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8월쯤에 써두고 저장해둔 걸 이제서야 발견하고 포스팅.. 



 광복절 기념으로 읽을 만한 책이 없을까하고 알아보던 중 눈에 띈 책이 있었다. 바로 이연석이 쓴 "조선을 떠나며"라는 이 책이다. 부제로 '역사 논픽션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가 붙어 있는데 말 그대로 식민지 조선의 지배자였던 일본인들이 패망과 함께 어떤 일을 겪으며 일본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서울시립대에서 한국현대사와 한일관계사를 공부한 저자는 20여년간 해방 후 한반도로 돌아온 이들과 떠난 사람들에 대해 연구하며 그 중 일본으로 돌아간 조선의 일본인들의 에피소드를 엮어 이 책을 쓰게 되었는데 통속적인 역사서가 아닌 개개인의 일기나 회고담, 신문기사 등을 통해 상당히 피부에 와닿는 세밀한 묘사를 보여준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 당선작이라는 영예도 안은 우수작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광복 당시의 모습은 그저 좋아서 만세를 외치며 길거리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이게 다 아닐까? 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 현실적인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항복이라는 표현을 애둘러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전쟁을 마쳐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고 중얼거린 일왕의 이른바 '옥음방송' (옥음은 무슨 ㅋ)을 들은 조선인 중 그것이 일본의 패전 소식으로 알아들은 사람은 의외로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당시 경성의 조선인들의 라디오 보유율은 일본인 보유율 70%의 1/10수준으로 그만큼 라디오를 가진 사람도 적었고 설사 들었다 해도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 줄도 몰랐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인지 광복 당일의 서울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대부분의 증언이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일장기 위에 덧대어 그린 제각각의 태극기가 나붓기고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조금 늦게라도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우리는 그 후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패망한 이 땅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1944년 독일로부터 해방된 파리에서는 레지스탕스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독일 협력자에 대한 즉결 처분과 독일군의 애인이었던 여성들에 대한 조리돌림과 삭발 등의 다소 잔인하기까지 했던 처단들과 달리, 우리는 언제 조선의 일본인들이 학살당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나 있었는가.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않고 곱게 그들을 보내줬던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에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적격이었다.


이 책은 크게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1장. 뜻하지 않은 재앙, 패전

2장. 사면초가에 처한 조선총독부

3장. 잔류와 귀환의 갈림길에 선 일본인들

4장. 억류,압송,탈출의 극한체험

5장. 뒤집어진 세상을 원망하며

6장. 모국 일본의 배신

7장.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른 기억들


 보다시피 목차만 봐도 이 책의 내용은 감이 온다. 하지만 각 장을 읽다보면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여러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어느정도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은 물론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만약 지금 나라면, 우리라면 과연 어떠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 그 누가 자신있게 답할 수 있을까. 후세의 평가는 단호하고 명료하게 내릴 수 있지만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처한 현실 속에서 가치판단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통하여 깨닫게 된 사실 중의 하나는 바로 일본애들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언제나 질서정연하고 도덕과 예의를 중시하고 집단의 가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거라 여겨지던 일본인들도 극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하고 추하며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여과없이 보여주더라는 점이다. 8월 15일 항복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총독 부인 일행이 귀국(도주)할 배편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우습게도 이 배는 부산을 출발하였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다. 그 이유는 이들 일행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가려다 과적으로 배가 기울자 상당량의 물건을 바다에 버려야했고 급기야 기관 고장으로 부산으로 다시 돌아왔던 것인데 이 처럼 권력과 부를 지닌 일본인들은 미군정의 행정력이 미치기 전에 미리 갖은 꾀를 부려 재산을 일본으로 반출하고 탈출하려 했고 이 사실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적잖은 충격과 배신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추한 모습은 곧 나머지 일본인들에게서도 재현되게 되는데 미군이 진주한 이후 미군정은 일본으로 돌아갈 일본인들의 반출 재산의 부피를 한 사람당 짊어질 수 있는 정도로 통제하고 현금 역시 일정액을 이상의 소지를 금해버렸다. 결국 수많은 일본인들이 짐을 쌌다 풀고를 반복하며 최대한의 재산을 가져가기 위해 연습까지 해가며 기를 쓰게 되고 밀선을 통한 탈출도 이어진다. 또한 그 동안은 거래대상으로도 여기지 않았던 조선인들에게 그들의 살던 일본식 가옥과 부피 큰 가재도구와 사치품들을 팔아넘기는데 혈안이 된다.

  이 와중에 우리의 추한 모습도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일본인들이 내놓은 고급 물품들을 조선의 부호들이 눈독을 들이며 사다 모았고 이는 결국 조선내에서 유통될 화폐의 유출로 이어져 경제 질서를 교란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환수하거나 몰수해야할 적의 재산을 유상으로 사들이는 부끄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일본인들의 재산 매도 행위를 금지 시켜달라는 요청을 하자 하지 중장의 답변은 '조선인들이 안사면 될 것인데 자꾸 사니 그런 것 아니냐' 였다. 결국 '니 들도 참 무지하고 답답하다' 라는 짜증이 섞여 있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日帝는 증오하면서도 日製에는 환장하던 당시의 모습은 오늘날과도 사뭇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곧바로 귀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역시 당연히 그들이 패망했으니 모두 돌아간 것이 아니었겠나... 아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2차대전 패전이 곧 우리의 해방이라는 공식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해외 식민지는 유지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놓지 않았다. 특히 조선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해 점령한 지역과 달리 이미 그 전부터 일본에 병합된 곳이었기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더욱 그런 희망이 강했다. 더군다나 이미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에서만 자란 2세들은 그들이 내지라고 부르는 일본 본토에는 가본적 조차 없어 조선은 그들에게 당연한 고향이었으며 이미 경제적 기반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그들이 갑자기 생면부지의 본토로 돌아가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 중 대다수는 정국을 지켜보며 설사 한국이 독립하더라도 외국인 신분으로라도 남아있고자 희망했다. 

 거기에다 일본 정부는 패전과 동시에 해외식민지와 전장에서 수백만의 일본인이 일시에 본토로 귀국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폐허가 된 좁은 국토에 갑작스러운 인구 유입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전후 일본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조선총독부에 될 수 있는한 현지에 남을 수 있게 조치하라는 애매한 지시를 내렸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그야말로 멘붕에 빠져든다. 이같은 일본의 소극적인 송환 노력은 결국 사할린에 남아 돌아오지 못한 우리 동포들의 처지와도 무관할 수 없다. 자국민도 나몰라라 했던 그들이 식민지 징용자들에게 쏟을 정성은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조선에 계속 머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은 돌이켜 생각할 수록 아찔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바램대로 일본이 비록 패전은 했다지만 협상을 통해 인도차이나와 태평양 일대의 군도와 만주나 대만등 승전국의 식민지나 영토만을 반환하고 중일전쟁 이전의 영토는 보장받았다면 우리는 광복도 없이 2차 대전의 종전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랬더라도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들처럼 50년대 말부터 60년대를 즈음해 독립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국가들처럼 여전히 일본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 속에 허덕이고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러한 헛된 희망과 오판으로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순식간에 역전된 그들의 처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는 조선인들을 보고 일본인들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을 느끼고 두문불출하기에 이르렀고 경찰서나 관공서 등에 대한 공격과 테러도 이어졌다. 이 같은 이른바 '불상사건'이 수백건 정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그 상세한 내용과 정확한 피해 현황은 찾을 길이 없었다. (무조건 곱게 보내주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에 고소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각종 공장과 회사, 관공서 등에서는 하루아침에 조선인 직원들이 일본인 상급자들을 몰아내고 '자주관리'에 들어갔으며 개인적 원한에 의한 일본인들에 대한 공격과 테러도 빈번했으며 특히 경찰서 같은 곳은 많은 습격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 상급자 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해방과 동시에 그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인데 이들은 과연 친일파로 단죄해야할 대상인가 아니면 해방 초기 행정력 회복과 건국 준비 과정에 공헌한 자들인가에 대한 판단은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이다.

 적극적인 친일에 앞장서고 일제로부터 남작등의 작위를 받은 인물들이야 변명의 여지도 없지만 일제 치하에서 어딘가의 자리에 앉아 있었단 것 만으로 친일로 몰기에 이 땅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남을지도 고민이고 그렇다고 예외를 봐주기 시작하면 친일이 누가 있겠냐는 반문이 든다. 적극 가담한 자들에게는 엄벌을, 그 정도가 약했던 자들은 그들대로 적어도 어떠한 형태로든 약간의 죄값을 통해 갱생할 수 있는 절차가 있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같은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데는 우리 정치 세력의 분열과 미숙한 행정력을 믿지 못한 미군정의 독단적인 정책(기존 총독부 체제를 통한 행정 관리를 선호했던)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하여튼 해방 후 알다시피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게 되는데 특히 소련군이 진주한 38도선 이북의 일본인들은 비참한 1945년 겨울을 보내야했다. 미군과 달리 소련군은 진주하면서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하고 재산을 압류했으며 남자들은 시베리아 등지로 보내 강제 노동에 종사하게 했으며 일본인 여성들은 능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독일을 점령한 소련군의 만행과 별 다를 것이 없었는데 이 와중에 일본인들은 보통의 선량한 대다수의 일본 여성 보호를 위해 차라리 위안대를 꾸려 소련군에게 보내기도 했다. 직업 여성들을 우선 선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 여성들도 포함되었고 집답 수용소에 수용된 16세 이상의 일본 여성의 숫자와 이름을 소련군은 파악하여 관리하였다. 이를 피하기 위해 나이를 속이기도 하고 머리를 잘라 남장을 하기도 했으며 끌려간 딸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부모들과 소련군에게 능욕을 피하기 위해 자결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도 있다. 

 자기 동포 여성들 마저 자체적으로 선발하여 위안대를 만들어 소련군에게 넣어줬던 그들이 식민지 조선의 여자들을 정신대로 보내면서 과연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생각해본다. 군의 사기를 높이고 현지에서 성군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논리로 동원된 정신대에게 그들이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이처럼 자신들에게 가장 쉬운 해결책이자 소수의 희생을 통해 다수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필요악이었다는 자기 합리화가 너무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련군에 의한 가옥에서의 강제 퇴거 조치, 재산 압류 등으로 45년 겨울에는 북한 지역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다수의 동사자와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소련군의 약탈 행위도 빈번하여 시계나 만년필, 라디오 등을 빼앗기기 부지기수였다. 이 역시 그들에게는 서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벌였던 태평양전쟁에서 수세에 몰리자 무기 생산에 필요한 구리 확보를 위해 제사사 때 사용해야할 제기 마저 약탈해 간 일제의 악랄함을 생각하면 자업자득, 인과응보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여튼 이처럼 북한 지역의 일본인들은 남쪽에 비해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소련군의 군기가 미군처럼 엄정치 못한데서 발생한 빈번한 약탈과 성폭행, 전쟁 보상의 명목으로 공식적으로 실시된 소련의 물자 반출, 그리고 공산주의 진영의 민족주의자들의 정권 장악으로 인한 일본인 및 친일파에 대한 과감한 청산이 이루어진 탓이었다. 

그에 반해 남쪽은 미군의 행패가 거의 없었으며, 한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진영의 능력을 불신한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일제시절의 일본인 및 조선인 관료들이 대부분 그 위치를 유지하며 행정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사정이 나을 수 있었다. 우리의 정권이 아닌 미군정 하에서 우리 스스로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며 극단적인 사회 혼란을 원치 않는 미군정은 행정력 장악과 효율적 통치를 위해 기존의 인재들을 그대로 활용하는 편의를 선택했다. 

 제조업 시설과 철도등 기간 산업 부분에서 일본인 간부들을 밀어내고 이를 접수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들로부터 고급 기술을 전수받지 못하고 단순 노무 및 하급 관리자들이었던 탓에 생산능력이 급감했고 기차도 운행되지 못하거나 정상적인 운영이 되지 못했다. 다른건 몰라도 우리에 비해 일제 청산은 잘했다고 평가받는 북한도 공장이 안돌아가자 결국 다시 일본인 기술자들을 후한 조건으로 복직시켜 공장을 재가동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화려한 환송회까지 열어주었으니 결국 이는 우리의 능력 부족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단 몇년간 점령당했던 프랑스가 나치 협력자들을 엄중 처단한 것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우리의 친일 청산은 편의성이라는 논리에 눌려 너무나도 어물쩡 지나가 버렸으니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어쨌든 패전 후 이처럼 자기들 딴에는 고초를 겪던 일본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결국 자존심을 버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하다는 일본인들의 특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 일본인들은 업신여기던 조선인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 일하기도 하고 잡역에 동원되어 길거리를 청소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오물을 싣고 지나가던 조선인이 일부러 오물을 길에 흘리며 웃고 지나가기도 하고 귀하신 일본 나으리가 이런 일도 하시네요? 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꾹꾹 참아낸다. 더럽다고 손님으로 받지도 않던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목욕탕을 빼앗아 운영하자 그 밑에서 일을 하기도 하던 모습에서는 사실 '고소하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통쾌함마저 들지만 일개 개인의 운명에서만 한정해서 보자면 연민의 정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국 국가가 힘이 없을 때 그 국민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렇게 고생 끝에 일본으로 돌아간 조선의 일본인들은 본토로 돌아가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전쟁 내내 지속된 공습으로 일본의 대도시는 잿더미였으며 해외 전선과 식민지에서 귀국하는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로 인해 일본의 인구는 급증했고 주택과 식량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항복 당시 조선총독부와 만주등에 최대한 현지에서 버티라며 그 곳의 일본인들이 본토로 귀환하는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본토인들은 식민지에서 돌아온 일본인들에게 식민지에서 호의호식한 부류로 취급하며 전쟁 때 날마다 공습과 전시 동원에 시달린 자신들에 비해 그 정도는 고생도 아니라는 차가운 시선을 보냈고 그들로 인해 부족해질 일자리와 식량, 주택 등을 이유로 문제아 취급했다. 여성들의 경우는 기타규슈의 하카타항에 내리자 마자 항구에 설치된 부인과에서 검진을 받고 필요시 강제 낙태 시술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식민지에서 소련군이나 미군에게 정조 마저 잃은 여성들이라는 낙인마저 씌운 행위였다. 마치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공녀들이 화냥년이라 불리며 오히려 멸시받았던 우리의 과거와도 꼭 닮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조선에서도 본토에서도 미운 털이 박힌 그들은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범죄를 일으키는 등 사회 문제도 만만치 않았으며 6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패전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잃어야했던 재산에 대한 보상을 청구했다가 패소하기도 한다. 전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측불가능한 전 국민이 입은 피해의 하나로서 헌법이 그 부분까지 보장할 수는 없다는 논리인데 이처럼 자국민들의 요구마저 묵살하는 일본이니 우리 강제 징용자들의 보상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경성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경성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야기도 많이 언급된다. 명동, 충무로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은 신식 문물과 함께 풍족한 삶을 즐겼으며 충무로 일대는 당시 도쿄의 긴자 거리 못지 않게 화려했다고 하니 경성의 일본인들은 좋았던 시절을 지금도 추억하는 이가 많은 모양이다. 그 시절이 그리워 한국의 서울로 딸을 데리고 여행온 일본 할머니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충무로, 명동 일대를 딸들 앞에 서서 자신있게 안내하며 '아 이 건물은 아직 남아있네. 엄마가 어릴 때..' 뭐 이런식으로 돌아다니던 그 할머니가 종로와 청계천에 이르러서는 어디로 가야할 줄 모르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종로와 청계천 쪽의 조선인 거주지로는 나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그들의 집단 거주촌에서 그들끼리 어울렸고 더럽고 지저분한 조선인들이 많은 곳에는 갈 일도 가본 일도 별로 없으며 조선인들과 얘기를 하고 지내는 경우는 그 쪽이 부유하고 세도가 있어 상당히 일본화된 경우였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관심조차 없으며 존재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끼리의 신천지에서 1등 신민으로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했으며 그러니 광복과 동시에 갑자기 숨죽여있던 조선인들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이 책은 여러 개인들의 다양한 관점과 경험들을 아주 짜임새있게 배치하고 활용하여 광복 후 몇 년간 일본인들이 겪었던 일들을 피부에 와닿게 얘기해준다. 그러나 이 책이 진정 가치있는 이유는 일본인들의 이야기와 기록에 바탕을 두어 글을 풀어 나가되, 우리의 관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증언에 기반한 책은 자칫 잘못하면 감상에 치우쳐 동정을 느끼게 하거나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나도 모르고 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렇게 살짝 정신줄을 놓을만 할 때 저자는 준엄하게 심판하듯이 무게추를 바로 잡아 준다. 개개인의 비극은 안된 일이긴 하지만 36년간 우리 민족이 겪었던 비극과 설움에 비하면 그 정도는 무겁지 않으며 그 기간도 대단히 짧았으며 그 무엇보다 그 원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일본 그들에게 있음을 이 책은 분명히 얘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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