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8.10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이란 낭만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지만 내 집 바로 뒷마당으로 우렁찬 경적소리와 함께 기차가 지나다닌다면 정말이지 아찔한 하루하루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이 곳을 지나는 철로는 다른 곳으로 변경될 것이란 얘기를 들었지만 사진 찍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심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장면 하나 쯤은 찍고 싶은 것이다. 하루 운행 횟수가 극히 적어 시간을 일부러 맞추지 않는 이상 이 곳을 지나는 기차를 찍기 어렵지만 이 곳을 처음 찾았던 06년에는 운좋게도 때맞춰 지나는 기차를 촬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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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정선 5일장


2009.08.08 포항

죽도시장




2009.10.02 경북 예천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전통주막 '삼강주막'


경북 지방 출신이 아니면 이름조차 생소할 듯한 예천군에 있는 삼강 주막은 1박 2일에 소개되면서 인기가 급상승하며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사실 마지막 남은 주막이라 하여 예전에 몇 차례 매체에 보도된 것을 보았으나 기사에서 본 주막은 허름하면서도 소탈한 그런 모습이 아닌 복원된 느낌이 너무 나는 그것이었기에 굳이 먼 걸음을 하고 싶진 않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뜬금없이 빌려온 내비게이션 사용에 서툰 어느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는 내비게이션을 쓸 줄 몰라 못찾아가겠다며 도움을 요청하여  어딜 가시느냐 했더니 바로 삼강주막을 가고자 하노라고 대답했었다. 그 분은 신문기사까지 스크랩해서 보여주었는데 그 날 이후 삼강주막을 나도 한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고 추석을 앞둔 휴일 잠시 다녀올 짬을 낼 수 있었다.




삼강 주막이 위치한 삼강나루터.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곳이라 삼강 나루터라 하고 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기 위해 많은 길손들이 머물 수 밖에 없는 목이다. 자연스레 주막이 생겨났을거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어찌보면 오늘날의 고속도로 휴게소와도 같은 곳이었을텐데 주막이라고 하면 왠지 우악스럽게 팔뚝을 걷어 붙히고 대낮부터  술상앞에 앉아 막사발에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입에선 술이 줄줄 새어 흘러야하고) '주모!! 여기 술 한병 더~!!' 를 외치는 수염 덥수룩한 사내들과 탐욕스러운면서도 간사해보이기도 하고 요염하기도 한 분위기로 눈웃음을 치는 주모가  살랑거리며 술을 들고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건물은 원래의 건물을 복원차 보수한 것인데 1900년대에 지어진 나름 100년이 넘은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흑백으로 찍어두니 그럴싸하지만 선명한 황토빛은 조금 어색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마 밑의 액자는 복원전의 모습들. 초가지붕이 아닌 슬레트 지붕이 덮어져 있고 담배를 태우는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보부상 숙소라고 재현해둔 건물. 뭐 어쩔 수 없단 생각이 들지만 저 반듯한 목재와 깨끗하고 편편한 황토벽은 크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궁궐이나 사찰이 아닌 이상 조선시대 서민들의 집, 특히나 주막에 저렇게 각진 반듯한 목재가 사용되었을리는 없다. 그리고 아무 곳에나 걸리는 저 현수막~ 비단 여기 뿐이 아니라 사찰이든 길거리든 넘쳐나는 현수막은 정말 시각 공해다.




뒤에 있는 컨테이너와 쇠파이프 구조물이 참 맘에 안들지만 어쨌거나 나름 주막의 풍경이 이러했지 않을까 싶다. 요즘 처럼 세상이 바쁘지도 않고 복잡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물건 팔러 다니는 보부상들이나 먼 길 가는 나그네들이 좋은 풍광을 만나 하루쯤 늦으면 어떠리오~하면서 강바람에 취해 술에 취해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을 것도 같다. 여기 들른 사람들이 거의 다 촌두부나 부침개, 도토리묵 정도는 다들 맛보던데 가격은 싼 편이었다.




요건 예전에 있던 간이 화장실을 복원한거라는데 뭐 ㅎㅎㅎ  군대 있을 때 숙영지에 설치하던 간이 화장실같은 그런 방식이다. 남자들이야 까짓거 들어갈지 몰라도 여자들은 엄두도 못 낼 화장실. 하기야 조선시대에 조신한 여인네들이 주막에서 얼쩡거릴 일도 없었겠지만;




강둑에서 바라본 삼강 주막.

어쨌거나 삼강주막은 방송을 탄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회룡포, 용문사와 함께 예천을 찾으면 들러볼만한 관광코스가 개발됨으로써 예천군 입장에서도 삼강 주막의 가치는 클 것이다. 하찮아 보이는 이런 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문화와 옛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방송이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예전과 달리 지나는 길손이 쉬어가는 주막이 아닌 일부러 들러야 하는 곳이 된 관광지로서 복원된 주막이 얼마나 자생력을 갖추고 오랫동안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는 더 오랫동안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촌두부 한 점에 막걸리 한 사발 마셔보고자 여기까지 찾을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북적이라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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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01  서울 세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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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부산투어를 향하며 조금은 색다르게 가덕도를 가보기로 했다. 곧 연육교가 완성되면 더이상 섬이 아닌 섬이 되는 곳이기에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섬으로서의 가덕도를 보고 필름에 담고 싶었다. 위 사진의 선착장에서는 배에 차를 못 싣고 간댄다. 섬도 크지 않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 섬주민들의 차량 외에는 출입이 허가되지 않고 어차피 이 곳 선착장에서 탈 수 있는 배는 사람밖에 못 탄다. 한적한 여행을 기대하던 중이라 차는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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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의 낡은 쇼파와 부부. 그리고 그 들의 뒤 쪽에 지금 한창 공사중인 부산과 가덕도를 연결하는 연육교가 보인다. 이제 곧 가덕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가 된다. 섬사람들은 이제 부산으로 나오기 편해졌고 땅값은 오르고 있다. 전역 후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는 가덕도가 고향인 학군단 동기 녀석에게 전화를 했더니 한다는 소리가 '니도 땅보러 가나?' 였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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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시간이 다가오고 배 안에는 몇몇의 관광객을 제외하곤 모두 주민들 같다. 뭍의 사람들은 배를 탄다는 재미도 느끼겠지만 그냥 시골마을의 버스와 다를게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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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되는 뱃길을 왕복하는 운전기사도 아니고 뱃사공(?)도 어색하고.. 어쨌든 할아버지. 이 좁은 바다를 오가며 평생을 살아오셨겠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저 다리가 완공되어 차들이 달려들어가게 되면 그 때도 이 배를 탈 수 있을까. 배에서 내리며 살짝 여쭤볼까도 싶었는데 왁자지껄한 배 안 분위기에서 그런 심각한 질문은 너무나 뜬금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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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14 가덕도


흑백사진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섬에 도착하고 나서 공사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 있는 섬의 모습과 질퍽질퍽한 도로, 섬을 돌아다니는 셔틀버스 외에 가용한 이동수단은 거의 없었고 의욕적으로 섬에 상륙했을 때와는 달리 도저히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면서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고 싶은 것들은 다리나 완공되면 편하게 다녀와야겠다. 혼자서 여유로운 일정이라면 모르겠으나 공사 중으로 어수선한 작은 섬에서 반나절 이상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별 맛없던 회 한접시 먹고 바로 덜컹거리는 버스 타고 선착장으로 돌아와 배타고 부산으로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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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포항

일제시대에는 조선 10경에 들만큼 솔밭과 모래사장이 끝내줬다는 송도해수욕장의 퇴락한 마지막 모습들. 이미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간혹 바다를 보고 싶을 땐 가장 금방 도착해서 바람을 쐴 수 있던 곳이었으나 이제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모래사장을 뒤엎고 해안을 따라 일주도로가 건설 중에 있다. 송도해수욕장은 이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p.s. 몇개월만의 현상, 그리고 몇 개월만의 스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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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6 서울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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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  서울놀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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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 서울놀이공원


할아버지가 안계셔서 그런가 2000년도에 별 생각없이 찍었던 이 사진들을 다시 보니 왜일케 애뜻한건지 모르겠다. 이게 핏줄의 정인가 싶은것이..ㅠㅁㅠ    저렇게 눈에 넣어도 안아픈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다니시던 할아버지 분들의 마음은 어떨까. 나 왜 이러지? 나이가 들었나 정말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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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의 골목길에서 만난 아이. 눈을 감았지만 그 때는 인화도 하지 않았던 이 사진이 왜 이렇게 맘에 드는지 모르겠다. 노출 완전 오버에 현상도 오버라 톤은 개판이지만 투박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흑백 사진을 처음 시작하던 초기의 네가티브들은 지금에 와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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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다듬던 할머니. 난곡의 좁은 골목에서는 할머니, 아줌마들이 나와서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나누며 나물을 다듬거나 하는 모습들이 흔했다. 집안이 좁고 어두워서이기도 했겠지만 재개발의 열풍이 몰아치기 전 난곡은 사람사는 냄새가 풍기는 정가는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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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의 경사가 심한 골목길은 노인들이 다니기에 절대 편하지 않았고 겨울에 눈이라도 와서 얼어붙으면 자빠지기 딱 좋았다. 골목을 지나다보면 염화칼슘 보관하는 집이라고 써진 집들이 한 두군데씩 있었다. 지금와서 보니 이 사진을 찍은 것도 가상하다. 사실 이 때는 왜 난곡에서 못사는 사람들 사진을 찍어야하는지에 대한 개념정립이 안된채로 헤매이기만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사진들을 찍어야 하는지 왜 좋은 사진인지 이해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 부터 사진을 찍어왔지만 대학교 1,2학년 때 난 내가 어떤 사진을 해야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도 아니고 내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사진을 대해야한다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난 내 사진의 색깔을 찾고 싶었고 여러가지 시도를 해봤고 다양한 책들을 읽어 나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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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사고. 세월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이런 장면 조차도 아련한 추억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흑백 사진으로 담은 스냅들은 꽤나 오래전의 장면을 보는듯한 착각을 준다. 그래도 21세기인 2000년도의 사진인데 무척이나 오래된 모습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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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간판의 오락실. 오락실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안타깝게도 난 학창시절 오락실을 들락거린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그다지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 앞 문방구 등에서 많이들 사먹었다는 달고나, 뽑기 등과 더불어 보편적인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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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곡에서 만난 희망들. 이 아이들을 만나기 전만 해도 난곡이라면 우울한 달동네..이거 하나만 생각했었다. 뭔가 진지한 태도로 뭔가의 스토리를 담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난곡 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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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들러서 쭈볏쭈볏 기웃거리다 선생님에게 애들 사진 좀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허락해주시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사진 제목에 달동네 아이들. 이런 식으로 안하실거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당부를 하던 그 유치원 선생님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복된 인연을 만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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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간 필름도 하필 감도 100인 TMX라 노출도 안나오는 상황에 이 녀석들은 부지런히 카메라 앞에 모여든다. 여기저기서 '나도 찍어주세요~','저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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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렇게 부대끼며 어울리고 장난칠 수 있는 친구들과 그러한 환경이 갖춰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나 이 사회에게나 행복한 일이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학원에서 시달리고 노는 시간엔 놀이터가 아닌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요즘 아이들의 성격 형성은 분명 앞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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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을 나서며...또 오라고 인사를 하던 아이들. 사진 인화해서 또 올게~ 라며 약속했지만 1년 후  내가 다시 찾았을 때 유치원은 벽돌 더미로 변해있었고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길이 없었다. 재개발 결정이 내려진 후 난곡엔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란 두 글자가 휘갈겨졌고 분위기는 흉흉했다. 그렇게 난곡에 대한 재개발 결정이 내려지고 집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나는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왜 그동안 난곡에 대한 사진을 더 많이 찍어두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바로 그거였다. 기록. 내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작업은 기록으로서의 사진이었다. 이 후 몇년간 나는 아마추어임에도 아마추어로서의 한계를 벗어넘고 싶었고 다큐 사진에 푹 빠져 많은 시도와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발점이 된 사건이 바로 난곡의 재개발이었다. 난곡은 어쩌면 내 사진의 방향이 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알려주고 사라진 소중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2000.05.17 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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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14

날씨가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하던 5월의 주말, 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여유
8년도 넘게 지난 이 필름들을 들여다보니 사람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본 지가 언제인가 싶다. 현상, 노출도 엉망일 만큼 기교도 부족하던 시절의 사진들이지만 필름 속에 사람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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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4.16  덕수궁

지금은 경복궁, 창덕궁은 물론 남한산성을 비롯한 성곽유적에서도 이와 같은 행사가 흔해졌지만 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던 2000년에는 아마 덕수궁에서의 수문장 교대식이 처음이었던걸로 기억한다. 혹자들은 규모의 화려함과 절도의 엄격함도 없는 옷입고 줄지어 왔다갔다 하는 엉성한 병정놀이같은 코스프레라고도 혹평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쓴다면 충분히 구경거리로 통할 수 있는 문화 상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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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4.05 경복궁

서울에서 무척 좋아하던 곳 중 하나였던 경복궁. 식목일을 맞아 촬영을 갔을 때 만났던 어느 꼬마. 벌써 8년이 훨씬 지난 이 시점에서 보니 좀 촌스러워보이기도 하다만 같이 온 엄마와 함께 꽤나 멋 좀 부린 차림이었다. 한 컷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그러라고 했고 꼬마는 알아서 포즈를 취했었다.


p.s. 필름에 기스와 먼지가 꽤나 생겼는데 대학시절 필름들은 왠만하면 그 분위기 그대로 놔두고 스캔하고자 한다. 물론 ICE가 되지 않는 흑백필름이라 일일히 작업해서 없애기도 귀찮기도 하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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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8  전북 고창

간만에 훈훈한 사진인가..

이제서야 스캔해서 포스팅하게 되니 좀 민망하긴 하다만 묵혀둔 필름의 이미지들을 다시금 바라보니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들고 나서고 싶어진다. 이번 사진들은 지난 8월 가족들과 다녀온 여행에서 얻은 의외의 소득, 군산 새벽 도깨비 시장에서 촬영한 컷들. 역전 앞에 잠깐 서는 도깨비 시장이야 곳곳에 있는 편이지만 군산만큼 크게 서는 장은 본 적이 없다. 지난 2006년에 군산을 찾았을 때는 가보지 못했던 이 새벽시장을 촬영하고자 기어이 일어나 다녀왔다. 아무래도 상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는 시장 촬영이라 시선을 끌기 쉬운 니콘은 두고 Hexar AF와 Contax T3만 달랑 들고서 역전앞을 누비며 마음껏 셔터를 눌렀고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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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화물역 앞에 공터에 들어서는 새벽 시장. 새벽 일찍 섰다가 사람과 차들의 왕래가 늘어나는 아침시간이 되면 자리를 피해 재빨리 사라지는 반짝 장이라 도깨비 시장이라고도 부른다. 도깨비 시장이란 말은 이런 새벽 반짝 시장이나 아님 남대문 시장이나 대구 교동 시장 처럼 온갖 수입물품을 비롯한 온갖 물건들을 파는 시장에 자주 붙는 별명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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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역 앞 도로는 모두 상인들의 차지다. 도로 가득 상인들이 저마다 가지고 온 물건들을 펼쳐놓고 장보러 온 사람들로 분주하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해가 막 뜬 직후로 도깨비 시장으로선 끝물에 가까워진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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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현재가 눈을 떼지 못하던 것 중 하나.. 싱싱한 게들. 바다와 인접한 군산답게 역시나 해산물들이 놀랄만큼 저렴하게 팔리고 있었다. 뭐 포항에 사는 입장에서 크게 다르게 느껴질 것은 아니었으나 게가 많이 잡히는 편은 아닌 동해안과 달리 서해안인 군산에서 게는 무척이나 저렴했다. 정말 한 소쿠리 사가서 쪄먹던 찌게를 끓여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게가 이렇게 싸니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게장이 밑반찬으로 푸짐하게 나왔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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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장본 것들을 싣는 할아버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지 3달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요즘 이미 2대의 자전거가 있음에도 어김없이 장비병에 빠져 날마다 새로운 자전거를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있으니..;; 어쩜 이 할아버지처럼 여유로운 페달질을 하며 장을 보러 다니고 마실다니는 자전거 생활이 더욱 바람직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개인적으로 이 컷의 톤과 질감이 참 맘에 든다. Hexar AF는 고속셔터의 한계를 제외하곤 결과물 측면에서는 정말 물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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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일찍부터 장에 나와 구경도 하고 나무 그늘 주변에 앉아 노니는 할아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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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세트에서 보일듯한 특이한 양식의 건물. 군산엔 일제시대 가옥이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언젠가 한번 이에 대한 작업을 구룡포와 연계해 진행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어쩌다 보니 남해안 일대에 산재한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축성한 왜성(倭城)도 몇군데를 답사했었는데 이 것들을 주제로도 괜찮은 작업이 될 것같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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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에 차가 들어오자 펼쳐놓은 물건들을 안으로 당기기에 바쁘다. 원칙적으로 도로 위의 난전으로 불법이겠지만 이런 시장에까지 까칠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처럼 차들의 통행이 늘어날 때 쯤 되면 이미 상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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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되면 알아서 자리를 뜰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일단 무력시위 중인 공무수행 차량.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기에 긴장감은 없다. 어차피 알아서 도깨비처럼 사라질 시장이다. 그래도 내일 새벽이면 또다시 장이 서고 또다시 불법도로 전용단속 차량이 올 것이고 그 쯤이면 또 장은 사라질 것이다.


2008. 08. 10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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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부산

영도대교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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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나가사키

원폭 피해 현황과 처참한 사진자료들을 보고 있는 일본인들



한국하면 아직도 한국전쟁을 떠올리는 외국인이 많다는 뉴스를 가끔 접하곤 한다. 내심 못마땅해 불쾌해 하기도 하고 올림픽 / 월드컵을 거치면서 그러한 부정적 인식을 떨쳐버리고 있음을 뿌듯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는 원자폭탄이지 않을까? 워낙에 충격적이었던 인류가 만들어낸 가공할 무기의 첫 실전 사용이었기에 그들이 원치 않더라도 타인의 인식 속에서 잊혀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율을 경험한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시 예상되는 인명 피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이는 때마침 개발된 신무기를 써보고 싶은 유혹을 더욱 부채질 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용으로 특수 개조된 4발 중폭격기 B-29 '에놀라게이'호가 날아가 작고 길쭉한 모양 때문에 '리틀보이'란 별명을 붙은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항복이 없자 3일이 지난 8월 9일 통통한 형태라 '팻맨'이라 별명이 붙은 두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이 가공할 무기는 수 만명의 목숨과 도시를 한 순간에 새까만 재로 만들어 버렸고 이에 굴복한 일본은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그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던 나가사키의 평화공원과 원폭기념관에는 원폭 투하 전 평화로운 시내의 전경부터 시작해 원폭 투하 직후의 폐허가 된 시내의 모습, 불에 타 쓰러진 시신들, 생존자들의 절규, 환자 구출 및 필사의 복구 활동, 원폭의 위력과 공포, 폐허 더미에서 가져온 잔해, 원폭이 폭발한 순간 멈춘 시계 등등을 전시하여 관람객들의 가슴을 교묘하게 무겁게 만든다. 마치 일본인들이 전쟁의 피해자인양. 정말 인류에게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단 느낌이 들도록. 더군다나 더 가관인 것은 '미국 너네가 원폭을 떨어뜨려 우리만 죽은게 아니다. 봐라 괜한 외국인들도 이만큼이나 죽었다.'라고 얘기하는 듯한 외국인 원폭 피해 현황도 있는데 그 중에 한국인이 가장 많음은 뭐라 설명해야 할런지.

아직도 끊이지 않는 헌화와 편지들에는 No War, Peace, Love 등 좋은 말은 다 적혀있었다. 과연 원폭 폭발 중심지의 평화공원에서 일본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잔인한 식민지배와 중일전쟁과정에서 일어난 남경대학살 등의 참상은 알고서 저리도 침통한 표정을 짖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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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잡은 고기를 냉동하기 위해 배에 넣어둘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던 부둣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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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후쿠오카

정말 일본'틱'했던 母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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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하동


3월에 월차신공으로 평일에 조용히 다녀왔던 섬진강.

하동을 빠져나와 남해안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달리던 중 보이는 간판 '최참판댁'
적어도 운치있는 고택과 최참판이 하동 마을 주민들에게 베풀었던 넉넉한 마음씀씀이 등의 훈훈한 일화를 떠올리며 핸들을 꺾었던 나의 기대를 무참히 깨준 곳이었다. 드라마 '토지' 세트장이었다는 민속촌 비스무리한 초가집들과 각진 목재로 새로 깨끗이 만들어진 최참판댁과 이런 것들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받는 어이없는 상황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야했다. 더군다나 수많은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단체 관광객들의 왁자지껄함에 질려버렸음은 물론이다.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소설의 감흥을 느끼고자 찾은 애독자는 있기나 했을까.

어쨌든 괜히 왔다라는 생각을 되뇌이며 세트장을 빠져나오며 만난 마을은 그나마 위안을 주는 모습이었다. 요즘 농촌 답게 빈 집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섬진강변의 넓은 들을 끼고 있는 곡창의 마을답게 여유가 느껴지는 한적한 마을이었으며 돌담도 예전 그대로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런 돌담을 보기도 어려워져 돌담도 보존해야할 향토 유적으로 분류될 정도이니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이런 골목길을 만나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골목을 돌아다니며 TMX가 들어있는 Nikon FM과 내가 제일 좋아했던 렌즈 ai-s 28mm2.8로 몇 컷을 담았다. 어딜가나 골목길은 셔터를 누르게하는 묘한 매력이 가득한 공간이다. 괜찮다 싶은 곳에선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재빨리 셔터를 누르곤 하지만 뭐 사실 딱히 대단한 사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감이 느껴지는 골목길에 사람이 없다면 허전하다는 나름의 고정관념으로 해마다 이 같은 사진을 수십장 남기게 하는 듯 하다. 작고한 김기찬 작가는 골목길만을 평생동안 필름에 담았다고 하니 골목길의 매력은 사진가들에게 남다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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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3  구룡포


대학 시절부터 군시절까지 이어진 약 7년 정도의 서울/경기권 생활을 정리하고 직장 덕에 다시 포항에 내려와서 좋은 점이 있다면 바다가 가깝다는 것이 아닐까. 간혹 갑갑하거나 하면 늦은 밤에도 송도 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아 바다 바람을 쐬며 담배 한대 피우며 걸을 수 있고 날씨가 좋을 듯한 날 저녁이면 다음 날 새벽 동해안으로 달려가 일출을 볼 수도 있으니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를 걷던 기분도 낼 수 있다.

3월의 네번째 토요일 나른한 오후 바닷 바람이나 쐬러 구룡포로 갔다. 그나마 가까운 어항인 구룡포에 가면 언제나 찍을 거리는 있다. 자주 가다보니 더이상 특이한 앵글이 나오지 않지만 제대로 된 작업을 해보고 싶은 소재는 많은 곳. 이 날은 몽골에서 활약한 후 전설의 명렌즈 Carl Zeiss Biogon 21mm4.5에 밀려 좀처럼 빛을 못본 니콘 ai-s 20mm2.8를 데려갔다. 사실 동일한 구도와 노출값으로 비오곤과 동시에 촬영해 비오곤의 명성을 새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 억지로 우겨야 비오곤이 조금 더 좋아보이는 수준이라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확대 인화시에 해상도가 얼마나 차이가 날런지 모르겠지만 사실 올드 렌즈들에 비해 현행렌즈의 해상도가 나쁠리도 없고 비오곤의 자랑인 왜곡억제능력도 크게 차이나는 편은 아니었다. 주변부 해상도는 확실히 비오곤이 훌륭해 보였지만 그런 세세한 차이를 확인하고자 필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노라니 드는 생각은 '객관적으론 돈지랄이다..' 이거 뿐.

이왕이면 좋은 카메라, 좋은 렌즈를 갖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욕심이겠지만 새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Rolleiflex와 Contax IIa에 밀려 찬밥이 되버린 나의 니콘 라인업들. 어쨌거나 가장 신뢰가 가는 10년지기 니콘에 Tri-X를 넣고 거리로 나가고 싶은 밤이다.



그러나 지금은 숙직 中      

젠장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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