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로 이어지는 토,일,월 황금연휴를 놓치지 않고 5월 2일(금)에 월차신공을 더해 3박 4일 일정으로 2004년에 이어 일본으로 향했다. 부산항에서 고속훼리를 타고 간 길이기에 목적지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였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하우스텐보스나 유후인으로 향하지만 그다지 흥미있는 곳이 아니었다. 규슈에 가게되면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가토 기요마사의 성인 구마모토성이었다. 후쿠오카 역에서 쓰바메 특급을 타고 내린 구마모토역에서 구마모토 성까지 도보로 이동하며 곳곳의 모습을 스냅으로 담으며 1시간 정도 후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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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은 마침 축성 4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동안 계절 단위로 나눈 축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을 3월 중순 ~ 4월초였다면 더욱 끝내주는 풍경을 보여줬겠지만 그만큼 붐볐을 생각을 한다면 뭐 이 정도 시점도 나쁘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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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구마모토성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동상이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한자 발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많이 부르는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을 떠올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가는 정도의 유명세(?)를 보유한 일본의 맹장이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의 많은 장수들 중 유독 가토 기요마사의 이미지가 강렬한 것은 동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하고 선조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은 전공 외에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성안의 모든 사람과 가축까지 몰살시킨 잔인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 특유의 갑옷 형태와 무사계급들의 상징이던 두 자루의 칼, 가토가 즐겨썼다는 긴 형태의 특이한 투구와 원모양의 문양까지 조각되어 있는 섬세한 형태다. 수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이 동상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웃고 있었다. 구마모토성에 한국인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이 동상과 그 앞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는 일본인들을 보며 이들이 과연 이 녀석이 저지른 잔인한 학살극을 알기나 할런지 하는 생각이 들며 우리에게 원수와도 같은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선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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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동상 아래에 있던 영문 설명문. 그의 삶을 간단히 요약한 이 설명에서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쪽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리가 일대 회전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언급만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는 이에야스의 편에 섰고 역시 눈부신 전공을 세우며 이 곳 구마모토 일대에 영지를 하사받고 구마모토 성을 7년에 걸쳐 세운다. 정작 우리에게 가토의 이미지를 심어준 임진왜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는데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에 대해 굳이 드러내기 싫었을테고 규슈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에 민감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오히려 그래서 구마모토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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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된 안내도 충실하다. 허접한 번역으로 인한 어색한 표현과 오류가 보이지 않는 완벽한 수준으로 규슈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임을 실감케 한다. 위 설명에 나오는 수많은 실전 경험 중의 하나인 정유재란 당시 울산성 전투에서 얻은 교훈 중의 하나가 구마모토성 건축에 영향을 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뒤에 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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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외곽의 해자. 이건 뭐 참호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거의 강이다. 상당한 폭도 폭이거니와 둑의 높이에 축대의 높이 만으로도 공격군의 기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고려 이후 중앙집권적인 왕권 조직을 갖춘 우리나라는 전쟁 발발시 중요 거점에 위치한 산성으로 이동하여 방어전을 수행하는 방식이었지만 일본은 19세기까지도 막부 체제 하 지방 영주들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며 각자의 영지에서 성을 쌓고 살았다. 더군다나 전국시대에 서로가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논리 속에서 일본의 성은 철저하게 실전적인 형태로 발전했을 듯하다. 우리의 거점 방어같은 형태가 아닌 하나의 요새로서 건설된 일본의 성은 이 처럼 해자에서부터 우리와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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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벽 위에는 위처럼 조총을 쏠 수 있는 총안구가 빽빽하다. 16세기 무렵 유럽에서 도입된 조총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서 조총의 충격은 6.25 때 겪은 북한의 T34 전차에 대한 공포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성은 이 처럼 사수가 완전이 보호를 받은 상태로 사격이 가능한 형태로 이루어져있어 실제 외부에서 내부의 사수를 조준해 명중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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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성의 중요한 특징. 바로 꺾어진 출입구. 성문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ㄴ','ㄷ'자형 등으로 꺾인 길을 통과해야 한다. 성문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아 화포나 공성기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될 수 있으며 성문으로 도달하는 동안 방향을 틀어야하는 공격군은 전방과 좌우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총탄으로 부터 몸을 숨길 곳이 없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이 성문을 보호하듯이 성문 전면에 반원형으로 외성을 친 형태가 일부 있긴 하지만 일본의 성처럼 보편적인 설계방식은 아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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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안에서는 축성 400백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 중이었다. 위 사진은 더운 날씨에 구마모토성의 마스코트 분장을 하고 고생 중인 어느 녀석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퀴즈를 내는 진행자인데 일본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대략 '구마모토성을 지은 사람은 누구일까요?'였다. 답은 당연히 가토 기요마사였고 곁다리 답안으로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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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의 가장 핵심부인 혼마루 쪽은 입장료를 지불해야했다. 500엔이었나. 우리나라 기준으로 봤을 때 입장료는 꽤 비싼 편이지만 그럼에도 성 안엔 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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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의 중심, 하긴 구마모토 성 뿐 아니라 일본식 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텐슈가쿠(天守閣). 엄청난 높이의 기단부 석축 위에 우뚝 솟아있다. 구마모토성은 일본의 3대 성(城)의 하나로 꼽힐만큼 그 규모와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실제 2004년 오사카성을 찾았을 때 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 때는 일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인지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인지도.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은 정말 진리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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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웅장한 건물을 보고 있노라니 화가 울컥 나기도했다. 우리나라를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가토는 자신의 영지에서 이처럼 웅장하고 강한 성을 지어서 부귀영화를 누렸단 말이지.. 가토가 7년 동안 공을 들여 지은 이 성은 19세기 세이난(西南)전쟁에서 많은 건물이 불타 사라지고 복원된 것이다. 오사카성도 히데요시가 지을 당시의 엄청난 규모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실제 일본 관광을 위해 알아보던 자료에서 보던 웅장하고 멋진 목조건물들은 대부분 원형대로 복원되었거나 아예 콘크리트로 재건축된 것들도 적지 않다. 2차 대전 당시 미공군 B-29 폭격기에 연일 융단 폭격 당했던 일본의 주요 도시에 있던 유적들은 더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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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유적, 구마모토성 안에 있는 우물터, 보호 철망이 덮혀져 있지만 우물의 깊이는 엄청났다. 안내 표지판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농성(籠城)에 대비해 구마모토성 안에 우물을 120여 곳이나 팠다고 되어있다. 여기서도 일본 녀석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생략하고 있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집착적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우물을 파게 된 계기는 바로 정유재란 당시의 울산성 전투였다. 가토가 주둔하고 있던 울산성을 완전히 포위한 조,명 연합군은 수일동안 공격을 퍼부었지만 가토 기요마사의 악귀처럼 공격을 막아 버터냈다. 더군다나 태화강 하구로 밀려오는 원군들로 인해 조,명 연합군은 퇴각하고 마는데 결국 막대한 인명피해만 내고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울산성을 사수한 가토의 군사들은 갈수로 인한 처절한 경험을 해야했다. 말을 잡아 피를 마시고 소변을 받아 마시기도 했으며 식량이 떨어져 성벽의 흙을 긁어 먹을 정도로 처절했던 전투가 울산성 전투였다. 가토는 할복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그가 구마모토로 돌아와 성 안에 우물을 120여개나 팠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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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으로 들어가는 바로 입구 쪽도 만만치 않은 경사의 성벽과 굽이굽이 계단과 통로로 성 내부에 진입한 적들이라 해도 천수각을 침범하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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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으로 들어가는 입구. 2004년에 갔던 오사카성과 달리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내부 개방이 되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아무리 든든한 축대 위에 세워졌지만 이처럼 많은 관광객이 올라가도 괜찮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내부는 애초 60년대 복원 당시 부터 박물관 형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란 측면에서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건물의 유지와 보수, 활용성 측면에선 합리적인 선택인 듯 했다. 저 문양은 가토 가문에서 쓰인 것 같았다. 가토의 투구는 물론 그릇 같은 생활 용품에도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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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넘의 우물은 천수각 안에도 또 있었다. 정말 울산성에서 고생 많이 한 듯. 일본 측에서 그린 울산성 전투도를 봐도 왜군은 처절한 상황을 겪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론 가토가 조명연합군을 격퇴함으로써 그의 무용담에 결정적 순간을 더해준 격이 되버렸지만. 여담이지만 사천왜성을 쌓고 남해안에 머물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명군을 박살내버린 무용담 역시 일본에선 나름 유명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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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초상. 이순신 영정이나 다 똑같이 생긴듯한 논개, 춘향이 영정 그림 처럼 상상의 그림이 아닌 당시에 직접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德이 느껴지는 상은 절대 아니다. 눈빛에선 냉정함과 교활함이 보이는 듯도 하고 감히 마주 보지 못할 강한 포스도 느껴진다. 일본에서 이처럼 그림이 남겨진 이들은 당시에도 권력이 있던 이들이고 대부분 무사계급이었으므로 우리 선비들의 상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 달리 험상궂고 거칠고 냉정한 인상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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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마사公의 생애'라는 전시코너 쪽엔 태어날 때의 일화부터 동네의 분쟁을 해결하는 대범함과 판단력을 보여준 성장기의 가토의 모습 등 가토 기요마사는 분명 일본의 영웅 중 하나로 추앙받는 듯 했다.  특히 군사 뿐 아니라 건축, 토목 등 다양한 방면에 재주가 많아 오늘날 구마모토현의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위 그림은 영지로 부임하는 가토의 모습인데 그가 썼다는 긴 투구와 문양인 'O'가 선명하다. 뱃머리에 서서 붉은 갑옷을 입고 서있는 가토의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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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투구가 위의 그림에 나오는 긴 형태의 투구.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썼던 바로 그 투구라고 한다.  다른 장수들의 투구와 달리 전투에 적합한 형태는 아니지만 가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좋은 독특한 모양이다. 가토가 저걸 쓰고 조선에도 왔었을거란 생각이 드니 400여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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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 꼭대기 층에 가까워 올 수록 전시물의 내용은 구마모토성이 불탔던 세이난(西南)전쟁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루기 시작한다. 사쓰마 군이 맹공을 펼치고 있고 구마모토성에서 군사들이 농성하고 있는 그림이다. 아쉽게도 세이난 전쟁에 대한 사전 지식은 거의 없었다. 관련 내용은 더 공부해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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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듯한 더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줄을 지어 겨우 올라간 천수각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천수각은 구마모토시 전체를 거의 조망할 수 있는 사령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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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까마득해 보인다. 우리나라에 황룡사 9층 목탑이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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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올라간 천수각을 내려와 전 날 편의점에서 사둔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충 떼우고 성을 빠져나와 다시 걸어걸어 구마모토역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 날 의외로 빡쎈 왕복 도보 이동경로와 천수각 내부에서의 지체현상에서 체력소모가 커 후쿠오카로 돌아가서 들르기로 계획했던 후쿠오카 타워와 후쿠오카돔은근처에도 못가고 호텔에 뻗어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머리 속에 최우선 순위로 잡혀있던 구마모토성을 봤기에 그 정도쯤은 생략해도 별로 아깝지 않았다. 이번 구마모토성을 찾음으로써 가토가 지은 성 3곳이나 답사한 셈이 됐다. 가토가 조선에 장기 주둔하며 지었던 울산성과 서생포왜성, 그리고 이번 구마모토성까지.


가토 기요마사라는 한 인물도 그렇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처럼 복잡한 생각이 교차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런지 모르겠지만 일본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수천년을 마주해온 우리는 또 앞으로 그렇게 일본과 손도 잡고 싸우기도 할 것이다. 구마모토성을 빠져 나오면서도 내 머리속에는 일본과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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