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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부산 화교촌

국공내전에서 마우쩌둥에게 패한 국민당은 작은 섬 타이완으로 밀려났고 우리는 이들을 자유중국이라 부르며 형제와도 같은 우애를 가지고 대했었다. 반면 지금의 중국은 '중공'이라 부르며 6.25 당시 통일을 눈앞에 둔 상황에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와 분단을 고착시킨 원수의 나라로 냉전시대에 우리의 적국으로 분류되었었다.

그러나 중공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 무한한 시장 개척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던 국가들이 미국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중공과 수교하기 시작했고 자유중국은 점차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하나의 중국을 천명하는 중공과 수교를 하면서 자유중국과는 국교를 단절할 수 밖에 없었고 우리도 이 같은 흐름에 따라 92년 8월에 명동에 있는 대사관까지 고스란히 넘겨주며 중국과 수교를 맺게 된다. 그 후 중공은 중국으로 자유중국은 대만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만인들은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이 이럴 줄은 몰랐다면 배신감과 서운함을 격렬하게 토로했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않을까. 어린 시절에 신문에서 본 명동의 자유중국대사관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내려가던 날 모여든 대만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사진은 그러한 자유중국이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청천백일의 문양을 부산 화교촌에서 만났다. 국교 단절전에 만들어졌을 듯한 '부산화교소학'이라는 유치원정도로 보이는 건물의 현관에는 아직도 청천백일이 건재하다. 어쩌면 저 것도 곧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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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부산

인천의 화교촌, 일본 나가사키의 화교촌에 이은 세번째로 찾아본 부산의 화교촌.

이제까지 가본 화교촌들 중 가장 분위기가 애매했던 곳이다. 중국인들 뿐 아니라 거의 비슷한 수의 러시아인들도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한자나 키릴어로 된 이국적인 간판만 놓고 본다면 다른 곳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어둠침침한 러시아인들의 술집과 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을 위한 드레스샵등 왠지 찝찝한 분위기였다. 이 곳에서 맛본 중국 음식은 여타 화교촌에 비해 오리지널에 가까운 형태인 듯 했지만 뭐 특별히 맛있는 편은 아닌 듯.

p.s. 흑백으로 찍은 컷들과 같이 업로드할 생각이었지만..현상도 아직 안한지라. 후 일을 기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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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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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부산

마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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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영도다리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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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

원폭 피해 현황과 처참한 사진자료들을 보고 있는 일본인들



한국하면 아직도 한국전쟁을 떠올리는 외국인이 많다는 뉴스를 가끔 접하곤 한다. 내심 못마땅해 불쾌해 하기도 하고 올림픽 / 월드컵을 거치면서 그러한 부정적 인식을 떨쳐버리고 있음을 뿌듯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는 원자폭탄이지 않을까? 워낙에 충격적이었던 인류가 만들어낸 가공할 무기의 첫 실전 사용이었기에 그들이 원치 않더라도 타인의 인식 속에서 잊혀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율을 경험한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시 예상되는 인명 피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이는 때마침 개발된 신무기를 써보고 싶은 유혹을 더욱 부채질 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용으로 특수 개조된 4발 중폭격기 B-29 '에놀라게이'호가 날아가 작고 길쭉한 모양 때문에 '리틀보이'란 별명을 붙은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항복이 없자 3일이 지난 8월 9일 통통한 형태라 '팻맨'이라 별명이 붙은 두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이 가공할 무기는 수 만명의 목숨과 도시를 한 순간에 새까만 재로 만들어 버렸고 이에 굴복한 일본은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그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던 나가사키의 평화공원과 원폭기념관에는 원폭 투하 전 평화로운 시내의 전경부터 시작해 원폭 투하 직후의 폐허가 된 시내의 모습, 불에 타 쓰러진 시신들, 생존자들의 절규, 환자 구출 및 필사의 복구 활동, 원폭의 위력과 공포, 폐허 더미에서 가져온 잔해, 원폭이 폭발한 순간 멈춘 시계 등등을 전시하여 관람객들의 가슴을 교묘하게 무겁게 만든다. 마치 일본인들이 전쟁의 피해자인양. 정말 인류에게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단 느낌이 들도록. 더군다나 더 가관인 것은 '미국 너네가 원폭을 떨어뜨려 우리만 죽은게 아니다. 봐라 괜한 외국인들도 이만큼이나 죽었다.'라고 얘기하는 듯한 외국인 원폭 피해 현황도 있는데 그 중에 한국인이 가장 많음은 뭐라 설명해야 할런지.

아직도 끊이지 않는 헌화와 편지들에는 No War, Peace, Love 등 좋은 말은 다 적혀있었다. 과연 원폭 폭발 중심지의 평화공원에서 일본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잔인한 식민지배와 중일전쟁과정에서 일어난 남경대학살 등의 참상은 알고서 저리도 침통한 표정을 짖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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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잡은 고기를 냉동하기 위해 배에 넣어둘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던 부둣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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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4  포항

바닷가에 차 세워두고 캔커피사러 제일 먼저 들르는 슈퍼 앞
흐린 날엔 퇴락한 송도해수욕장이 어울린다. 일대에 대한 재개발 소문이 나돌면서 좀더 부지런히 찾아야할 곳으로 부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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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4  대구구장
삼성:기아의 08년 프로야구 개막전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관중들의 표정이 역전패당한 홈팬들의 느낌이라 제목만 저렇게 정해봤을 뿐 사실은 5회말 종료 후 구장 정리시간. 길고 긴 야구경기 중 여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시간은 5회말 이후 뿐이라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고 나오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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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정말 일본'틱'했던 母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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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하동


3월에 월차신공으로 평일에 조용히 다녀왔던 섬진강.

하동을 빠져나와 남해안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달리던 중 보이는 간판 '최참판댁'
적어도 운치있는 고택과 최참판이 하동 마을 주민들에게 베풀었던 넉넉한 마음씀씀이 등의 훈훈한 일화를 떠올리며 핸들을 꺾었던 나의 기대를 무참히 깨준 곳이었다. 드라마 '토지' 세트장이었다는 민속촌 비스무리한 초가집들과 각진 목재로 새로 깨끗이 만들어진 최참판댁과 이런 것들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받는 어이없는 상황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야했다. 더군다나 수많은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단체 관광객들의 왁자지껄함에 질려버렸음은 물론이다.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소설의 감흥을 느끼고자 찾은 애독자는 있기나 했을까.

어쨌든 괜히 왔다라는 생각을 되뇌이며 세트장을 빠져나오며 만난 마을은 그나마 위안을 주는 모습이었다. 요즘 농촌 답게 빈 집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섬진강변의 넓은 들을 끼고 있는 곡창의 마을답게 여유가 느껴지는 한적한 마을이었으며 돌담도 예전 그대로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런 돌담을 보기도 어려워져 돌담도 보존해야할 향토 유적으로 분류될 정도이니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이런 골목길을 만나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골목을 돌아다니며 TMX가 들어있는 Nikon FM과 내가 제일 좋아했던 렌즈 ai-s 28mm2.8로 몇 컷을 담았다. 어딜가나 골목길은 셔터를 누르게하는 묘한 매력이 가득한 공간이다. 괜찮다 싶은 곳에선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재빨리 셔터를 누르곤 하지만 뭐 사실 딱히 대단한 사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감이 느껴지는 골목길에 사람이 없다면 허전하다는 나름의 고정관념으로 해마다 이 같은 사진을 수십장 남기게 하는 듯 하다. 작고한 김기찬 작가는 골목길만을 평생동안 필름에 담았다고 하니 골목길의 매력은 사진가들에게 남다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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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구룡포


대학 시절부터 군시절까지 이어진 약 7년 정도의 서울/경기권 생활을 정리하고 직장 덕에 다시 포항에 내려와서 좋은 점이 있다면 바다가 가깝다는 것이 아닐까. 간혹 갑갑하거나 하면 늦은 밤에도 송도 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아 바다 바람을 쐬며 담배 한대 피우며 걸을 수 있고 날씨가 좋을 듯한 날 저녁이면 다음 날 새벽 동해안으로 달려가 일출을 볼 수도 있으니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를 걷던 기분도 낼 수 있다.

3월의 네번째 토요일 나른한 오후 바닷 바람이나 쐬러 구룡포로 갔다. 그나마 가까운 어항인 구룡포에 가면 언제나 찍을 거리는 있다. 자주 가다보니 더이상 특이한 앵글이 나오지 않지만 제대로 된 작업을 해보고 싶은 소재는 많은 곳. 이 날은 몽골에서 활약한 후 전설의 명렌즈 Carl Zeiss Biogon 21mm4.5에 밀려 좀처럼 빛을 못본 니콘 ai-s 20mm2.8를 데려갔다. 사실 동일한 구도와 노출값으로 비오곤과 동시에 촬영해 비오곤의 명성을 새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 억지로 우겨야 비오곤이 조금 더 좋아보이는 수준이라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확대 인화시에 해상도가 얼마나 차이가 날런지 모르겠지만 사실 올드 렌즈들에 비해 현행렌즈의 해상도가 나쁠리도 없고 비오곤의 자랑인 왜곡억제능력도 크게 차이나는 편은 아니었다. 주변부 해상도는 확실히 비오곤이 훌륭해 보였지만 그런 세세한 차이를 확인하고자 필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노라니 드는 생각은 '객관적으론 돈지랄이다..' 이거 뿐.

이왕이면 좋은 카메라, 좋은 렌즈를 갖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욕심이겠지만 새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Rolleiflex와 Contax IIa에 밀려 찬밥이 되버린 나의 니콘 라인업들. 어쨌거나 가장 신뢰가 가는 10년지기 니콘에 Tri-X를 넣고 거리로 나가고 싶은 밤이다.



그러나 지금은 숙직 中      

젠장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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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완전 역광이 되는 상황에서 보여준 비오곤의 플레어. 그다지 보기 싫지는 않다. 전용 후드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구하기도 어렵고 있다해도 가격은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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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
메가네바시(めがね橋)를 찾아가던 중.

나가사키 시내를 가르는 청계천 만한 개울에는 오래된 홍예교들이 여럿 놓여있는데 더 인상적인 것은 다리 아래 개울에는 잉어들이 돌아다니고 있더라는 점이다. 사실 구마모토성의 해자에도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는데 도심을 흐르는 개울도 관리가 잘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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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옥산서원

하프카메라는 이런게 잼있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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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경주

철호한테서 빌려서 한 롤 찍어본  PEN EE3
PEN FT같은 고급형도 아닌 보급형 모델이기도 하고 그렇잖아도 작은 135판을 반으로 잘랐으니 그 해상도에는 좋다해도 한계가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스캔해본 결과 상당히 놀라운 수준이다. 냉정히 얘기해 확대 인화보다 가로 700픽셀 정도의 사이즈를 통해 온라인에만 게시하는 비율이 절대적인 현상황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렌즈 교환식 하프카메라인 PEN F는 유진 스미스가 사용한 기종으로도 유명하다.

뭐 하나 지를 때가 됬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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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長崎)

스와신사의 휴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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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구마모토(熊本) / 나가사키(長崎)


우리나라에서는 60년대에 사라졌다는 전차가 아직도 유효한 교통수단으로 애용되고 있는 일본.

우리의 버스 중앙차선제와 비슷한 형태로 운용중인데 분명히 구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전차를 아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걷기엔 멀고 버스를 타기엔 가까운 정도의 거리를 타기에 제격. 요금은 구간 상관없이 100엔으로 저렴한 편이다. 더군다나 나가사키 역에서 1일 500엔 패스를 끊으면 하루종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 5번만 타면 된다며 충분히 본전을 뽑으리라 자신했건만 6번을 타며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었었다.

국내의 철도 매니아들이 전차를 타보기 위해서 일본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전차와 같은 감성적 사회 인프라도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비단 이 전차뿐이 아니라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는 근본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정말 대조되는 부러운 모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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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長崎)  메가네바시(めがね橋) 근처

일본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2년이라는 시간을 군에서 보내야 하는 우리와 비교해볼 때 그들은 더욱 자유롭고 여유로운 자신의 인생설계와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앞날에 '군대를 가게 된다면..' 이라는 걱정은 없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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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3  구마모토

가토 기요마사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일본인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인상적인 무장으로 우리에겐 악명이 드높았지만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는 물론 도요토미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무공으로 유명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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