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9.


포항 시외버스터미널은 1985년에 준공된 낡은 시설로 고속터미널과 함께 흥해 쪽으로 이전할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포항시의 인구 증가가 지지부진한데다 완전 외곽 지역에다 투자하기를 꺼리는 기업들의 참여 부진으로 결국 현 자리에서 복합환승센터로 재개발하기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원안대로 추진하라는 북구 주민들과 현재 터미널이 위치한 남구 주민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발생하고 등등 말이 많다는데. 뭐 어쨌든 이 곳의 모습도 머지 않아 사라질테니 틈날 때 마다 찾아서 좀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Leica M3 / Summicron 50mm f2.0 Rigid / Kodak 400TX / IVED


'다라이'에 담겨 있던 커다란 방어들 중 한 마리가 팔렸다. 아직 살아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방어를 회로 먹을 수 있는 철은 지났기에 누가 어떤 용도로 사가는지 궁금해진다.







방어가 움직이지 못하게 무릎으로 누르고 아가미 안 쪽에 칼을 집어넣는다. 살고자 몸부림치는 방어의 힘은 대단해서 미끄러운 바닥에서 방어가 튀어나가지 않게 하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넓은 바다를 누비다 좁은 다라이 안에 담겨진 방어들은 견디지 못하고 파닥거려 보지만 벗어날 수 없다. 이들도 곧 앞선 동료와 같은 운명에 맞이할 것이다. 지능이 낮은 어류라고는 하지만 겪어본 적 없는 낯선 환경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리가 있을까.







아주머니께서 잡으신 방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다. 방어는 크기가 제법 큰 어류다 보니 몸에서 나오는 피의 양도 적지 않다. 칼라였다면 더 날스러운 사진이 되었으리라.






아가미에 칼이 들어갔는데도 방어는 죽지 않고 이따금씩 발작하듯 파닥거린다. 몇차례 다시 찌르는 걸 보고 있노라니 한번에 숨통을 끊으려고 칼을 찌르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로 유지시켜 피를 빼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움직임이 점차 뜸해지는 방어의 머리를 아주머니께서 토닥이며 뭐라고 얘기를 하시는게 아닌가. 뭐라고 하시는 건가 궁금해지던 차에 아주머니 쪽에 더 가까이 있던 일행이 내게 돌아와 얘기를 해준다. 




"아주머니께서 방어한테 '미안하다~ 미안하다~ 좋은데 가거라.' 하고 계세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더이상 카메라를 겨누지 못했다. 그저 그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그런 마음으로 생명을 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속으로 되뇌일 뿐. 


팔닥거리는 싱싱한 물고기들이 넘쳐나는 어시장은 그래서 활기차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지만 그 싱싱한 물고기들은 결국 '아직 죽지 않은, 곧 죽을' 물고기들이다. 주인이 나타나면 곧바로 도마 위에 올려져 목이 달아나고 몸통이 갈라져 살점이 발라진다. 태어나 죽기를 바라는 생명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살고자 하고 죽지 않고자 함은 본능이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며 모든 생명체는 저항하지만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물고기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처절하게 보여서인지 대부분 잔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6년전에 제주 모슬포항에 방어회를 먹어보러 들렀었다. 여느 횟집들이 그러하듯 손님들이 주문을 하면 뜰채를 들고가 수족관에서 물고기를 잡아 건져 올린다. 그런데 그렇게 수족관에서 꺼낸 커다란 방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횟집 아주머니께서 방망이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미끈거리는 물고기이니 빗맞기도 하고 제대로 맞지 않으면 한번에 기절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러차례 방망이를 내려치는데 이 모습은 적잖이 충격으로 남고 말았다. 먹어야 하는 것이니 죽여야 하겠지만 저런 방법 밖에 없나 싶었지만, 또 생각해보니 가만히 잡고 있을 수도 없으니 때려서 기절이라도 시켜야 칼을 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회를 먹으려던 마음이 많이 불편해지는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래도 잘 먹긴 먹었다는 ㄷ)




어업이 생업인 분들께는 사실 물고기를 죽이는 일에 복잡한 생각을 가지실 이유도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 분들에겐 반복되는 일상이자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찌른 칼에 피를 쏟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방어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미안하다'고 속삭여주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은 정말이지 놀랍고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록 생계를 위해 방어의 목숨을 앗아야 하지만 생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저런 분이라면 평소 생활에도 얼마나 따스함이 가득할까 생각해 본다. 





2017.04.02. 포항 죽도시장


Leica IIIa / Elmar 5cm f3.5 / Ilford HP5+ 400 / IVED





























2017.03.18. 청송


Leica IIIa / Elmar 5cm f3.5 / Kodak TMY / IVED



















2017.03.25. 포항


Leica IIIa / Elmar 5cm f3.5 / Kodak 400TX / IVED



































2017.03.10~11



불금을 맞아 회장님과 함께 간단히 소주 한잔 하러 들른 참지집에서 술김에 찍은 막샷들. 


침동 엘마를 받아온 날이라 회장님 보여주려고 들고 나가긴 했는데 여기서 뭘 찍을 생각은 원래 아니었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니 괜히 셔터를 누르고 싶어져 객기로 몇장을 찍기 시작했고 그러다 바르낙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옆자리 커플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알고보니 여성분이 포항시향 비올라 단원이라 한 때 클래식빠로서 감개무량하여 즉석 연주를 부탁드렸다는거 ㄷㄷ  이 분도 이미 소주를 3병 정도 헤치우신 상태라 처음에 좀 빼시다가 결국 차에서 비올라를 갖고 오셔서 즉석 독주회를 열게 되었다. 참치집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숨죽여 '섬집아기'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곡명이 이게 맞나?)'를 감탄하며 들었고 연주가 끝나고는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으니... 내가 본 그 어떤 실황보다도 사실 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연주회였다. 


사진이야 물론 뭐 보다시피 어두운 실내에서 어두운 엘마로 찍었으니 망했지만 ㅠ 


Leica IIIa / Elmar 5cm f3.5 / Kodak 400TX / IVED




























































































































2017.01.13. 경주


홈그라운드에서 관광객처럼 놀기. 교토에서 돌아오신 보따리 장수 수경님과 콩고물 얻으러 정희님이랑 접선했던 날. 무려 첫 눈을 남자 셋이 함께 맞았다. ㄷㄷ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Kodak 400TX / IVED
















































































2017.03.01. 포항


Leica M3 / Orion-15 28mm f6.0 / Kodak 400TX / IVED




































































2017.01.28.

Hexar AF / Kodak 400TX / IVED























2017.01.22. 포항

Contax IIa / Carl Zeiss Tessar 50mm f3.5 / Kodak 400TX / IVED



Zeiss Opton Biogon 35mm f2.8 T




RF카메라를 사용하는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화각은 단연 35미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좁지도 넓지도 않은 화각 탓에 편안하게 두루두루 운용할 수 있는 35미리 렌즈는 거리 사진과 보도 사진 분야에서 널리 인기를 끌었고 각 메이커들은 저마다 우수한 35미리 렌즈의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20세기초 표준렌즈와 장초점 망원렌즈의 발전에 비해 광각렌즈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뎠고 오늘날까지도 성능을 인정받는 '제대로된' 35미리 렌즈의 출현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소형카메라의 선두주자이던 라이츠사는 1930년 Elmar 3.5cm를 출시했다. 당시 자이스이콘은 아직 Contax I 조차 발매하지 못했던 때였으니 라이츠의 엘마는 가장 빨리 등장한 35미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Contax I이 출시되고 난 후에도 칼 자이즈는 35미리를 아예 건너 뛰어버리고 더 넓은 화각인 28미리 테사를 발매하며 그들의 기술력을 과시한다. 그리고 정작 35미리 화각은 Contax II가 발매되고 난 뒤인 1937년에 처음 출시하게되니 바로 칼 자이즈 예나 비오곤이었다. 비로소 '제대로 된' 35미리 렌즈가 사진계에 등장한 것이었다.



역사적인 첫번째 비오곤. Carl Zeiss Jena Biogon 35mm f2.8 (uncoated)


35미리 비오곤은 당시로선 대적할 상대가 없는 최고의 35미리 렌즈였다. 라이츠에 비해 한발 늦었던 만큼 성능상으로 엘마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는데 최대 개방값은 f2.8에 달했고 놀라운 해상도와 극도의 왜곡 억제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후옥의 크기가 극단적으로 크고 플렌지 백이 엄청나게 짧은(21미리 비오곤보다 더) 특유의 설계로 달성할 수 있었던 놀라운 성능이었다. Elmar 3.5cm의 최대개방값은 f3.5에 머물렀고 해상도는 사실상 열악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당시 비오곤과 엘마의 성능 격차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차대전 전에 생산되었다고 하여 전전형(pre war) 비오곤이라 불리게 되는 Carl Zeiss Jena Biogon 35mm f2.8은 종전 이후까지 생산이 지속되며 당대 최고의 35미리 렌즈라는 지위를 내려놓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는 T코팅이 더해지는 개량이 이루어졌고 전쟁 기간 중에는 특이하게도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용으로도 잠시 생산되었다.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용 35미리 비오곤. 


전쟁 중 드레스덴의 자이스이콘 공장이 폭격을 맞아 카메라 생산을 못하게 되자 예나의 렌즈 공장 역시 위기에 처한다. 렌즈를 만들어봐야 이를 장착할 카메라가 없는 것이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자이스이콘은 콘탁스용 렌즈들을 라이카용으로 제작하여 판매처를 뚫기로 한다. 종전 후 이같은 변종들은 더이상 생산되지 않았고 생산기간이 짧다보니 생산량도 상당히 적어 구하기는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구할 수만 있다면 마운트할 수 있는 바디가 제한적인 콘탁스용에 비해 훨씬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하지만 명성을 날리던 전전형 비오곤은 1950년, Contax IIa가 등장하면서 뜻밖의 문제에 맞딱드린다. 앞서 얘기한 커다란 후옥과 짧은 플렌지백 때문에 Contax II에 비해 소형화된 Contax IIa에 장착이 되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비오곤 35미리를 쓸 수 없다니, 이건 심각한 사안이었다. 물론 자이스이콘이 이같은 문제를 몰랐을리는 없고 바디의 소형화를 달성하기 위해 희생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동독 칼 자이즈 예나에서 설계된 Biometar 35mm f2.8이 급히 투입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영구적이고 완전한 분단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터라 동독과 서독의 교류는 유지되고 있었고 비오메타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비오곤과 비오메타. 한 눈에 봐도 렌즈 후옥의 길이가 짧은 것을 알 수 있다.




 Zeiss Opton Biogon 35mm f2.8 T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될 수는 없었고 서독의 Zeiss Opton은 곧 새로운 비오곤을 출시하게 된다. 덕분에 위에서 언급한 비오메타 35미리는 1,614개만 생산되고 사라지게 되어 레어 아이템으로 등극하게 된다. Zeiss Opton Biogon 35mm f2.8은 이전의 비오곤과 구분하기 위해 전후형 비오곤으로 불리게 되는데 Contax IIa에 마운트 할 수 있기 위해 새롭게 설계된 것으로 후옥의 크기가 작아지고 길이가 짧아진 것이 특징이었다. 출시 초기부터 단종 때까지 코팅의 변화 외에는 구조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은 50mm Sonnar와는 달리 흥미로운 변화라 할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을 통해 그 변화를 확인해보기로 하자.





최초의 비오곤은 조나 타입으로부터 파생되었는데 후옥이 크기가 전옥보다 큰 특유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전전형 비오곤은 전쟁 후 두갈래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는데 전쟁 후 소련에서 생산된 주피터-12 렌즈는 전전형 비오곤의 설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반면, 서독에서 생산된 전후형 비오곤은 앞서 언급했듯 Contax IIa에 사용되기 위해 후옥의 크기가 작아지고 길이도 짧아진다. 




마운트된 전후형 비오곤. 짧아졌다지만 필름면 가까이 상당히 들어와있음을 볼 수 있다.




전전형 비오곤(좌)과 전후형(우) 비오곤의 비교. 후옥의 길이가 짧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전후형 비오곤이 가지는 핸디캡이었다. 바디에 맞추기 위해 비오곤의 완벽한 설계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문에 전후형 비오곤은 콘탁스 마운트 비오곤 타입 35미리 렌즈들의 성능을 논할 때 주피터-12 보다도 한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는 렌즈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사실일까? 실제 전전형과 전후형 모두를 써본 유저들의 대체적인 평가는 해상도 만큼은 전전형이 탁월하다는 쪽이다. 전후형 비오곤의 짧고 작아진 후옥을 고려해 봤을 때 전전형에 비해 해상도와 왜곡 억제력이 다소 떨어졌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아직 두 렌즈를 1:1로 비교한 결과를 보지 못해서 선뜻 수긍이 가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연 전후형의 해상도가 다소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확연한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다. 엘마와 비오곤이 60:100이라면 전후형과 전전형은 90:100의 느낌은 아닐런지. 그리고 해상도 측면에서만 렌즈를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고해상도 렌즈와 고화소 이미지 센서들이 당연시된 요즘 시대에 올드 렌즈를 사용하면서 기대하는 요소는 뛰어난 해상도만은 아니란 점에서 전통적인 시각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전후형 비오곤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 개선점들을 고려하여 다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Contax II에서 IIa로 이어지면서 이루어진 소형화, 그리고 디자인의 개선은 비오곤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졌다. 전전형 비오곤이 다소 투박한 디자인과 마감을 보여줬다면 전후형 비오곤은 훨씬 세련된 디자인과 컴팩트함을 이루어냈고 크롬 코팅의 품질도 개선되어 아름다운 광택을 자랑한다. 거기에다 개선된 T코팅이 적용되어 역광에서는 물론 칼라 필름 사용시에도 보다 안정적인 결과물을 보장해준다. 결국 종합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전후형이 보다 우수한 성능이라고 봄이 더 타당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바닥이 그러하듯 객관적 성능과 정밀하게 측정된 수치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전설'은 분명 존재한다. 전전형 비오곤은 그런 면에서 전설의 대열에 오른 렌즈였지만 전후형 비오곤은 아쉽게도 그러질 못했다. 그렇게 된 이유로 두가지를 들고 싶다. 


① Biogon 21mm f4.5의 출현. 

비오곤 35미리의 출시 후 얼마지나지 않은 1954년 칼 자이즈는 21미리라는 놀라운 화각의 비오곤을 출시한다. 전에 없던 광활한 화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었을 이 렌즈는 광학적 성능마저 뛰어났다. 비오곤하면 21미리가 먼저 떠오를 정도로 임팩트가 강한 렌즈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35미리 비오곤은 한마디로 묻히게 된다. 


② 라이츠의 약진

앞서 언급했듯 전전형 비오곤이 출시되던 당시 라이츠에서 내세울 수 있는 35미리 렌즈는 해상도 낮고 코팅도 적용되지 않고 개방값도 어두운 Elmar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시 비오곤의 성능은 라이츠를 포함한 여타 경쟁사들의 렌즈들을 압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전전형 비오곤은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후형 비오곤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라이츠는 엘마에 비해 모든 면에서 성능이 향상된 Summaron 35mm를 출시하고 있었고 1958년에는 그야말로 신화가 된 렌즈, Summicron 35mm 1st, 일명 8매를 선보이게 된다. 이건 그야말로 두 회사의 35미리 경쟁에서 종지부를 찍어 버리는 일이었다. Contax IIa가 61년 단종되며 콘탁스 마운트 렌즈들 역시 같은 운명을 따르게 되면서 주미크론에 대항할 f2.0개방값의 비오곤은 결국 시장에 선보이지 못했다. 이처럼 전전형과는 달리 경쟁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던 상대적 지위 역시 전후형 비오곤이 다소 박한 평가를 받게된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러쿵 저러쿵 하는 호사가들의 얘기를 별개로 치더라도 전후형 비오곤은 좋은 렌즈임에 틀림없다. 출시 당시 콘탁스용 교환렌즈 중 세번째로 비싼 가격이었고 깔끔한 외관 디자인과 고급스런 크롬 광택이 아름답고 비오곤 다운 컴팩트한 사이즈 역시 매력적이다. 초점링과 조리개링은 아주 부드럽게 작동되어 만지작 거리는 재미도 크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구하기도 어려운 물건인 탓에 소유에 따른 만족도도 높은 렌즈라고 할 수 있다. 


21미리 비오곤과 50미리 조나라는 걸출한 두 렌즈 사이에 가려 콘탁스 마운트 렌즈들 중에서 그 이름은 드높지 않지만 역시 비오곤은 비오곤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물건이 많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바디가 제한적임에도 불구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가격을 자랑하지만 Contax 유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35미리의 폭이 좁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렌즈 역시 Must Have Item이다. 보이면 사야하는 렌즈다. 




Contax IIa / Zeiss Opton Biogon 35mm f2.8 T




AGFA APX1OO




AGFA APX1OO




AGFA APX1OO




AGFA APX1OO




AGFA APX1OO




AGFA APX1OO




ILFORD HP5 400




ILFORD HP5 400




KODAK 400TX




KODAK 400TX




KODAK 400TX




KODAK 400TX




KODAK 400TX




KODAK 400TX




KODAK 400TX




FUJIFILM C200




FUJIFILM C200




FUJIFILM C200




FUJIFILM C200




FUJIFILM C200




FUJIFILM C200




FUJIFILM C200




FUJIFILM C200




FUJIFILM C200















































































2016.11.20. 부산

Leica M3 / Elmar-M 50mm f2.8 / Kodak 400TX












2003.08.15. 서울 시청광장

Nikon F90X / ai-s 28mm f2.8 / Kodak TMY / IVED




지인이 써보라며 올드 렌즈를 하나 건네줬다.

라이카 35mm의 원조격인 Elmar 3.5cm다. 1930년대 부터 발매되어 4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엘마는 주마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라이카의 35미리 화각을 담당했지만 성능적으로 크게 뛰어난 평가를 받지 못하다 보니 오늘날 5cm 엘마에 비해 그 인기는 높지 않은 편이다. 지인의 렌즈는 그 중 1940년산 무코팅 버전인데 경통에 상처가 많고 렌즈 내부에도 먼지와 스크래치가 적지 않은 그야말로 전투형이었다. 


LTM을 이용해 라이카 M3에 마운트하고 Zeiss Ikon의 35미리 파인더를 달아주니 제법 예쁘다. 보다시피 워낙 얇고 컴팩트한 렌즈라 침동한 5cm 엘마 못지 않다. 이왕이면 M3보다는 바르낙 바디를 하나 구해서 바디캡으로 써보고 싶은 욕심이 잠시 들지만 일단 결과물을 보고나서 생각하기로 하자. 광학적 성능에 대해서는 솔직히 기대되지 않지만 특유의 '맛'이 나는 렌즈면 좋겠다.




토요일 늦은 오후, 해가 짧은 요즘이라 지금 나가서 몇시간이나 찍을 수 있겠냐는 생각에 잠시 고민이 들었지만 그래도 토요일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순 없지. 신광면에 있는 법광사지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고즈넉한 폐사지에서 호흡긴 촬영을 할 수 있을테니 익숙하지 않은 이 렌즈로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됐다. 




큰 도로에서 벗어나 차 두대가 지나기도 버거운 좁은 마을길을 통해 한참을 올라가서야 법광사지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건 뭥미. 허허벌판에 드문드문 놓여진 주춧돌과 우뚝 솟은 당간지주 따위를 어떻게 적당히 담아볼까 생각하고 왔더니만 발굴 중이라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나를 맞이했다.




발굴 조사를 위해 온통 절터를 뒤집어 놓은데다 유구가 나온 곳은 방수천으로 덮어놓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자괴감이 들 무렵 역광 테스트나 해보자고 해를 집어 넣어 찍어보았다. 무코팅 렌즈임에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수준이다. 




해상도야 그리 높지 않지만 부드러운 콘트라스트와 그로 인해 넓은 계조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렌즈가 그러하듯 순광에서 조리개를 조였을 때의 묘사력은 부족하지 않다. 날카로운 선예도와 강한 콘트라스트 등 너무 잘나오기만하는 현행 렌즈에 비해 올드 렌즈가 흑백 사진에 좋다는 이유가 이런 느낌 때문이 아닐까.




법광사지는 완전히 허탕을 친 것이 되었지만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주변 마을이라도 좀 둘러보자 싶었다. 경사진 산비탈을 따라 이어진 계단식 논과 시골집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인공의 구조물임에도 자연과 하나된 듯 녹아있는 이런 따스한 풍경도 오랜만이다. 팔순이 다된 렌즈로 찍은 결과물이라 그런지 시간이 멈춘듯한 신광면의 풍경이 더욱 옛스럽게 느껴진다. 




집 가까이로 다가가 봤다. 살림 도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 빈집으로 보인다. 애초에 대문은 없었던 것 같고 어설픈 목책만이 주인대신 빈집을 지키고 있다. 투박하게 쌓은 돌담과 3단으로 된 목책을 보고 지인은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이냐고 물었다. 




돌담 옆에 서 있던 감나무의 질감이 좋았다. 늦가을의 시골 정취를 표현하는데 잎이 떨어진 감나무에 달린 감 만한 소재도 없는데 요즘은 시골 마다 감을 딸 사람도, 먹을 사람도 없어 겨울이 지나도록 그대로 감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어릴적 시골에 가서 키보다도 훨씬 긴 장대로 감을 따고 놀던 기억이 난다. 




길을 내려오다 마을의 당나무를 만나서 잠시 멈추었다. 





묵직한 톤이 제법 마음에 든다.




개방 조리개의 느낌은 어떨까 싶어 금줄에 초점을 맞추고 구도를 잡아봤는데 피사체에 좀 더 극적으로 다가섰어야 했나보다. 어중간한 거리 탓에 그리 심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을 막걸리 한 병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지대가 높아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많이 하고 있는 듯 했다. 하우스에서 자라는 시금치의 색이 생기있게 파랬다. 




지도에도 없는 촌 길. 




다시 차에 오르기 전 마을의 모습을 조금 넓게 잡아봤다. 노출을 결정하는데 신중을 기울였던 컷으로 기억된다. 3.5cm 엘마의 조리개 수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3.5 / 4.5 / 6.3 / 9 / 12.5 / 18 로 표기되어 있어 익숙치가 않은데다, 초기형 M3의 유럽식 셔터스피드 다이얼까지 더해지니 머리 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리저리 함수를 끼워 맞추며 겨우 한 컷을 눌렀는데 다행히 결과물은 원하던 분위기로 나와주었다. 




산길을 내려와 곧장 집으로 가려다 큰 도로변에 서있던 신광시장이라는 간판을 보고 혹시나 볼거리가 있나 하고 차를 세웠다. 골목 안쪽으로 향하니 요즘 시골에서 보기 드문 아이들의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어? 사진기자 아저씨다!' (노숙자로 안보여서 다행) 




카메라를 들이대자 녀석들이 좋아 날뛰기 시작한다. 법광사지에서 허탕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밀려오지만 사실 익숙하지 않은 렌즈로 이런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앞서 얘기했듯 엘마의 이상한(?) 조리개 수치 때문에 지금 내가 놓은 눈금이 조리개 몇쯤 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고, 초점 맞추고 게눈 파인더로 눈을 옮기자니 정신이 없다. 제발 좀 가만 있어봐라 얘들아.





정신없이 움직이는 녀석들을 노출과 초점을 신경쓰며 찍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믿을건 Kodak 400TX의 부처님같은 관용도와 35미리 렌즈의 심도 뿐. 노출계 꺼낼 생각도 못하고 뇌출계로 대충 때려 잡았다. 흔들리지 않을 만큼만 최대한 느린 속도로 세팅하고 조리개는 조일 수 있을만큼 조인 후 초점을 고정시켰다. 이젠 그냥 찍는거다.




시골에 웬 아이들이 이렇게 있나 싶어 여기에 사느냐 물었더니 외갓집에 놀러온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외갓집에서 제대로 추억을 쌓고 있는 녀석들이 부러웠다. 




귀염둥이들 :)




수레를 밀던 녀석은 부끄럽다며 한사코 얼굴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나는 한때를 보내고 있는 개구진 녀석들.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야 하는데 말이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 다시 걸음을 옮기다가 이 장면을 마주했고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눌렀다. 오른쪽에 있는 여인네와 눈이 마주치면 분위기가 깨어질거라 생각해 마음이 급했더니만 결국 흔들렸다.




면사무소 근처 도로에서도 다니는 차들을 별로 볼 수 없었다. 너무나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신광 분식 앞 평상에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늦은 오후를 보내고 계셨고




나는 캔커피를 사러 점방에 들어갔다. 평상에 앉아계시던 할머니 중 한분이 주인이셨는지 느린 걸음으로 따라오셨다. 냉장고에는 전기도 들어오고 있지 않았지만 날씨가 추우니 괜찮았다. 동전이 없어 5천원짜리를 드렸더니 거스럼돈을 뒤적이시길래 그냥 담배 한갑도 같이 샀다. 내가 피우는 담배는 없었다.




점방의 기둥에 붙어있는 '간첩 잡자' 표어. 저런 것도 오랜만이다.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친 아반떼가 아니었다면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진이었이라. 해가 거의 떨어진 상황이라 콘트라스트 약한 엘마가 제대로 표현해줄까 걱정도 되었지만 보다시피 멋진 톤을 보여주고 있다. 




필름이 두 컷 정도 남았었다. 

'할매! 가게 앞에서 사진 한장 찍어드릴게요. 나와 보세요.'

'다 늙은 할매 뭐할라고, 안찍는다~~'

'에이, 한번 나와보세요. 할매 가게 앞에서 사진 한장도 안찍어보셨죠? 내가 좋은 카메라로 찍어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평생을 지내온 집이자 일터인 점방 앞에서 찍은 사진이 없다고 생각되셨는지 그제서야 할머니는 머리를 정리하시며 못이기는 척 밖으로 나와 앉으셨다. 뻣뻣한 포즈셨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남은 두 컷을 할머니에게 할애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이 놈의 엘마가 제대로 나와줘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처음 쓰는 렌즈를 신경쓰이는 촬영에 투입하는 건 역시나 부담스럽다. 어쨌든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를 그와 비슷한 세월을 보낸 엘마로 담아 드리면서 촬영은 마무리 되었다.  

그렇게 총알이 떨어진 나도 카메라를 내려놓고 할머니 옆에 앉았다. 신광면에 사람이 북직이던 재미나던 시절 얘기와 법광사지가 밭이었 때 밭을 갈다가 주웠던 기와조각 등의 얘기, 공부를 많이 못시켜서 미안한 자식들 얘기와 이 시골에도 대형 마트가 들어와 이제는 담배 말고는 팔리는게 없다는 점방 얘기까지. 제법 긴 시간동안 할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나중에 장날에 한번 다시 놀러오겠다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할머니도 저녁을 차려야겠다며 들어가셨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다시 신광면에 들렀고 점방으로 가서 할머니를 불렀다.


'할매! 내 또 왔다!'



2016.12.03. 포항 신광면


Leica M3 / Elmar 3.5cm f3.5 / Kodak 400TX / IVED




Leitz Elmar 3.5cm f3.5

생산시기 : 1930 ~ 1949년
생산수량 : 40,000여대
최단초점거리 : 1.25m
렌즈 구성 : 3군 4매



2016.12.03. 포항

Leica M3 / Elmar 3.5cm f3.5 / Kodak 400TX / IVed


일본 여행은 여러가지로 참 편리하다. 

우선 생김새가 비슷하여 아무 말 않고 가만히 다니면 이방인 티가 많이 나지 않아 시선에 대한 부담이 적고(실제 나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사진을 좀 찍어달라며 부탁하는 일본인들도 많았다.) 일어나 영어를 못하거나 히라가나를 몰라도 한자를 배워온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필수적인 정보는 대략 식별할 수 있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잘 갖추어져 있고 치안도 좋아 돌아다니기에 불편함이 적으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나긋나긋 조용하다. 현지식도 우리 일상에서도 친숙한 일식이라 거부감이 들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도 일본 여행을 좋아한다. 여느 관광객들처럼 대형 쇼핑몰이나 백엔샵 따위에 들러 물건을 고르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맛집을 찾아 줄을 서서 기다려 가며 식도락에 탐닉하기도 하고, 사진도 신나게 찍으며 즐겁게 놀다 오곤 한다. 하지만 그런 즐겁고 편리한 일본 여행의 와중에 한편으로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고  불편해짐을 자주 느꼈었다.

성숙해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사회 문화적 수준은 그나마 많이 따라갔다고 하는 일본과의 경제력 격차만큼 금방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경우에서 확인할 수 밖에 없었고, 강박적이라고까지 보여지는 그들의 타인에 대한 철저한 배려, 그리고 질서 의식에 대한 부러움은 괜한 반발심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도 뭔가 못난 모습을 발견해보려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시선을 낭비하기도 했다.


무단횡단하는 아가씨1




무단횡단하는 아가씨2




그리고 간혹 다소 차갑고 고압적인 태도의 공무원 등을 마주치게 되면 일제 시대에 그들이 우리를 대했을 그런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며 식민지의 2등 신민이 겪었을 기죽고 서러운 감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씁쓸한 기분이 못내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봐도 비싼 돈 들여 재미있게 놀자고 가서는 이딴 생각이나 하고 다녔으니 나도 참 피곤한 사람이다 싶다.


삐딱하게 서서 '저건 뭐냐?' 하듯 나를 쳐다보던 츠키지 시장 입구의 경비원




반면 서양 관광객들 옆에선 기죽은 듯 왜소한 일본인의 표정에서 페리 제독과 맥아더 장군을 대했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일본을 작년 여름에 또 한번 찾았다. 어쨌든 일본 여행은 ‘편리’하니까. 도쿄는 두번째였다. 특별히 볼거리가 있어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은 아니었지만 2004년에는 일정상 패스했던 우에노 공원을 이번에는 들러보기로 했다. 그저 도쿄 시민들의 편안한 일상이 보고 싶었다.
























무더운 여름날, 공원의 큰 나무 그늘 아래선 가족들이 모여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잘 놀고 있다가 카메라를 겨눈 나를 보고 다소 당황한 듯한 여자아이들에게 괜시리 미안해졌고,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던 여자아이도 참 예뻤다. 자전거를 타고 산책나온 단란한 한 가정도 보기 흐뭇했고, 커피숍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젊은 청년이 만들어주는 막대 풍선을 구경하는 아이들도 평화로웠다. 그들을 보며 공원을 거닐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도 70여년 전이었다면 오늘같은 우에노 공원의 평화로움은 누릴 수 없었을테지..’

불행했던 그 시대의 아이들은 B-29 편대의 공습을 피해 겁에 질려 방공호로 뛰어들어야 했을 거고, 소이탄을 맞아 잿더미로 변해버린 동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잠들 때 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물으며 간절히 기다리던 그 아빠는 이오지마나 콰달카날에서 반자이 돌격으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의 큰 형은 꽃다운 나이에 해군 항공대 소위가 되어 제로센 전투기를 겨우 조종할 수 있게 되던 날, 돌아올 수 없는 연료와 폭탄을 싣고 날아올라 오키나와로 몰려오는 미해군 함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런 그의 비행기를 향해 사쿠라 가지를 흔들어주며 배웅하던 여학생들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켰겠지…

우에노 공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나니, 행복해 보이는 오늘 그들의 모습이 새삼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여겨졌다. 모두가 살기 어렵고 힘들기만한 요즘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성이 파괴되고 말살되는 전쟁과 같은 그런 처절한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 불행한 시대를 겪지 않았음에, 그래도 평화로운 지금에 살고 있음에 감사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에노 공원 사진들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잠시나마 일본 여행에서 느껴왔던 불편함이 사라진 순간이었고, 그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과 여전히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그들의 몰염치성에 지금도 분노하고 있다. 그들의 악랄한 식민 지배를 겪은 불행한 나라의 후손인지라 잊어서도 안될 일이고 그렇기에 일본 여행은 편리하면서도 내게는 또 불편한 것이었지만 우에노 공원에서는 잠시 그 마음이 누그러질 수 있었다. 문득, ‘그래.. 모든 인간은 행복해야 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2016.08.04. 도쿄

Leica M3 / Elmar-M 50mm f2.8 / Kodak 400TX / IVED



2016.05.22.

Rolleiflex 2.8F Xenotar / Kodak Ektar 100 / Epson3200








2016.10.08. 포항

Leica M3 / Elmar-M 50mm f2.8 / Kodak 400TX / IVED











































2016.10.08. 포항

Ricoh GR1s / Kodak 400TX / IVED





















2016.11.05. 포항

AGFA ISOLETTE II / KODAK TMY / EPSON 3200

Canon의 컴팩트 RF카메라 Canonet GIII QL17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방학 동안 토익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내가 끼고 살던 책이 있었으니 이 바닥에서 바이블이라 통하던 '바바라 런던의 사진'이었다. 알던 내용도 다시 보고 존 시스템처럼 단박에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은 몇번이고 다시 읽으며 독파해나갔다. 이 책의 모든 것을 방학 기간동안 마스터하리라는 욕심이 들던 때였다.


그런데 늘 그렇듯 환자들의 생리란 뻔해서 존 시스템 보다는 카메라의 종류를 언급한 부분에서 보았던 레인지 파인더 방식의 카메라가 느닷없이 궁금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친구분의 라이카 M6를 만져본 적이야 있었지만 내가 직접 써본게 아니니 그 찰나의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못했다. 뭐라도 하나는 써봐야 느낄거 아닌가. 학기 중이었다면 곧바로 남대문으로 달려갔겠지만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와있는 와중이었으므로 그럴 수도 없다. 물론 가봐야 헐벗고 굶주리고 다니던 내 형편에 살 수 있는 물건도 없겠지만.


그러고보니 지역에 '나름' 인지도 있는 카메라 가게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거기나 한번 가보자.' 별 기대는 안했지만 심심하기도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가게에 들어서니 마침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사장님과 열심히 장비 얘기 중이다. 들고 있는 카메라는 당시 캐논의 대히트작 EOS-5의 한단계 아래 보급기였던 EOS-55였다.


'아 이번에 내가 백두산에 가서 천지를 좀 찍으려고 해서.. 이거 갖고 찍을 수 있겠는교?'


번들처럼 흔하디 흔하던 캐논 EF28-105 줌렌즈를 들어 보이며 그 분은 사장님께 질문했다. 장사하는 사람한테 저렇게 물어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사장님이 썰을 풀어댄다.


'아이고 선생님, 이번에는 작품 제대로 찍으러 가시나보네요. 이 렌즈도 나쁘지 않은데 천지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28미리로는 이게 다 안들어와요. 워낙에 넓으니까. 이걸로는 좀 그렇고 이거 함 보이소. 이거 갖고 가면 마 끝이지예.'


사장님은 꽤나 비싸던 EF20-35 F2.8L렌즈를 꺼내보였다.


'이거 하나믄 마 풍경은 끝입니다. 이거 빨간 줄 보이시지예? 이게 캐논서 제일 좋은 L렌즈 표시 아입니까? 선생님 정도 활동하셨으면 이제 렌즈도 좋은 거 하나 장만하셔야지요.'


'이기 비싸다 아이가. 너무 비싸가지고.. 좋기야 한데..'


'아따 선생님요. 28미리가꼬 천지 한방에 안들어와가 후회하고 다시 갈라캅니까? 그 돈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지예. 그리고 카메라야 나중에 바꿔도 렌즈는 평생쓰는거 아인교. 백두산까지 가시는데 맘 먹은 김에 좋은 걸로 사가서 찍으이소.'


'생각해보니 그거는 또 그렇네요. 그럼 그거 하나 주소. 그리고 삼각대는 내거 이걸로 가져가도 괜찮겠지요?'


'선생님 내가 장사할라고 하는게 아이고 솔직히 천지 올라가면 바람이 진짜 장난이 아입니데이. 이것도 뭐 카메라 올릴 수는 있지예. 근데 이래 약해가지곤 바람 불어가 휙 넘어가뿌면 비싼 카메라 렌즈 다 깨묵는다 아입니까? 삼각대는 알면 알수록 좋은걸 써야지. 초보들이야 뭐 아는교. 서이 가가 서이 사진 찍을 때나 세우는게 삼각대인줄 알지. 작가들 함 보소. 머할라고 그 사람들이 짓조 같은거 쓰겠는교. 삼각대도 하나 하소. 하는김에.'


적당히 띄워주고 협박(?)하고 회유하여 결국 사장님은 EF20-35 L렌즈와 짓조 삼각대와 많이 사셨으니 싸게 준다며 카메라 가방까지 하나 파실 수 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며 '아 나도 학교 때려치우고 카메라 장사나 해볼까.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한건 올린 사장님 기분이 좋을테니 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표정으로 아저씨가 가게를 나가고 나서야 사장님은 나에게 관심을 주신다.


'어 학생은 뭐 살라고?'


'그냥 구경 좀 하려구요.'


'뭐 찾는거 있나?'


'RF카메라 중고 뭐 없나 싶어서요.'


'젊은 사람들이 그런 것도 쓰나? 우리는 몇개 없는데 그런거.'


그런거 뿐 아니래도 지방 카메라 가게가 그렇듯이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그저 '눈 먼' 매물이 하나 없나 싶어 왔던 것인데 역시나 별게 없다. 그런데 쇼윈도 쪽에 먼지를 케케묵은 작은 RF카메라가 하나 눈에 띄었다. 바로 캐논 GIII QL17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것이 딱 봐도 사기 싫게 생겼었지만 가격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이거는 얼마예요? 파시는거예요?'


'이거? 이거를 뭐 얼마를 받아야되노..'


애초에 별 팔 생각이 없었던 물건이었던지 잠시 고민하시던 사장님은


'학생이니 내 싸게 줄게. 7만원!'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달 용돈이 20만원도 채 안되던 나에게 7만원은 나름 큰 돈이었다. 깎아야한다.


'에이 이거 먼지도 많고 상태도 그냥 그런데 5만원 해주세요.'


'5만원은 안되지~ 우리도 매입한 가격이 있는데.. 학생이니까 그럼 6만원.'


'아 5만원 해주세요. 어차피 이거 제가 안사가면 또 누가 사갈 것 같지도 않은데.'


나름 솔깃한 멘트였으리라.


'그럼 5만 5천원! 됐재? 더는 안된데이.'


이 정도면 OK!


'네 그럼 제가 살게요. 케이스랑 이런건 주시는거죠?'


당시만 해도 남대문에서 니콘 FM2 따위를 사면 서비스랍시며 노란 니콘 스트랩과 정품은 아니겠지만 레자로 된 케이스를 대부분 줬었기에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먼지 케케묵은 이 카메라에 맞는 케이스가 있으리라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의외로 새 것같은 레자 케이스가 있었고 사장님은 '학생이니까'를 자꾸 강조하며 그것도 끼워주셨다. 그렇게 나에게도 처음으로 RF카메라가 생긴 것이었다. 집에 와서 엄마 매니큐어 지우는 아세톤으로 구석구석 닦아주니 새것처럼 반짝였다.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일본의 카메라 제조사들은 이와 비슷한 컴팩트 RF 카메라들을 우후죽순 쏟아냈다. '가난한 자의 라이카'로 유명한 야시카 35GN부터 올림푸스 35시리즈, 미놀타의 하이매틱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35미리 전후의 붙박이 광각 단렌즈가 탑재되고 셔터스피드 우선AE 등의 자동노출이 가능해 사용이 간편했고 플라스틱이 본격적으로 공산품에 많이 사용되던 시절이 아니라 바디의 대부분이 금속으로 만들어져 나름 탄탄한 내구성을 자랑했다는 점이었다. 이 기종들은 80년대 들어 AF가 되는 본격 똑딱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중적인 카메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중에서도 캐논의 GIII QL17은 약 120만대나 팔려나갈 정도로 히트를 친 기종이다. 초반에는 일본에서 생산되나 후에는 대만에서 생산이 되었고 내것도 대만제였다. 중고가는 일본산이 조금 더 비싸다고 하나 롤라이35의 독일제냐 싱가폴제냐 정도의 갭은 아니다. 그 놈이 그 놈인 수준이다.


이 카메라의 최대 장점은 모델명 QL에서 알 수 있는 신기한 Quick Loading 방식이다. M4 이후의 라이카 M바디의 퀵로딩 스풀도 편하다지만 QL17은 그냥 자동카메라에 필름을 넣듯 빨간점까지 필름을 뽑아 뒷두껑을 닫아준 후 와인딩 레버를 감기만 하면 실패없이 로딩이 된다. 필름 넣기에 서툰 일반인들을 배려한 아주 편리한 방식이다. 이후에는 왜 이런 방식의 카메라가 나오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카메라에 캐논이 꽤 많은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시차보정이 되는 프레임 라인이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M형 라이카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장치를 보급형 카메라에서 구현 해줬다니 놀라운 일이다. 노출은 셔터스피드 우선 AE가 가능하고 반셔터를 누른채로 있으면 AE-LOCK도 가능하며 렌즈셔터 방식이라 소음도 진동도 아주 작으며 덕분에 전 셔터스피드 영역에서 플래쉬 동조가 가능하다. 셔터스피드 우선 AE 외에 매뉴얼로도 사용할 수 있고 이 때는 노출계가 OFF되는 대신 완전 기계식으로 작동된다. 나름 기계적 신뢰성도 갖춘 셈이다.


처음에는 제법 예쁘고 클래식컬한 모양 때문에 애지중지하며 자주 들고 다녔다. 하지만 결국 몇롤 찍지 않고 장식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결정적 이유는 4군 6매의 40mm f1.7 렌즈 성능의 한계 때문이었다. '가난한 자의 라이카' 부류에 속하는 카메라들에 대한 사람들의 후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한데 사실 '가성비'로 놓고 보면 부족하지 않은 기종들이지만 보급형이니 만치 그 한계는 명확했다. 이 녀석으로 찍은 필름을 확대기에 걸어놓고 보면 니콘 렌즈와 차이가 제법 났다. 선예도, 콘트라스트 모두 부족했고 역광에서도 강하지 못했다.




2001.01.04 안동, 자전거를 끌고오던 다정한 형제를 만났었다 / Kodak TMX




2001.01.05. 안동, 안동포 짜는 마을 / Kodak TMX




구입 초반을 제외하곤 별로 찍지도 않아서 예제 사진을 찾기가 좀 힘들었다. 그나마 쓸만한 것이 이 두 컷이 전부로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던 중 '야 우리 지금 안동 안갈래?' 라는 동기의 말에 무작정 청량리역으로 달려가 막차를 타고 내려갔던 안동에서 3일동안 돌아다니며 찍었던 사진들 중에서 골랐다. 그 이후로는 이 녀석을 제대로 써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렇게 별로 사랑받지 못하던 GIII QL17은 몇년이 지난 후, 군시절 절친했던 계원에게 선물로 주면서 내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싸구려 카메라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장의 사진때문이다.




2001. 1월 어느날, 대구 / Kodak TMX


할머니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찾아왔다가 돌아갈 때면 항상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개울가 바위 밑에 가셔서 누군가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셨다. 아마 돌아가는 길에 우리 가족 안전하게 잘 가라고 산신령이거나 누구에게 간절히 비셨을 것이다. 늘상 있었던 일이므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장면, 그 장면을 무심코 눌렀을 때 내 손에 있던 카메라가 바로 GIII QL17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후 우연히 옛 필름들을 들춰보다가 이 컷을 스캐너에 걸었다. 당시엔 확대 인화조차 하지 않았던 컷이었기에 어떻게 찍힌 건지 좀 궁금했다. 잠시 후 4000픽셀로 스캔된 이미지가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곧 그 이미지는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종종 걸음이 만들어낸 눈 밭의 발자국을 보며 한참을 눈물을 흘렸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간절했구나. 이 사진에서만큼은 해상도니 콘트라스트니 뭐니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 장면을 남겼음이 너무 소중했고 할머니가 건강히 살아 계실 때 왜 더 많은 사진을 남겨두지 못했나 하는 후회만이 가슴을 후볐다.


환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에게도 버릇, 혹은 목표란 것이 있다. 어떤 카메라나 렌즈를 새로 구입하게 되면 이것으로 일명 '일면'이라든지 '베스트갤러리'라든지로 대표되는 '걸작' 하나는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싼 돈을 주고 샀으니 본전 생각이 나는건 어쩔 수 없나보다. 사진으로 돈벌어 먹고 사는 프로가 아닌지라 나에게 본전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5만 5천원 주고 산 GIII QL17은 본전의 백배쯤은 남겨준건가? 아니 그런 물질적인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겠다. 이곳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라 어딘가에서 '일면'이나 '베갤'을 간 적도 없고 갈 사진도 아니겠지만 내게는 다시는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사진이다. 내 가슴에 와서 박힌 할머니의 모습을 아로새겨준 소중한 카메라로 기억되고 있는 카메라가 바로 GIII QL17이다.


사진 한장으로 기억되는 카메라라니. 녀석은 나의 장비 편력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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