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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의 악마들 : Peter Hopkirk 지음 / 김영종 옮김 (원제 : 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

 파미르 고원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인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어릴적 즐겨 읽었던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왔던 그 지명만은 생생히 기억에 남는 걸로 봐서 파미르 고원은 세상의 지붕이라는 인식 처럼 뭔가 신비하고 모험이 가득한 그런 이미지로 내 뇌리에 남아있는가보다. 그 파미르 고원을 넘어 고대부터 중국과 로마를 이어주던 문명의 교통로 '실크로드'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실크로드를 걸었던 대상들의 무역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룬 책은 아니고 20세기 초반 이루어진 서구 열강의 실크로드 유적 탐험 / 발굴기다. 보다시피 책의 제목 위에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라는 글귀가 적혀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다분히 서구사회에서 바라본 시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 책의 진정한 주요내용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과 러일전쟁 이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일본의 중앙아시아 '문화재 약탈사'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중국의 서쪽 변방인 타클라마칸 사막과 텐진(天山)산맥 남단에 흩어져 있던 실크로드의 주요 교역로에 위치했던 찬란한 문명들의 유적지들이 수세기 전 급격한 사막화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가 서구 열강의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고 화려한 벽화와 수많은 조각상, 한자,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으로 적혀진 많은 고문서들이 어떻게 대영박물관과 루블박물관 등지에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는지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에 등장하는 스타인, 펠리오, 르쿡 등 열정적인 탐험가들은 개인적인 학구열에 의해, 자국의 문화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의해, 혹은 '주인없는' 화려한 유물들에 대한 소유욕으로 갖은 고생을 마다 않고 지금도 사람의 발길을 들여놓기 어려운 황량한 땅에 도전했다. 이 책은 1981년 영국에서 첫 출간이후 영국 도서상의 논픽션 부분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단순히 인문학적, 고고학적 수준을 넘어서 한 편의 소설을 보기라도 하는 듯 다이내믹한 전개와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물론 여기에는 깔끔한 번역과 저자의 오류를 바로 잡아준 주석을 아끼지 않은 김영종씨의 노력도 일조했다. 또한 지명이 낯설어 적절한 공간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을 출판사측에서 인지했었는지 부록으로 실크로드 일대의 지도도 들어있어 푸짐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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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의 인쇄수준은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지만 당시 탐험대에 의해 직접 촬영된 유적지의 발견 당시의 생생한 사진들이라 그들이 느꼈을 흥분된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충분이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이들이 발견할 당시 대부분의 유적들은 바람을 따라 이동하는 사구에 묻혀 높은 부분만이 간신히 남아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 유적지를 발굴하기 위해 이들은 현지의 유목민들을 인부로 고용해 모래를 퍼내고 건조한 기후 속에 모래에 파묻혀 훌륭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수많은 유물들을 수집하여 낙타나 말에 싣고 떠났다. 심지어 이들은 사원의 벽에 그려져있던 수많은 불화(佛畵)들을 표면 그대로 떼어 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화려한 벽화들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안료의 비밀을 밝히고 그리스 양식이 동양으로 퍼져가던 미술사적인 측면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오늘날 중국에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서양 학자들에 의한 유물 반출은 중국 인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사안이 되고 있다. 그 유명한 돈황석굴에서도 스타인과 펠리오 등의 학자들은 이 곳 사원을 관리하고 있던 승려를 감언이설로 매수하여 귀중한 불경 필사본을 수천본이나 가져갔으며 이 곳에서도 벽화를 뜯어가버렸다. 이 중에는 우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로 알려진 '금강경'도 있었다.(역자는 여기에도 주석을 달아주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이들이 한 행위들은 자국 문화재의 도굴이나 다름이 없었다. 20년대에 접어들어 중국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유적 발굴을 엄격히 통제했고 이 후 서양 탐험대는 발굴에는 참여할 수 있어도 그 어떤 것도 반출해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20여년에 걸쳐 가져간 수많은 유적들은 지금도 대영박물관과 루블박물관 등에서 전시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전세계에서 3번째 정도 손꼽히는 양과 질적으로 뛰어난 중앙아시아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일본의 오타니 백작이 이끄는 스파이인지 탐험단인지 모를 일본의 발굴단에 의해 수집된 것인데 일제 시대에 서울의 박물관에 보관되게 되면서 얼떨결에 우리의 소유가 된 것이라고 하니 이건 역사의 어부지리라고 해야 하는지..

 저자는 이 책 속에서 줄곧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발굴활동이 도굴이나 다름없는 도덕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사실임에도 그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며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인디애나 존스에서 느껴지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에 젖어 우리의 입장이 어느 쪽인지 망각하기 쉽다. 우리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당했던 역사가 있기에 이 흥미진진한 탐험기를 읽으면서도 맘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 때 그나마 그들이 가져갔기에 이렇게 연구되고 박물관에서 훌륭한 보존처리를 거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2차대전 당시 베를린이 폭격당하며 수천점의 귀중한 유물이 사라진 것을 보면 그 주장도 그리 떳떳하긴 어려울 것 같다.

 약탈이냐 발굴이냐. 이에 대한 입장 차이는 분명하겠지만 그러한 가치 판단은 제쳐두고라도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다. 실크로드 혹은 중앙아시아 내륙에 존재했던 다양한 민족들이 남긴 문화 유산을 알게 되면서 황량한 사막과 만년설이 뒤덮인 험준한 산맥 속에 야크나 낙타 떼나 몰고 다니는 유목민 밖에 없다고 여겨왔던 그 땅에도 화려한 문명과 생명력 강한 민족들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특성상 이 책에 이어 '유목민 이야기 - 김종래 著'를 읽고 있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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