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사 일주문. 열목어 서식지로서 천연기념물에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맑은 계곡을 끼고 있는 정암사. 적멸보궁으로 유명한 절이며 만항재 고갯길로 오르기 전에 들를 수 있었다.





땔감으로 쓰일듯한 장작더미. 저마다 다른 둘레와 색상과 질감이 재미있다. 촌에 가서 군불 떼고 딱 누워 푹 잤음 싶은 요즘이다.





정암사 적멸궁. 정암사에는 이 적멸궁 뒷산에 세워진 석탑 안에 부처님 정골(頂骨 : 정수리뼈)사리를 모셨으므로 법당 안에 불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팔작지붕의 형태도 좀 그렇지만 전면이 모두 문으로 열리지 않고 가운데 출입구 좌우로 창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 등 일반적인 법당과는 다소 차이점이 보인다. 지붕의 기와는 파란색이지만 청기와는 아니고 색칠한 기와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론 절에 동(銅)기와나 이런 번쩍이는 청기와보다 우리 전통 기와가 훨씬 단아해보인다고 생각한다. 적멸궁에는 청기와를 써야하는 이유나 사찰 건축 기법상 유행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정암사 수마노탑. 사실 정암사의 백미는 이 7층 석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벽돌로 만든 탑은 아니기에 전탑은 아니며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만든 형태로 경주 분황사에 있는 그것과 같이 모전탑이라고 불러야할거 같다. 이 탑에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탑 제일 꼭대기의 청동제 상륜부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탑들에서 상륜부는 온전히 남아있는 경우가 드문데 잘 보존되어 있다.





수마노탑에서 내려다 본 정암사 전경. 강원도 산중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송광사에서 떠오르는 장엄한 가람배치와도 거리가 멀다. 적멸보궁 오른 편에는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들과 공양간 등이 난무(난 좀 그렇게 느꼈다)하고 있어 적멸보궁에 어울리는 정갈한 느낌을 받기 어려운 것이 좀 안타깝다.


2010.08.05 정선

한국에서 제일 높은 역이라기에 찾은 추전역.

해발 855미터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태백의 해발고도가 높은 탓에 그리 높은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도로가 발달되면서 버스와 승용차의 폭발적인 증가로 여객 운송으로서의 철도의 기능은 이제 최소화되었고 작은 시골역들은 대부분 승객들 없이 조용하지만 추전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상징성으로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찾아오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굽이굽이 철길의 모습. 73년 태백선이 개통되면서 영업을 시작했다는 추전역. 험준한 강원도를 가로지르는 이 구간은 5.16 이후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장정들을 대상으로 군복무에 준하여 조직된 국토건설단원들이 동원되어 건설하였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이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엔 뭐 시대가 시대인지라 부르면 갈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말이 국토건설단이지 조선시대 백성들이 노역에 불려가는거나 뭐 다를바가 있었을까 싶고 군대가 아니다 뿐이지 공병대 처럼 일했을 것 같다.

실제 건설단원들은 신분상 현역병에 준하여 취급되었고 사고시 군법에 의거해 처리되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폭압적인 정책이었다 생각되지만 당시에도 무리가 따랐던지 군대식의 강압적 조직과 규율은 단원들로 부터 잦은 반발과 저항을 샀고 부족한 장비와 무리한 공사 강행으로 인한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여러 문제가 드러나 결국 1년 만에 해체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개발 시대에는 공병대들 역시 국토 개발에 많이 동원되었는데 따로 돈이 들지 않는 공병대는 민간 업체에서 맡기를 꺼리는 위험한 구간의 공사를 맡을 일이 많았을 것이고 그만큼 사고도 따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부 고속도로 역시 공병대가 작전을 수행했고 울진 불영계곡을 통과하는 도로 변에도 공병대 순직장병 위령비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역사속에서 저마다 맡게될 역할은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가지고 온 렌즈 중 그나마 망원인 85미리를 끼우고 이리저리 휘둘러 본다만 이미 작업 반장 쯤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자꾸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기차역, 특히 이런 작은 시골역은 사진 찍는 사람이라면 소재로 삼아보고 싶을 매력적인 소재이지만 정식으로 사진을 찍기는 그리 쉽지 않다.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경춘선의 강촌역이나 가평역 같은 곳에서는 사진을 찍어대도 신경쓰지 않지만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이런 한적한 역에서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리다가는 금방 눈에 띄고 십중팔구 몇 컷 찍어보지도 못하고 제지당하게 된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국가 중요 시설이라 관할 상부역의 정식 허가를 득해야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며 촬영을 금지 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 말도 안되는 규정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헷갈리게 한다.

88올림픽 전만 해도 남산 타워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땐 그랬다. 경복궁 뒷편의 청와대도 내려다볼 수 있는 등 보안상으로 문제가 있다는게 이유였다. -_-;;  지금 군사 시설도 아닌 이딴 철길 하나 찍는데 내가 어딘지도 모르는 추전역의 관할역에 가서 허가를 득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다.

어쨌든 자꾸 눈치를 주기에 대충 몇 장 찍고 말았다. 소탈하게 웃으며 역을 안내해주며 역에 얽힌 옛날 얘기를 들려주는 푸근하고 인상좋고 인심좋은 시골역장님은 '6시 내고향'에서만 볼 수 있나 보다. 물론 일하고 있는데 카메라 들고 나타나 이것저것 찍어대는 관광객이 짜증스러울 것이라 충분히 이해는 한다.





한 켠에 전시된 광차(鑛車 : Mine Tube). 광산에서 채굴한 석탄 등을 운반하는데 쓰였던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우리나라라고 얘기하지만 석탄과 시멘트는 풍부했던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리라.





추전역에서 바라본 매봉산 풍력단지. 해질 무렵에 올라갈 예정이다.





굉음을 내며 지나는 기차 한 대. 석탄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예전만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뭔가를 실은 기차들은 잠깐 머무는 동안에도 2대나 지나갔다.





추전역에 오니 문득 ROTC 1년차 시절 TMO를 타고 강원도로 향하던 때가 떠오른다. 4주간의 하계 훈련 중 3주차를 마치고 마지막 주에 있을 전방실습으로 양양의 000여단으로 가게 되어 청량리 역에서 승차해 강릉역까지 갔었으니 이 추전역도 분명히 지났으리라. 군복을 입고 불편한 전투화를 신은 상태였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강원도 산골의 풍경은 훈련 중이라는 생각마저 잊게 해주었다. 훈련을 마치고 퇴소하면 사진 찍으러 반드시 다시 오겠다는 생각만 계속 했었다.

그 때의 감정이 떠올라 이번에 들렀던 추전역. 역시 청량리에서 출발해 여기저기 다 정차하며 느려터지게 한참을 가던 무궁화호를 타고 온 것이 아니어서인지 그 때의 호젓한 감정을 다시 느끼긴 무리였다. 없는 돈을 쪼개어 필름을 사고 기차표는 입석으로 끊어 메뚜기를 하다 그것도 귀찮아 지면 아예 연결통로에 쪼그려 앉아 잠을 자며 태백으로 향했던 대학생 시절. 역시 여행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 같다.


2010.08.05 태백











통리 5일장을 구경하고 떠나기 전 잠깐 둘러본 한보 사택. 석탄 산업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태백을 비롯한 탄광촌 지역 곳곳에는 이처럼 텅빈 집들을 보기 어렵지 않다. 예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쇠퇴해버린 도시들을 찾게 되면 마치 속담처럼 널리 쓰이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때는 개들도 만원 짜리를 물고 다녔다'라고  ㅎㅎ   석탄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태백에도 개들이 만원 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떠나 발길이 닿지 않는 계단에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계단에는 버려진 인형도 있고.. 내가 올려둔거 절대 아님;;





거대한 흉물로 남은 텅빈 아파트. 아파트는 개발 시대에 서민들의 꿈이자 최고의 재산이었지만 참 멋없고 운치없는 집일 수 밖에 없는것 같다.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밀도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이렇게 남은 콘크리트 덩어리를 보니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마치 소비에트에 온듯한 딱딱하고 멋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너무 많다고 혹평을 하는 것이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국가도 산업도 도시도 그리고 사람도. 언제나 전성기일 수는 없다. 다 때가 있는 법. 얼마나 그것을 품위있게 지켜나갈 것인가.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쇠락의 시기에 얼마나 슬기롭게 대비하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신리 너와집을 보고 태백으로 이동 중 우연히 들른 통리. 마침 장날이라 시끌벅적했다.
작년 5월의 강원도 여행에서도 운좋게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정선 5일장 날짜를 잘 맞춰서 구경했는데 5일장과 좀 인연이 되는 듯. ㅎㅎ  일단 점심 먹고 시장 구경하기로 결정.





태백 여행 전 사전 정보 수집시 맛집에 검색된 이 설렁탕 집이 마침 통리에 딱 있었다. 딱히 먹을 만한 데도 없는데 설렁탕 정도면 무난하고 장날이라 그런지 맛집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많았다.





기본 세팅 밑반찬. 뭐 설렁탕집이라면 기본적으로 볼 수 있는 반찬들이다.





국물은 서울의 설렁탕들에 비해 꽤나 진한 편에 속했는데 고기의 양은 특을 시켰음에도 불구 적다. 그리고 일반적인 설렁탕 고기 처럼 편육 형태로 썬 것이 아닌 저런 형태인 것도 특이했다는.. 설렁탕은 역시 을지로 이남장이 최고인 것 같다. 맛이 없진 않았지만 특을 시켜서 먹기엔 돈 값을 못한다고 해야하나. 뭐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 잘 먹었고 더 시켜먹진 않았지만 원한다면 국물과 공기밥은 무한 리필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덜어준다.





꼭 뭐 이 식당에서만 볼 수 있는건 아니지만 태백에서 연탄을 보니 탄광촌이라는 느낌이 물씬 나는 거 같은 착각도 든다.





가마솥 옆에서 배추를 다듬는 아주머니들. 설렁탕집의 기본은 김치와 깍뚜기라 할 정도로 설렁탕이라는 담백한 음식에 곁들이는 반찬으로서 김치와 깍뚜기 담그는 솜씨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집은 일부 프랜차이즈 설렁탕집의 조미료 듬뿍 달달한 그런 맛은 아니었지만 좀 투박하다고 해야할까. 기교있는 맛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한 끼 잘 먹고 통리 5일장을 구경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조용하고 띄엄띄엄한 산골 마을을 보다 갑자기 번잡한 장에 들어서니 활기가 넘친다.





구경 다니다가 낚여서 지른 목수건(?)  찬물에 담궈두면 5분 정도 후 수분을 흡수해서 내부의 특수 파우더가 팽창하며 시원한 기운을 유지하며 목에 감아두면 좋다는데 아저씨의 현란한 말빨과 잠깐의 착용에 혹해 많은 사람들이 지르고 있었다. 뭐 이런데 오면 속는 셈 치고 재미삼아 살 만한 것들 중 하나지만 어쨌든 낚인건 낚인거;  아이스팩 처럼 차가운 온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닌지라 물 적셔 수건 목에 감는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행 중에 우연찮게 만나는 5일장은 언제나 재미있다. 그 지역의 특산물과 먹거리, 사투리가 어울어져 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 2007년 초 몇가지 사진 프로젝트를 구상하며 여러 주제들을 써내려가며 메모했던 적이 있는데 그 중에 당연히 5일장도 있었건만 역시 이 사진들 처럼 수박 겉핧기식 사진들만 찍어왔지 제대로 된 작업을 해보지 못함이 아쉽고 게으름을 자책하게 된다.


2010.08.05  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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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번 국도변의 작은 휴게소, 동활휴게소에서 휴식 중

생각보다 7번 국도는 정체가 거의 없었다. 아침이라 피서 차량들이 몰리기 전이었을 듯. 울진까지 거침없이 북상하여 월천교를 지나 태백 방향으로 연결되는 416번 도로로 빠졌다. 넓고 쭉쭉 뻗은 바닷가의 7번 도로를 벗어나 416번 도로에 진입하면 강원도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물씬 든다. 들은 좁아지고 산은 높아지고 골짜기는 깊어지고 코너는 가파르다. 그렇지만 오가는 차도 적고 주변의 풍광에 젖어 운전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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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첫번째 목적지 삼척시 가곡면 신리의 너와집 앞에 도착했다. 이 너와집이 없다면 이 곳을 지나는 차가 하루에 몇 대나 될까 싶을 정도로 한적하고 조용한 산골이다. 신리의 너와집은 언젠가 찾았던 적이 있는데 워낙 오래되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크게 없는 것 같지만 주차장이 조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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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한옥의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지역적, 환경적 특색이 드러나는 가옥 형태인 강원도의 너와집. 강원도 깊은 산골에 정착한 화전민들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나무였을 것이다. 가난한 그 들이 기와를 올릴 수는 없을 것이고 벼농사가 어려운 곳이 많았으니 일반 농촌처럼 볏짚을 올려 초가지붕을 올릴 수도 없어 아예 나무 판자로 기와를 대신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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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옥의 형태를 대청마루로 대표되는 남방계 주거 문화와 온돌이라는 북방계 주거 문화의 조화라고 말하기도 하던데 너와집은 개방적 구조의 남방계 주거 문화의 요소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혹독하게 추웠을 깊은 산골의 겨울을 버티기 위한 구조였을까. 건축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는 없지만 답답하고 어두워 보이는 너와집. 건물 내부를 구경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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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굴뚝도 나무로 만들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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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의 너와집에는 드문드문 관광객들이 꾸준히 찾아와 잠시 둘러보고 발길을 돌렸다. 오늘날의 이런 호기심어린 관심이 사치스럽다 생각들 정도로 옛 시절 강원도 산골 화전민들의 삶은 치열했을 것이다. 험한 산세와 좁은 경작지에서 먹고 살기 위해 험한 산비탈을 개간하고 쌀 대신 감자와 옥수수로 연명하며 벌목과 사냥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했으리라. 물이 있고 조그마한 터라도 있으면 이 좁은 국토 어디에서도 마을이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생명력은 끈질기고 강했음을 강원도 여행길에서는 절실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너와집은 특이한 옛날 집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 남았던 강원도 사람들의 질긴 삶의 흔적으로 더 가치있을 것이다.





흑백 필름으로 뭔가 운치있는 장면을 찍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쨍한 날씨의 강한 콘트라스트에서는 별로 원하는 장면이 나올거 같지 않았다. 막연한 기대일지 모르지만 새벽이나 해질 무렵이라면 모를까 벌건 대낮에는 역시 어쩔 수 없다. 자 이제 태백으로~



2010.08.05 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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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한 이번 휴가 기간의 끝 물. 이대로 흘려보냈다간 분명히 후회하리라. 1박 2일 일정으로 잠시라도 어디든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 날씨는 보는 바와 같이 아주 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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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일찍 출발해야 했으나 전 날 늦게 잠드는 바람에 그만큼 기상도 늦었다. 해가 일찍 뜨는 여름에는 도로의 정체와 더위를 피해 새벽 6시면 출발해야 하거늘 이미 지표면이 달궈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출발하게 되었다. 목표한 출발 시간보단 늦었지만 그래도 해가 긴 여름날이니 계획한 일정을 소화하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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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의 목적지는 바로 강원도 태백. 마지막으로 태백에 여행 갔던 것이 현재 군입대 전 태백산 일출산행을 했던 2003년 초였던가..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밤기차를 타고 떠났던 그 때의 운치만 하겠냐만 어쨌든 올 휴가는 태백이다. 7번 국도를 따라 북상해서 울진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태백까지 향하는 정석적인 코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휴가철을 맞아 7번 국도에 차량들이 넘쳐나지 않을까 걱정도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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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고고고~


2010.08.05

김치볶음밥과 샌드위치~





야외에서 본연의 진가를 발휘하는 로지텍 Pure-Fi Anywhere / iPod Touch ~  집에서 들을 때 보다 밖에서 들으니 오히려 소리가 더 나아보인다. ㅎㅎ





셀프타이머가 원래 없는 Rollei35이기도 하지만 선이 무척 긴 에어릴리즈가 있으니 둘이서 사진 찍기 참 편하다. 





꼼지락꼼지락~ 





만고땡~ 여유로운 일요일 점심 시간~


2010.07.18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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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생일을 맞아 혜정이가 준비한 꽃바구니. 아들들만 있는 집이라 그런지 생각해보니 엄마한테 꽃 선물 해드린 적은 거의 없었던것 같다. 그래서인지 반응이 무척 좋았던 꽃바구니. ㅎㅎ 계모임에 자랑해야 하신다며 일주일간 물 줘가며 생기있게 유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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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생이 사드린 선물은 이거.. ㅎㅎ  남자들은 역시 선물이라면 실용적인게 최고인가 보다.


10.06.20


원래는 JBL의 On Stage Micro ll 를 지를까했다만 마침 재고가 없는김에 대안을 찾다가 발견한 녀석. 생긴건 JBL 제품이 튀고 좋아보이긴 한데 독킹된 아이팟이 너무 불안해보이는 감도 있고 배터리캡도 좀 헐겁단 얘기도 있고 결정적으로 재입고를 기다리기가 귀찮아 이 녀석으로 질렀다. 터치가 블랙이라 검정색으로 사려했으나 검정색 없고;; 역시 재입고 기다리기 귀찮아 화이트로 고고. 나노나 클래식이었음 더 어울릴 디자인일것 같다만 꽂아두니 뭐 흰색도 괜찮은 듯.
 
터치 전용 독킹 아답터는 포함되지 않아서 터치 살 때 들어있던 아답터를 끼워주고 단자에 독킹시키면 충전이 시작된다. 잠금 상태를 해제하고 재생 메뉴까지는 직접 아이팟을 조작해야 하지만 재생 후 부터는 리모콘으로 콘트롤할 수 있다. 내장된 충전식 배터리는 완충시 약 10시간 정도 재생이 가능하며 휴대용 케이스도 포함되어 있어 여행용으로 훌륭하다. 집 안에서도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가며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음질은 크게 좋진 않지만 뛰어난 음질을 위해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투자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단점으로는 장난감처럼 딸깍거리는 느낌의 리모콘 버튼과 지나치게 딱딱한 본체의 버튼. 그리고 세부적으로 조잡해 보이는 마무리와 만듦새. 저렴한 제품이고 대륙에서 만들다보니 어쩔 수 없나보다. 그냥 깔끔한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란 점에 만족하자.

욕심을 버리고 편하게 듣기엔 나쁘지 않다..ㅎㅎ


1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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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 컨스텔레이션 1502.30 (크로노미터 인증 cal.1120)

아버지 환갑 기념으로 동생과 사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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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5 영덕


전형적인 풍경사진을 찍으러 갈 때마다 늘 그렇지만 별 기대도 않고 바람이나 쐬자는 취지로 나섰고 역시나 특별할 것 없는 사진들을 건져왔다. 그래도 일주일 동안 학수고대하던 늦잠까지 포기하며 새벽부터 설쳐야 하는 일요일 아침 출사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주말을 그나마 알뜰하게 보내게 해준다.
중학교 1학년이던 1994년에 읽었던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 1권의 첫 부분에는 칠천량 해전의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있었다. 훗날 알게된 실제 전투 과정과는 상이한 부분이 많지만 소설답게 칠천량 전투의 긴박함과 절망적인 조선 수군의 모습들이 생생했다. 이순신 위인전이나 국사 교과서 등에서 자랑스럽게 외치는 한산도 대첩이나 명량대첩과 달리 패배, 그것도 궤멸적 타격을 입은 칠천량 해전은 그다지 알려져있지 않았음에도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통해 내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고 있는 동안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전멸당한 칠천량 해전. 그 허망한 패전의 현장을 다녀왔다.



 

거제에서 칠천도로 건너가기 직전 도로 우측편에 있는 칠천량해전비. 이 전에는 관심도 없었는지 비가 생긴지는 얼마 되지도 않은 듯 하다. 2010년 1월 12일에 제작된 비석이다. 역시 패전의 수치스러움과 이순신과 상반되는 이미지의 원균이 어우러져 묻히고 잊혀진 역사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라면 절대 이렇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늦게 나마 생긴 비석의 비문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수전에 어두운데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한 선조와 권율의 무모한 작전 수행 지시와 원균의 꼼꼼하지 못한 작전 지휘등 가치 판단에 대한 부분은 생략한채 담담하게 칠천량 해전의 결과를 얘기하며 이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침몰 거북선 찾기 탐사를 추진 중이라고 마무리 하고 있다. 칠천량 해전의 안내문인지 '우리 거북선 찾기 운동하고 있다규!' 라고 홍보를 하는 것인지...이 해역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의 수가 단일 전투에서는 가장 많을텐데 전몰장병 위령비라도 하나 세워두는 것이 보다 모양새가 맞지 않나 싶다.




거제도와 칠천도를 연결하는 칠천교. 이 다리가 가로지르는 좁은 해협이 칠천량이다. 이 좁은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칠천량 해전이다.





칠천량에서 동쪽인 부산 방향을 바라본  모습이다. 저 멀리서부터 가덕도, 안골포 등지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의 전선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대략 조선수군 100여척, 일본 수군 1천척 가까이 벌어진 전투였는데 이 좁은 바다에 그만큼 많은 전선들이 들어 찼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수한 함포를 이용한 포격전이 유리한 조선 수군은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진을 펼치고 함포 사격을 통해 적을 제압해야 하거늘 좁은 해협에서 진을 펼치지도 못한채 적의 기습을 받아 근접전을 허용하게 되었으니 애초에 칼싸움에서는 일본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칠천량에서 바라본 서쪽 통영 방향의 모습. 포위 당한 조선 수군이 한산도로 퇴각하기 위해 어떻게든 뚫어야 했던 퇴로다.





칠천도와 그 주변의 지도. 화살표 표시가 된 부분이 칠천량이다. 지도 우측 상단의 가덕도에서 전투 후 칠천도로 물러나 정박해있던 조선 수군은 가덕도와 부산포, 안골포, 웅포 등지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고 칠천량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벌였다. 간신히 칠천량이라는 호구를 벗어난 나머지 수군들은 당시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로 어떻게든 철수해야 했으나 한산도로 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통영과 거제 사이의 견내량 마저도 일본 수군에게 봉쇄당해 향하지 못하고 고성의 춘원포로 밀려나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통제사 원균 역시 그 곳에 상륙하였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한 이유는 칠천량 해전에서 목숨은 부지한 선전관 김식(金軾)의 보고서에도 전사한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없고 일본측 기록에도 적의 사령관을 포획 혹은 사살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지라..

선전관 김식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왜선 5,6척이 갑자기 소동을 일으키며 불질을 하여 우리나라 함선 4척이 전부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여러 장수들이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진을 벌리지 못하였습니다. 닭이 울 무렵에 왜선들이 헤아릴 수 없이 와서 서너겹으로 에워싸고 형도 근처에 가득히 널린 채 싸우거나 물러가거나 하여 도저히 당적할 도리가 없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고성 땅 춘원포로 물러나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적세가 하늘을 찔러 우리 배들이 전부 불타서 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도 모두 불타 죽고 빠져 죽을 때에 신은 통제사 원균과 순천 부사 우치적과 같이 몸을 빼어 육지로 올랐습니다. 원균은 나이가 많아 달아나지를 못하고 홀로 칼을 짚고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왜병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면서 원균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는데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결국 칠천량이란 좁은 바다에서 불시의 기습을 당한 조선 수군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며 제대로된 호쾌한 반격 한번 못해보고 무너진 것인데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수군 총사령관이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조선 수군이 전멸당하자 일본 수군은 거칠 것이 없어졌다. 지상군의 진격을 수군이 지원하는 수륙병진책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며 임진년에는 무사할 수 있었던 호남지역 마저 위태하게 되었으며 뻥 뚤린 남해안의 뱃길을 통과해 서해안을 따라 한강으로 적이 치고 올 수도 있게 되었으니 칠천량 해전 한 번의 패배로 인한 결과는 가혹했던 것이다.

철천량 해전에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적과의 교전을 앞두고 적전 도피한 수사 배설의 이야기다. 배설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잽싸게 퇴각하여 호구를 빠져나갔는데 이 덕분에 경상우수영 소속 판옥선 12척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적전 도피죄를 지은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어쨌든 도망하는 와중에도 정신줄 놓지 않고 한산도에 들려 통제영을 불살라 무기와 식량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훗날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비장한 심정으로 쓴 장계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이나 있사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 그 12척이 되어줬다. 여기까지라면 비록 적전 도피를 하였다 하나 현명한 판단으로 목숨을 부지해 훗날 조선 수군의 눈물겨운 감동의 드라마 '명량대첩'의 밑거름이 되어준 것으로 인정해주겠는데 배설은 결국 명량대첩을 앞두고도 또 도망가고 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결국 체포되어 참형을 담하고 마니..ㅉㅉ  어쨌든 그렇게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판옥선 12척을 제외하고 거의 불타 사라지는 최악의 패배가 바로 칠천량 해전이었다.





그리고 칠천량 해역에서 거북선을 찾기 위한 탐사선. 아무래도 이 해역에서 괘멸적인 타격을 입었기에 거북선의 잔해가 있다면 칠천량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자랑스런 역사와 기술을 상징하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란 용어는 이제 쓰지 않기를 바라지만 갑판에 지붕을 씌우고 그 위에 장갑을 덧대어 적의 총, 활로 부터 전투원을 보호하며 적진 속을 종횡무진 누비며 격파하는 돌격 전투함이라는 창의성은 거북선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거북선 철갑 조각이라도 한 점 꼭 찾아주길 바란다.



 
2010.02.27 칠천도





















2010.02.28 지심도


겨울의 끝자락부터 봄기운을 완연케 하는 동백을 보러 찾아간 지심도.
해마다 동백을 일찍 만나러 보길도나 여수 오동도 등 남해안의 동백섬들을 찾고 싶은 마음은 꿀뚝 같았지만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렵던 중 올 해는 드디어 다녀왔다 ㅎㅎ 

동백은 다른 꽃들이 시드는 모습과 달리 꽃송이의 모양 그대로 땅에 툭 떨어지고 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참형을 당해 머리가 댕강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남해안 섬 등지로 귀양을 왔던 사람들이 재수없다고 여겨 많이 베어버리기도 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땅에 떨어지고도 동백은 한동안 그 모습을 유지하며 쉽게 시들어버리지 않는데 곱고 하얗던 자태를 뽐내기를 얼마만에 금방 꽃잎이 뚝뚝 떨어져 거무죽죽하게 시들어가는 목련과 달리 한동안 꼿꼿이 서서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동백의 모습은 여타 꽃들과 달리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나무에 피어있을 때 보다 땅에 떨어진 모습이 더욱 애절하고 처연한 동백이라 사진도 거의 땅에 떨어진 녀석들 위주구나.. 










2010.02.15 포항


블로그에서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와 생각들은 언제나 많지만 요즘은 마음에 여유가 잘 안나네.
그래도 나름 잘 지내고 있음 :)









2010.01.02 순천

2001년에 처음 찾았던 순천만을 거의 10년만에 다시 찾았다. 그 사이 순천만에는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엄청난 인파가 찾고 있는 생태 관광지로 변했는데 2001년 5월의 그 날만 해도 갈대밭을 어슬렁거리며 사진찍던 사람은 우리 식구밖에 없었는데 대단한 일이다. 그나저나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일몰은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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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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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영주

순흥 읍내리 벽화 고분 - 사적 313호



2009년의 마지막 여행지로 영주를 택했다.
언제가도 좋은 부석사와 그 외 몇군데를 들를 생각이었는데 코스를 짜며 지도를 보던 중에 우연히 신라시대 벽화 고분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 1993년 겨울 당시 과천 현대미술관까지 올라가 고구려 고분 벽화전을 봤던 강렬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와중에 남한 지역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벽화 고분들 중 보존 상태도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라니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부석사로 향하는 길 가에 위치해 동선이 꼬이지도 않으니 금상첨화. 사진에 보이는 고분은 원형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일반인들도 저 돌 문을 열고 들어가 구경해볼 수 있다. 실제 벽화는 보존 관계상 들어가볼 수 없는데 아무리 복제한 모형이라지만 무덤 속에 들어가는 기분은 꽤나 깨름칙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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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석문을 열면 '┌ ' 으로 꺾어지는 입구가 나온다. 입구 양쪽 벽면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듯한 우람한 사내들이 그려져 있다. 이 좁은 문을 통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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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쪽으로 들어와서 바라본 모습.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무용 장면이라던지 사냥 장면, 씨름 장면 등이 많이 나와 사료적인 가치도 뛰어날 뿐더러 북두칠성은 물론 삼족오(三足烏)나 주작, 백호, 청룡, 현무 등등 종교적인 관념도 볼 수 있으나 이 그림은 상당히 특이하다.

무덤을 지키는 무사(?) 쯤으로 보이는 이 사내는 뱀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용맹을 보여주고 있는데 신기한 헤어스타일은 물론이며 우람한 체격과 큰 코와 구릿빛 피부는 아무리 봐도 동양인인 신라인의 모습이 아니다. 아래위로 심하게 돌출되어 그려진 송곳니도 그렇고 무섭고 강한 인상으로써 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무덤을 지키기 위한 과장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왠지 경주 괘릉에서 본 아랍인의 모습을 본 뜬 석상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국적이고 특이한 인물의 모습도 그렇지만 마치 펜으로 그린 듯한 그림의 스타일이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마저 주는데 그림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웠던 고구려 벽화들과 달리 이 고분의 벽화는 조선시대 민화를 보는 듯한 투박하고 어설픈 서민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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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통로 안쪽의 꺾이는 부분 상단에 있는 이 그림은 작지만 눈길을 끈다. 벽면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이 곱상한 여성분의 얼굴은 살아남았다. 바로 옆의 구름 그림도 있어 선녀를 그린 것으로도 생각되는데 앞서 우락부락하기만 한 사내의 그림과 달리 이 여성의 얼굴은 참 곱게도 그렸다. 낮은 코와 작은 눈, 통통한 볼과 작지만 도톰한 입술과 기품있어 보이는 긴 목.. 당 현종 때 양귀비도 그랬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얼굴이 통통한 편을 좋아했다고 하니 신라에서도 꽤 괜찮은 미모였으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이 그림은 마치 오늘날 만화를 보는 듯한 획 놀림을 보여주는데 정말 요즘 그림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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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건 뭐 낙서인지 뭔지;; 그리다 만 것인지. 뭘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계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는 보이지 않는 무질서가 혼란스럽다. 신라의 중심이던 경주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이 곳에 존재했던 지방세력의 무덤이었을테니 세련된 기법과 웅장한 규모를 바래선 안되겠지만 고개가 계속 갸우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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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관이 놓여졌던 곳이다. 편편한 바닥에는 적어도 관 2개 정도는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나온다. 벽면의 벽화는 훼손이 심해 거의 알아볼 수 없고 단서가 될 만한 유물은 토기 파편 5개만 남고 모두 도굴당했다고 한다. 또 피가 끓어오르는데 벽화는 거의 지워지고 유물은 다 사라지고 뒷받침할만 사료도 없으니 이 고분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비단 이 작은 고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도굴로 인해 잃어버린 역사의 조각이 얼마나 될지, 또 그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책의 어느 페이지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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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몇평 되지도 않는 좁은 무덤에서 이제 산 사람 세상으로 나가야겠다~ 무섭다고 안들어오고 있다가 내가 나오자 카메라를 들이대는 혜정이~ ㅎ


좁은 무덤 안에서 비록 복제한 벽화들이지만 꽤나 리얼해서 실제 고분을 발견하여 발굴하는 듯한 느낌을 가져볼 수 있는 괜찮은 경험이었다. 이 투박한 작은 벽화 고분을 들여다봐도 놀랍고 흥미로운데 중국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들을 직접 들어가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실감이 안난다.

시간내서 고구려고분벽화 도록이나 오랜만에 펼쳐봐야겠다.


2009.12.26  포항 송도


촬영을 하려거든 관할인 동대구역의 정식 승인을 얻으라는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는 효자역 직원들의 짜증섞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오랜만에 들른 송도 해수욕장. 2-30년전만 해도 피서객들로 붐비던 모래사장 위에는 이제 냄세나는 검은 아스팔트가 한참 깔리고 있었다.

백사장은 매끈한 새 도로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송도해수욕장이 오염되면서 빈민가 처럼 변한 주택가는 여전하다. 해수욕장의 옛 추억을 덮어버린 쭉 뻗은 새 도로의 개통과 함께 바닷 모래 날리는 퇴락한 이 곳에도 재개발의 열풍과 인생 한방의 역전 홈런이 터질지 모른다.

어쨌든 비교적 가까운데다 찾는 사람이 적어 조용히 바람쐬러 자주 들렀던 한적한 모래사장이 없어졌고 어제보다 매서워진 찬 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여 카메라를 들고 기웃거린 결과물은 이 사진 한장만 남기곤 모두 삭제. 필름이고 디지털이고 간에 맘에 안든다고 통채로 지워버린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종일 찍은 결과물이 모두 맘에 안든다.

저 사진 한 장 만으로 앞으로 어떤 사진을 해야할지 고민스러웠던 오늘의 나를 보여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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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2  서울


새로 구입한 MOLESKINE Weekly Notebook Planner 2010 과 2년된 Ruled Notebook..둘다 포켓사이즈 하드커버

2007년 연말에 처음 구입한 MOLESKIN Ruled Notebook. 고무 밴드로 여며진 단단한 검정 하드커버의 몰스킨을 손에 쥐면 왠지 느낌이 참 좋았다. 처음엔 만년필로 써보려다 워터맨 F촉의 투박한 굵은 선에 좌절하고 파커 볼펜으로 바꿨다가 작은 글씨를 쓰기에 좀 더 유리한 제트스트림으로, 필기구까지 여러번 바꿔가며 애착을 가졌었다. 몰스킨을 펼치면 뭔가를 쓰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고 그다지 두껍지도 않은 이 수첩에 08년도의 많은 이야기들과 생각을 적어두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08년에는 틈틈히 촬영일지와 여행담, 간략한 감상문들을 적어두며 나름대로 목적에 부합하게 잘 사용 중이었는데 09년부터는 이상하게 몰스킨에 손이 가지 않았다. 몰스킨에는 항상 정리된 내용들이 적혀야 할 것 같단 강박관념이 생기다 보니 출사시나 여행에는 니콘에서 제작한 부담없는 수첩을 휴대했고 여기에 휘갈겨 쓴 메모와 촬영기록들은 정작 몰스킨에 정리하여 옮겨 적지 않은 것이다. 결국 2년간 불과 몇 페이지 사용하지 않은 몰스킨, 나도 역시 기록과 정리의 생활화에 실패한 것인가라는 자괴감이 살짝 드는 와중이었는데..

연말이 되자 다시금 몰스킨을 지르면 내년은 정말 알차고 보람찬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한 해가 될 것만 같은 부질없는 생각이 마구 들기 시작했다. 09년도에 몰스킨 사용횟수가 급감하게 된 이유는 일자에 맞게 제 때 작성해야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주지 않는 룰드노트북의 형식 때문이라는 자위적인 결론에 이르렀고 때 맞춰 기록하되 매일매일 한 장을 가득 적어야하는 압박이 없는 위클리로 구입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이 들었고, 결국 질렀다는 거;;

위클리노트북 포켓 하드커버에는 블랙이 없어 결국 레드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다소 부담스럽지 않을까라는 걱정과 달리 꽤나 산뜻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내지 구성은 왼쪽에는 간략한 메모가 가능한 주간일정표가 오른쪽엔 줄노트가 있어 그 주에 읽은 책에 대한 얘기나 여행담 등 다소 긴 문장도 여유있게 적을 수 있다. 양면이 다 주간 일정으로 구성되어 다소 건조한 위클리 플래너와 달리 위클리 노트북 플래너는 개인적으로 딱 좋은 구성이라 생각된다.
 
요즘은 몰스킨과 유사한 제품들이 시중에 많이 나왔고 디자인적으로 더 뛰어난 것들도 많이 보인다. 가격마저 저렴하며 몰스킨이 자랑하는 100년의 보존성과 튼튼한 제본기술에 비해 그 것들이라고 크게 떨어져 보이지도 않는다. 가격대 비 성능으로 보자면 당연히 몰스킨은 최악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그냥 수첩'이 27,000원이라고 하면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올해도 몰스킨을 지른 것은 2011년에도 2012년에도 그 후에도 동일한 디자인과 동일한 사이즈의 제품을 구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게 몇년의 기록이 쌓이면 뿌듯할 거 같긴한데 원래 다이어리 류는 항상 1년 후 빽빽하게 적혀있을 훗날의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이 때가 제일 좋은 것 같다. ㅎㅎ  뭐 일단 질렀으니 2010년에는 많은 기록을 담아둘 수 있길 바라며~

2010년은 2009년보다 계획적으로 살 수 있길! (제발 좀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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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QUE moisture surge extended thirst relief (이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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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CITANE  Hand Cream Trio Set

서울 출장길에 구해온 혜정이 생일 '늦은' 선물 겸 크리스마스 '미리' 선물~


갖고 싶어하는 두 상품의 이름을 완벽히 외워 매장에서 자연스레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몇번이고 봐도 외워지지 않는 크리닉의 저 모이스춰 크림과 록시땅의 핸드크림의 이름~;;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여자 화장품에 문외한인 나로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니.. 결국 영구보관함에 옮겨둔 문자메세지를 보면서 물건을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정도면 비싼건지 얼마나 좋은건지 개념조차 안잡히지만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롯데 잠실점의 탁하고 더운 공기 속에서 이마에 땀 송글송글 맺혔던 잠깐의 고생에 대한 위안이 된다. 어릴 적에도 잠실 롯데(롯데월드 마찬가지)의 탁한 실내 공기는 참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수 년만에 다시 찾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 그리고 간만의 ai-s 28mm 2.8을 이용한 접사~ 굳이 힘들게 구했던 이 28mm는 Nikkor 28mm 중 CRC설계가 되어 0.2m의 근접 촬영이 가능하단 거~ ㅎㅎ  맘에 들어~


2009.12.13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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