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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기타오카신사(北岡神社)

현재 일본 천황(天皇)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 원년은 서기 1989년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일본 내에서는 많은 곳에서 쓰이고 있었다. 우리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늘 사용해왔고 우리나라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시절에 들어와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역사를 배우면서 임진왜란은 선조25년(서기1592년)이라는 식으로 불리지만 고려 / 조선을 거치면서 동북아 일대에서의 정치 문화적 흐름상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리라.

일본은 16세기 이후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 문물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19세기 즈음에 이르러서는 일본이 중국이나 조선보다 우월한 국가라는 인식이 두터워졌으며 페리 제독의 미국 함대에게서 굴욕적 불평등 조약을 맺은 후 빠르게 서구화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표되는 지식층은 탈아시아론을 내세우며 서구를 지향한 부국강병을 시도했다. 못된 것부터 배운 일본은 운요호 사건등을 일으키며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며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무찌르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며 러일전쟁 마저 승리한다.

이러한 일본의 자신감의 바탕을 이루는 한가지는 고대로 부터 일본의 정권은 천황을 그 정점으로 하여 바뀐적이 없다는 유래깊은 정통성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명목상 천황이 임명하는 최고 통수권자로 엄밀히 말해 일본의 왕이 아니라 오늘날 일본으로 치면 총리와도 같은 칸바쿠였다. 물론 이들은 조선과 중국과의 외교상에서 일본왕 혹은 일본대장군등으로 칭하며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일인자임을 자처했다. 반면 천황은 실질적으로 힘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음에도 일본은 수시로 유목민족에게 중원을 내주었던 중국이나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이 교체되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이야말로 정통성을 갖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원자폭탄 두 방을 얻어맞고 히로히토 천황이 '저는 신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라며 일본 국민의 전면적인 파멸을 막기 위해 연합군에게 항복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을 했음에도 천황은 여전히 정신적 지주로 남아있으며 헤이세이 연호는 잘도 쓰이고 있다. 우리 역시 해방 후 단군기원의 단기를 썼지만 박정희정권 시절 국제적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사실 기독교 문화권의 서구 사회에서 서기를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우리가 왜 서기를 써야하는지는 탐탁치 않다. 국제적으로 통일된 년도는 있어야하지 않냐고 반문한다면 일본처럼 병행 사용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이제와서 이런 얘기 꺼내봐야 좋은 얘기 돌아올 것은 별로 없을듯..

(열심히 떠들었지만 사실 나도 올해가 단기 몇년인지 모른다. 사천삼백몇십몇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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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장수국가로도 유명한 일본은 노인인구의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로 앞으로 우리 역시 동일한 형태의 연령구조가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건강하고 오래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고와 가치관이 건전하고 세련된 노인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며 우리도 그렇게 늙어가야 하겠다. 그런면에서 정갈한 옷차림으로 조용조용한 대화를 나누며 서있던 이들은 참 인상적이었다.

물론 깔끔함의 나라 일본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니다. 전철 역 앞에 널부러져서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노인들도 있고 담배 꽁초 중 긴 것을 찾으려 쓰레기 통을 뒤지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 비해 교양 수준이 높고 매너있는 노인들은 분명히 많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늘 倭놈이라고 비하하던 일본인들에게 국민소득은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 의식수준 면에서 우리는 오히려 배울 면이 많다. 일제시대라는 단절기를 통해 인,의,예를 숭상하던 품격높은 가치관을 잃어버린채 근본없이 헤매이는 우리의 정서와 가치관이 더욱 아쉬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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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이번 규슈 여행의 성과 중 하나는 평소 좋아하지 않던 RDPIII와 T3의 궁합이 꽤나 훌륭하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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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長崎)

스와신사의 휴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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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 나가사키(長崎)


우리나라에서는 60년대에 사라졌다는 전차가 아직도 유효한 교통수단으로 애용되고 있는 일본.

우리의 버스 중앙차선제와 비슷한 형태로 운용중인데 분명히 구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전차를 아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걷기엔 멀고 버스를 타기엔 가까운 정도의 거리를 타기에 제격. 요금은 구간 상관없이 100엔으로 저렴한 편이다. 더군다나 나가사키 역에서 1일 500엔 패스를 끊으면 하루종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 5번만 타면 된다며 충분히 본전을 뽑으리라 자신했건만 6번을 타며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었었다.

국내의 철도 매니아들이 전차를 타보기 위해서 일본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전차와 같은 감성적 사회 인프라도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비단 이 전차뿐이 아니라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는 근본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정말 대조되는 부러운 모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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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長崎)  메가네바시(めがね橋) 근처

일본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2년이라는 시간을 군에서 보내야 하는 우리와 비교해볼 때 그들은 더욱 자유롭고 여유로운 자신의 인생설계와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앞날에 '군대를 가게 된다면..' 이라는 걱정은 없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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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3  구마모토

가토 기요마사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일본인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인상적인 무장으로 우리에겐 악명이 드높았지만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는 물론 도요토미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무공으로 유명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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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02  후쿠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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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03  구마모토

하카타역에서 1시간 반 정도 쓰바메 특급을 타고 도착한 구마모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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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2  오사카

저 마다의 소원을 적은 나무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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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2  동경 황성

전형적인 일본식 축성법을 보여주는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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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2  일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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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1  일본 도쿄

그래도 젊었던 시절이었나부다.
야경이 있는 걸 보니 삼각대를 대낮부터 들고 다녔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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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1  일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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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1  일본 도쿄

일본스럽던 느낌의 거리.
사실 도쿄나 오사카는 서울과 다를바가 없어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다음엔 규슈나 훗카이도를 가봐야겠다. 일본은 시골 여행이 더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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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2  일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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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01  베트남 호치민시

호치민에서 지내는 동안 자주 만나서 놀던 친구들.
호치민 정보대학교 한국어학과 3학년이던 얘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한국말을 잘했다.
귀국하고 나서도 메일을 자주 주고 받았는데 사진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아직도 못지키고 있으니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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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베트남 호치민

여기가 시청이었던가. 벌써 5년이 흐르니 기억도 잘 안나는구나..
프랑스 식민지 시절 지어진 서구양식의 건물.
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곳이다.
사진을 찍어주며 파는 베트남사진사 아저씨를 하나 만났는데 Canon AE-1을 사용 중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 처음 쓴 카메라라며 통하지 않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우리 기념 사진을 부탁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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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베트남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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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몽골 울란바토르

시대가 변해가면서 이제 몽골에서도 유목민의 전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기는 힘들지만 아직도 이들은 게르에서 많은 이가 살고 있다. 다분히 아이러니한 현상이지만 자기 집터에 나무 울타리를 쳐놓고 생활은 여전히 게르에서 하는 정착도 이동도 아닌 희한한 형태의 주거문화가 혼재되어 있는데 이는 비단 오늘날의 현실도 아닌 원나라 때도 보였던 일이다. 중원을 지배한 몽골족들은 화려한 궁궐에서도 게르를 지어두고 생활하며 유목민들이 유목정신을 잊고 정착문명에 동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실 중국을 지배한 수 많은 유목민족들이 멸망하게 된 것도 중국의 한족문화에 동화되며 특유의 강인한 민족성을 잃고 기동성이라는 그 들만의 장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청나라를 지배했던 여진족조차 오늘날은 찾아보기 힘들정도이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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