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창고가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은 '서재'라고 부르고 싶은 내 방 책꽂이 한 켠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수백롤의 필름이 차곡차곡 담겨져 있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필름들을 보다 못한 와이프가 넣어준 것들이다. 내 저것들을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텐데 하며 가끔 노려보기도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만다.


'에이, 나중에 하자.'


그러다 지난 금요일밤 괜히 한번 상자를 열어봤다. 마구잡이로 섞인 필름들을 천장의 형광등에 비추어보며 간만에 추억에 젖다가 송도 해수욕장을 촬영한 필름 하나를 발견했다. 36컷을 모두 살펴봐도 그 필름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는 단 한 컷도 없었다. 메모조차 해두지 않아 언제 찍은 건지도 알 수 없는 필름 속 이미지들은 전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빠듯한 용돈 사정으로 인해 인화지 한 장이 아쉬웠다. 그래서 굳이 '불필요한' 밀착 인화는 생략했고 확대 인화 역시 한 롤에서 고르고 고른 몇 컷 외에는 하지 않았다. 이 버릇은 나중에도 그대로 이어져 스캔할 때도 한 롤 전체를 긁지 않고 네가티브를 비추어 보다 괜찮다 싶은 몇 컷만 추려 스캔을 해왔기에 네가티브를 보다가 새롭게 눈에 띄는 컷이 있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롤에서 한 컷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아도 이 건 단 한 컷도 스캔하지 않은채 쳐박힌 필름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도대체 이 필름은 왜 버림받았을까? 일단 한롤을 채로 긁어보기로 했다. 







송도의 뒷골목 입구에서 부터 내 발걸음은 시작되고 있었다. 







모래사장의 유실로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송도 해변의 회생을 포기하고 해안 도로가 건설되던 때의 막바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산책로는 거의 다 되었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던 시점이다. 







지금 평화의 여신상이 있는 광장 해안 축대 옆의 테트라포드들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산책로에는 아직 모래가 많이 남아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아이들이 두꺼운 차림에 장갑까지 끼고 있는 걸 보니 제법 추운 날이었나보다. 







우리의 기억은 이미지와 글에 얼마나 의존적인가. 21미리로 강아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찍었을 정도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현상 후 스캔조차 하지 않았던 탓에 이날 촬영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송도 해변 일주도로 건설을 맡았던 청구 건설의 현장 사무소







송도 해변 방파제 위에는 허름하고 어설픈 포장마차촌이 있었다. 송도 해수욕장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이 곳도 사라졌다. 당연히 무허가 불법이었을테고 태풍이라도 오는 날엔 위험하기 그지 없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쉽기도 하다.







동남아의 수상가옥 마냥 방파제 한 귀퉁에 의지하여 바다 위에 자리 잡았던 포장마차들. 자리에 앉으면 판자로 만든 바닥과 천막 틈 사이로 파도가 출렁였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들으며 회 한 접시에 소주를 마시고 모래사장에 세워둔 차에서 눈을 붙히고 아침에 바로 출근했던 날도 있었다.







천막을 뒤집어 씌웠던 철골과 계단의 녹물이 방파제 바닥 곳곳을 붉게 물들였던 것이 기억난다.







배에서 내린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 손길들. 포장마차가 사라진 지금, 더이상 배들은 이 곳에 접안하지 않는다.







방파제 왼쪽의 풍경. 송도 해변과 포항 구항이 멀리 보인다. 늘상 보는 장면이라 새롭지 않지만 이곳이 동해안에 몇 없는 지형인 영일만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다소 과다현상이 되어 콘트라스트가 강한 네가티브가 되었다. 암부가 많이 죽었음이 느껴진다만 평소 사진의 톤에 비해 칼칼한 것이 또 나쁘지 않다. 







방파제에서 굿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인가, 요즘은 송도에서 굿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변해버린 방파제 위 풍경과 달리 송도의 퇴락한 뒷골목은 이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골목 사이를 누비면서 정적인 사진에 동감을 불어 넣고자 누군가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래본들 무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사진이 되겠나 싶다. 부질없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낡은 하얀 벽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흑백인데도 차갑고 투명한 겨울 공기가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려온다. 늙은 듯 ㄷㄷ







이 사진 덕분에 이 필름이 언제 찍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8년전의 블로그 포스팅에는 Nikon D700으로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이 날 찍은 파일은 모두 지워 버렸다는 내용이 있었다. 찍은 사진도 맘에 안들고 앞으로 어떤 사진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유와 함께. 아마 그래서 이 날 찍은 필름도 스캔조차 하지 않고 던져뒀던 듯 싶다. 





같은 위치에서 찍은던 사진. 이 컷을 제외하고 RAW파일은 모두 삭제됐다.






8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날 느꼈던 회의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뭘 찍어야 하고 뭘 표현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찍어야 하는가. 아니 그런 것에 답은 있는가. 답을 찾을 필요는 또 있는 것인가. 여전히 머리 속은 복잡하지만 이렇게 출토된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사진들이라도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니 기록으로라도 가치가 있겠다 싶으니 그건 또 다행이라 해야하나. 아직도 모르겠다. 





2009.12.26. 포항 송도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Kodak 400TX / 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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