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 해수욕장의 모습을 뒤바꿔놓은 해안도로 공사도 거의 마무리되었다.




축대가 쌓아지고 아스팔트가 덮인 도로가 차지해버린 모래사장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뭐 이미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던 송도해수욕장이었지만 한적한 분위기를 느끼러 찾아오기 좋았던 곳 하나가 결국 사라졌다.




반면 다 쓰러져가던 빈 집들과 상가들은 이 도로의 개통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될지.. 오늘 신문기사를 보니 모래사장을 엎어서 도로를 만든 포항시에서 송도해수욕장 모래사장 복원을 추진할 계획이라던데 파괴하기 만큼 복원하기도 쉬울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어쨌든 모래사장이 포항시의 계획대로 성공적으로 복원되고 다시금 많은 관광객들이 찾게 될 명소로 거듭난다면 이런 흉물스런 폐가들 대신 번듯한 건물들이 삐까뻔쩍하게 들어설지도 모른다. 광안리처럼 변해버린 북부해수욕장처럼.




프레임만 남은 문. 송도의 골목길.




방파제 근처의 선착장 주변. 21mm Biogon의 광활함을 다루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사진은 뺄셈의 예술이라 했건만 이것저것 다 들어오는 화각은 절제를 요한다.




꽃샘추위도 이제 거의 물러간 듯 하다만 바닷바람은 쌀쌀하다. 아직은 저 난로와 잡목 땔감이 유용하리라.




방파제 위에는 허름한 횟집들이 모여 있지만 언제나 한산하다. 누군가는 이 허름한 곳에서 투박하게 썰은 회 한점에 소주를 털어넣는 운치를 즐기겠지만 내가 한 번 그렇게 해본바로는 이 곳의 회 맛은 솔직히 그닥이었다.




송도해수욕장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이 '평화의 여상' 뿐인듯 하다. 촌스럽기도 하고 조형적으로도 우수해보이진 않지만 송도 해수욕장에 대한 크고 작은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송도의 상징으로서 뇌리에 기억될 수 있는 것 중 하나일 듯 하다. 나 역시 해안도로가 건설된다고 했을 때 이 것은 좀 남겨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다행히 위치를 조금 옮겨 보존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무조건 갈아 엎어버리는 불도저식 개발 시대는 지나갔음을 느낀다.

어쨌든 송도의 변화에 대한 큰 가치 판단없이 심심할 때면 들러 셔터를 눌러온지도 몇 년이 되었다. 그동안 송도의 모래사장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이제 또 복원을 한다니 틈날 때면 한번씩 들러 또 그 모습을 담담하게 기록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2010.03.28 포항 송도



08.08.10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이란 낭만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지만 내 집 바로 뒷마당으로 우렁찬 경적소리와 함께 기차가 지나다닌다면 정말이지 아찔한 하루하루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이 곳을 지나는 철로는 다른 곳으로 변경될 것이란 얘기를 들었지만 사진 찍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심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장면 하나 쯤은 찍고 싶은 것이다. 하루 운행 횟수가 극히 적어 시간을 일부러 맞추지 않는 이상 이 곳을 지나는 기차를 찍기 어렵지만 이 곳을 처음 찾았던 06년에는 운좋게도 때맞춰 지나는 기차를 촬영할 수 있었다. 


2008.08.10 군산

 
째보 선창의 여름, 얼음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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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정선 5일장


2009.08.08 포항

죽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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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26  포항 구룡포




2008.10.03  단양

단양 8경 중 가장 유명한 도담삼봉의 전경. 명승 제 44호로서 조선 개국공신이자 우리 집안으로선 원수가 된 정도전이 지었다는 멋드러진 정자가 있는 곳이다. 저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위에 흡사 조경석 마냥 어우러진 세 기암이 있고 그 중앙봉에 아담한 정자 하나 지어두고 나룻배를 타고 노 저어 건너가 책을 읽고 시를 읊고 술한잔 걸치던 그 순간 만큼은 고려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손에 묻혀야했던 많은 피와 한맺은 이들의 충혈된 눈동자의 마지막 모습도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잠시나마 그런 쓸데없는 상념에 젖을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모터보트 타는 곳의 확성기에서는 '신명나는' 뽕짝 메들리와 '보트가 곧 들어오니 승선 대기하시라'는 안내방송이 우렁차게 울려퍼진다. 될 수 있는대로 나와 관련없는 일에는 신경꺼서 스트레스도 받지 말고 괜한 에너지 소모도 하기 싫지만 짜증이 밀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자연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강변에 흉물스런 쇠파이프 뼈대에 철판 지붕을 덮은 저 따위 건물을 허가해준 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며 자신의 사업이 심각한 소음 공해와 시각 공해를 동시에 유발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저 모터 보트 업주의 무지함은 어째야 할 것이며 평화롭고 잔잔한 수면 위에 상처같이 날카로운 궤적을 남기며 달려가는 모터 보트를 어이없게 쳐다보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왁자지껄한 관광객들 모두 안타깝다. 관광(觀光)...진정 을 보았습니까?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게 여전히 수준 떨어지고 촌스러운 저질 후진국스런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정말이지 손발이 오그라 든다.






2009.10.02 경북 예천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전통주막 '삼강주막'


경북 지방 출신이 아니면 이름조차 생소할 듯한 예천군에 있는 삼강 주막은 1박 2일에 소개되면서 인기가 급상승하며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사실 마지막 남은 주막이라 하여 예전에 몇 차례 매체에 보도된 것을 보았으나 기사에서 본 주막은 허름하면서도 소탈한 그런 모습이 아닌 복원된 느낌이 너무 나는 그것이었기에 굳이 먼 걸음을 하고 싶진 않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뜬금없이 빌려온 내비게이션 사용에 서툰 어느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는 내비게이션을 쓸 줄 몰라 못찾아가겠다며 도움을 요청하여  어딜 가시느냐 했더니 바로 삼강주막을 가고자 하노라고 대답했었다. 그 분은 신문기사까지 스크랩해서 보여주었는데 그 날 이후 삼강주막을 나도 한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고 추석을 앞둔 휴일 잠시 다녀올 짬을 낼 수 있었다.




삼강 주막이 위치한 삼강나루터.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곳이라 삼강 나루터라 하고 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기 위해 많은 길손들이 머물 수 밖에 없는 목이다. 자연스레 주막이 생겨났을거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어찌보면 오늘날의 고속도로 휴게소와도 같은 곳이었을텐데 주막이라고 하면 왠지 우악스럽게 팔뚝을 걷어 붙히고 대낮부터  술상앞에 앉아 막사발에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입에선 술이 줄줄 새어 흘러야하고) '주모!! 여기 술 한병 더~!!' 를 외치는 수염 덥수룩한 사내들과 탐욕스러운면서도 간사해보이기도 하고 요염하기도 한 분위기로 눈웃음을 치는 주모가  살랑거리며 술을 들고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건물은 원래의 건물을 복원차 보수한 것인데 1900년대에 지어진 나름 100년이 넘은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흑백으로 찍어두니 그럴싸하지만 선명한 황토빛은 조금 어색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마 밑의 액자는 복원전의 모습들. 초가지붕이 아닌 슬레트 지붕이 덮어져 있고 담배를 태우는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보부상 숙소라고 재현해둔 건물. 뭐 어쩔 수 없단 생각이 들지만 저 반듯한 목재와 깨끗하고 편편한 황토벽은 크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궁궐이나 사찰이 아닌 이상 조선시대 서민들의 집, 특히나 주막에 저렇게 각진 반듯한 목재가 사용되었을리는 없다. 그리고 아무 곳에나 걸리는 저 현수막~ 비단 여기 뿐이 아니라 사찰이든 길거리든 넘쳐나는 현수막은 정말 시각 공해다.




뒤에 있는 컨테이너와 쇠파이프 구조물이 참 맘에 안들지만 어쨌거나 나름 주막의 풍경이 이러했지 않을까 싶다. 요즘 처럼 세상이 바쁘지도 않고 복잡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물건 팔러 다니는 보부상들이나 먼 길 가는 나그네들이 좋은 풍광을 만나 하루쯤 늦으면 어떠리오~하면서 강바람에 취해 술에 취해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을 것도 같다. 여기 들른 사람들이 거의 다 촌두부나 부침개, 도토리묵 정도는 다들 맛보던데 가격은 싼 편이었다.




요건 예전에 있던 간이 화장실을 복원한거라는데 뭐 ㅎㅎㅎ  군대 있을 때 숙영지에 설치하던 간이 화장실같은 그런 방식이다. 남자들이야 까짓거 들어갈지 몰라도 여자들은 엄두도 못 낼 화장실. 하기야 조선시대에 조신한 여인네들이 주막에서 얼쩡거릴 일도 없었겠지만;




강둑에서 바라본 삼강 주막.

어쨌거나 삼강주막은 방송을 탄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회룡포, 용문사와 함께 예천을 찾으면 들러볼만한 관광코스가 개발됨으로써 예천군 입장에서도 삼강 주막의 가치는 클 것이다. 하찮아 보이는 이런 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문화와 옛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방송이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예전과 달리 지나는 길손이 쉬어가는 주막이 아닌 일부러 들러야 하는 곳이 된 관광지로서 복원된 주막이 얼마나 자생력을 갖추고 오랫동안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는 더 오랫동안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촌두부 한 점에 막걸리 한 사발 마셔보고자 여기까지 찾을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북적이라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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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01  서울 세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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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8 경남 고성

작년 휴가 때 해안도로를 달리던 중 바다가 너무나 파래서 방파제로 몰고 들어가 차를 세웠었다. ㅋㅋ  지금은 철호에게 시집간 아방이와 함께한 마지막 하계휴가~

올 휴가도 이제 한달 조금 덜 남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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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31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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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31 구룡포


일요일 아침에 늦잠을 포기하고 찾아간 구룡포엔 평소와 다른 활기가 느껴졌고 가져간 필름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이댈 소재가 넘쳐나고 있었다. 한동안 놀고있던 Rollei35SE가 바람 좀 쐰 날. 톤이나 질감 맘에 들어 역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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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12  강구항

대게철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던 지난 4월의 강구항. 대게를 맛보려는 수많은 사람들로 발디딜틈 없었고 어디서 그렇게 많이 잡히는지 수없이 많은 게들이 수족관에 겹겹히 포개져 담겨있었고 그 중에 몇 마리는 또 우리 식구들의 뱃속으로~ ㅎㅎ 

기본적으로 흑백필름을 선호하지만 가져간 카메라에 칼라네가만이 들어가있을 땐 스캔 후에 많은 갈등의 순간들이 온다. 칼라로 포스팅할 것이냐 흑백 전환하여 그럴 것이냐. 오늘은 그냥 둘다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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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부산투어를 향하며 조금은 색다르게 가덕도를 가보기로 했다. 곧 연육교가 완성되면 더이상 섬이 아닌 섬이 되는 곳이기에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섬으로서의 가덕도를 보고 필름에 담고 싶었다. 위 사진의 선착장에서는 배에 차를 못 싣고 간댄다. 섬도 크지 않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 섬주민들의 차량 외에는 출입이 허가되지 않고 어차피 이 곳 선착장에서 탈 수 있는 배는 사람밖에 못 탄다. 한적한 여행을 기대하던 중이라 차는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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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의 낡은 쇼파와 부부. 그리고 그 들의 뒤 쪽에 지금 한창 공사중인 부산과 가덕도를 연결하는 연육교가 보인다. 이제 곧 가덕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가 된다. 섬사람들은 이제 부산으로 나오기 편해졌고 땅값은 오르고 있다. 전역 후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는 가덕도가 고향인 학군단 동기 녀석에게 전화를 했더니 한다는 소리가 '니도 땅보러 가나?' 였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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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시간이 다가오고 배 안에는 몇몇의 관광객을 제외하곤 모두 주민들 같다. 뭍의 사람들은 배를 탄다는 재미도 느끼겠지만 그냥 시골마을의 버스와 다를게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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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되는 뱃길을 왕복하는 운전기사도 아니고 뱃사공(?)도 어색하고.. 어쨌든 할아버지. 이 좁은 바다를 오가며 평생을 살아오셨겠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저 다리가 완공되어 차들이 달려들어가게 되면 그 때도 이 배를 탈 수 있을까. 배에서 내리며 살짝 여쭤볼까도 싶었는데 왁자지껄한 배 안 분위기에서 그런 심각한 질문은 너무나 뜬금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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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14 가덕도


흑백사진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섬에 도착하고 나서 공사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 있는 섬의 모습과 질퍽질퍽한 도로, 섬을 돌아다니는 셔틀버스 외에 가용한 이동수단은 거의 없었고 의욕적으로 섬에 상륙했을 때와는 달리 도저히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면서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고 싶은 것들은 다리나 완공되면 편하게 다녀와야겠다. 혼자서 여유로운 일정이라면 모르겠으나 공사 중으로 어수선한 작은 섬에서 반나절 이상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별 맛없던 회 한접시 먹고 바로 덜컹거리는 버스 타고 선착장으로 돌아와 배타고 부산으로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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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포항

일제시대에는 조선 10경에 들만큼 솔밭과 모래사장이 끝내줬다는 송도해수욕장의 퇴락한 마지막 모습들. 이미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간혹 바다를 보고 싶을 땐 가장 금방 도착해서 바람을 쐴 수 있던 곳이었으나 이제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모래사장을 뒤엎고 해안을 따라 일주도로가 건설 중에 있다. 송도해수욕장은 이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p.s. 몇개월만의 현상, 그리고 몇 개월만의 스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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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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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6 서울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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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  서울놀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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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 서울놀이공원


할아버지가 안계셔서 그런가 2000년도에 별 생각없이 찍었던 이 사진들을 다시 보니 왜일케 애뜻한건지 모르겠다. 이게 핏줄의 정인가 싶은것이..ㅠㅁㅠ    저렇게 눈에 넣어도 안아픈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다니시던 할아버지 분들의 마음은 어떨까. 나 왜 이러지? 나이가 들었나 정말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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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의 골목길에서 만난 아이. 눈을 감았지만 그 때는 인화도 하지 않았던 이 사진이 왜 이렇게 맘에 드는지 모르겠다. 노출 완전 오버에 현상도 오버라 톤은 개판이지만 투박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흑백 사진을 처음 시작하던 초기의 네가티브들은 지금에 와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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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다듬던 할머니. 난곡의 좁은 골목에서는 할머니, 아줌마들이 나와서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나누며 나물을 다듬거나 하는 모습들이 흔했다. 집안이 좁고 어두워서이기도 했겠지만 재개발의 열풍이 몰아치기 전 난곡은 사람사는 냄새가 풍기는 정가는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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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의 경사가 심한 골목길은 노인들이 다니기에 절대 편하지 않았고 겨울에 눈이라도 와서 얼어붙으면 자빠지기 딱 좋았다. 골목을 지나다보면 염화칼슘 보관하는 집이라고 써진 집들이 한 두군데씩 있었다. 지금와서 보니 이 사진을 찍은 것도 가상하다. 사실 이 때는 왜 난곡에서 못사는 사람들 사진을 찍어야하는지에 대한 개념정립이 안된채로 헤매이기만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사진들을 찍어야 하는지 왜 좋은 사진인지 이해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 부터 사진을 찍어왔지만 대학교 1,2학년 때 난 내가 어떤 사진을 해야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도 아니고 내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사진을 대해야한다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난 내 사진의 색깔을 찾고 싶었고 여러가지 시도를 해봤고 다양한 책들을 읽어 나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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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사고. 세월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이런 장면 조차도 아련한 추억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흑백 사진으로 담은 스냅들은 꽤나 오래전의 장면을 보는듯한 착각을 준다. 그래도 21세기인 2000년도의 사진인데 무척이나 오래된 모습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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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간판의 오락실. 오락실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안타깝게도 난 학창시절 오락실을 들락거린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그다지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 앞 문방구 등에서 많이들 사먹었다는 달고나, 뽑기 등과 더불어 보편적인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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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곡에서 만난 희망들. 이 아이들을 만나기 전만 해도 난곡이라면 우울한 달동네..이거 하나만 생각했었다. 뭔가 진지한 태도로 뭔가의 스토리를 담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난곡 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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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들러서 쭈볏쭈볏 기웃거리다 선생님에게 애들 사진 좀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허락해주시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사진 제목에 달동네 아이들. 이런 식으로 안하실거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당부를 하던 그 유치원 선생님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복된 인연을 만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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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간 필름도 하필 감도 100인 TMX라 노출도 안나오는 상황에 이 녀석들은 부지런히 카메라 앞에 모여든다. 여기저기서 '나도 찍어주세요~','저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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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렇게 부대끼며 어울리고 장난칠 수 있는 친구들과 그러한 환경이 갖춰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나 이 사회에게나 행복한 일이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학원에서 시달리고 노는 시간엔 놀이터가 아닌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요즘 아이들의 성격 형성은 분명 앞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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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을 나서며...또 오라고 인사를 하던 아이들. 사진 인화해서 또 올게~ 라며 약속했지만 1년 후  내가 다시 찾았을 때 유치원은 벽돌 더미로 변해있었고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길이 없었다. 재개발 결정이 내려진 후 난곡엔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란 두 글자가 휘갈겨졌고 분위기는 흉흉했다. 그렇게 난곡에 대한 재개발 결정이 내려지고 집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나는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왜 그동안 난곡에 대한 사진을 더 많이 찍어두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바로 그거였다. 기록. 내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작업은 기록으로서의 사진이었다. 이 후 몇년간 나는 아마추어임에도 아마추어로서의 한계를 벗어넘고 싶었고 다큐 사진에 푹 빠져 많은 시도와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발점이 된 사건이 바로 난곡의 재개발이었다. 난곡은 어쩌면 내 사진의 방향이 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알려주고 사라진 소중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2000.05.17 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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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14

날씨가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하던 5월의 주말, 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여유
8년도 넘게 지난 이 필름들을 들여다보니 사람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본 지가 언제인가 싶다. 현상, 노출도 엉망일 만큼 기교도 부족하던 시절의 사진들이지만 필름 속에 사람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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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4.16  덕수궁

지금은 경복궁, 창덕궁은 물론 남한산성을 비롯한 성곽유적에서도 이와 같은 행사가 흔해졌지만 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던 2000년에는 아마 덕수궁에서의 수문장 교대식이 처음이었던걸로 기억한다. 혹자들은 규모의 화려함과 절도의 엄격함도 없는 옷입고 줄지어 왔다갔다 하는 엉성한 병정놀이같은 코스프레라고도 혹평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쓴다면 충분히 구경거리로 통할 수 있는 문화 상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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