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5. 포항

Leica M3 / Elmar-M 50mm f2.8 / Ilford HP5+ 400 / IVED


2016.11.27. 포항

Contax IIa / Biogon 35mm f2.8 / Ilford HP5+ 400 / IVED

2016.12.03. 포항

Leica M3 / Elmar 3.5cm f3.5 / Kodak 400TX / IVed


일본 여행은 여러가지로 참 편리하다. 

우선 생김새가 비슷하여 아무 말 않고 가만히 다니면 이방인 티가 많이 나지 않아 시선에 대한 부담이 적고(실제 나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사진을 좀 찍어달라며 부탁하는 일본인들도 많았다.) 일어나 영어를 못하거나 히라가나를 몰라도 한자를 배워온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필수적인 정보는 대략 식별할 수 있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잘 갖추어져 있고 치안도 좋아 돌아다니기에 불편함이 적으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나긋나긋 조용하다. 현지식도 우리 일상에서도 친숙한 일식이라 거부감이 들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도 일본 여행을 좋아한다. 여느 관광객들처럼 대형 쇼핑몰이나 백엔샵 따위에 들러 물건을 고르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맛집을 찾아 줄을 서서 기다려 가며 식도락에 탐닉하기도 하고, 사진도 신나게 찍으며 즐겁게 놀다 오곤 한다. 하지만 그런 즐겁고 편리한 일본 여행의 와중에 한편으로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고  불편해짐을 자주 느꼈었다.

성숙해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사회 문화적 수준은 그나마 많이 따라갔다고 하는 일본과의 경제력 격차만큼 금방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경우에서 확인할 수 밖에 없었고, 강박적이라고까지 보여지는 그들의 타인에 대한 철저한 배려, 그리고 질서 의식에 대한 부러움은 괜한 반발심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도 뭔가 못난 모습을 발견해보려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시선을 낭비하기도 했다.


무단횡단하는 아가씨1




무단횡단하는 아가씨2




그리고 간혹 다소 차갑고 고압적인 태도의 공무원 등을 마주치게 되면 일제 시대에 그들이 우리를 대했을 그런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며 식민지의 2등 신민이 겪었을 기죽고 서러운 감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씁쓸한 기분이 못내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봐도 비싼 돈 들여 재미있게 놀자고 가서는 이딴 생각이나 하고 다녔으니 나도 참 피곤한 사람이다 싶다.


삐딱하게 서서 '저건 뭐냐?' 하듯 나를 쳐다보던 츠키지 시장 입구의 경비원




반면 서양 관광객들 옆에선 기죽은 듯 왜소한 일본인의 표정에서 페리 제독과 맥아더 장군을 대했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일본을 작년 여름에 또 한번 찾았다. 어쨌든 일본 여행은 ‘편리’하니까. 도쿄는 두번째였다. 특별히 볼거리가 있어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은 아니었지만 2004년에는 일정상 패스했던 우에노 공원을 이번에는 들러보기로 했다. 그저 도쿄 시민들의 편안한 일상이 보고 싶었다.
























무더운 여름날, 공원의 큰 나무 그늘 아래선 가족들이 모여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잘 놀고 있다가 카메라를 겨눈 나를 보고 다소 당황한 듯한 여자아이들에게 괜시리 미안해졌고,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던 여자아이도 참 예뻤다. 자전거를 타고 산책나온 단란한 한 가정도 보기 흐뭇했고, 커피숍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젊은 청년이 만들어주는 막대 풍선을 구경하는 아이들도 평화로웠다. 그들을 보며 공원을 거닐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도 70여년 전이었다면 오늘같은 우에노 공원의 평화로움은 누릴 수 없었을테지..’

불행했던 그 시대의 아이들은 B-29 편대의 공습을 피해 겁에 질려 방공호로 뛰어들어야 했을 거고, 소이탄을 맞아 잿더미로 변해버린 동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잠들 때 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물으며 간절히 기다리던 그 아빠는 이오지마나 콰달카날에서 반자이 돌격으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의 큰 형은 꽃다운 나이에 해군 항공대 소위가 되어 제로센 전투기를 겨우 조종할 수 있게 되던 날, 돌아올 수 없는 연료와 폭탄을 싣고 날아올라 오키나와로 몰려오는 미해군 함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런 그의 비행기를 향해 사쿠라 가지를 흔들어주며 배웅하던 여학생들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켰겠지…

우에노 공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나니, 행복해 보이는 오늘 그들의 모습이 새삼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여겨졌다. 모두가 살기 어렵고 힘들기만한 요즘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성이 파괴되고 말살되는 전쟁과 같은 그런 처절한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 불행한 시대를 겪지 않았음에, 그래도 평화로운 지금에 살고 있음에 감사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에노 공원 사진들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잠시나마 일본 여행에서 느껴왔던 불편함이 사라진 순간이었고, 그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과 여전히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그들의 몰염치성에 지금도 분노하고 있다. 그들의 악랄한 식민 지배를 겪은 불행한 나라의 후손인지라 잊어서도 안될 일이고 그렇기에 일본 여행은 편리하면서도 내게는 또 불편한 것이었지만 우에노 공원에서는 잠시 그 마음이 누그러질 수 있었다. 문득, ‘그래.. 모든 인간은 행복해야 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2016.08.04. 도쿄

Leica M3 / Elmar-M 50mm f2.8 / Kodak 400TX / IVED


감히 김기찬 작가의 작품집 이름을 제목으로 쓰고나니 부담스럽고 송구스런 마음이 한가득이다.



나의 유년시절 추억 중 골목길과 관련된 것은 안타깝게도 거의 없다. 아파트 단지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게 골목길이 친숙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시작된 서울 생활부터였다. 학교 앞 주택가는 촌놈들이 기대하던 으리으리한 서울의 이미지와는 크게 달랐다.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복잡하고 좁은 골목길과 고르지 못한 보도블럭, 곳곳에 널린 쓰레기와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과 기울어진 전신주들... 하지만 그 낡고 지저분함 덕분에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카메라 한대를 어깨에 둘러메고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은 출사가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요란하지 않아도 됐다. 골목에는 거친 콘크리트의 질감이 있었고, 대문 옆에 놓은 작은 화분이나 보도블럭 사이에서 피어난 민들레 같은 소박하고 예쁜 눈요기 거리도 있었다. 다세대 주택의 가스배관들은 패턴을 만들어 줬고 대문과 창문의 모양도 저마다 다양했다. 그리고 골목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2000년 10월 녹천

Nikon F3HP / ai-s 50mm f1.4 / Kodak TMX




2000년 10월 녹천

Nikon F3HP / ai-s 50mm f1.4 / Kodak TMX




2001년 7월 황학동

Nikon F3HP / AF85mm f1.8D / Kodak TMX




2001년 9월 무악동

Nikon F3HP / AF85mm f1.8D / Kodak TMY




2001년 9월 신설동

Nikon F3HP / ai-s 50mm f1.4 / Kodak TMY




2003년 7월 이문동

Nikon F3HP / ai-s 28mm f2.8 / Kodak TMX




2003년 12월 이문동

Nikon F3HP / ai-s 28mm f2.8 / Kodak TMY




2003년 12월 이문동

Nikon F3HP / ai-s 28mm f2.8 / Kodak TMY



사실 나의 골목길 사진들은 농익지 않은 아마추어 사진가가 찍은 그저그런 사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큐라든지 기록이라든지 심도 깊은 고민과 주제 의식을 가지고 일관된 작업을 해왔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 찍은 이 장면이 지금이야 평범하고 흔한 모습이겠지만, 언젠가는 시간의 가치가 더해지리라는 막연한 기대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김기찬 작가께서 열정을 바쳐 평생 작업해왔던 사진들에 비해 겨우 흉내나 낸 내 사진들은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번뜩이는 감각과 창의적 예술성 따위란 애시당초 없었던 나의 한계로는 할 수 있는게 그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런 보잘 것 없는 내 사진을 나 혼자만이라도 소중히 생각하는 이유는 그 시절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돈은 떨어졌어도 카메라 하나, 필름 한롤만 있으면 몇시간이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낯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는 앳된 젊음이 있었다. 


그 시절 그 골목길들은 여의도나 강남같은 화려한 서울의 겉모습에 가려진 또 하나의 서울이었고 나에게는 오히려 더 어울리고 편안한 서울이었다. 서울이 고향이 아님에도 이따금씩 서울이 그리워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골목길과 그곳에서 만났던 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2016.05.22.

Rolleiflex 2.8F Xenotar / Kodak Ektar 100 / Epson3200

Contax IIa / Carl Zeiss 50mm f1.5 Sonnar / Zeiss-Opton 35mm f2.8 Biogon / Carl Zeiss 21mm f4.5 Biogon


구입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Contax IIa에 슬슬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저속셔터가 늘어지고 고속에서 상단끝부분의 노광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 심지어 11월 마지막 주 죽도시장 새벽 출사에서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셔터가 작동하지 않기를 몇 회. 더이상 버틸 재간은 없었다. 오버홀을 다시 해줄 때가 된 것이다.


다른건 몰라도 Contax는 무조건 중앙카메라에 맡기고 싶었다. 금속날로 이루어진 Contax의 셔터막은 손을 대기가 까다로워 제대로 하는 곳이 몇 없다. 사장님 연세도 있으시고 슬픈 얘기지만 사장님이 일을 그만하시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앞섰다.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사장님과 통화를 나누고 카메라를 포장했다. 직접 찾아가서 뵙고 부탁드리고 싶었지만 변방에 사는 사람이 이 것 하나 때문에 한양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기왕 보내는 김에 초점링 돌림이 너무 빡빡하던 35mm 비오곤이랑 조리개 지침이 눈금과 다소 어긋난 상태이던 21mm 비오곤도 함께 넣었다. 


약 2주만에 돌아온 녀석들은 아주 건강해져 있었다. 셔터속도는 당연히 정상으로 돌아왔고, 약간 맥없이 풀어지는 듯한 느낌의 셔터는 아주 야무지고 절도있게 작동된다. 파인더도 아주 맑고 깨끗해졌고 와인딩 놉과 헬리코이드 등 곳곳의 조작감도 매우 부드러워졌다. 35미리 비오곤도 적당한 저항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딱 좋은 정도로 윤활 작업이 잘 되었고 볼 때 마다 개운치 않던 21미리 비오곤의 조리개 지침도 눈금과 맞아 떨어지니 속이 시원하다. 


상대적으로 중고가가 그리 비싸지 않은 Contax IIa를 위해 상당한 오버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사실 그리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다. 같은 가격으로 오버홀 대신 바디를 새로 구할 수도 있을 정도니까. 장터에 Contax IIa 매물이 나올 때 마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손 때 묻은 내 카메라이기에, 이 녀석이 남겨준 필름과 추억들 때문에 이렇게 고쳐주며 쓰는 것이다. 어쨌거나 내년이면 딱 60년이 되는 할아버지 카메라가 주기적 관리만 해주어도 이렇게 멀쩡히 현역으로 활약할 수 있다니.. 이런 카메라는 단순히 기계, 도구, 물질이라고만 부르기 미안할 정도다. 


2016.12.15.

필름으로 사진을 마지막으로 찍은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하다. 2011년 여름, 티벳에서 좀 찍기는 했으나 Nikon D700이 주력으로 쓰이던 때라 필름은 F3에 넣은 흑백과 Rolleiflex의 슬라이드만이 보조적인 역할을 했고 그나마도 두 카메라를 합쳐 5롤도 안찍고 돌아왔다. 사실 티벳 여행 전에도 D700 구입을 기점으로 필름 소모량이 급격히 줄어 들었으니 이래저래 한 5년간은 필름을 놓았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은 Ricoh GR의 구입이라는 결정타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아, 이제 필름은 나도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굳어지던 2015년 봄이었다.


오랫동안 같이 사진을 찍어오던 지인이 다시 필름 라이카를 사겠다고 했다. (그도 나와 비슷하게 필름을 놓은지 몇년이 된 상태였다.) 뜬금없이 이제와서 무슨 다시 필름이고 하필 또 가성비 안나오는 라이카냐고 되물었지만, 육아에서 어느정도 해방(?)이 되면서 제정신이 돌아온 그의 의지는 강했다. 수년전에 내가 '이것만은 그냥 안쓰더라도 팔지 마라'고 했던 M7과 35미리 주미크론을 결국은 다시 사야겠다며 그는 다시 필름을 하자고 열심히 꼬셔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지 않던 나는 그리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정말 열렬한 필름 추종자였던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이제 와서 무슨 필름으로 뻘짓을 해요? 아, 난 못하겠어요. 시간도 없고 필름값도 너무 비싸고 이제.'

'야 네가 갖고 있는 그 좋은 카메라들이 아깝다.' 

'뭐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그것들 쓰자고 필름질은 못하겠네요 이제.'

'아, 재미없게 진짜. 혼자하면 심심한데... 그래도 내가 M7사면 같이 필름 카메라로 출사는 가줄거지?'

'그래요 그럼. 그거야 뭐 어렵나. 같이 갑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정말로 다시 M7과 Summicron-M 35mm f2.0 ASPH를 구입했다. 약속대로 그와 필름 카메라를 챙겨들고 출사에 동행해야 했다. 7월의 첫번째 주말에 안강 5일장날이 돌아왔다. 예전에 한창 포항지부가 활발했던 시절에 멤버들과 자주 왔던 곳이기도 하여 익숙하기도 하니 장날 구경이나 하며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손맛이나 보자 싶었다. 유통기한은 진작에 지났을, 그리고 이사하면서 다시 냉장고에 넣지도 않고 방치했던 TMX 한롤을 Contax IIa에 넣었다. 잘 나오긴 하려나... 다행히 몇년간 만져주지도 않았던 카메라는 잘 작동되고 있었다.




골목 귀퉁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잠시 어슬렁 거리다 첫 컷을 눌렀다. '챡!' 아.. 이 느낌이었다. 필름을 와인딩하고 셔터를 누르던 그 설레임의 순간, 잊혀졌다고, 다시 되돌아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던 필름의 기억이 그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몇 년만의 스냅질이라 번잡한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과 달리 몸은 예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컷을 제외하곤 사람이 없는 컷은 거의 찍지 않았다. 지인의 테스트 촬영에 그저 따라서 놀러온 것 뿐이었던 마음 가짐은 이미 사라졌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GR을 메인으로, 필름은 서브로만 적당히 찍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될 수록 이는 반대가 되었다. 함께 가져온 GR은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역시 두개로는 번잡하다.




이럴 줄도 모르고 한롤 밖에 안가져온 필름이라 아끼려 했건만 난사하던 버릇이 살아나니 이런 의미없는 컷도 마구 눌러보고..




주택가 골목길에 펼쳐진 좌판에서는 떠날 줄 모르고 서성이며 셔터찬스를 노렸다. 28미리로 바짝 들이대던 뻔뻔함까진 살아나질 못해 적당히 떨어져서 찍기 편한 50미리를 가져온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뒷배경에 나타난 신형 투싼이 아니라면 언제적 찍은 사진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 곳도 참 변화가 더딘 곳이다.




경운기를 찍었더니 나를 오늘 이 지경으로 몰고온 몹쓸 지인의 모습이 같이 담겼다. 




이 컷을 누르고 났을 때 설레임은 아직도 기억난다. 디카와 달리 어떻게 찍혔는지 알 수가 없는 필름질에서의 기대심리는 극에 달한다. (물론 결과물은 보시다시피 그냥 그렇지만..)




낡은 철물점에서 텐트칠 때 쓸 저렴한 해머를 구입한 지인




촬영을 마치고 캔커피를 곁들인 끽연의 여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What else?



많지 않은(물론 적지도 않지만;;) 나이에 비해 나름 사진을 찍은 햇수는 제법 오래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캐논 AE-1으로 처음 사진을 찍었으니 비교적 빨리 시작한 편이었다. 그러니 그동안 내가 나선 출사의 횟수는 적지 않다. 그 많은 출사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날이 있기 마련인데 이 날의 출사는 나의 사진 인생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날로 남았다. 정말이지 이날 느꼈던 설레임과 흥분은 처음 사진을 배웠던 20년전 그때 못지 않았다. 불과 하루의 촬영만으로 '왜 그동안 필름을 쉬었는가!'라는 자책과 후회가 들었고 디카로만 깔짝거렸던 지난 몇년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지난 날'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던 수년만의 필름 출사는 이후의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조금 싸다 싶게 필름이 나오면 '있을 때 사두자!'며 수십롤씩 사재기를 해서 냉장고에 쑤셔 넣었고 '이왕 이렇게 된거 남들 다 쓰는 라이카도 써보고 죽자.'며 라이카 M3도 들이고, 몇년 동안 놀면서 엉망이 된 필름 카메라들을 오버홀하느라 돈이 깨지는 수렁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이 날이었다. 

나에게는 필름 사진의 르네상스가 되었던 2015년. 그 해 7월 4일의 기록이다.


2015.07.04 경주 안강

Contax IIa / Zeiss-Opton 50mm f1.5 Sonnar / Kodak TMX / IVED


 


































2016.12.11. 포항 신광면

Ricoh GR


Leica M3 / Elmar-M 50mm f2.8


초기형 M3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로 더블 스트록의 재미와 더불어 '도그이어(Dog Ear)' 혹은 'Buddha Ear' 라고 불리는 스트랩 고리의 예쁜 모양을 들 수 있다. 이 도그이어 스트랩 고리는 M3에서도 후기형으로 넘어가면 보다 단순한 형태로 변하게 되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좌 : 일반적인 라이카 M바디들의 스트랩 고리(M4) / 우 : 도그이어 스트랩 고리 (M3 초기형)


두가지 모양을 놓고 비교해보면 일반적인 스트랩 고리에 비해 도그이어 고리의 모양이 좀 더 유려하고 바디와의 이음 부분에도 보다 디테일이 있어 멋져 보이긴 한다. (사실 눈에 확 띄는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디자인 뿐 아니라 높이의 차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일반적인 라이카 M바디용으로 발매된 하프 케이스들 대부분이 도그이어 버전 M3에 잘 맞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라이카용 하프 케이스들이 똑딱이 방식으로 바디와 고정되는데 일반형 케이스들은 저 똑딱이와 구멍의 높이가 낮다보니 도그이어 버전에는 잘 맞지 않는 것이다. 지인들이 가지고 있는 KIMOTO, A&A 제품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하면 겨우 똑딱이를 잠글 수는 있었지만..) 이렇다 보니 M3 도그이어 버전 사용자들은 하프 케이스 구하기가 쉽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장터에서 좋은 물건을 발견했다. 럭스케이스에서 나온 CSE-17이란 모델명의 Leica MP3용 하프 케이스였다. 한정판으로 발매되었던 MP3는 M3 형태의 디자인을 복각한 모델로 스트랩 고리 역시 도그이어 버전이 적용되었다. 당연히 이 케이스는 M3 도그이어 버전에도 딱 맞는다. 




Leica MP3. 셀프타이머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곤 도그이어 스트랩 고리까지 M3와 거의 같다. (필름카운터는 M2 스타일)




전체적인 핏팅이 상당히 좋다. 케이스를 벗기고 씌울 때도 너무 빡빡하지 않고 적당하다. A&A 제품에 비해 전면을 커버하는 면적이 더 넓어 셀프타이머 레버가 숨을 듯 말 듯 자연스럽게 커버된다. 저 부분의 디자인이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든다.




지인의 Leica M4와 A&A하프케이스. 전면을 커버하는 면적이 차이남을 알 수 있다.



후면부도 뒷덮개의 형태에 따라 자연스럽게 잘 길들었다. 




가죽의 두께는 A&A 제품보다 약간 얇은 듯하다. 덕분에 바디와의 밀착감은 더 나은 느낌.




바닥에 LUXECASE가 새겨져있다. 





가죽의 품질도 우수하고 디자인도 깔끔하며 피팅이 참 좋아 전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하프 케이스 선택의 폭이 좁은 M3 초기형 사용자들에게는 수작업으로 의뢰하지 않아도 기성품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날씨도 추워졌으니 올해는 M3를 좀 대우해주며 데리고 다녀야겠다.


2016.12.09

지인이 Leica M7을 팔아먹고 M4를 들였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아는 분에게 구구절절한 문자로 구애한 끝에 데리고 온 것!) M4는 M3나 M2에 비해 생산량이 적은 편이라 은근히 보기 힘들어 나도 실물은 처음 만져본다. MP와 특이한 한정판 모델들을 제외하고는 M3, M2, M6, M7 까지 두루 겪은 지인의 마지막 희망이던 M4를 아주 좋은 상태의 물건으로 구해 뿌듯하다. 렌즈는 기존에 사용하던 Summicron-M 35mm F2.0 ASPH. 




사실 구입하고 나서 며칠 지난 것이긴 한데 이제서야 첫 필름을 넣어 본단다. 이제 궁금한 것도 없는지 느긋하기만 한 지인. 나같음 도착한 날 바로 한 롤 찍었음.




평소에 카메라에 하프케이스 따위는 씌우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엔 좀 곱게 써주고자 A&A 가죽케이스까지 장만해서 대우해 주기로 했다. 사실 M6 이전의 모델들의 볼커나이트는 오랜 세월이 지나 경화로 인해 갈라지거나 떨어지는 경우가 생기기에 관리해 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 좋다.




필름만 안넣은게 아니라 스트랩도 아직 안달아뒀다. 카메라는 수없이 바뀌었어도 바뀌지 않고 있는 A&A의 실크 스트랩 ACAM-301. 스트랩치고 무지막지한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눈에는 허접스러워 보이는지 우리 와이프는 '카메라는 비싸면서 줄은 왜 그런걸 끼웠어?' 라고 했다.. 



'M4의 첫 컷은 널 찍어줄게!' 영광이네유 ㄷ




M4의 파인더를 찍어 보았다. 아주 밝고 깨끗한 상태다.




이번엔 내 M3의 파인더. 일반적인 0.72배율과 다른 0.91배율로 50미리에 특화되어 있다.




M4와 M3. 이 M4는 셀프타이머 레버, 화각 변환 레버, 필름 장전 레버가 M3 스타일로 교체되어 있어 오리지날 M4의 외모와는 조금 달라졌지만 예쁘긴 더 예쁘다. 물론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한다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다.




손에 쥐고 M4를 찍어본다. 




흑백으로 바꿔서. 라이카 브로셔에 나온 그 느낌이 나게 하고 싶었으나 그냥 그렇네.


만져보니 역시 기계식 M형의 최종 진화형이라 불릴만큼 우수한 카메라임에 틀림없다. 편리한 퀵로딩 스풀과 꺾여진 리와인딩 레버는 M4를 시작으로 현행의 M바디까지 이어지고 있는 부분이며 노출계도 없는 완전 기계식의 설계와 황동 부품들이 만들어주는 조작감도 훌륭하다. 최고의 M바디는 M3라하지만 35미리가 주력이라면 M2보단 M4를 선택하고 싶어진다. 이 정도 바디가 손에 들어온 것은 인연!


2016.08.10.

 









2016.10.08. 포항

Leica M3 / Elmar-M 50mm f2.8 / Kodak 400TX / IVED



지인에게서 묻지마 무상, 무기한으로 라이카 Elmar 3.5cm f3.5를 데리고 왔다. 렌즈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찍히기만 하면 되니깐 뭐. Summaron 3.5cm가 출시되기 전까지 바르낙 라이카에서 35mm 화각을 담당했던 녀석의 결과물이 제법 궁금해진다. 그러고 보니 무코팅 렌즈는 처음 써보는 건가? 지난 주말동안 흑백과 칼라네가를 한롤씩 테스트차 찍어두고 대기 중. 




3.5cm엘마의 가장 큰 매력은 컴팩트함이다. Elmar 5cm 같은 침동식도 아닌데 튀어나온게 저게 다라는 거. Summaron 3.5cm도 제법 짧지만 Elmar가 더 짧다. 겨울에는 코트 주머니에 쏙 넣기에도 부담이 없다. LTM을 이용해 M3에 마운트했고 35미리 파인더는 ZeissIkon의 것이라 짬뽕 조합이 되어버렸지만 의외로 예쁘다. 바르낙 바디를 하나 구하면 제격이겠다 싶지만 더이상의 카메라 지름은 자제해야.. ㄷ


















2016.11.05. 포항

Leica M3 / Elmar-M 50mm f2.8 / Ilford HP5+ 400 / IVED


이른 아침에 죽도시장에 도착했더니 밍크고래 한마리가 떡하니..




일포드 HP5가 들어있던 Contax IIa로는 노출이 잘 나오지 않아 서브로 들고간 X100이 거의 메인이 된 촬영이었다.




또 죽도시장인가 하다가도 경매장의 활기 넘치는 모습을 만나면 가슴이 뛴다.




담배는 추운 날 더 맛있긴 하지.




문어삶는 골목에선 찜솥의 수증기가 몽실몽실 제법 포토제닉했다. 흑백으로 찍은 결과물이 궁금




후진




새벽의 푸른 색온도와 노란 전구의 불빛이 조화롭다.




저 안쪽 어판장은 찍을 때 마다 노출이 잘 안나와서 힘든 곳.




쌀쌀한 날씨라 작은 화로가 놓여져있다.




거래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청어도 요즘 죽도시장엔 제법 보인다.




패닝..;;




새벽부터 누워있던 고래 경매가 시작되었다.




선도 확인을 위해 고래의 살점을 베어내고 있다.




도려내진 살점들




고래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는데 사진으로는 제대로 나타나질 않았다. 




모닥불과 오징어




지난번에 본 고래보다 더 어린 녀석이었다. 다시 봐도 연민이 드는 것은 어류가 아닌 포유류라 더욱 그런가보다.




아직 본격적인 철은 아니지만 대게도 올라오기 시작한다.




촬영을 마치고 들른 시장밥집 영양식당




함께한 지인의 Leica M6와 내 Contax IIa. 오버홀할 때가 지난 콘탁스는 새벽 추위를 못이기고 종종 셔터가 멈추곤 했다.




5천원의 행복. 쌀밥 반 보리밥 반으로 섞어나온 백반. 달달 떨다가 먹으니 몸이 사르르 녹았다.




요건 동행한 백창원님이 찍어주심, Leica M6 / UC-Hexanon 35mm f2.0 / Kodak 400TX


2016.11.27. 포항

Fujifilm X100










































2016.10.08. 포항

Ricoh GR1s / Kodak 400TX / IVED



눈을 떠보니 7시가 거의 다 되었다. 늦었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포항의 동남쪽 장기면에 위치한 장기읍성에 가보기로 맘을 먹었었다. 그리고 이왕 가는거 늦어도 6시에는 집을 나서 성 위에서 동해의 일출을 보고 싶었는데 이미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어차피 일출 촬영은 물 건너 갔음에도 괜시리 마음이 급하다. 씻지도 않고 카메라를 부랴부랴 챙겨 차에 올랐다. 동녘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약 30분을 달려 장기읍성 바로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다. 뒤편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장기읍성의 성곽이다. 이 곳은 오늘로 세번째 찾는 곳이지만 제대로 답사기를 써보고자 마음 먹고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전신주에 있는 장기면의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이 곳 특산품인 산딸기와 더불어 오늘 둘러볼 장기읍성을 모델로 하고 있다.




옛 지도에 나타난 장기읍성의 모습. 성안에는 객사를 비롯한 동헌 건물이 있었으며 보통의 4개와 달리 하나가 적은 총 3개의 문이 있었다. (지도에는 2개만 그려져있음) 남문이 가장 크고 중요한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지형의 특성상 동문이 가장 중요했으며 지금도 동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성내에 옮겨져 있는 장기향교가 과거에는 성밖에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동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간다. 최근 몇년간 장기읍성 성곽의 복원 정비가 많이 진행 되었음에도 동문은 여전히 허물어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정감이 간다.




동문에서 부터 서쪽으로 이어진 성벽을 따라 성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성곽의 둘레는 2,980척(약 1,392m)이었다고 하니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고려 현종 2년(1101년)에 북쪽의 여진족과 동쪽의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흙으로 처음 쌓았고 이후 세종 21년(1439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사적 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에 보이는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간은 최근에 복원 정비된 것이다.




동해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장기읍성은 여전히 복원 및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고구려 성곽에서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성의 특징 중 하나인 '치'. 치는 성벽을 오르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방어 시설로서 치와 치의 간격은 활의 사정거리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요동성을 공격하던 당나라군이 아무것도 모르고 성벽을 기어오르다 양쪽의 치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무참히 당하면서 크게 놀랐음이 '구당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고구려 군에게 약오르게 당한 이후 '치(雉)에서 활을 쏘았음(射)'이 오늘날 '치사하다'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읭?) 어디가서 얘기하고 창피당해도 저를 탓하지 마시길.




파란 하늘과 붉은 깃발의 보색대비. 나무 위에 앉은 까치 암수 한쌍이 정겨웠다.




저 아래 장기면의 들판과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인다. 




동남쪽 성벽 아래 양지 바른 텃밭이 꽤 좋아 보인다. 아침 일찍부터 주민 한 분이 밭일을 시작하고 계셨다. 오늘은 서리도 내리지 않고 제법 따스한 아침이다.




12월임에도 아직 지지 않은 구절초를 만났다. 흐릿하게 뒤에 보이는 것은 남문의 옹성이다.




이와 같이 반월 형태로 둘러진 옹성은 성문을 파괴하려는 공성화기로부터 문을 보호하고 문앞에 돌입한 적을 포위 협살하기 위한 방어 시설이다. 동대문에서 볼 수 있는 그것과 같다. 남문의 옹성은 최근에 복원한 티가 많이 나는 다른 구간에 비해 비교적 원형의 모습이 잘 남아있는 곳이다.




옹성 내부에는 좌우로 길을 막아선 대전차 방호벽 같은 구조물이 있는데 짧은 지식으론 저것이 어떤 용도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옹성의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옹성 내부에서 바깥 쪽을 바라본 모습




남문을 지나니 성벽이 끊어져 마을안을 통해 돌아서 다시 성벽 쪽에 이르렀다.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옛 성벽(왼쪽)과 복원된 성벽(오른쪽)의 차이가 극명히 보인다.




아직 정비되지 않은 옛 성곽의 모습이 궁금해 뒷편 비탈진 경사로 내려가 보았다.



 

복원 정비 하기 전에 장기읍성은 대체로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무너져내린 성곽의 흔적이 안타깝다. 한양도성이나 수원화성처럼 국가적으로 구축된 견고한 성곽이 아닌 장기읍성과 같은 이런 지방 읍성의 경우 양질의 석재와 치밀한 건축기법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낮아 장기간 방치되었을 경우 이처럼 쉽게 무너지고 훼손되었을 것이다.




최근에 복원된 북문이 말끔하다. 이 곳은 실제 정서쪽 방향이지만 북문이라고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 지도에도 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실제 방위와는 상관없이 성의 정문으로 쓰이는 곳을 남문이라 칭하고 그 반대편을 북문이라 하여서 그런 것인가 싶다가도 동쪽으로 향한 정문은 또 그대로 동문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북문의 옹성에 문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북문 안쪽은 주민들의 주차장으로 쓰일만큼 제법 너른 공터가 있었다. 장기읍성의 모든 문은 개거식 구조로 별도의 지붕이 없이 문으로서 트여진 성벽 위에 문루가 바로 올라간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다. 변방의 작은 읍성이다 보니 건축기법상 전문성이 필요하고 비용이 더 올라갈 홍예문은 생략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문을 지나 다시 복원된 성벽이 이어진다. 이 사진에서 잘 드러나듯이 장기읍성은 산위에 지어진 읍성으로서 그 사례가 매우 드문 편에 속한다. 순천 낙안읍성과 서산 해미읍성을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읍성 유적은 거의 없는데 대부분의 읍성들이 평지에 있었던 것에 반해 산 위에 위치한 장기읍성은 왜구의 접근을 관측하고 유사시 수성전(守城戰)에도 유리한 지형적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동서로 긴 마름모 형태의 장기읍성 북쪽 성곽은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경사가 제법 급하다.




갑자기 성곽이 끊어지고 험한 내리막길을 만나 당황스러웠다. 복원을 하려면 다 하지 이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성곽이 끊어진데는 이유가 있었다. 작은 개울이 있었던 것. 장기읍성에 하나 있었다는 수구(水口)가 이 곳이었을 듯 싶다. 이런 작은 개울에는 요즘 보기드문 가재가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돌 몇개를 들춰봤을 수도 있었겠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길도 없는 수구를 지나서 다시 이어진 성곽으로 기어 올랐다.







처음 들어왔던 동문까지 거의 다 내려왔다. 




정비되지 않은채 무너져있는 그대로인 동문터. 겉에서 보이지도 않는 북문은 번듯하게 복원해놓고 장기읍성을 찾으면 제일 먼저 들어서게 되는 동문을 이렇게 방치해둔 것이 처음에는 좀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니 여전히 주민들이 드나드는 통로인 이곳을 복원 한답시고 공사기간 내내 통행에 불편을 겪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나 싶었다. 그리고 제대로 복원하려면 옹성을 둘러야할텐데 그렇게 했을 땐 차량 통행이 너무 어려울테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겠다. 어쨌든 비록 허물어지긴 했어도 장기읍성의 동문은 여전히 주민들이 드나들고 있으니 현재까지 '문'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성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동문 옆에 있는 '배일대(拜日臺)'. 완벽한 역광이라 새겨진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음이 아쉽다. 동해를 내려다 보는 이 곳은 과거부터 해맞이를 하던 장소로 정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장기향교. 글 서두에 첨부해둔 지도에서 보듯 원래는 성 아래에 있던 것인데 지금은 성안에 있다. 반대로 장기현 동헌 건물은 성안에 있던 것이 1922년 성 아래로 옮겨졌다. 




장기향교의 문은 찾을 때 마다 잠겨 있어서 한번도 내부로 들어가보지 못했다.




장기읍성 내부에는 향교 뿐 아니라 여전히 민가가 여럿 남아 성읍마을을 이루고 있다. 물론 여느 시골 마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빈집도 많지만 관광지로서만 존재하는 다른 읍성들과 달리 살아있는 공간으로 남아있음이 인상적이다.


















유럽으로 여행간 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고색창연한 중세 고성(古城)을 보고나서 그 멋스러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비단 건축 양식 자체가 다른 유럽의 성들이 아니라도 같은 동양권인 일본의 성들,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의 경우만 봐도 넓고 깊은 해자와 높은 축대, 화려한 지붕과 아름다운 조경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는 조선통신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우리나라의 성곽들, 그나마 멋지게 지은 수원화성도 아닌 장기읍성과 같은 변방 바닷가의 작은 성을 보고나면 이건 차라리 중국 지방 귀족이 살던 저택 담장만도 못한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드는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읍성과 산성들은 귀족과 영주들이 자신의 위세를 뽐내기 위해 지은 화려한 저택이 아니었고 황제 못지 않게 호화롭고 사치로운 생활을 즐기던 그들만의 작은 궁궐도 아니었다. 궁핍한 재정과 부족한 노동력으로 높고 화려한 성벽을 쌓을 수는 없었지만 야트마한 야산일지라도 험한 산세에 의지하면 낮은 담으로도 적이 쉽게 넘지 못할 요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을 유린하기 위해 적이 몰려오면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성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어 싸웠다. 적을 피해 성안으로 도망 했지만 더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싸우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작은 읍성은 그래서 슬프고 또 절실한 공간이다.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청나라의 여진족은 청 멸망 후 100여년만에 만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사실상 멸족하고 말았다. 한 때는 내로라했던 거란족, 흉노족 등의 북방 유목민족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당의 변방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던 티벳은 중국의 일부로 복속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거대한 중화의 소용돌이 바로 옆에서 수천년 살아오면서도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살아 남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역사 이래 끊임없이 반복된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이런 볼품없고 작은 성에 의지하여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장기읍성과 같은 작은 성의 가치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매길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6.12.03.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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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0.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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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5. 커튼 뒤에 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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