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집 맛집인가 보네요? 오리지날이네."

칼국수 한 젓가락을 후루룩 입 안에 넣은 그가 뱉은 한 마디에 조금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린다. 제법 따스해지던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회사에 가봐야 한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와 회사 근처에선 그런대로 맛이 괜찮은 칼국수 집에서 마주 앉았다. 그와는 오늘이 첫 만남이다. 

길게는 10년 이상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고 부러 만남을 가질 기회도 없었고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만남은 아주 작은 것에서 이루어지는 법. Nikon F3용 웨이스트레벨 파인더인 DW-3를 구하신다는 P형의 글을 보고 내가 가지고 있는 DW-3를 빌려(?)드리기로 했던 것이었다. (가격 태그까지 있는 신동품이었다!) 우리 환자들에겐, 아니 남자들에겐 서로 만나보고 싶었다는 말은 차마 쑥스러운 것이다. 이럴 때 장비질은 참 좋은 핑계 거리가 된다. 




DW-3를 꽂은 Nikon F3를 들고 있는 P형


웨이스트레벨 파인더 따위야 그런 핑계에 불과했다는 듯 사진 이야기, 카메라 이야기, 오디오 이야기 등등 두서없는 잡설을 나누다 보니 국수 그릇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초면의 남자 둘이서 칼국수 한 그릇 달랑 먹은 것 치고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일행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파전이라도 한 접시 같이 대접했을 것인데 고작 둘 뿐이라 그러지 못한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 정도가 딱 좋다. 배가 너무 부르면 사진 찍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늘 그와 같이 둘러볼 곳은 경주에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흔적으로 정했다. 경주라면 그도 수없이 다녀왔을 터, 황룡사지나 분황사, 남산 곳곳의 불상과 탑들을 굳이 다시 돌아다닐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물론 언제 가도 좋은 곳들이다.) '경주는 신라'라는 뻔한 공식에 대입하여 다니기 보다 그와는 좀 '학구적'으로 색다른 곳으로 다녀보기로 했다. 




첫번째로 들른 곳. 경주경찰서 맞은 편에 있는 '화랑수련원'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근대 건축물의 느낌이 물씬나는 이 곳은 일제 시대 당시에는 '야마구치 병원'이었던 건물이다. 일제 시대 당시의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도 한번쯤 찾아볼만한 곳이긴 하지만 이 병원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이야기가 곁들여져야 더 의미있는 발걸음이 된다.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이른바 '얼굴무늬 수막새'


1932년 경주 영묘사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 수막새는 경주의 골동품상 구리하라에게 넘어갔고 이를 경주에서 공익의사로 근무하던 '다나카 다카노부'가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일하던 오사카 긴타로가 이를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1932년 06월호에 아래와 같이 소개하게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자의 웃는 얼굴을 조각한 회백색 기와…신라 와당 중에서도 아직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섬세한 문양이 특히 이색적" 

그 후 1940년 다나카씨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수막새도 일본으로 가져가 우리는 다시는 이 수막새를 볼 수 없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수막새를 기억하고 있던 박일훈 경주박물관장은 반드시 이를 되찾고 싶어했고 수막새를 처음 소개했던 오사카 긴타로에 연락하여 수막새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여전히 다나카씨가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돌려받기 위해 박일훈 관장은 서신으로 연락하며 간곡히 부탁을 했고 오사카 긴타로 역시 다나카씨를 설득하여 결국 1972년 다나카씨가 방한하여 기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다나카씨가 근무하던 곳이 바로 위 사진의 야마구치 병원이었다.

일견 훈훈한 일화이기도 하나 곱씹어 볼 수록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제시대 동안 한국의 골동품 수집에 혈안이 된 일본인들 때문에 전국의 고분들은 철저하게 도굴되었으며 이 때부터 골동품은 돈되는 물건으로 인식이 되어 해방 후에도 이 같은 도굴은 끊이지 않게 된다. 이 기간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사의 조각이 얼마나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렇게 돌아온 수막새보다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일본식 사찰 '구) 서경사'에 왔다. 교토도 아닌 경주 한복판에 이런 건물이 남아있다니 무척 신기하다. 전국 각지에 있던 신사는 당연하고 일본 불교 사찰건물들도 대부분 사라져 현재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 귀한 구경에 속한다. 여담으로 현재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으로는 군산의 동국사가 가장 유명한데 동국사 역시 김영삼 정권 시절 조선총독부 폭파쇼처럼 사라질 뻔 했으나 결국 보전하기로 하여 거의 원형 그대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세번째 들른 곳은 경주문화원. 조선총독부 경주 분관으로도 쓰였고 현재의 국립 경주박물관이 개관되기전까지 박물관으로도 쓰였던 곳이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이 새로 건축된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걸렸있던 종각 도 위치하고 있다. 




논어의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에서 따온 '온고각'이란 건물의 현판이다. 이 곳에 온 이유는 바로 이것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 현판의 글씨를 쓴 자가 바로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다. 그가 1915년에 경주에 방문했을 때 기념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군인 출신인 초대 총독으로 가혹적인 탄압 정치를 펼쳐 악명이 높은 그이지만 그럴수록 그가 휘갈긴 글씨를 한번 보고는 싶었다. 의도적인지 모르겠으나 현판은 번듯하게 벽에 걸어주지 않고 바닥에 내려서 대충 기대어 두었는데 보존은 하되 적당히 하대해 주고 있는 듯해 보여 기분이 흡족했다. 그래도 현판에 대한 설명문과 함께 보이지 않는 뒷면의 사진을 벽에 걸려두어 관람객에 대한 배려는 충분히 해주고 있었다. 




경주의 옛 사진들을 설명해주고 계신 해설사분. 카메라를 든 수상한 두 사내의 관등성명을 무척 확인하고 싶으셨는지 '어디서 왔느냐, 뭐하는 분들이냐' 계속 물어보셨지만 뭐라고 딱히 답할 말이 없어 그저 '재미로 사진찍고 공부하고 구경다니고 그럽니다' 라고 대답했다.

 



여기는 일제 당시의 흔적은 아니지만 일본과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은 집경전 터다. 집경전이라 함은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시던 곳으로 조선 왕조 내내 가장 신성한 곳 중의 하나였다. 경주로 출장을 온 조정의 관료들은 아침마다 이 곳에 들러 배례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홀랑 타버린 후 일제시대에는 그 터 마저 밀리고 어진을 걸어두던 석조 건축물만이 달랑 남아 이처럼 주택가 구석에 쳐박히게 되었다. 




저 안에 어진을 걸어두었던 것. 화재 예방의 목적으로 저렇게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고는 하는데 국내에 저런 형태의 석조 건축물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주 원시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단순한 형태의 구조물이라 무척 특이하여 어떤 의미가 담긴 형태인지 궁금하나 짧은 지식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여담으로 조선 왕조 역대 임금의 어진은 태조부터 모두 다 근래까지 잘 보관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종묘에 보관 중이던 어진들은 서울이 함락되면서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는데 서울이 수복되고 나자 다시 서울로 옮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가기 바로 직전 어느날 밤, 창고에 화재가 발생했고 몇 점을 제외하고 모두 홀랑 불타버렸던 것이다. 화마속에서 겨우 건져낸 것은 영조와 철종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정말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진은 일제시대에도 감히 무엄하게 사진으로도 찍어두질 못해서 이 화재로 우리는 영영 세종대왕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어진이 남았다면 오늘 날 우리 만원짜리에는 인자한 모습의 세종대왕이 아니라 쳐진 눈에 디룩디룩 살찐 세종대왕의 리얼한 얼굴이 그려져 있을 수도.. 안타깝기 짝이 없는 어진의 소실이지만 그것 또한 하늘이 정한 바, 조선의 운명이고 업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만으로 35년이 조금 안되는 기간 동안 이 땅을 지배했던 일제의 흔적은 이제는 막상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도처에 세워졌던 그들의 신사는 패망 후 그들이 먼저 불살랐고, 우리 역시 그런 것들은 당연히 깨어 부수었다. 거기에 뒤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은 일제 당시의 흔적을 갈아엎어 버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개발로 또 사라져 갔던 것이다. 무언가 귀해지려면 희소해야 한다. 일제의 흔적을 귀한 것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찾아보기 어려워진 오늘날에는 남아있는 당시의 흔적을 찾아봄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만 일제의 흔적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남아있으며 이는 그런 면에서 우리의 언어, 생활, 문화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일제의 잔재와도 비슷하다.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눈에 띄지 않고 자각하기 어렵다. 





곧 5월이라 날씨가 제법 더웠다. 오늘의 답사는 마치기로 하고 근처의 까페에 들어섰다. 주말이지만 손님은 우리 둘 뿐이다. 테이블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보니 오늘의 만남이 원래는 F3용 웨이스트 레벨 파인더 때문이었음이 다시 한번 상기된다. 노안이라 힘드시다 하셨지만 심도 깊은 20미리를 꽂아 잘 써주시길...


유명한 명승 고적이 아닌 이처럼 볼품없고 소소한 유적을 찾아다닐 때 말동무가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P형과 함께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싸구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2016.04.30.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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