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mm Biogon이 없었다면 Contax는 지금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극단적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난 리뷰에서도 언급했듯 Leica M3의 등장으로 후속기를 내놓지 못하고 단종된 자이스이콘의 콘탁스는 잊혀진 카메라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아직도 소수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콘탁스를 사랑하고 있으며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껴가며 사용된 적잖은 콘탁스들이 여전히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다. 바디 자체만 놓고 봤을 때 그리 매력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인 콘탁스가 이 정도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큰 공헌을 한 렌즈가 있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광각 렌즈.'라고도 불리는 전설의 렌즈, Carl Zeiss Biogon 21mm f4.5 이다.
1954년, 자이스이콘은 당시로선 그야말로 초광각이던 90도 화각의 21미리 비오곤을 출시한다.
당시 브로셔 표지에는 21미리 비오곤으로 촬영한 사진 위에 50미리 화각을 표시하여 21미리가 얼마나 넓은 화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21미리가 발매됨으로써 콘탁스용 비오곤은 두 개가 되었다. 21mm f4.5와 35mm f2.8
21미리 비오곤은 총 8매의 렌즈로 구성되었으며 전면에 2개의 오목 유리를, 후면에 1개의 오목 유리를 놓은 대칭형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백포커스가 극단적으로 짧아 렌즈의 후옥은 필름면 가까이 최대한 근접하여 장착된다. 이를 통해 최고 수준의 왜곡 억제력과 주변부까지 선명한 해상도를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비네팅 현상 역시 그리 두드러지지 않아 사용에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았다. 개방값은 f4.5로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라이카 28mm 주마론이 f5.6, 칼 자이즈 28mm 테사가 무려 f8.0이었던걸 생각해보면 보다 넓은 화각을 가지고도 f4.5를 달성한 비오곤이 오히려 대단하다 여겨진다.
21미리 비오곤의 렌즈부를 분해한 사진
배럴 내부의 사진
배럴 내부에는 노란색이 보이는데 이는 황동의 색이 아니라 금 코팅의 색이다. 비오곤 배럴 내부에는 금이 코팅되어 있는데 이는 렌즈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확보하고 정밀한 중심축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다른 렌즈에도 이런 식으로 금을 코팅한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칼 자이즈가 비오곤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1미리 비오곤의 특이한 설계 중 하나. 렌즈 후옥에 '플레어 쉴드'가 부착되어 있다. 렌즈 전면이 아닌 바디 속에 들어가는 후면에도 후드가 있는 셈이다. 같은 구조로 설계된 Contarex용 21미리 비오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플레어 쉴드'는 칼 자이즈의 다른 렌즈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21미리 비오곤을 설계하며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신경쓴 그들의 집념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답터를 이용해 라이카 바디에 마운트 하고자 할 때는 두 개의 나사를 풀어 '플레어 쉴드'를 제거해주면 된다. 제거했을 때 특별히 문제가 있다는 보고는 보지 못했다.
가장 비싼 금속인 금까지 코팅해줄 정도로 정성을 다한 21미리 비오곤은 당시 콘탁스용으로 발매 중이던 교환렌즈들 중 가장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1961년 10월 기준 가격표에 비오곤의 가격은 219달러로 나와있다.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했을 때는 약 3,000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참고로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ㅠㅠ
콘탁스용 21미리 비오곤에 이어 자이스이콘의 SLR 라인업 Contarex용 21미리 비오곤도 발매되었다. SLR용으로 발매되었지만 구조적, 성능적으로 콘탁스용과 동일한 렌즈로 알려져 있다. 필름면 바로 앞까지 들어가는 특성상 미러업을 한 상태로 마운트해야 했고 그로 인해 프레이밍은 외장 파인더를 이용해야 했고 포커싱은 목측으로 해야하는 불편한 방식이었지만 디스타곤 같은 레트로 포커스 구조의 광각 렌즈가 개발 되지 않은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콘탁스용 비오곤의 설계를 해치지 않은 덕분에 오늘날에는 비교적 더 후기에 생산되어 코팅이나 재료의 개선이 이루어졌으리라 '예상되는' Contarex용 21미리 비오곤의 인기가 조금 더 높다. Contarex 사용자는 멸종 위기로 현재 시중에 돌아다니는 Contarex용 비오곤의 대부분은 M마운트로 개조되었거나 아답터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21미리 비오곤은 여기까지 이어진다. 바로 누구나 써보고 싶어한다는 핫셀블라드 SWC에 탑재된 38mm Biogon이다. SWC의 높은 인기를 가능케 해준 것 역시 칼 자이즈의 비오곤이었다.
SLR이 대세를 장악했던 시절. 비오곤은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해왔다. 미러 박스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으로 인해 비오곤 타입의 렌즈는 설 자리가 좁았던 탓이다. 하지만 교세라의 콘탁스 G시리즈와 함께 G28과 G21이 비오곤이란 이름으로 부활했고, 최근에는 코시나에서 자이즈 브랜드로 비오곤 광각 렌즈들을 출시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요즘의 비오곤들은 60년전 당시에 비해 설계 구조의 많은 변경이 이루어 지고 있는데 성능상의 개선은 물론 좋은 일이나 렌즈 매수가 증가하고 백포커스에 여유를 두는 설계로 인해 길이가 길어지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
Zeiss C-Biogon 21mm f4.5
미러리스나 D-RF카메라들이 출시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비오곤은 그리 사용하기 편한 렌즈는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 비오곤 설계의 특징은 대칭형 구조와 극도로 짧은 백포커스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가장 우수한 왜곡 억제력과 뛰어난 해상력, 그리고 컴팩트함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오곤처럼 짧은 백포커스로 설계된 렌즈는 디지털 센서에서 비네팅과 마젠타 캐스트를 억제하기 어렵다. goliathus님의 리뷰에 의하면 A7에 마운트했을 때 의외로 마젠타 캐스트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태영님께서 Leica M-P typ240에 테스트했을 때는 약간의 마젠타 캐스트가 발생한다고 알려주셨다. 슈퍼 앵글론에 비해서는 적게 발생하는 편이라 한다. 이 같은 문제점은 이미지 센서의 발전과 함께 개선될 부분일 수도 있겠으나 최상의 광학적 성능만을 고려해 설계된 오리지날 비오곤의 제 짝은 역시 RF카메라, 그리고 필름이라 생각된다.
14-24mm 같은 초광각 줌렌즈까지 흔해진 오늘날 21미리는 '초광각'이라는 수식어를 붙히기도 쑥스러운 수준의 화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35미리와 50미리를 주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RF카메라 유저들에게 여전히 21미리는 낯설다. 파인더의 특성상 RF카메라 유저들은 28미리 이하 광각으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다. 최단 거리가 길어 강렬한 근경을 큼지막하게 넣기가 어렵고 외장 파인더를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도 따른다.
이 같은 이유로 꺼려하는 이가 많지만 막상 21미리 비오곤을 접해보면 그 자유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렌즈는 바디에서 아주 조금 돌출되어 있을 정도로 컴팩트하며 조리개를 8.0 정도로만 조여줘도 거의 모든 구간에 초점이 맞는다. 오로지 외장 파인더만 들여다보며 신나게 셔터를 눌러주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135판 SWC가 되는 것이다. 아니지. 콘탁스용 비오곤이 선배이니 그렇게 불러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다. 어쨌든 콘탁스용 비오곤을 쓴다는건 단순히 21미리 화각을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라 RF카메라에 최적의 설계를 이루어낸 다시 나올 수 없는 최고의 광각렌즈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앞에서 슈퍼 앵글론과 슈퍼 엘마를 논하지 말자. 더 좋은 렌즈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오겠지만 그 시작은 바로 콘탁스용 비오곤이었으니까 말이다.
Carl Zeiss 21mm f4.5 Biogon for Contax (1954~1961년)
2017.01.14. 포항
Contax IIa / 21mm f4.5 Biogon / Kodak 400TX / I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