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30 상하이(上海)





집안의 고구려 고분군. 엄청나게 많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지만 대부분의 무덤들이 이미 깔끔하게 도굴당해 누구의 무덤인지 알수 없는 것이 허다하다. 남의 땅이 되버린지 천 년 동안 이 고분들처럼 고구려의 역사를 증명해줄 증거들은 너무나 희미해졌다.




삼륜차를 끌고 먼지를 날리며 다리를 건너는 현지인.




과거의 우리의 땅이었던 이 일대에는 조선 말기부터 건너간 우리 동포들도 많이 살지만 한족과 만족들도 많이 살고 있다. 우리 동포 말고는 이 곳의 고구려 유적들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으리라. 지금은 펜스가 둘러쳐지고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그 전엔 무너진 고분 안으로 들어가 노숙자들이 잠을 자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니..

더 얘기해봐야 속만 탈 뿐이다.



2010.09.24 지안(集安)시







무척이나 뜨겁고 시끄럽고 복잡했던 예원 상가. 비행기 시간상 대부분 몇시간 못잔 상태에서 진을 빼기에 충분한 다소 부담스러웠던 첫 날 일정.

2011.07.30 上海


해도 뜨지 않은 꼭두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 보딩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았고 잠을 제대로 못잔 피로함이 밀려온다.




지루한 사람들은 담배도 피우고..




두 다리 쭉 뻗고 스마트폰과 놀기도 하고..




이번 티벳 여행을 함께할 녀석들. 현재와 현재 친구들인 은국, 강남, 자준. 다 동생 친구들에 내가 꼽사리가 된 격이지만 사실 티벳은 내가 몇년째 노래를 부르던 곳. ㅎㅎ  이번 여행은 2007년 몽골-바이칼 여행 때 함께한 여행사 사장님이 아직 우리를 기억하는 덕에 촬영에 보다 유리한 일정으로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다들 사진이 취미인 녀석들이라 적격이다.




오늘이 가장 출국자가 많다고 했던가. 어느 게이트나 줄이 장난이 아니다. 올해도 여행수지 적자에 기여하는구나.




Take off ~~

항공편 사정상 티벳에 앞서 첫날은 상해로~ 


2011.07.30 인천




2010.09.22 지안(集安)

무식하단 생각이 들기보단 깜찍했다고 해야하나? ㅎㅎ  실상 우리도 잘못된 외국어 표현을 쓰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은지라 비웃을 것도 아니다.

국내성터를 둘러본 후 점심으로 맛도 없는 숯불구이를 대충 먹고는 드디어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러 떠났다. 사실 이번 여행에 있어 백두산 천지 보다도 개인적으로 가장 설레는 코스가 바로 광개토대왕릉비였는데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최인호의 역사소설 '읽어버린 왕국'에서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이른바 '신묘년 기사'였기 때문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본의 대표적 역사서 '니혼쇼키(日本書紀)'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판한 부분과 더불어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기사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자로 몇번이나 써보았던 그 신묘년 기사는 다음과 같은데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고구려가 백제를 낮춰부르던 말),○○,○라(가야,신라로 추측)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기사는 위와 같이 해석한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때문에 비문이 19세기 말 일본의 육군 중위에게 발견될 당시 조작되었다는 설부터 기사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보아 거꾸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고 백제,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한다는 주장 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한, 중, 일 삼국간에 끊이지 않는 논쟁을 불러 일으켜온 아주 민감한 부분이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수년전 신문에서 본 기사에는 중국 측의 정밀검사 결과 비문에 대한 고의적인 훼손과 조작은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었다. 당시 무척 실망했고 중국의 검사라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어쨌든 그 후 비문조작설은 힘을 잃고 있어서 결국은 비문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설만 분분한 상태인 듯 하다.

어쨌든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던 당시 임나일본부설은 강제합병의 역사적 정당성을 찾기 위해 반드시 증명해내야할 가장 결정적 가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의 해석과 더불어 니혼쇼키의 기사를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를 찾기 위해 창녕일대의 가야고분들을 도굴과 다름없이 발굴해대며 뭔가가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던 결정적 자료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고 임나일본부설은 여전히 근거가 빈약한 '설'로 남아 한일간의 치열한 역사 전쟁의 최전선이 되어왔는데 얼마전 결국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고 인정하며 일단락되는 분위기이긴 하다. 물론 일본이 늘 그렇듯이 양심적 일부 학자들이 그렇게 얘기했다고 한들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해온 니혼쇼키의 임나일본부설을 쉽게 포기할 일본이 아니기에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는 언제나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사실 우리의 고대사는 그 사료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전무하여 삼국시대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 쓰여진 삼국사기 외에 이렇다할 정사(正史)가 없다보니 우리 스스로의 기록으로 역사를 증명해내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 와중에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는 더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우리 땅이 아닌 곳에 있어 우리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으며 비를 직접 촬영도 하지 못함이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 민족의 유적임에도 지안(集安)의 다른 고구려 유적들과 마찬가지고 광개토대왕릉비 역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비 자체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지라 비각역시 웅장하다. 저 안에 들어가서 비문을 한참을 들여다 보며 신묘년 기사를 직접 보고 싶었지만 글자의 마모도가 심하고 입체감을 더해줄 사광의 빛이 닿지 않아 육안으로 확인하는데는 실패했다. 사진 한 장 몰래 찍고 싶었지만 망할 중국 녀석이 곁눈질로 계속 감시를 해오고 있던터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충주에 남아있는 중원고구려비와 비석의 형태까지 거의 흡사하지만 역시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비석을 보면서도 직접 이 비를 보고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 가슴이 아픔은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는 흔히 광개토대왕이라 부르지만 저 비각의 현판에 보이듯이 중국에선 호태왕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부르는 명칭이 100% 정확한 것은 아니고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국강상(國岡上)은 광개토대왕릉이 있는 무덤의 언덕을 말하며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영토와 세력을 넓혔음을 의미하고 평안(平安)은 백성들이 평안하도록 다스렸으며 호태왕(好太王)은 왕중의 왕 왕중에서 제일 높은 최고 대왕이라는 뜻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광개토대왕릉비 인근에 위치한 왕릉으로 이동한다. 이 일대에는 민가들이 들어서있었지만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모조리 철거하고 정비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3,4면에 걸쳐서는 왕릉을 관리하는 임무와 역할에 대해 세세히 기록해두었는데 고구려 때는 이 곳에 주민들이 살며 왕릉을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문에 명시된 바와 달리 고구려의 패망과 더불어 왕릉은 관리되지 못했고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심하게 훼손되어 석축은 무너져내리고 잡초만이 무성하다.




더군다나 이 처럼 흉물스런 계단이 무엄하게도 왕릉 위에 놓여져 수많은 관광객들이 무덤위로 짓밟고 오를 수 있다.




못마땅하지만 나도 그렇게 올라가볼 수밖에 없다. 집안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들은 대체로 아래쪽의 석축은 거대한 반면 위로 갈수록 자갈과도 같은 돌무지들만 흘러내리듯 무너져있는데 장군총이라 불리는 장수왕릉과 달리 아래에만 큰 석축을 받치고 위쪽에는 작은 돌로 덮었던 것인지 아니면 훼손되어 이렇게 된 것인지 얕은 지식으론 알수 없었다.




계단을 다 올라오니 현실로 들어갈 수 있게 입구까지 만들어뒀다. 뭐 우리나라도 천마총을 비롯한 몇몇 고분들을 전시관 형태로 만들어둔 것이 있지만 중국넘들이 이렇게 해두니 기분이 나쁘다.




대륙을 호령한 대왕의 묘로 보기에 지나치게 수수하기까지 한 현실. 왕과 왕비의 관이 놓였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규모이며 집안의 다른 고분들에서 보이는 고분 벽화도 보이지 않는다. 부장품 따위는 이미 깔끔하게 도굴당한 상태로 인근에서 발견된 기와 파편의 호태왕이라는 명문마저 없었다면 광개토대왕의 릉이라고 확신하기 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볼 수 있으니 보고는 왔지만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춰주지 않은 중국의 유적 관리는 고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마음속으로나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왔다.


발해가 멸망한 후 그 넓은 요동과 만주 벌판을 잃어버리고 압록강 이남으로 좁아진 우리 민족의 역사 인식 속에 막연하게나마 남아있는 대륙의 기상과 그에 대한 로망은 광개토대왕이라는 한 영웅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어찌보면 반도 컴플렉스라고 해야할까? 성공 가능성도 희박했던 고려말의 요동정벌 계획과 효종의 북벌론을 떠올리며 만약 성공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어찌 달라졌을까하며 안타까워하는 우리지만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은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포기할 수 없는 웅대한 꿈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비록 대륙은 잃어버렸지만 대륙을 차지했던 수많은 민족들이 그 명맥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간 것을 보면 결국은 살아남은 자가 최종적으로 승리자가 아닐까 싶다.   


10.09.22 중국 지안(集安)


압록강 유람을 마치고 단동에서 집안으로 이동~
원체 땅이 넓은 중국이다 보니 단동에서 집안 정도면 가까운 편이다. 고속도로였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꽤나 아름답다. 특히 뽀얀 옥빛의 물색깔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는데 텐트 쳐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휴게소도 아닌 작은 공터에서 휴식 중. 우리나라와 달리 국도변이라도 휴게소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적당히 화장실만 있는 곳이면 잠시 쉬어 간다. 단동에서 집안으로 넘어가면서 문득 만족(滿族 = 여진족) 자치구도 들러보고 싶었지만 오늘날 여진족은 고유의 문화는 물론 언어 마저 거의 잃어버렸다고 하니 가봐야 별 것 없을 것 같기는 하다. 흉노, 선비, 돌궐, 말갈, 거란, 여진 등 중원을 정복한 강성했던 유목 민족들 중 그나마 명맥을 이어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몽골 뿐이니 7~8천만에 가까운 인구가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살아남은 우리 민족도 참 위대하단 생각이 든다.




드디어 집안(集安)에 도착했다. 집안은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오랜 수도로 고구려의 유명한 유적들이 대부분 위치하고 있는 실질적인 고구려의 발상지다.  




이것이 흔적만 남은 고구려의 도성 국내성의 성벽이다.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남아있는 석축은 정말 가지런하다. 도시개발과 더불이 국내성의 훼손은 가속화되고 있다. 천년도 넘게 지난데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민족이 쌓은 성이었으니 이 정도 남아있는 것만 해도 신기할 정도다.




이 쪽에는 성벽에서 돌출된 구조물의 흔적이 보인다. 옹성이 있던 자리인지 아니면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의 흔적인지 애매했는데 아래 지도를 보니 아마도 서문의 옹성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사진을 찍은 성벽이 바로 국내성의 서쪽 성벽으로 서쪽은 통가강이 남쪽은 압록강이 흘러 천연 해자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지금도 도로가 통과하는 곳이니 당시에도 서문이 위치했을 수 있고 서문이 있었다면 옹성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니 위 사진의 돌무더기는 치 보다는 옹성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치는 성벽 중간 중간에 __∩___∩__ 형태로 튀어나온 성벽으로 보통 그 간격은 활의 사정거리 정도를 유지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을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방어시설이며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문 앞으로 진입한 적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 반월 형태로 둘러싼 성벽을 말하는데 서울 동대문에 있는 그것과 같은 것이다. 


어쨌든 초라하게 남은 국내성의 흔적에 가슴아파할 겨를도 없이 주변에는 우리말로 참깨 사라며 달려드는 중국 상인들이 시끌벅적해졌다. -_-;   


 











중국 도착 후 이틀째 날 첫번째 일정은 압록강 유람선.  안개가 많이 끼면 건너편의 신의주가 보이지 않는다지만 다행히 전 날과 달리 날씨가 맑다. 




매표소 직원 비슷한 사람들. 제복을 입고 무표정한데다 꼭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입국 심사 때 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여권의 사진과 내 얼굴을 대조하며 아래위로 훓어보던 직원을 포함해 중국에서 만난 제복들은 인상이 너무 딱딱하다.




어디선가 중국에선 공안들 사진을 찍다가 걸리면 카메라 채로 압수한단 얘기를 들었는데 공안만 보이면 카메라를 근처에도 들이대지 않았다. 이 아저씨는 유람선 타는 곳에 관련된 분이니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거라 생각하고 그냥 180미리로 당겨 찍은 것. 




유람선 내부. 의외로 유람선은 깔끔했다. 우리나라의 섬 지역을 운행하는 유람선들 보다 더욱 쾌적한 편. 그러고 보니 강에서 유람선을 타본적이 있었나 싶다. 서울에 있을 때도 한강 유람선을 타본적이 없으니 호수를 제외하고 강에서 유람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압록강 상류 쪽으로 가는 중. 오른쪽 편이 바로 북한의 신의주다. 중국의 단동(丹東)과 북한의 신의주를 가로지는 이 곳은 압록강의 최하류 지점인데도 강폭은 생각보다 좁았고 물은 탁했다.




'중조우의교'를 지나는 중에 현재 사진 한 컷. 다리 이름의 뜻은 말그대로 중국과 조선의 우의의 다리인데 그 뒤로는 6.25 당시 미군 폭격으로 끊어진 구 철교를 그대로 두었다. 저 다리 끝 쪽에 가면 미공군이 폭격에 사용했던 불발탄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베트남에 갔을 때 들렀던 박물관에도 그런 전시물들이 한가득이었다.
 
6.25 전쟁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부르는 중국은 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어마어마한 대군을 파병했고 엄청난 인명 손실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한 방에 역전시켰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했던 연합군은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혹한 속에서의 사투를 벌이며 남쪽으로 밀려났고 군인과 피난민이 뒤섞여 제2의 덩케르크 철수라고도 불리는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탈출해야했다. 급기야 서울을 다시 뺐기는 1.4후퇴마저 일어나는데 어쨌든 중국은 6.25 참전의 대가로 역사 이래 이어져온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고 북한의 큰 형님 역할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사실 6.25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혼란스러운 시기로 대규모 참전, 더군다나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불가하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거시적인 안보 안정과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세계에 영향력 행사 등의 국익을 위해 세계 최강국 미국과 전쟁도 불사한 마우쩌둥의 결정은 대국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결국 우리만 통일을 눈앞에서 날려버렸다. 




위화도 근처에서 배는 다시 하류쪽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저기 평평한 섬이 위화도로 압록강 위에는 의외로 크고 작은 섬들이 꽤 있다. 이 중 대다수는 북한 영토로 되어 있고 일부는 중국 영토인데 위화도는 지금도 북한 소속이다. 섬에는 가옥들도 보이고 면적은 여의도 못지 않은 정도라고 하니 고려말 요동정벌을 떠난 고려군이 주둔할 만했다. 요동 정벌 당시 위화도에는 이미 부교가 부설되어 도하 준비가 끝난 상태였으며 선발대로 소규모 부대가 강을 건너가 노략질 비슷한 약간의 전과를 올리고 복귀하기도 했다고 한다. 4불가론을 내세우며 이 섬에서 군대를 돌린 이성계는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데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은 요동정벌을 위해 정예군을 쥐어주고 출병을 강요한 고려 조정의 무리수가 결국 망국을 재촉하지 않았나 싶다. 원명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요동 지역을 일시적으로 차지한다 하더라도 한반도와 달리 너무나도 넓은 그 지역을 우리가 추후 방어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리라 본다. 




배는 하류 쪽으로 이동하며 북한 쪽과 더욱 가까워졌다. ROTC 시절 판문점 회담장안에서 금을 넘어가서 명백한 '북한영토'를 '합법적'으로 밟은 적은 있지만 군인이 아닌 북한 주민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얼마전 엄청난 수해를 입은 신의주는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다. 유독 낚시를 하러 나온 주민들이 많이 보였는데 옷차림은 남루하고 얼굴에는 생기가 없다.



 
압록강의 모래를 퍼가는 것으로 보이는 작업 현장. 여기는 그래도 중장비들이 오가며 활력이 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국 관광객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텐데 손을 흔들어주는 북한 주민들... 촬영 당시에는 파인더를 통해 표정까지는 볼 수가 없었지만 호텔방에서 노트북을 통해 확인해보고는 그만 찡해버렸다. 허옇게 살찌고 좋은 옷을 입은 남한 사람들이 구경거리인 마냥 뱃전에 붙어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손을 흔들면 기분 나쁘고 배알 꼬일 법도 하건만 이렇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너무나 짠하다. 냉전 시대도 끝난 지금에도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멀리서 손 흔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을씨년하고 우중충한 건물들과 비웃기 보다 안타깝기만한 허황된 구호만이 가득한 신의주 쪽과 달리 중국의 단동은 이렇다. 제방부터 다르고 상큼한 색깔의 건물들은 멋들어졌다. 그 뒤로 새로운 고층 빌딩들도 쭉쭉 올라가고 있다.




교과서에 나왔던 민통선에서 펼쳐진 남북한의 각각의 선전 마을의 국기게양대 경쟁도 이 정도쯤 격차가 되면 이미 게임 끝이리라. 신의주와 단동은 이미 차원이 다른 도시가 되어 있다. 밤이면 강건너 휘황 찬란을 조명을 보는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어떨까 싶다. 그나마 중국과 이렇게 연한 북한 도시들은 다른 곳보다 비교적 생활 수준이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기념품들. 위조임이 뻔한 북한 화폐와 북한 담배들. 가짜인줄 알면서도 호기심 반 애뜻함 반에 사가는 우리 나라 사람들 덕분에 돈을 버는 이들도 있다. 북한을 통해 가볼 수 없는 백두산과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을 보기 위해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뿌린 돈으로 인해 중국의 동북 3성(요녕,길림,흑룡강)이 발전했다고 한다.

우리도 얼른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뿐이다.

2010.09.22 중국 단동(丹東)








2010.09.22 중국 단동(丹東)










2010.09.21 중국 단동(丹東)



2010.09.21 중국 대련(大連)

중국 도착 첫 날 부터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주셨다. 아직까지는 좀 더운 우리나라와 달리 꽤나 추웠는데 백두산 천지에 오르기가 걱정될 정도였다. 차례 안지내고 연휴랍시고 놀러나온 죄를 받는다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던 첫날의 오후.


2010.09.21 중국 대련(大連)

대련공항에 도착한 후 중국 일정의 첫 코스. 날씨 마저 비바람이 몰아쳐 공원 한 가운데쯤에서 동서남북으로 네 방향으로 우향우~우향우~ 하며 한 컷씩 찍고는 거의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공원 곳곳에 여러가지를 의미하고 상징하는 조각과 조형물들이 있지만 땅덩어리가 넓은 중국이라 그런지 크기와 규모에서만 압도할 뿐 아기자기하고 예쁜 조경을 갖춘 여의도 공원보다 나을게 뭐냐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일단 이번 여행은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 천지 등정이 최우선의 가치였기에 이런 곳은 전혀 관심 밖이었고 지금도 아쉽지 않다.



2010.09.22 중국에서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시(通化市) 허접 호텔방에서 동생 노트북 캠샷 ㅎ  귀국하면 중국 여행관련 포스팅할 주제들이 머리 속에 마구마구 떠오르는 밤이다. 까칠하지 않게 순수 여행기로 올리고 싶지만 비판적인 여러가지 생각만이 머리 속에 맴도는 오늘 밤. 칭다오(靑島)맥주 한 캔 마시고 일단 자야지. 날씨도 춥고 호텔방도 서늘하지만 10월이 넘어야 난방이 가동된다는 어이없는 호텔. 아쉬운건 결국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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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

원폭 피해 현황과 처참한 사진자료들을 보고 있는 일본인들



한국하면 아직도 한국전쟁을 떠올리는 외국인이 많다는 뉴스를 가끔 접하곤 한다. 내심 못마땅해 불쾌해 하기도 하고 올림픽 / 월드컵을 거치면서 그러한 부정적 인식을 떨쳐버리고 있음을 뿌듯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는 원자폭탄이지 않을까? 워낙에 충격적이었던 인류가 만들어낸 가공할 무기의 첫 실전 사용이었기에 그들이 원치 않더라도 타인의 인식 속에서 잊혀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율을 경험한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시 예상되는 인명 피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이는 때마침 개발된 신무기를 써보고 싶은 유혹을 더욱 부채질 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용으로 특수 개조된 4발 중폭격기 B-29 '에놀라게이'호가 날아가 작고 길쭉한 모양 때문에 '리틀보이'란 별명을 붙은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항복이 없자 3일이 지난 8월 9일 통통한 형태라 '팻맨'이라 별명이 붙은 두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이 가공할 무기는 수 만명의 목숨과 도시를 한 순간에 새까만 재로 만들어 버렸고 이에 굴복한 일본은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그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던 나가사키의 평화공원과 원폭기념관에는 원폭 투하 전 평화로운 시내의 전경부터 시작해 원폭 투하 직후의 폐허가 된 시내의 모습, 불에 타 쓰러진 시신들, 생존자들의 절규, 환자 구출 및 필사의 복구 활동, 원폭의 위력과 공포, 폐허 더미에서 가져온 잔해, 원폭이 폭발한 순간 멈춘 시계 등등을 전시하여 관람객들의 가슴을 교묘하게 무겁게 만든다. 마치 일본인들이 전쟁의 피해자인양. 정말 인류에게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단 느낌이 들도록. 더군다나 더 가관인 것은 '미국 너네가 원폭을 떨어뜨려 우리만 죽은게 아니다. 봐라 괜한 외국인들도 이만큼이나 죽었다.'라고 얘기하는 듯한 외국인 원폭 피해 현황도 있는데 그 중에 한국인이 가장 많음은 뭐라 설명해야 할런지.

아직도 끊이지 않는 헌화와 편지들에는 No War, Peace, Love 등 좋은 말은 다 적혀있었다. 과연 원폭 폭발 중심지의 평화공원에서 일본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잔인한 식민지배와 중일전쟁과정에서 일어난 남경대학살 등의 참상은 알고서 저리도 침통한 표정을 짖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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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캐널시티

그다지 흥미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간 김에 한번 들리기라도 하자며 잠깐 스쳐지나간 후쿠오카 캐널시티.
써커스 중인 곡예단인데 일본인들도 그리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진 않는 듯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곡예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고 자극적인 것들이 지천에 널려있으니 뭐.

노출이 나올거 같지 않아 거의 쓴 적 없는 T3의 내장플래쉬를 강제 발광시켜봤는데 나름 적절한 사용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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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정말 일본'틱'했던 母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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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일본 후쿠오카


요번 일본행에서의 칼라사진은 후지의 대표적인 정색재현용 포지티브 Provia와 Contax T3가 맡았다.
사실 이 조합은 나로선 약간의 도박이었다. 일단 후지 프로비아는 나와 궁합이 안맞는 편이었다. 이상하게 정색재현용이란 이미지 때문인지 프로비아로 찍은 사진들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고 어차피 슬라이드라면 화려하게 가자는 생각으로 벨비아나 E100VS같은 Vivid계열만을 선택했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고급 P&S이라고 해도 어쨌든 똑딱이인 T3에 관용도 좁은 슬라이드를 넣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번의 그 시도는 아주 성공적. 의외로 프로비아와 T3의 눈 Carl Zeiss
35mm 2.8 T* Sonnar의 궁합은 참 훌륭했다. 차분한 편인 프로비아와 짜이즈 특유의 쨍함이 만나 적절한 수준의 톤과 색감을 만들어준 듯. 첫 번째 사진은 특히 나무 기둥의 질감이 참 기막히게 표현된 것 같다. 사진의 내용과 주제도 중요하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스캔빨잘 받고 색감이랑 톤이 맘에 든단 이유만으로 괜히 혼자 뿌듯뿌듯할 때도 있다.

노출계도 없는 수십년 된 카메라들을 쓸고 닦고 만지며 재미를 느끼기도 하지만 T3처럼 누르기만 하면 되는 똑똑한 녀석도 귀엽긴 하다. 앞으로 종종 슬라이드 물려줄 생각  :)


※ 사진들은 후쿠오카의 첫 날 열심히 삽질하며 돌아다니다 만난 아담한 작은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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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완전 역광이 되는 상황에서 보여준 비오곤의 플레어. 그다지 보기 싫지는 않다. 전용 후드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구하기도 어렵고 있다해도 가격은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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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
메가네바시(めがね橋)를 찾아가던 중.

나가사키 시내를 가르는 청계천 만한 개울에는 오래된 홍예교들이 여럿 놓여있는데 더 인상적인 것은 다리 아래 개울에는 잉어들이 돌아다니고 있더라는 점이다. 사실 구마모토성의 해자에도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는데 도심을 흐르는 개울도 관리가 잘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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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

뜨거운 햇살에 녹초가 되었던 날.
텐슈가쿠(天守閣)에 올라갔다 내려오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줄은 예상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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