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에 갈 때면 언제나 카메라부터 챙긴다.




옷가지며 세면도구 등 챙길 것이 무척 많은 아내가 짐 싸기에 분주한 사이, 나의 어느 카메라를 가져 가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 이 놈 저 놈 한참을 들었다 내렸다 하다가 아내의 시선이 신경 쓰일 때 쯤 결국 손에 잡히는 녀석 하나를 몇 롤의 필름과 함께 가방 한 구석에 쑤셔 넣는다. 길게 고민해 봤자 결국은 수십년된 낡고 속닥한 카메라들 중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롤라이 35가 될 때도 있고 콘탁스나 바르낙에 렌즈 몇 개가 더해 지기도 한다.




내 처가는 경북 청송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발전이 가장 더딘 곳 중 하나인 이 곳에 나의 처가가 있다. 마을 입구의 잘 가꾸어진 솔밭과 주변의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고 계곡에 흐르는 작은 개천과 개천을 따라 이어진 논밭, 그리고 낮고 소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 곳에는 어느새 보기 힘들어진 제비들도 여전히 찾아 오는데 녀석들의 날렵한 비행을 구경하거나, 달 밝은 여름밤 열어둔 창문 너머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잠 드는 것은 내가 처가에서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신행을 다녀와 처음으로 자던 날, 해가 어둑어둑해진 후 동네 곳곳에서 은은하게 퍼져오는 군불 연기 냄새를 맡으며 조금은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을 안 공터에 있는 게시판. 저기에 마지막으로 공지가 붙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늘 궁금하다.






이 곳에서 자란 나의 아내는 여름에는 물고기와 가재를 잡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동네 오빠야들을 따라 뒷 산을 내달리고, 보자기를 휘감고 논두렁에서 뛰어내리는 슈퍼맨 놀이 따위를 하며 즐거운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마치면 버스비를 아낀 돈으로 점방에서 군것질을 하고는 세상 바쁠 일 없이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집까지 처제와 재잘거리며 걸어오곤 했는데 우연히 장인 어른의 경운기라도 만나는 날이면 ‘아빠!’하고 달려가 경운기 뒤에 타고 올 수 있었다며, 그게 그 때는 그렇게도 좋았다고 하는 나의 아내. 나는 아내가 그런 소박하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음이 감사했고 나의 처가가 그런 곳이라 퍽 마음에 들었었다.







외가에서 시골의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건 딸냄을 위해서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처가에 도착하면 보통의 경우 장인어른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한겨울의 농한기를 제외하곤 장인어른은 언제나 사과밭에 계시는 것 같다. 두어차례 왕복하며 차에 실린 짐을 날라두자 마자 나는 곧장 장인어른께 인사 드리러 사과밭으로 가곤 한다. 




사과밭으로 가는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대추 나무가 하나 있다. 도랑 옆의 둑 위에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그 대추 나무는 제대로 관리된 조경수보다도 훨씬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데 계절과 시간대 마다 달라지는 빛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장면들이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논 너머 산자락에 곧게 뻗은 낙엽송들이 배경으로 멋드러지게 어우러져 꽤나 그럴싸한 풍경이 되어 준다. 







아마 처가에서 가장 많이 찍었던 풍경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대추나무를 두어컷 찍어주고 나면 장인어른의 사과밭에 도착한다. 이쑤시개 같던 묘목들을 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빽빽하게 우거진 사과밭 이 골 저 골을 오가며 장인어른이 어디 계신가 찾는다. 


'어, 왔나? 피곤한데 쉬지 뭐하러 왔노?' 


늘상 있는 장인어른의 첫 마디다. 올 해는 폭염 탓에 사과들도 버티지 못해 농약을 쳐두지 않으면 다 상할 판이라며 다시 바삐 움직이신다. 도와드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모양새가 좋겠는데 할 줄 아는 거 하나 없으니 '날씨가 이래서 어쩝니까.' 하며 괜시리 주변을 서성일 뿐이다. 그렇게 얼마간 옆에서 기웃 거리고 있다 보면 장인어른도 신경이 쓰이시는지 이만 물러가라 하신다. 


'날 뜨거운 데 집에 내려가 있재?' 


그제서야 나는 못이기는 척 사과밭에서 나온다. 







하늘에 달린 일 인지라 어찌 할 수 없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 장인 어른의 속도 타들어 간다.  






땅 한 줌 없이 이 마을로 들어 오셨던 장인, 장모님은 그야말로 두 분의 땀과 눈물로 한 평, 두 평 논밭을 늘려 가며 아내를 포함한 삼남매를 반듯하게 키워 내셨다. 이제 좀 쉬셔도 될 법한데 땅 노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게 농부의 천성인지라 농사 좀 줄이라는 자식들의 원성에도 '내년부터는...' 이라는 말씀만 몇년째다. 







산 중턱을 개간한 고추 밭은 그렇게 두 분 삶의 터전이 됐다.






능소화가 지고 구절초가 피기 시작하면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바로 고추와 사과 수확철이 다가오는 것. 이 시기가 되면 누구보다 착한 우리 처남은 회사 일이 바빠도 꼭 휴가를 내고 내려와 큰 힘이 되어 준다. 막내다 보니 아직도 어린 취급을 당하며 매번 장인 어른의 괜한 잔소리를 듣긴 하지만 그래도 보고 배운게 있어 나름 전문 기술(?)을 요하는 일을 맡아 묵묵히 큰 몫을 하는 반면, 아는 게 없는 나와 동서는 그저 몸으로 떼우는 단순노무직을 맡는다. 따놓은 고추 포대나 사과 상자를 나르는 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분야. 학교 다닐 때 야구를 해서 그래도 좀 건장한 동서와 달리 나는 허우대만 멀쩡한 약골이라 사실 이 마저도 시원찮다. 







그 해 마지막 고추를 따던 날, 허리를 숙인채 작업해야하는 고추 수확은 '놉'하는 할매들도 꺼릴 정도로 고되다.







장인어른 만큼이나 말수가 적은 처남이지만 부자지간의 호흡에는 말이 필요없어 보인다.






일하는 와중에도 주머니 속의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대는 철부지 같은 사위에게 어느덧 적응이 되신 탓에 장인장모님을 비롯한 처가 식구 그 누구도 이제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던 한번은 역시나 일 하다 말고 갑자기 카메라를 빼어든 나를 보고 장모님께서 물으셨다. '우서방, 사진은 그렇게 찍어서 어디다 쓰려고 그러나?' 딱히 그럴싸한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그저 '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겁니다.' 하고 대답했고 '이런 것도 찍어서 다 쓸 데가 있나?' 하고 장모님은 그저 웃으셨다. 그 순간, 장모님이 보여준 그 웃음이 나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10여년 전 나는 로버트 카파의 사진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어찌나 그의 사진을 들여다 봤는지 어느 날은 디데이에 독일군의 MG42 총탄이 쏟아지는 노르망디 해안에 서 있는 듯한 착각(환각?)마저 들면서 심한 두통이 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 때는 정말이지 카파처럼 세상을 돌아 다니며 원 없이 사진만 찍으며 살고 싶었다.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나이가 들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현실의 부대낌 속에서 '사진까지 꼭 그렇게 치열하게 해야 하느냐!' 는 자기 변명의 방어기제는 날로 두터워져 갔고 이런 저런 핑계가 많아질 수록 그에 비례해 나의 사진은 참을 수 없이 가여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럴싸한 흉내를 낸들 나를 속일 수는 없었고 다가가도 다가간 게 아니란 걸 알게 될 즈음 나는 비로소 욕심을 버렸다. 아니 그래야 했다.




구글 캘린더에 빼곡히 적힌 회의 일정과 당면 업무들을 체크해 나가며 한 주 그리고 또 한 주를 넘기는 삶이란 얼마나 건조한가. 갖고 싶던 렌즈를 구하느라 일전에 연락드렸던 L선생님은 한번 잘 찾아 보겠노라며 '매화꽃 필 때까지는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답장을 보내 오셨다. 2월말이나 3월초가 아니라 '매화꽃 필 때' 까지라니. 봄은 그렇게 오는게 아니던가.  







여전히 공기는 차갑지만 햇살은 따스해지고 있다. 봄이 머지 않았다.






시퍼런 사무실 조명 아래서 인생의 대부분을 팔아 먹어야 하는 서글픈 인생은 경북 산간의 작은 마을에서 위로를 받는다. 넓은 하늘 아래서 빛과 계절의 변화를 비로소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 그리고 그 곳에서 서로 익숙해져 가는 우리 가족들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 눈 감으면 아련히 다가올 빛나는 순간들. 기억이란 무언가에 의존하기 마련이라 필름에 담아두지 못하면 곧 잊혀질 것만 같은 강박을 어찌 하지 못하는 나는 짐 안챙기고 또 카메라만 챙기느냐는 잔소리를 들어도 꿋꿋이 카메라부터 가방에 쑤셔 넣는다. 




처가에서 찍어온 흑백 필름을 현상하고 스캔했다. 평소 '쓸데없는' 내 사진들을 볼 때와는 달리 제법 오랫동안 물끄러미 사진들을 바라보던 아내에게 '우서방, 그렇게 사진 찍어서 어디다 쓰려고 하나?' 하셨던 장모님의 질문에 해야했던 대답을 들려 주었다, 





'나중에 보면 눈물 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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