. 일제의 말도 안되는 주장인지 모르겠으나 '쾌지나 칭칭 나네~'에서 쾌지나 칭칭이 '가등청정'나오네~에서 변형되어 구전된 것이라는 말도 있으며 조선의 집에서는 악귀를 쫓는 신앙물로 가등청정 인형을 두기도 했다는 등 가토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은 상상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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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 죽을 힘을 다해 농성한 울산성 전투도. 당시 왜군의 처절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가토 기요마사는 왜란 참전 일본장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는데 실제 고니시의 부대와 벌였던 충주 탄금대 전투도 가토의 부대와 교전끝에 신립의 조선군의 전멸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노인이 있었을 정도다. 우리에겐 아주 악질같았던 생각도 하기 싫은 일본 장수의 이름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였던 것이다. 이 비문에도 결국 가등청정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억지로라도 격을 낮추고 싶었는지 추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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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 2차 진주성 전투로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에 살아있던 모든 조선 사람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개, 닭까지 모조리 죽였다.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도요토미의 직접적인 지시로 이루어진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성 함락 후 위의 촉석루에서 연회가 벌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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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바위 의암에서 논개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웃긴것은 20세기 초반 군국주의 일본이 과거의 침략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포장하는 과정에서 병신같이 여자 안고 히히덕거리다 물에 빠져 죽은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미화하고자 논개를 그 병신의 연인으로 둔갑시켜 일본에 사당까지 만들어뒀단 것인데.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에서 발칵 뒤집혀 난리 좀 떨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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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논개는 기녀였는지 아니었는지 설이 분분하다. 위와같이 '義妓論介'라고 써진 비각이 있는데 의기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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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아래 쪽은 남강을 끼고 있는데다 절벽위에 성벽을 더 쌓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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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내에는 3.1운동기념비는 물론 6. 25당시 진주지구전적비도 있는데 아무래도 진주성의 메인테마는 임진왜란 당시의 장렬했던 두 번의 전투라 얘네들은 곁다리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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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좀 되었으나 온 김에 안 보고 갈 수는 없어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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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기본 테마는 임진왜란. 조선과 왜의 장수 투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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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자료. 왜란 후 무공을 세운 무장들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 졸렬한 임금 선조를 따라다니며 도망다니기 급급했던 문신들은 수도 없이 많은 상을 받아놓고 싸움터에서 분투한 무장들에게 내린 논공행상은 선무공신이 달랑. 선무일등공신에 봉해진 3명 중 2명은 그나마 전사한 장수다.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 그 3명이다. 사실 원균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하고 조선 수군이 전멸하게 된 것은 결국 해전에 어두웠던 도원수 권율의 책임과 선조의 무능함이 크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사수하고 전사한 김시민은 2등에 봉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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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 순절도. 1592. 4. 15. 부산진을 함락시킨 다음날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여 싸우겠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는 팻말을 세우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戰死易假道難'(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비장한 글을 적어 던졌다. 이 그림에는 동래성남문 앞에 떨어진 송상현이 쓴 글과 성을 넘어 도망가는 이곽(?..이름이 지금 기억이 안나는데..동래성의 장수. 후에 결국 적전도피죄로 참형당하는데 저리 도망하면 어쩌겠단 말인지.)의 모습, 성이 함락되자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한 후 한치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는 송상현의 모습등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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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 당시 양국의 갑옷 및 병기 비교. 우리 장수의 갑옷은 대부분의 기마민족들이 그러하듯 보호성보단 기동성과 움직임에 중점을 둔 가벼운 형태의 것이고 일본의 것은 오랜 전란을 겪으며 상당히 세심한 방호능력을 가지고 있다. 팔목은 물론 손등까지 덮을 수 있는데다 가면 형태로 얼굴도 박아주는 등 칼 위주의 근접전에 능한 일본의 전술과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장수의 투구와 갑옷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없어져 보존 상태가 훌륭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밖에도 진주성과 진주성 내에 있는 박물관에는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이 정도로 마치고.. 제발 때와 장소를 못가리는 개념 안드로메다 간 인간들이 좀 사라지길 희망해본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뭔가 확 치밀어 오를 때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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